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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트랑고 타워 등반을 목표로 하는 원정대 대원을 모집 합니다.
트랑고타워는 파키스탄 카라코람 레인지에 위치해 있는 첨봉으로 고산에서 이루어지는 거벽등반 형태의 등반대상지 입니다.
타기 회원을 대상으로 원정대 대원을 모집하고 2년의 훈련을 진행 하면서 준비할 계획입니다.
당장의 등반 능력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등반훈련을 통해 원정대에 참여 하고자 하는 분들도 훈련대원으로 참여가 가능 합니다.
**** 2010년 타기 트랑고타워 원정대 ****
1. 원 정 대 명 : 2010 타기 트랑고타워 원정대
2. 원 정 기 간 : 2010년 7월 중순 ~ 8월 하순 (45일)
3. 등반스타일 : 고산 거벽등반
5. 인 원 : 4명 이내 (트레킹 및 지원조는 인원제한 없음)
4. 참 가 자 격 : 타기매니아 교육( 암벽, 인공등반, 빙벽등반)을 마친 타기회원
(2008,2009년 타기매니아 등반 교육 수강 예정자 가능)
*** 훈련대원 모집***
1. 모집 목적 : 2010년 타기 트랑고타워 원정대 대원으로 참여 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기 위한 예비대원 모집
2. 활동기간 : 2008년 8월30일 ~ 2010년 6월
3. 모집기간 : 2008년 8월 12일 ~8월 25일
4. 참가 자격 : -. 트랑고타워 원정대에 참여를 희망하는 타기회원.
-. 등반등급 중급이상, 매니아 등반교육 이수자. (하계동계,인공등반 전 부문)
(2008,2009년 타기매니아 교육 이수 예정자 가능)
-. 2010년까지 지속적으로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한 분.
-. 원정경비 마련을 위해 매월 일정액의 적금을 납부할 수 있는 분.
5. 훈련형태 : -. 매월 둘째 주 1박2일 훈련등반 실시 (하중훈련, 팀웍 훈련, 인공등반, 고급 암벽등반).
-. 매월 1회 정기 집회 실시 (대상지 정보, 등반기술 교율 및 토론).
-. 타기매니아 교육과 함께 진행 될 수 있음.
-. 대원 확정 후 운영 형태 등 추후 확정.
-. 대장, 총무, 기록 등 대원별 임무 부여됨.
기타 의문사항은 타기 방서동으로 문의 바랍니다. (284-5014, 민준영 010-8846-5014)
BC(4000m)에서 ABC(51OOm)로 가는중 바라보이는 트랑고 타워 서벽
트랑고 타워(영어: Trango Towers)는 파키스탄의 발토로 빙하 북부에 위치한 암봉의 무리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의 높이는 6,286m
트랑고 네임리스 타워 등반 일지 오영훈
“너희들은 한국의 얼굴이니, 매사에 조심스레 행동해라.”
잔뜩 기대에 부푼 원정 등반, 그러나 해외에 나가 연맹의 이름을 걸고 등반하는 만큼 출발 전에 선배님들이 다짐을 주신다. 비록 한국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모인 다섯 명이 가까스로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지만, 현지인들과 다른 원정팀이 보기에는 그저 ‘코리아 팀’일 뿐이다. 두 달 가까이 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행동할까? 우리의 등반이 국제무대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궁금증을 안고 긴 여행길에 오른다.
출발 - 7월 5일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지 3일째다. 강렬한 태양 아래 현지인들 속에 던져진 우리들은 내내 어색한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저녁에는 같은 비행기로 한국을 떠난 코오롱 팀과 또 다른 한국 트랑고 팀과 같이 시내의 유명 호텔 스카이라운지 뷔페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수십명이 떠들썩하게 식당을 이용하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진 않았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이제 그리워지겠지.
환한 웃음으로 사람을 맞는 파키스탄 사람들의 환대가 우리를 편하게 한다. 처음 만난 쿡 겸 가이드인 임란의 첫인상이 좋다. 많은 한국 사람들을 상대했기에 한국인들을 잘 안다고 했다. 두고 봐야겠지만. 함께 택시를 타고 다니며 식량 등을 구입했다. 밤에 호텔 옥상에 딸린 화장실에서 김치를 담갔는데, 글쎄 맛이 어떨지?
