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장례예식에 대하여
상제례는 인륜의 대사이며 특히 가족들과 일가친지들이 함께 모여 이루어나아 가는 공동체 윤리의 가장 중요한 종교의례이다. 가족이나 일가친지 중에서 기독교 예식이 참으로 의미있고 경건하며 가장 소망스런 예식법례라고 인정 할 수 있도록 정성과 성심을 다하여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는 중에서도 비기독교인이 종교적 차이로 상제례 예식 가운데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능한 한 깊은 배려와 관용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상제례기간 중 교리적 논쟁이나 종교적 배타심은 경계해야 할 점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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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 상제례의 신학적 이해
제 1 장. 상제례 토착화 작업의 문화 선교적 의미
기독교 복음이 외래 선교자들에 의해 한반도에 전파된지 천주교는 200년이 지났고 개 신교는 100년이 지났다. 복음은 개화의 새 물결과 전통의 보수물결이 서로 긴장 갈등하는 문화사회적 상황 가운데서 한국민의 마음밭에 떨어졌다. 한국 천주교는 복음전파 과정에 서 특히 상제례문제로 인하여 10,000명 가까운 순교자가 피를 흘렸고 개신교도 적잖은 갈등 과 박해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상제례문제가 복음의 한국전래과정에서 심각한 문화갈등 적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된 것은 주로 세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부딪힌 신앙적 갈등이다. 복음전래 당시 한국사회는 유교적 가정의례가 토착화되어 사대부 양반 가정에서는 형식이 번잡스러울 정도로 된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사례편람(四禮便覽)이 규범적 예식서로 서 사용되었다. 일반 서민 가정에서는 위에서 말한 유교적 제사정신과 종교의례가 무교 적 다령신앙및 민속적 귀신숭배신앙과 종교습합을 이룬 채 조상숭배(祖上崇拜)신앙으로서 자리잡고 전승되어 왔다.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기독교신 앙은, 앞서 말한 대로 무교적 다령숭배 및 귀신숭배 신앙과 부분적으로 종교습합을 이루 고 있었던 당시 유교적 상제례 의식과 충돌을 낳게 되었다. 다시말하면 효(孝)정신에 기초 를 둔 유교제사의 근본정신으로 부터 민속화된 조상숭배 및 귀신숭배신앙을 구별해 내는 현 명한 통찰을 갖지 못했다.
둘째는 종교사회학적 갈등 요인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졌던 18-19세기 한국 근세사회는 조선왕조가 해체기에 들어갔던 시대 전환기였다. 국내정치의 문란과 외세의 위험이 그치지 않았던 시대 적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를 통치하던 지배적 가치이념은 유교였기 때문에, 유교적 가치 관과 유교식 관혼상제례의 준수는 곧바로 사회의 기존질서를 지탱해가는 필수적 요소이었 다. 그러므로 상제례의 변경은 곧바로 당시 조선왕조의 사회해체를 유발 촉진시키는 위험 한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왕권과 지배계층은 새로운 "구원의 도"를 전파 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험시하였고 사회통합을 깨트리는 반국가적 집단으로 단죄하였다. 그 결과, 개화세력과 기독교신앙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정치사회적 요인이 상승작용하여 전통 적 상제례 의식을 기독교적 의식으로 변경하려 했던 초기 신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리하여 상제례 문제가 직접적인 빌미가 되어 수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리게 되었다.
셋째는 선교신학과 선교정책의 졸속 및 과오문제 이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으로 기독교신앙이 전래될 때, 처음부터 상제례문제가 그 충돌의 원 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는 중국선교를 함에 있어서 유교문 화와 유교적 상제례를 동북아시아 문화적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다 가 사회의 하층계층에 선교임무를 맡았던 도미닉파 선교회 및 프란체스코 선교회들은 유교 적 상제례가 실질적으로는 귀신숭배신앙과 종교습합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중시하고, 로 마 바티칸 당국에 조상제사 금지령을 호소 하였다. 그 결과 "예전논쟁"(禮典論爭)이 일어나게 되었고 마침내 당시 로마 바티칸 교회당국은 조상제사 금지령을 내리게 되 었다(1742). 그 결과 한국의 초기 카톨릭 교회도 앞서 말한것 같은 심한 문화갈등과 종교 박해를 받게 되었다.
