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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현이, 찬웅이네 집에서 홈스쿨링(방학과제)을 하는 날입니다.
하늘이, 승기는 집안사정으로 당분간 함께 하기 어려워
오늘부터 혼자 찾아갔습니다.
대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준현이가 스윽 문을 엽니다.
"안녕하세요."
"안녕, 준현아."
인기척에 먼저 문 열어주고 반기는 준현이가 고맙습니다.
거실에 앉자 따뜻한 매실차를 권하시는 오희순 어머니, 고맙습니다.
아이와 읽을 책을 골랐습니다.
준현이는 책장에 위인전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위인들 중 간디, 멘추, 달라이 라마를 꺼냈고
준현이가 또 다른 후보로 '황희 정승'을 골랐습니다.
각 권마다 뒷표지에 적힌 위인 소개를 읽어주고
어떤 위인전을 읽어주길 바라는지 물었습니다.
준현이가 '황희 정승' 편을 골랐습니다.
황희 정승 일대기를 찬찬히 읽어주었습니다.
위인전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교훈에 가까운 내용은
준현이의 표정을 살펴가며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준현이는 어디선가 읽어보았던 내용을 잘 기억합니다.
아는 이야기가 나오거나 아는 부분이 나오면
눈빛이 반짝이고 입가에 미소를 띱니다.
검은소, 누런소 그림을 보고 줄거리를 금새 기억해냈고
종이 산다고 하는 행랑채는 학교 사회시간에 배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준현이가 보이는 반응에 읽는 저도 신이 납니다.
황희 정승 집에 들어온 총명한 종 이야기를 읽고
제가 아는 만큼 준현이에게 조금 더 설명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물건처럼 종을 사고 팔았어. 사람 대접하질 않았지.
종의 자식도 대대로 종이었고, 좋아하고 하고싶은 일이 있어도 시키는 일만 해야 했어.
그저 시키는대로 일만 하는 짐승처럼 부렸어.
심지어 결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이랑 하는 게 아니라
주인 마음대로 결정하곤 했대."
준현이가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종이면 그 아들의 아들도 종이에요?"
"응, 대대로 계속 종이 돼."
"그럼 종 문서를 태우면 보통 사람이 되요?"
"응, 종이라는 증거가 없어지니까."
"그럼 지금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같은 거네요?"
"응, 그렇지."
"(주인이) 결혼은 하고 싶어하는 사람하고 결혼시켜주면 안되요?"
"준현이처럼 해주는 주인이 드물었을 거야."
다 읽은 후 어느 이야기에서 황희 정승에게 배우거나 닮고 싶은 점이 있는지
책 안의 주요 이야기를 하나씩 간추려 이야기해가며 물었습니다.
"종 이야기요."
가장 호기심을 가지며 물었고
부족하게나마 제 설명을 듣고 끄덕끄덕했던 부분입니다.
"종 이야기에서 어떤 점을 배우거나 닮고 싶어?"
"다른 선비들처럼 종을 물건처럼 쓰지 않고, 사람으로 살게 허락한 거요.
나도 약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아야 겠다고 다짐했어요."
책 한 권으로 준현이가 당장 좋은 사람이 되겠냐만은
의로움을 행한 이야기에 스스로 울림이 있었다니 그걸로 족합니다.
"준현이가 어디서 하나라도 본 게 있으면 그걸 잘 떠올리네요."
책을 다 읽고, 준현이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찬웅이는 제가 오기 전, '봉이 김선달'을 미리 골라 놓았습니다.
찬웅이는 엄마와 책을 읽었는데
찬웅이가 엄마에게 한 번,
엄마가 찬웅이에게 한 번 읽어주었습니다.
찬웅이가 엄마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가 차분하고
어머니가 찬웅이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가 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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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준현이, 찬웅이네 가족이서 귀가 시리도록 쨍하게 추운 날씨에
재량활동으로 얼음썰매 신나게 탄 곳에 또 갔답니다.
"(제가 타보니까) 얼음썰매 잘 나가던데요."
준현이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몸으로 자세를 보여줘가며 신나게 설명하는 찬웅이,
"제가 썰매에 엎드려 있는데, 아빠가 밀어서 눈에 박았어요."
그 때를 상기하며 입가에 웃음이 걸린 준현이,
"제가요, 눈을 치우고 강 밑을 보니까 물고기 한 마리가 휙 지나가는 거에요."
"얼음축구했는데 제가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넘어졌어요. 히히."
금요일 재량활동 때 어떻게 놀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준현이는 "복기형아는 걸상 반 만한 눈을 나정샘한테 던졌어." 하고
찬웅이는 "눈썰매 타는데서 옆으로 굴렀어, 히히." 합니다.
제가 "하늘이는 제 뒤에 몰래 다가와서 눈뭉치를 엉덩이에 딱 붙이고 도망가요." 하니
다들 하하호호 웃음보가 터집니다.
"시골이 아이들 사는데 좋죠." 오희순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준현이, 찬웅이 아버님(박기호 아버님)은 재주가 많으십니다.
집에 담궈놓은 오미자, 복분자 같은 효소도 직접 따서 담그셨고
TV 아래 서랍장, 책상도 직접 못질해서 만드신 거랍니다.
지난 주말,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 사장님 뵌 이야기 말씀드리며
여름방학 때 자전거여행 가면 어떨지 계획중이라 하니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 사장님이 같은 아파트 사시는 분이라며
"좋네요. 애기 아빠도 젊을 적에 원주 살았는데 여기저기 자전거로 여행 많이 다녔대요." 하십니다.
아들과 아빠가 함께 가는 자전거여행, 한 번 해보고 싶은 활동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가면 어떨까 상상해보았습니다.
준현이, 찬웅이 피아노 학원 갈 시간이 가까워져서 인사드리고 나섰습니다.
현관문을 나서며 "준현아, 찬웅아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가자." 하니
황희 정승 이야기 읽은 탓인지 준현이가 "다녀오겠사옵니다." 합니다.
찬웅이는 "안녕히 계세요." 하기에
"그 인사는 내가 할 인사고, 찬웅이는 '다녀오겠습니다' 해야지." 했습니다.
찬웅이가 공손하게 "다녀오겠습니다." 합니다.
준현이, 찬웅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걸 귀하게 여기시는 오희순 어머니, 고맙습니다.
형제 사이 우애가 좋은 준현이, 찬웅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