7월 6일 - 8일
국내선 비행기로 고작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이틀 동안 버스를 타고 달렸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커브길에 시달리며 인더스 강을 거슬러 따라 올라 도착한 이곳은 스카르두. 스카르두는 옛날 독립국이었던 발티스탄의 중심 도시다. 현재는 카라코람 트레킹의 배후도시 역할을 톡톡히 하여 ‘카라코람의 샤모니’라고도 불린다.
스카르두에 도착하자마자 거리를 잠깐 둘러봤다. 시골 촌 동네 저자거리 같은 작은 규모에 처음엔 실망했다. 네팔 카트만두의 타멜 거리쯤을 상상했었기에, 몇 집 안 되는 스카르두의 장비점에 들르니 온갖 중고품들만 잔뜩 쌓여있어서 살 물건이 별로 없었다.
대신 온 바자르에 웬 사람이 그리 많은지? 그리고 모두 남자들이고 여자는 구경조차 못 해서 궁금하다. 후에 이슬람과 그 교리 등에 대해 좀 알고 나니 이해가 갔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처럼 이 곳 여자들은 집의 ‘안주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으며, 외간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거나 눈을 마주치는 행위가 금기시되어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스카르두에 있는 대행사인 ‘블루스카이 트렉 앤 투어’ 사무실에 들러 식량을 추가로 구입했다. 장비점에도 들러 가스캔과 몇몇 장비들을 추가로 구입했다. 쿡인 임란과 함께 야채를 파는 골목에도 들러서 과일과 채소들을 잔뜩 주문했다. 그리고 아뿔사! 식량 담당으로서 첫 작품인 배추김치가 너무 짜서 좋게 봐도 도저히 그냥 먹기 힘들 정도다. 생각다 못해 주먹만 한 무를 몇 개 사서 깍두기를 또 담갔다. 그런데 이것도 맛이 영~ 김치도 미리 담가보고 왔어야 하나?
7월 9일
“아살람알리쿰”
사다, 포터, 키친보이 등 본격적인 카라반에 앞서 오늘도 많은 현지인들을 만났다. 여기 사람들에게 언제나 만남은 반갑고 기쁜 행사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있으면 반드시 큰 웃음과 함께 악수와 포옹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우리 일행에게처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누구나 미소와 함께 환대하는 문화가 보기 좋았다.
지프 여행이 끝나고 드디어 아스꼴리에 도착했다. 이제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카라반이 시작이다.
스카르두에서 인더스 강과 합류하는 브랄두 강을 따라 험한 길이 이어져 있다. 4륜구동의 조그만 지프에 짐들과 사람들이 나눠 타고 위태위태하게 몇 시간을 달렸다. 덜컹거리는 비좁은 지프 안에서 꾸역꾸역 졸다가 오후 나절 도착한 아스꼴리. 이 곳은 카라코람 트레킹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근에서 가장 많은 트레커가 찾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사흘을 발토로 빙하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트랑고 베이스캠프가 나온다.
마을 아래 공터에 짐을 부리고 텐트를 설치한 뒤 임란과 함께 마을로 찾아갔다. 사다인 우합의 집에 찾아가 차와 과자를 대접받고 다른 포터의 집에 들러 내일 베이스캠프로 가져갈 닭을 열 마리 계약했다.
마을에서 우연히 봉사활동을 벌이는 이탈리아 여성 두 명을 만났다. 아스꼴리에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파견된 의사들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일본 여성도 만났는데, 그녀는 몇 년 간 인근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벌여왔기에 임란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정수 탱크를 설치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너무도 살기 힘든 곳이다. 관광지를 구제활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참 부럽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지인들을 비롯한 우리와는 다른 문화 속에서 사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캠프지로 돌아오며 우리나라는 왜 이런 활동을 벌이지 않았는지 곰곰 생각해봤다.
7월 10일 - 12일
졸라, 빠유 두 캠프장을 거쳐 올라와 트랑고 빙하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내내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 계속되어 상행 카라반이 무척 고됐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고 짐을 부리고 나니 그제서야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2900미터인 아스꼴리에서 4000미터인 베이스캠프까지 약 1100미터의 고도를 3일 동안 올리는 것은 물론 고소 적응에 적절한 수준이긴 하지만,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고소 증세에 텐트에 몇 시간 누워있어야 했다.
