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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최초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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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그의 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그곳에서 상점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가 1년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염세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현실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영계는 19세때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관성교(關聖敎)에서 읽는 보고문(譜告文)을 만독하는 것으로 수행을 시작했다. 약 9년간 선도수행에 힘써 영계가 도인으로 소문나자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후에 그와 함께 한국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될 김종섭(金鍾燮), 김찬성(金燦星), 정익노(鄭益魯) 등도 그 무렵에 찾아와 도를 배우던 사람들이었다. 1893년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영계도 이 낯설고 새로운 도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먼저 자기 밑에서 공부하던 김종섭을 마펫(S.A.Moffett)에게 보내 그들이 믿는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기독교에 입교한 김종섭이 그를 찾아와 끈질기게 전도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와 김종섭이 권하는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는데, 영계는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고 급격히 발전하는 기독교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침내 1896년 가을에 영계는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총소리같은 소란한 소리가 들리며,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방성대곡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1896년 초겨울부터 교회예배에 참석한 영계는 성서를 읽으며 본격적인 기독교 연구에 들어갔고, 가족에게도 전도하여 부인과 자녀들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장대현의 땅 800평을 비롯한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였고, 1897년 8월 15일에 리(Graham.Lee)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8년에는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때 영계는 널다리골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차리고 교육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숭덕(崇德)과 숭현(崇賢)학교로 발전하였다. 교회도 급진적인 발전을 보여 널다리골에서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에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한국식 교회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9월 장로회 공의회에서 영계의 발의에 따라 그해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에 걸친 구국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이미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영계가 이 집회 준비를 위한 새벽기도회 인도에 나섰다. 그가 1905년 친구 박치록(朴致錄)장로와 함께 세계교회사상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은 이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의식인 통성(通聲)기도도 그의 창안이었다. 이처럼 그는 영적 감응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당대 대표적인 부흥사였다. 첫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고양되었다. 사경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역사는 이러한 개인의 내면적 죄를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으로 진행되었다. 평양부흥회가 끝난 다음달에는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영계의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8월에는 의주에서 사경회가 인도되었다. 이처럼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부흥회와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통해 평양은 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곧 '백만명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은 영계가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구체화되었고, 1910년 제 4회 노회에서 그가 부회장에 당선되고 전도국장을 겸임함으로써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안하여 백만명구령운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도대를 전국에 파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나, 1907년 3만 7000여명에서 1911년에는 14만 4000여명으로 4배이상 증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겪은 후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1912년 영계도 수난을 당했다. 당시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의 장남 진형이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겪다가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18년에 죽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지방별로 조직된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제 1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창립했을 때, 영계는 한국인을 대표한 부회장 겸 전도국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한국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중국선교를 제안하여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계는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에 그는 참가하지 못했고, 그날 오후 황해도 장연읍교회의 특별사경회를 마친 뒤 상경하여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미결수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1922년부터 영계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회 행적은 35년간 설교 2만여회, 청강자 연 380만여명, 교회 설립 60여곳이며, 이수(里數)로는 연 6000리 총 20만리에 이르며, 그에게서 세례받은 사람이 3000명 이상이고 개종자가 7만명에 이른다. 그는 부흥집회 외에도 청년운동, 농촌운동, 금주운동 등의 사회운동집회에도 종종 연사로 나가 민족의 살 길을 외쳤다. 그러나 1926년 장대현 교회 청년계층 교인들이 길선주 목사 배척운동을 벌인 것과, 1933년에는 결국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교인들과 따로 이향리(履鄕里) 교회를 세우게 된 것 등은 그의 말년의 비극이었다. 이는 교회 안의 청년-원로, 진보-보수 집단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적인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그의 보수적 신앙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 영계가 급격하게 '말세'를 강조한 것은 1931년부터였다. 그해 만주에서 일어난 한-중 농민분쟁인 만보산 사건이 터지고 이어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그 여파로 한국인들이 중국인 화교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그의 종말론적 신앙은 더욱 강화되어, "예루살렘 멸망!" "평양멸망!"을 외쳤고, 자기 고향 평양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1934년 영계는 북간도와 함경북도를 순회하였고, 1935년 8월 평북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는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그해 11월 20일 평서(平西) 노회 사경회가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열렸을 때 이를 인도했는데, 마지막날인 26일 집회의 폐회축도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뇌일혈로 쓰러져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때 들은 마지막 찬송은 '예수가 거느리시니'였다. 영계의 장례식은 평양 노회장으로 12월 3일에 평양시내 각 교회의 종이 울리는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영계는 한국기독교회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한국 장로교 노회 조직의 선봉이자 한국 교회의 대부흥가이다. 특히 그는 성경공부와 열성기도를 중심한 한국기독교의 특성을 세운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글/김 탁(철학박사)
<사진>길선주 목사 가족사진. 맨 오른쪽이 길선주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