다른 한편 19세기 후반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봉 사와 복음전파 노력으로 인하여 큰 공헌을 이루었으나, 동북아시아 문화전통의 내용과 그 깊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국 전통문화 유산 일체를 서구 기독교문화로서 대치되 어야 할 "이교문화" 또는 "우상종교문화"로서 속단하는 큰 과오를 범 하게 되었다. 사려깊었던 극소수의 초기 선교사들을 제외하고 대개가 연령적으로는 20-30대 요 신학적으로는 보수적 근본주의신학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 선교사들에게 아시아 종교문화 의 본질을 깊이 숙지하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한국 개신교 의 역사 속에서 상제례에 관한 논의는 1920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지상논쟁이 있었다. 제 사를 모시는 일이나 상제례시에 절하는 예법은 아시아 문화전통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한다 는 이상재선생의 입장이 신문 지상에 발표 되었다. 다른 한편 당시 한국 보수적 교회 지도 자들의 논지는 조상제사란 우상숭배이며 상제례 의례 중 절하는 법도는 십계명에 위배된 다는 입장을 보였다. 두가지 입장이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서로 논쟁을 하다가 결말을 보 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세계 카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기점으로 하여 기존의 선 교신학 정책을 과감히 개선하였는데 선교지역의 종교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선교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 결과 한국 카톨릭교회는 "상제례토착화 연구"를 오랜 기간 추진하여 전통적 조상제사 및 상제례의 많은 부분을 기독교 예식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복음의 토착화 노력을 한국 개신교 보다 한발 앞서서 추진하고 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한국 개신교는 상제례문제에 있어서 토착화의 과제를 성공 적으로 이루지 못하고 한국사회 속에서 문화갈등적 집단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설날, 한식, 추석등 민족명절과 각 가정에서의 조상 기일(忌日)이 되면 개신교도 가정에서는 종종, 상제 례 의식절차 문제로 인하여 형제 간에 우애를 상하게 된다거나 본인들도 신앙적 갈등을 많 이 겪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전가족 일가친척들이 이미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 된 가족의 경우는 좀 덜하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의 경우에는 "상제례에 관한 가정의식 절차와 그 형식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방관 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 2 장. 상제례에 임하는 기독교인의 기본관점
1. 삶과 죽음의 주관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의 원리 기독교인은 생명의 주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생 사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그의 영광에 초청받는다. 그러므로 상제례에 임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 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 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느니라"(눅 20:38)
기독교인들은 인생이란 본래 흙으로 지음받았고(창2:7), 들의 풀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으로 살게 하시고 영혼을 불멸하게 붙드시며, 영원한 영적 생명으로 덧입혀 붙들어 주심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생함을 믿는다(요14:1-2,롬8:38-39,고전 42-49). 죽음은 분명히 유한한 인간의 처음과 마지막을 감싸는 두 괄호이지만, 은혜와 자비 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성의 괄호를 감싸 안으시는 더 큰 괄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위의 육신의 죽음을 넘어 하 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를 믿는 영생 소망의 원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믿더라도 우리 자신의 삶의 흔적과 결과를 정직하게 돌아볼 때,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으며 스스로 영생을 쟁취할 수 없음을 안다. 우리의 죄가 너무 깊고 크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우 리는 성경이 들려주는 복음의 초청을 붙잡는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을 붙 잡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
우리들은 누구나 만세반석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를 붙드는 자에게 은총 으로 값없이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도리를 믿고 영생의 소망을 지닌다. 우리는 상제례에 임하여 우리들의 대제사장 되시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히 12:2) 영생하는 생명의 도리를 굳게 소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자가 복 있음을 알고 모든 염 려와 근심걱정을 주께 맡기고 소망가운데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와 하늘나라의 소망 을 우러러 바라보는 신앙자세를 지닌다.