우리 팀 외에도 몇몇 팀들이 이곳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스페인 팀 외에 우리와 같이 도착한 한국 신루트 팀, 폴란드 팀 그리고 또 다른 스페인 팀인 바스크 팀이 있었다. 그 중 바스크 팀은 공교롭게도 우리와 같은 루트를 목표로 왔다고 해서 한편으로 조바심이 일었다.
이 곳 카라코람은 인도 히말라야에 막혀 몬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따라서 네팔처럼 몬순으로 인해 등반 시즌에 제약받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고산 지방에 강수량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물줄기나 호수 근처를 제외하고는 초목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오아시스처럼 한참을 가야 그리 넓지 않은 곳에 나무 몇 그루, 풀 얼마가 자라고 있을 뿐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캠프장이 있거나 작은 부대가 주둔할 뿐이다. 때문에 같은 고도라면 네팔에서는 롯지들 및 민가들이 줄지어 있을 텐데 이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카라반이 훨씬 힘든 것 같다.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K2를 바라보며 이 살벌한 공간을 걸어갔을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이 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갔다.
무더위에 열 마리 닭 중 세 마리나 죽어나갔다. 덕분에 아침 저녁 가리지 않고 백숙을 먹어야 했지만.
우리 팀의 팀 닥터 신동훈이 의사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졸라 캠프장에서 종기와 비슷한 게 난 포터를 치료해주고, 발에 물집이 잡힌 다른 포터도 치료해줬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한창 물갈이 중이라 가뜩이나 힘든 카라반을 더욱 힘겹게 오르고 있다. “하계를 1학년 다섯 명이 갔다고 생각해봐. 한 명이 퍼지면 다른 사람 모두가 편하게 오잖아.” 밤마다 내일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동훈이 보다는 그나마 조금 괜찮은 동영이가 덕분에 안도한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서 급료를 받고 돌아가는 포터들이 무언가 불만이 가득이다. 트랑고 타워 사진을 찍는다고 혼자 뒤처져 늦게 올라오던 나는 팁을 주지 않았다며 팁을 요구하는 포터들에게 둘러싸여 고역을 치러야 했다. 결국 두 명의 포터들을 데리고 베이스캠프까지 왔는데 결국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야 했다. 팁을 주는 문화가 우리에겐 익숙치 않으니 충분히 이런 갈등이 생길 수 있을 걸 예상하고 조심해야겠다.
7월 13일 - 14일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이후 계속 날씨가 좋지 않다. 고소포터가 올릴 짐들을 20킬로그램 단위로 포장하니 총 9개가 나온다. 그리고 고소포터가 사용할 이중화와 아이젠을 맞추다 보니 동훈이와 내 것을 빌려주게 됐다. 꼭 내가 등반기회를 뺏긴 것처럼 속으로는 안절부절 걱정됐지만 뭐 어쩔 수 없지.
13일 밤에는 다음날 등반의 점심으로 김밥을 싸려 했는데 온통 뒤져봐도 김이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는 것이다. 한바탕 카고백들을 뒤지며 소동을 피우다 결국 임란이 옆 팀 쿡인 이스마일에게 김을 빌려 와 함께 김밥을 만들긴 했다. 임란 왈, “김밥 is not important.” 그래, 김밥은 중요한 게 아니지. 정작 중요한 건 무엇일까?
14일 날씨가 흐림에도 ABC로 출발하기로 했다. 우리 팀 5명 외에도 다른 한국 팀 7명, 폴란드 팀 세 명까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출발한다. 늑장부리던 고소포터들도 이른 점심인지 늦은 아침인지 짜파티를 챙겨 먹고 늦게 출발한다.
ABC는 5000미터 부근에 있으며 베이스와는 1000미터의 고도차이가 난다. 올라오는 데에만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린다. 내내 미끄러운 계곡의 사태 지역을 힘겹게 오르다가 마지막 100미터 정도는 설벽이 형성되어 있어 이중화로 갈아 신어야 한다.
