▣ 리큐의 죽음
다도의 스승으로서 리큐의 권세는 당시 다도라는 예도(藝道) 자체가 상류무사계급사회에 보급되어 있었던 만큼 일종의 은연한 세력이 되어 차츰 그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외교면까지 뻗쳐있었던 것 같다.
1590년 내란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천하의 대군을 이끌고 관동(關東) 지방에 출장했는데 이때 리큐도 수행했다. 내란이 평정되고 리큐는 먼저 귀경했는데 그 다음해인 1591년 돌연 죄를 뒤집어쓰고 리큐의 자택인 후신안(不番庵)에서 고향인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죄목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다이도쿠지(大德寺)의 산문인 긴모가쿠(金毛閣)에 리큐의 목상(木像)을 안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도구의 감정과 매매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다도스승이라고 칭송받던 리큐는 70세의 나이에 결국 활복자결한다. 리큐가 활복자결하는 현장에는 전날부터 3천명의 군사들이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리큐문하의 다이묘들의 만일의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리큐는 왜 죽어야 했는가? 역사학자, 문화사가들이 여러가지 추측 내지 추리를 펼쳤고 역사소설가는 리큐의 딸을 둘러싼 사건을 들먹 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추측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가장 확실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역시 다이도쿠지(大德寺) 산문의 목상사건과 다도구 감정과 매매에 얽힌 부정사건인데 이는 당시 귀족과 승려의 일기 또는 무사들의 서신 등에도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틀림없다.
그러나 목상과 다도구 사건이 생겼기 때문에 처벌된 것이 아니라 리큐를 처벌하는데 있어서 이 두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서 리큐처벌의 진정한 원인을 대국적으로 추리해보면 전국시대에 사카이 시민의 기골(氣骨)이 참화의 근원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농지 측량과 무기몰수를 통해 농민과 도시상공인으로 부터 생산권과 무기행사권을 빼았는 동시에 일본 전국토를 통일하는 실적을 거둠에 따라 신분법령을 공포, 사농공상의 분리를 꾀했다.
이에따라 사카이란 자유무역도시도 오사카의 위성도시가 되었다. 기백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소상인으로 전략해갔다. 무사를 무사로 여기지 않는 기개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지배층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더구나 천하의 다이묘(大名)를 문하에 거느리고 히데요시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으며 고개를 쳐드는 천하제일 다도의 스승 리큐도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특권을 자랑하는 이 평민출신 다도의 스승이 없어져야할 필요성이 생겨 서둘러 처벌된 것이다.
▣ 다정자(茶亭子) 칠인과 리큐7철(七哲)
리큐 사후 그의 다도는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었는데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옛날부터 리큐 7철(七哲)이라고 부른다. 어느날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정자다사를 가졌는데 점다방법이 고법(古法)에 비해 매우 생략되었다. 그 이유를 추궁했더니 리큐는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고법을 약간 개량했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리큐를 칭찬하는 동시에 이 방법을 마음대로 전수하지 못하게 금지시키고 서약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스스로 이 다법을 전수받고 이어 관백(關白:당시 일본 최고위 직책) 7인에 의해서만 상전(相傳)토록 허가했다. 이를 "정자7인"이라고 청했다. 리큐7철의 기원은 히데요시 생존 당시에 정해진 "정자7인"에 있는 것 같다.
▣ 리큐의 평민제자
리큐의 많은 제자 가운데 "정자7인"이니 "리큐7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이를테면 리큐의 무사제자였고, 일종의 후견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리큐는 사카이의 평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제자는 이들 무사제자보다는 평민제자 였음이 틀림없다. 즉 사카이 평민다인으로 알려진 산상종이(山上宗二), 주길옥종무(住吉屋宗無), 만대옥종안( 万代屋宗安), 중종보(重宗甫), 하카다의 애호가 신곡종심(神谷宗심)등을 들 수 있다.
▣ 三千家의 성립
종단(宗旦)이 승계한 천가(千家)정통 다도는 그의 손자에 이어졌는데 그의 자식때부터 세집으로 나뉘어졌다. 그것을 3센케(千家)라 한다.
소사(宗左)의 자손을 오코테 센케(表千家)라 하고, 소시쓰(宗室)의 계통을 우라 센케(裏千家)라 한다. 종단(宗旦)의 차남을 이치오 소슈( 一翁宗守)라 했는데 그는 다카마쓰(高松)번의 다두가 되었다. 이 종수 계통의 다류를 무샤노코지 센케(武者小路千家) 또는 간큐안 센케라 한다. 이 오모테 우라 무샤노코지의 다도유파를 3센케류 라고 부른다.
▶ 오모테 센케(表千家)
오모테 센케는 센케의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센리큐로부터 현재 13세 소쿠추사미 소사에 이르고 있다.
오모테 센케의 종가는 현재 경도시 상경구 소천통 사지내상 불심암( 京都市 上京區 小川通 寺之內上 不審庵) 안에 있으며 구전가(久田家)와 굴내가(堀內家)를 두 날개로 하며 명고옥시(名古屋市)의 요시다 다카부미를 표현각(表玄閣)이라 칭하고 도쿄와 오사카에도 연습소를 두어 종가의 스승이 직접 출장교수하고 있다. 교토시의 하원서점(河原書店)에서 "다도잡지"란 기관지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 우라센케(裏千家)
센 소탄(千宗旦)의 4남 선수종실이 아버지 소탄이 세운 다실 곤니치안(今日庵)을 계승, 곤니치안 1세라고 칭한데서 비롯되며 현재의 12세 붕운제 종실(鵬雲齊 宗室)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라센케 종가에서는 센리큐를 1세로 하고 현재 15세라고 부른다.
▶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센 소탄의 차남인 일옹종수(一翁宗守)가 고송번(高松蕃) 송평가( 松平家)의 다두에서 물러나 귀향, 코토의 무샤노코지(武者小路)에 다실 관휴암(官休庵)을 짓고 관휴암 1세라고 한데서 비롯되어 현재 10세 유인제 종수(有隣齊 宗守)에 이르고 있다.
무사노코지 센케는 쿄토를 기반으로 하여 종가의 선조인 인연으로 고송(高松)에도 확고한 지반을 구축했다. 도쿄에는 과거 유호제 종수(愈好齊 宗守)가 직접 출장 지도한 인연으로 주로 지식층간에 보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