3. 보혜사 성령 안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 사랑의 원리 죽음은 인간의 시공4차원의 세계를 넘어서는 신령한 세계의 차원으로 넘어 감이다. 유 한한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이곳과 저곳, 시간과 영원, 산자와 죽은자들을 다리놓을 연결능력 이 없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는 모든것이 통할 수 있고 동시적 시공간의 은혜시간 안에 있음을 믿는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6)
기독교인들은 사도적 전승 안에서 성경진리에 기초한 사도신경을 누구나 고백한다. 사도신경은 그 셋째항목의 신앙고백에서 "성령을 믿사오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히 "성령 안에서는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성도 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친교만이 아니다. 하나 님 안에서, 성령의 은총 안에서는 산자와 죽은자가 서로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 가운데서 경험하는 오묘한 체험적 진리다. 변모산상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대 화하며, 고린도교회에서는 죽은자들을 위해서 세례까지 받았다(마17:1-8,막9:2-8,눅9:28-36,고 전15:29)
상제례의 종교적 의식절차가 이뤄지는 성별된 시공간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나 도덕적 마음다짐의 시공간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적 시공간은 평소생활에서는 분리된 것으로 경험 되던 영원과 시간이 성령 안에서 통하며, 돌아가신 사람의 영혼과 살아있는 사람들의 영혼 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서로 교통할수 있음을 믿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원리라고 부른 다. 이곳과 저곳이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로 통해있는 생명세계이며, 이곳과 저곳은 각각 차 원이 다른 질서세계일 뿐이지 성령 안에서는 하나로 통하여 있음을 믿는다.
4. 문화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성육신 신앙의 원리 성육신 신앙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 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 "(요1:14)을 믿는 신앙이다. 성육신 신앙이야말로 기독교 신 앙을 모든 영지주의적 신앙과 대조시키는 기독교 진리신앙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었다는 진 리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이 구체화되고, 역사화되고, 현실화 되면서 몸이라는 형체 를 입으면서 진리가 구현되는 법도를 말한다.
복음은 구체적인 문화, 언어, 그리고 역사적 상황 속에 육화됨으로써만 인간을 구원하 는 생명의 떡과 생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문화 선교는 "복음과 문화 "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영원한 복음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문화의 형태 속에서 증언되고 고백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복음은 왜곡되고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잘못된 문화 를 심판하고, 정화시키고, 속량한다. 복음은 구체적인 문화의 빛 안에서 조명되고 이해되며 증언된다. 복음은 다양한 문화의 형태와 정신이 복음의 본질에 위배되지 않는 한, 다양한 문 화는 긍정되고 수용되어야 하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형태로서 봉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제 3 장. 상제례에 임하는 기독교인의 기본 관점
1. 장례와 제레에 관련된 용어문제 상례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엄숙한 사태에 직면하여 죽은자를 정중히 모시는 절차인 만 큼 가장 중요한 예법이다. 사람이 임종한 후 매장과 탈상에 이르기까지 상중에 행하는 일 체의 예절을 상례라고 한다. 