이중화를 신은 준기형과 동영이가 ABC부근에 짐을 데포시키는 작업을 하는 동안 아래에서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내려온 준기형과 함께 내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빠지는 날씨에 눈발이 흩날리더니 약 4800미터 아래로는 많은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쏟아진 큰 비! 계곡이 급작스럽게 불어나더니 텐트만한 바윗덩어리들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우리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예기치 못한 위험 앞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피했다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베이스캠프에도 한창 난리가 났다. 베이스 뒤 쪽 계곡에서 난데없이 사태가 일어나 베이스 바로 옆까지 밀고 내려온 것이다. 쏟아지는 비속에 텐트들을 들어 옮기느라 온 인원이 동원되어 고생하고 있었다.
깜깜해지고 나서야 얼추 상황이 정리된 울퉁불퉁한 식당텐트 속에서 쉬고 있자니 그래도 편안하다. 우리보다도 늦게 내려온 신루트팀도 모두 무사히 내려왔단다. 모든 게 지저분하고 엉망이고 대충인 상황 속에서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낮에 벌어진 긴장된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앞으로의 등반이 그리 쉽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대원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위험에 대항해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잔잔한 기쁨이 느껴진다.
7월 15일
오른손은 할렐 즉 아름답고 깨끗하며 왼손은 하람 즉 추하고 더러운 것이다. 낯선 이들에게 굉장한 환대를 보이는 이들은 마치 민족성 자체가 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한편으론 환대를 보이지만 그만큼 공짜로 요구하는 것도 많으며, 항상 사소한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이 고마움에 감동해 주는 선물들을 그들은 오히려 당연하게 여긴다. 공짜로 요구할 때도 많다. 한 예로 트레킹 중에는 많은 포터들이 스틱을 요구한다.
트랑고 베이스 캠프에 쿡, 가이드, 키친보이 등으로 올라와 있는 현지인은 줄잡아 열 명이 넘는 것 같다. 그들은 모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신도라는 뜻의 무슬림이다. 파키스탄은 종교적인 이유로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한 국가로 거의 모든 국민이 무슬림이라 할 수 있다. 여기 올라온 현지인들은 거의가 카라코람의 중심부인 발티스탄 출신들로, 하루에 기도를 다섯 번 하는 누르박스키 교도들이다. 키친텐트 혹은 베이스캠프 주변에서 때만 되면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의 방향인 동쪽을 보고 절을 한다. 경건한 종교 의식에 방해되지 않게 때로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준다.
좋은 날씨를 그들의 신에게 빌어 달라고 임란에게 부탁했다. 당연히 그러마고 약속하는 임란. 그러나 어떤 산골 마을에서는 좋은 날씨가 며칠 계속되면 나쁜 날씨와 비를 뿌려달라고 기도한다고도 한다. 연이은 강렬한 햇볕에 고산의 눈들이 녹아 산골마을은 커다란 침수피해를 입는다. 간절히 기도하는 수많은 무슬림들을 외면할 수는 없을 테니, 그들의 신은 몹시 바쁘기도 하겠다.
종일 삼십 분 간격으로 소나기와 따가운 햇볕이 반복해 날씨를 종잡을 수 없는 하루였다. 감상이 밀려온 다른 대원들은 또 텐트 속에 박혀 동양화 감상에 몰두한다.
7월 16일 - 19일
트랑고 빙하 맞은편으로 울리비아호와 울리비아호타워(6096m)가 빤히 올려다 보인다. ABC를 설치하고 온 16일, ABC에서 하루 자고 내려온 19일에는 베이스로 내려오면서 타워의 가장 긴 동벽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인다. 저길 등반하려면 고생 깨나 해야 되겠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너무 안 좋다. 타워의 동벽을 제외한 부분에는 항상 구름이 걸려있다. 또한 벽까지의 어프로치가 훨씬 어려워 보이는데, 상당히 가파른 설벽이 적어도 천 미터 이상의 고도차를 형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96년에 여기를 찾은 한 등반대 중의 한 명이 설벽구간에서 크레바스에 빠져 숨진 이후로 거의 등반대가 찾지 않는다고 한다.
ABC를 설치한 16일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민호형과 동훈이는 남고 셋이서 작업하고 내려왔다. 그레이트 쪽 바위 아래 적절한 자리가 있었다. 도중에 스페인과 미국 팀을 만나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벌써 하단 루트작업 중이었다.
스페인 팀에 네 명의 트레킹 팀이 합류한 17일은, 그 중 두 명이 여자였는지라 온 베이스캠프가 떠들썩했다. 특히 현지인들이 과도하게 호들갑이었는데, 사실은 그들 중 연인관계인 커플이 있어 키스를 하는 장면을 자주 비췄기 때문이다.
시큰둥한 우리들도 이날은 쉬고 18일 전원이 ABC에 올라가 작업하고 19일 내려왔다. 고소포터들도 본격적으로 짐을 올린다. 그런데 고소포터가 올릴 카고백에 짐을 싸는 과정에서 저울의 눈금을 조작해 짐을 조금씩 더 넣었다. 수없이 짐을 날라본 이들일 텐데 이런 사정을 과연 모를까? 과연 그래야 하나 몹시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남는 짐을 우리가 옮겨도 모자를 판에. 고소포터를 잘 쓰지 않는 외국팀들이 부러웠다. 포타렛지를 두 개씩 메기도 하고, 홀백이나 커다란 어택 배낭을 멘 외국팀들을 마주치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한편 한 고소포터가 자켓을 요구하길래 이젠 너무한다는 생각이 앞섰으나 그가 입은 자켓을 보니 우리야말로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게 낡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미개한 이들, 너희들은 그런 거 입어도 잘 올라가잖아?’ 차마 내 자켓은 주지 못하고, 도저히 이런 생각도 지울 수 없다.
ABC에서 하단벽 출발지점인 콜까지도 약 100미터 정도를 더 올라가야 하기에 우선 숄더캠프로 올릴 짐들을 콜까지 올렸다. 콜에 갑자기 많은 등반팀이 몰렸다. 스페인팀, 미국팀, 그리고 곤도고라를 넘어 와 고소적응이 된 프랑스팀까지. 본격적인 등반 준비를 서두르는 ‘강력한’ 그들을 콜에 두고 우리는 다시 베이스로 내려왔다.
또다시 구름 한 점 없는 찌는 듯한 날씨에 베이스에 도착하자마자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신루트팀의 황승복 선배님이 다짜고짜 나오라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예전에 이 호수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이가 있다고 한다.
7월 20일 - 22일
드디어 숄더캠프 입성!
총 10피치의 하단벽을 올라 숄더캠프에 올라왔다. 20일 전 대원이 다시 ABC에서 하루를 보낸 후, 민호형, 동훈이와 함께 먼저 등반조에 편성된 우리는 21일, 22일 이틀간 하단을 등반하고 숄더캠프를 설치했다. 대신 준기형과 동영이는 뒤따라 올라오며 홀링을 도와주고 다시 베이스로 내려갔다.
21일, ABC에서 일어나 일찌감치 등반을 시작하기로 했다. 빠른 프리등반으로 오를 각오를 했으나 웬걸, 첫 피치부터 루트파인딩이 어렵고 등반도 만만치 않다. 다행히 앞선 스페인팀의 로프가 걸려있어 방향은 대충 알겠다. 아직도 물갈이에 고소적응이 덜 된 동훈이가 세컨으로 힘겹게 유마링한다. 1, 2피치는 한 번에 끊었고, 5.11급의 어려운 오버행이 나온 3피치를 지나 4피치까지도 한 번에 끊었다. 계속되는 좋은 날씨에 목이 몹시도 탄다. 어디 눈
쌓인 데 없나… 5피치를 올려다보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약 40미터 이상의 기다란 침니가 완전히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게 아닌가? 다행히 동훈이의 배낭에서 아이스바일을 빼 들고 암벽과 빙벽을 인공등반과 프리등반을 섞어 올랐다. 암벽화를 신은 채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 빙벽을 힘겹게 올라 7피치 렛지에 도달했다.
민호형과 동훈이도 차례로 올라왔는데 아래에서는 계속되는 홀링이 무척 힘겨웠나보다. 다들 지쳐 대충 포타렛지를 설치하고 벨트를 풀어헤친 채 저녁을 먹는데, 기우뚱- 포타렛지가 심하게 찌그러지더니 위태롭게 기울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비좁은 포타렛지에서 나와 옆의 좁은 렛지 위에서 자기로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침낭을 놓친 것이다! 아무 말 않고 침낭커버 속에 들어가 쭈그리고는 밤을 부들부들 떨며 뜬눈으로 지새웠다. 다음날 보니 웬걸, 바로 십여 미터 아래 침낭이 걸려있다.