상례는 장례 또는 장의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상여 또는 운구 가 집을 떠나는 때 갖는 의식을 장례식 또는 발인식이라고 부른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날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사행위는 기제사, 추도식, 추모식, 추도예배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나 추모제(追慕祭)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용어문제에서 한국교인 가정에서 흔히 통용되는 "제사"라는 용어나 " 추도예배"라는 말보다 "추모제"를 권장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예 배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인간의 종교행위가 본질을 이루기 때문에 고 인의 추모예식에 예배라는 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추도"라는 단어보다 "추모"라는 단어가 보다 소망의 신앙을 간직하는 기독교적 표현이다. "예식 "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사회적 행사표현인 "식"보다 종교적 의식임을 표 현할 수 있기 때문에 본 지침서는 "임종예식","장례예식","하관 예식","추모예식"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2. 검소하면서도 정성을 다하는 의식 기독교인들은 상제례에 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몸과 마음이 흐트러짐 없는 성실한 자세를 견지하여 타인의 본이 되어야 한다. 허례허식이나 의미를 알수 없는 습관에 매인 복잡한 예식은 신앙의 결단으로써 과감하게 버리고, 간결하면서도 정중한 예식이 되도록 마 음을 써야 한다. 간소화 하되, 그 대신 간소화한 예식이나 의식 준비절차는 최선의 정성과 성실을 핵심으로 한다. 장례에 관련되는 모든 준비와 절차는 기독교장의사의 협조를 받되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상제례 의식에서 민속신앙과 종교습합된 귀신 숭배신앙은 불가 한국 가정의 전통적 상례는 "주자가례"와 "사례편람"을 기초로하 여 그 예식절차가 진행되어 왔지만, 일반가정에서는 순수한 유교식 상례법이라기보다 전통 민속신앙 특히 귀신신앙과의 종교습합이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사자밥"을 놓는 것 같은 일이 일반 가정에서는 관습적으로 행해 진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일체의 귀신숭배신앙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상제례 의식 가운데서 촛불이나 향을 사용하는 일에 대하여 촛불은 어둠을 밝힌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므로 기독교 의식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것 이다. 본래 향 피우는 일은 영혼과 신을 불러내리게 하는 강신(降神)의 의례로서 행해진 것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는 그런 강신의 의미로서는 용납하지 않고 다만 조의(弔意)를 표하 는 상징행동으로서, 그리고 상가(喪家)의 경건한 분위기와 안정,조문객의 조의표현, 그리고 주위환경을 청결케하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향을 피울 수 있다.
상을 당한 교인가정이나 비기독교인 가정에 조문을 갔을때, 빈소가 어떻게 차려져 있는 가를 살피고 정황에 알맞는 조의를 표해야 한다. 먼저 향을 피우거나 꽃을 올리거나 한 연후에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하든지, 두번 절하든지 이 두가지 예법 중에서 한가지 예법을 자신의 신앙양심에 거리낌 없는대로 취하 여 조의를 표한다. 그 후에, 상주나 고인의 유족들과 위로의 인사를 서로 한다.
5. 상제례 의식에서 "절하는 禮"에 대한 신학적 이해 한국과 동아시아 문화전통에서 산자나 죽은자에게 절이라는 형식은 예(禮)표현의 고유 한 양식이다. 절은 동아시아 문화전통이 함께 공유하고 그 의미를 함께 인지하는 예절문 화의 고유한 형태일 뿐 결코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언급하는 우 상숭배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앞에 절하는 행위"란 유한한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높이고 그 앞에 인간의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복종시키는 잘못된 행위로서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고 우상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한 우상숭배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상제례에서 절하는 몸짓은 고인에 대한 조의, 추도, 추모의 심정과 명복을 비는 뜻을 말없이 전인적(全人的) 몸짓에 담아 표현하는 전통적 예법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가 상제례 시에 고인의 영정 앞이나 묘소 앞에서 절함으로 써 조의,추도,추모의 정을 표하는 행동을 우상 앞에 절하는 행동으로 간주하여 금지시킨 것은 성경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계명의 참 뜻을 바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라고 우리는 본다. 그러한 성경문자주의에 얽매여 절하는 행위를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빼앗아 버 린 것은 한국문화공동체 안에서 한국 기독교인을 스스로 낯선 국외자로 만들어 버리는 반문 화적 선교정책이었다고 우리는 반성한다.