숄더까지는 계속 선등을 섰다. 역시 선등이 제일 쉬우면서 재미있다. 등반은 모든 대원들의 협동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누군들 선등 서고 싶지 않을까? ABC에서 자고 다시 올라온 준기형과 동영이의 도움으로 숄더까지 남은 구간을 등반하고 세 개의 홀백을 홀링했다. 슬랩으로 이어지는 쉬운 8피치를 지나 9피치를 올려다보니 오버행이 만만치 않게 생겼다. 힘겹게 오르고 로프를 고정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루트는 좌측으로 크게 돌면 완만한 슬랩이 형성되어 두 피치로 나누어 갈 수 있었다.
이틀간의 힘겨운 등반과 홀링, 그리고 고소 증세로 세 명의 대원들 모두 지쳐있다. 꼭 장난감처럼 재미있는 MRE를 한 봉 까서 먹고는 비좁은 텐트 속에서 잠을 청한다.
7월 23일
너무 힘들다!
아직 고소에 적응이 덜 됐다. 동훈이 선등으로 14피치까지 로프를 고정시켰다. 오후 들어 점차 눈발이 흩날려 내려와야 했다. 다들 힘든가보다. 텐트 속으로 쓰러지듯 들어와 우선 낮잠부터 잤다.
고정로프 사용 문제로 한참 골머리를 썩였다. 4일 만에 등정하고 숄더로 내려온 프랑스팀과 아침에 인사를 나눴다. 그들이 유고루트를 통해 하강한다고 하는데 우리 로프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민호형은 당장 돈 받으라고 얘기하신다. 돈 달라는 얘기가 입에서 잘 안 떨어져 한참 머뭇거렸다. 민호형이 보다 못해 “We want money, 200 dollors.” 프랑스팀 한 멤버가 코웃음을 친다. 뭐 이런 놈들이 있냐는 듯한 표정. 이런! 우리가 뭔가를 잘못 알았나보다. 저희들끼리 한참 떠들더니, 로프를 사용하는 대가로 날씨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들은 자국과 위성 전화로 이곳의 날씨 정보를 받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 별로 필요 없었다. 그리고 날씨 따위가 중요하냐, 돈이 중요하지. 에라, 머뭇머뭇 거리다가 우리도 모른 척 하고 그냥 등반하러 갔다.
등반하면서 내려다보니 우리 로프를 사용해 내려가는 듯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작년에 한국 팀이 스페인 팀 로프를 사용할 때 300달러를 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24일
종일 눈이 몰아치다가 해가 쨍쨍 비추는 등, 날씨가 오락가락 했다. 텐트 속에 셋이 들어앉아 종일 멀뚱멀뚱 가운데 놓인 코펠만 바라봤다.
셋이서 좁은 텐트 안에 생활하자니 답답하다. 셋이 같이 있지만 더없이 고독해진다.
저 광대한 벽들을 생각하며, 그 위에 깨알같이 매달려 있는 나를 상상했다. 얼마나 외로울까? 등산은 너무나도 외로운 행위다. 가장 외로울 때가 등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순간일 것이다.
7월 25일
악천후 속에 등반은 계속 진행됐다.
25일은 민호형 선등이었다. 나는 세컨을 봤다. 잘 하겠지… 그리그리에 확보를 맡겨 놓고 동훈이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때,
“아악 앵커!”
16피치의 넓은 크랙을 지나 깊은 크랙으로 진입한 후 한참 올라가던 중 민호형이 큰 추락을 한다. 약 20미터 정도. 여러 개의 확보물이 모두 빠졌단다.
떨어져 충격이 커 보였다. 걱정스러웠다. “아악… 내 고어…” 고어텍스 자켓 어디에 구멍 나지 않았나를 제일 먼저 살펴보는 민호형. 어이가 없다. 물론 그리 큰 부상은 아닌 듯 해 보여 안심이 되긴 했다.
로프를 그대로 두고 일단 하강. 텐트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쉬었다.
7월 26일
이튿날 민호형은 텐트에서 쉬고 동훈이와 둘만 올라갔다.
“추락은 곧 등반의 실패다.” 오기 전에 준기형이 몇 번 이런 말을 했다. 프리클라이밍이 아닌 이상, 한 번의 추락은 심리적, 육체적으로 너무 큰 손상을 주기 때문이다.