이미 3대 이상 믿는 기독교 가정에서 기독교적 상제례 예식법이 체질화되어 전가족 일 가친척이 절하는 행동 없이 기도형태로써 조의,추도 ,추모의 뜻을 표현하는 것도 아름다운 예법이므로 그런 가정에서는 굳이 "절하는 예법"으로 되돌아 갈 필요는 없다. 그 러나 가족과 일가 친척 중에서 때와 장소를 따라 "절하는 예법"으로써 조의, 추 도, 추모의 뜻을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조금 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함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양심의 자유와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이지 외모의 형식 이나 계율에 얽매인 율법주의자가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6. 위패를 모시거나 지방을 써서 붙이는 일에 대하여 유교적 상제례 의식에서 사대부 가정에서는 위패를 만들어 사당에 모시거나, 사당이 없 는 가정에서는 기제사 때마다 화선지에 "0 0 0씨의 신위(神位)"라는 지방을 써 붙이고 예식을 거행했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위패나 지방을 만들어 모시는 행동 은 돌아가신 혼령이 그 자리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신령의 빙의(憑依)를 신앙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 돌아가신 고인의 영혼은 위패 나 종이에 임재하도록 모실 것이 아니라 후손들의 지극한 마음 가운데에 모셔야 한다. 기독교신앙의 관점에서 산자와 죽은자의 감응과 통함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이뤄지는 영적 교통이며 감응"인 것이지 나무조각이나 종이위에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제례 특히 추모제(기제사) 때에 고인의 사진이 없어서 추모제 의식에서 "중심 (中心)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위패나 지방을 써 붙이지 아니하고 그 대신 "O O O씨 제 # 주기 추모제" 라고 화선지에 쓰고, 그 아래에 짧은 성경구절 을 써 붙이고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다.
7. 상제례시에 제사상 위에 음식물을 진설하는 일에 대하여 상제례시에 고인의 영정 앞에 음식을 차리는 일은 기독교인으로서 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비록 음식을 진설한 제사상을 차리는 동기가 추 모의 정과 고인에 대한 정성 그리고 정성들인 음식물을 매개로 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지라도, 죽은자는 물질적 음식을 흠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패나 지방을 써붙이지 않는 이유와 같이 음식을 제사상 위에 차려놓지 않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것이다. 고인을 추모하는 후손이나 조문객이 그들의 추모의 정을 표현하는 가시적 형태로서 고인의 영정 앞에 그 무엇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작은 꽃바구니나 꽃다발로서 그 예를 행함이 좋다.
그러나, 만약 가족 중에서 굳이 음식을 제상에 올리기를 원한다면 고인이 생시에 즐 기던 음식을 중심으로하여 정성스럽게 음식물을 마련하여 진설 할 수는 있다. 다만 그런 경 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신령한 영혼은 물질로 마련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성을 흠양하는 것인즉, 어디까지나 정성과 지극한 추모의 정을 음식물로써 표현하는 상징행위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신앙적으로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핵심요지는 꽃다발을 올리거나, 음식물을 올리거나, 이 두가지는 모두 다 물질을 매개로하여 고인에게 드리는 정성과 추모의 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라는 점이다. 그점을 분명히 깨닫는 다면 제사상의 음식진설의 의미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말이며, 더 이상 그 리스도인의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상제례시에 음식을 장만하여 예식 후에 참여자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은 아름 답고 좋은 일이다. 그것은 "음복"의 정신을 신앙적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음복의 정신을 신앙적으로 이어간다는 말은 상제례에 함께 참석한 일가친지들이 음식을 함께나누며 고인을 추모하는 "성도의 교통과 사귀임"으로 창조적 변형을 이루어 간다는 말 이다. 우리는 음복을 통하여 전통문화의 좋은 점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인간이 어울려 노동함으로써 생산해 낸 음식물을 매개로 하여 어우러지는 생명의 연대성을 체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추석이나 설날의 차례상을 정성스럽게 차려놓고 온가족이 둘러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8. 장례시 고인에게 입히는 수의와 유족의 복장에 대하여 고인에게 수의를 입히는 것은 옳은 일이다. 전통적 유교복식대로라면 너무나 수의가 복 잡하므로 핵심적 복식예법에 필요한 형태로서 간소화한 수의를 입힌다. 삼베로 만든 수의 가 마련되지 못할 경우에는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중에서 가장 아끼던 깨끗한 옷을 입힐 수도 있다.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 중에서 남은 옷가지들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여 장례 후 태워버리는 일반인 습속을 기독교인은 따라서는 않된다. 그러한 행동은 물질낭비이며 신앙적으로 민속신앙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남은 옷가지 들을 의미있게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유족들은 고인에게 수의가 입혀진 후 상복으로 갈아 입는다. 유족들의 복장은 전통적 인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여자들은 흰 치마저고리를 입거나 검정옷을 입고, 남자들은 검정색이나 화려하지 않은 색상의 양복을 입거나 한복을 입는 것 모두 가능하다. 삼베 상장을 팔에 끼거나 옷에 부착 할 수 있다.