18피치 짧은 오버행에는 많은 얼음이 껴 있어 등반이 쉽지 않았다. 오후가 되니 또 눈이 몰아친다. 진척 속도가 늦다. 동훈이 유마링이 거의 선등자 등반 속도와 비슷하니 이것 참 짜증이 샘솟듯 한다.
캠프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이번엔 민호형이 쉴 틈 없이 짜증을 부려 나도 짜증만 쌓인다.
열 손가락 손톱이 온통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른다.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다.
밤이 깊어 마지막 소변을 보러 나왔는데, 맑은 밤하늘에 은하수가 아름답게 흘러간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마침 별똥별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트랑고 등반이 잘 되게 해 주세요.” 긴가민가 하면서도 재빨리 소원을 빌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7월 27일
“지직… 여기는 베이스캠프 영훈이 나오라.”
“예 영훈입니다.”
베이스에서 준기형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흐른다.
“지금 그쪽 상황이 어떤가?”
“예, 19피치까지 줄 설치하고 내려 왔는데요, 눈이 많이 내리네요.”
“그래? 여기는 비가 온다.”
“이제 베이스로 내려와서 좀 쉬는 게 어떤가?”
“예? 쉬다뇨?”
쉬다니, 19피치에 3일치의 식량과 장비를 데포시켜 놨는데. 내일 몸만 올라가면 하루 비박으로 정상을 찍고 내려올 수 있는데 여기서 내려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너무 오래 걸렸다. 베이스로 내려오는게 어떤가. 내려오면 맛있는 닭도리탕과 소주가 기다린다. 좀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라.”
“…대장님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내려와라.”
이제 끝났다. 아무튼 며칠 후면 다시 올라오겠지만 첫 시도는 분명 실패로 끝난 것이다. 민호형은 유마링하다 말고 일찌감치 아예 베이스까지 내려갔다. 남은 동훈이와 오히려 콤팩트하게 정상으로 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악천후와, 무거운 배낭의 유마링이 우리를 너무 지치게 했다. 아무튼 실패는 실패다.
허탈함을 안고 내려오는 베이스까지의 모레인지대가 너무도 길게 느껴진다.
7월 28일 - 29일
준기형과 동영이가 그간 몹시도 조바심이 났겠다. 28일은 전반적인 등반에 대해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했고, 29일 아침 바로 출발했다. 우리 셋은 베이스에서 이제 이들이 내려올 때까지 대기해야한다.
29일 아침 둘을 배웅하고 나니 막상 할 일이 없다. 쉽튼 베이스캠프에 들어왔다던 한국 팀을 보러 놀러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쿡만 홀로 우릴 맞는다. 등반팀 철수를 도우러 대장님이 그쪽으로 가 세 명이 모두 벽에 있단다.
쉽튼 베이스캠프에 들렸다가 오면서 트랑고 빙하 건너편의 하이나브락, 캐츠이어 스파이어 등을 동훈이와 함께 바라봤다.
“형은 저 봉우리들을 보고 등반의 욕구가 막 솟아올라요? 저는 전혀”
라며 원정등반에 대해 가진 회의를 얘기한다.
동훈이는 내가 봐도 익스트림 알피니즘을 신봉하는 유형은 아니다. 단지 좋은 경험을 위해, 좋은 기회를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사례다. 동훈이와 같은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산을 찾으며, 왜 산에 가는지 의미를 찾지 못해 갈등을 겪고 있다. 고봉의 등정자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워나간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우쳐 주는 듯 하다.
우줌브락, 하이나브락 동봉, 캣츠이어 스파이어, 쉽튼 스파이어 등의 침봉과 거벽들. 쏟아질 것 같다. 매달리고 싶다. 매달리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고산등반은 등산의 다른 장르일 뿐이지 알피니즘의 첨예화라고 단순히 넘겨짚을 수는 없다. 알피니즘은 속성상 고산이 아닌 국지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심화될 수 있다. 즉 단순히 고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위험과 어려움이 배가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주영 씨의 『얄개바위』에 나오는 트랑고타워 등반기를 다시 읽어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우선 우리의 등반과 그 때의 등반이 너무도 흡사했다는 것과, 또 주영씨가 약간의 형용사로 과장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우리의 등반이 매우 저급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첫째, 5.10급 이상은 인공으로 돌파하려 했다는 점. 둘째, 그리 나쁘지 않은 날씨에도 공격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고소적응이 웬만큼 된 상태라면 날씨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등반이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며칠이 될지 모른다. 준기형은 야심차게 4일 계산하고 올라갔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으련만. 그럼 우리가 후딱 올라가서 우리도 마저 등반하고, 그리고 일찍 베이스를 철수해서 다른 데 구경이라도 좀 다녀올 수 있을텐데.