9. 첫성묘(삼우재), 탈상예식, 추모제의 주관 등에 관하여 우재(虞祭)란 본래 죽은 이를 지하에 매장하였으므로 죽은 이의 혼령이 방황할 것을 염 려하여 우재를 거행하여 혼령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에서 행하는 의식으로서 초우,재우,삼우 가 있었다. 기독교인은 우재의 본래 의미에 구애받지 않고 장례 3일후 첫성묘(삼우재)를 하 여 유가족들이 묘소를 살피고, 믿음 안에서 피차 위로와 소망을 돈독히하는 추모자리가 되 는 것이 좋다.
탈상일자는 정부의 가정의례준칙에 의하면 부모,조부모,배우자까지는 100일째로 하고, 전통적 유교장례법에 의하면 3년째 대상일로 하고 있으나,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의미를 부 여하여 탈상 일을 잡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교 희망의 신앙에 기초를 두고 가정형편에 따라 가족들이 협의하여 탈상일자를 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보면 근신하는 기간을 보통 40일로 지켜오고 있으므로, 첫 성묘후(삼우제후) 주일을 제외한 40일째 탈상이 바람직 하다. 여기에서 주일을 제외하는 이유는 주일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추모제(기제사)의 범위는 가족들이 기억하는 조부모대 까지로 한다. 명절추모제는 성묘 하는 것이 권장할 일이며, 부모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후 3년이 지난후에는 가족들이 협의하 여 부모양위 중 한 분의 추모제 날에 양위 부모님을 함께 추모하는 합동추모제를 드려도 좋 다. 추모제의 주관은 장남이 아니더라도 좋으며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모셔도 좋다.
10. 화장과 묘지문제 및 비기독교인에 대한 배려정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람의 육체는 흙 곧 자연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육신의 몸이 죽으 면 육체는 자연으로 환원되고, 속 사람 곧 영혼은 하늘나라로 돌아간다. 시신을 장례하는 법은 자연환경과 문화전통에 따라서 매장, 화장, 수장, 풍장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한국인 은 매장법이 주류를 이루지만, 화장의 장례법도 신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일부 기독교 인 중에는 화장법이 몸의 부활신앙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잘못 생각하는 신도가 있는 데, 그런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몸은 생존시에 지녔던 육체의 소생 이나 재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영적 몸이요 신령한 몸"(고전 15:35-49)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국토의 공간면적을 생각하면 화려하거나 지나치게 넓은 묘지점유는 잘못된 생 각이다. 매장한 후 20-30년이 지난 후쯤 남은 유골을 거두어 교회의 공동 납골당에 함께 모 시는 방법도 연구해 가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지녀야 할 상제례법에 임하는 기본적 관점과 신앙적 태도를 살펴 보았다. 상제례는 인륜의 대사이며 특히 가족들과 일가친지들이 함께 모여 이루어나아 가는 공동체 윤리의 가장 중요한 종교의례이다. 가족이나 일가친지 중에서 기독교 예식이 참으로 의미있고 경건하며 가장 소망스런 예식법례라고 인정 할 수 있도록 정성과 성심을 다하여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는 중에서도 비기독교인이 종교적 차이로 상제례 예식 가운데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능한 한 깊은 배려와 관용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상제례기간 중 교리적 논쟁이나 종교적 배타심은 경계해야 할 점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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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크렙해갑니다.매우감사 합니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