베이스에서 뭐 할 일이 있나. 오직 먹는 게 낙이다. 신루트팀의 황승복 선배님은 항상 베이스를 지키셨다. 그런데 선배님은 요리를 무척 잘 하셔서 종종 맛있는 찌개, 수제비 등등을 얻어먹곤 했다.
재미없는 비디오를 두 편이나 보고 일찌감치 잠들었다.
7월 30일
종일 먹고, 자고, 쉬고, 싸고
다음의 등반을 위해 쉬었다.
7월 31일
오늘도 종일 먹고, 자고, 쉬고, 싸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소비했다.
점심 때 막 숟가락을 들 찰나 철수하는 쉽튼 팀이 내려왔다. 신루트팀과 함께 점심을 함께 하며 즐거이 담소를 나눴다.
김재규 대장님의 입심 한 번 끝내주더라. 그래도 경험이 많으신 분답게 철학 또한 상당했다. “로체 남벽, 자누 북벽 이제 우리도 이런 걸 해야죠… 트랑고가 끝은 아닙니다…”
대장님 말고 너무도 건장해 보이는 두 대원은 굉장히 잘 먹는다. 꺼내온 비스킷을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사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8월 1일 - 2일
영석형, 후배 태진(04)이를 비롯해 많은 한국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K2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온 35명의 한국인이 발토로 빙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한국을 출발하기 전부터 이들이 이 때쯤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석형은 K2에 동판 설치를 위해 가는 것이었고, 서울대학교 교수산악회에서는 영석형을 가이드 격으로 트레킹을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 보니 웬 중학생 아이들이 셋 있다. KBS에서 ‘아주 특별한 여름 방학’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촬영을 온 것이다.
임란과 함께 아침 일찍 베이스를 나섰다.
처음에는 점심 때 쯤 만나게 잠깐 보고 오려고 생각했었다. 4시간을 걸려 발토로 빙하를 건너 호불쉐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오질 않고, 먼저 도착한 포터들이 오늘 이곳에서 야영 할 계획이라길래 아예 눌러 앉기로 했다.
다만 베이스로의 무전이 잘 안돼 베이스에서 걱정할까봐 오히려 내가 걱정됐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즈음 하나둘 한국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반가운 이들도 있다. 태진이, 선좌(서울미대 02)를 비롯해 희준형, 형우형 등이 차례로 도착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교수님들은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한 분 한 분 인사드렸다. 돌아가면 혹시나 마주칠 지도 모르겠다.
영석형, 정영목 미대 교수님 등과 술을 마셨다. 등산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선배님들 사이에 앉아 꾸벅 꾸벅 졸았다. 간만에 술을 마셔 금방 취한다.
한 대 툭 치면서 영석형이 말한다. “트랑고 올 돈이면 왜 빠유 동벽 같은 데에 신루트 낼 생각은 안 했냐?”
사실 나도 등반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는 게 별로 없다.
침낭이 없지만 영석형 옆자리에서 형의 우모복을 덮고 잤다.
이튿날 아침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옆에서 식사하시던 여교수님들, 사모님들 입이 떡 벌어진다. 무안하게끔…. 희준형이 마침 전날 잡은 소 앞다리를 척 얹어주신다. 이야 다행이다! 그런데 임란은 뼈만 많고 살은 별로 없는 앞다리라고 무겁기만 하다고 한다. 아무튼.
오는 길에 임란과 많은 이야길 나눴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무척 보고 싶다고 한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며.
8월 3일
뭔가 계속 가시 걸린 듯 께름칙하다.
나는 아직도 이 등반을 알피니즘 달성을 위한 시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가? 결국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관광 따위였던 것을.
그레이트 트랑고에 신루트를 내겠다는 슬로베니아의 2인조가 우리 텐트 앞에서 장비를 챙겼다. 하필이면 텐트 바로 앞이람! 꼼꼼히 홀백에 식량과 장비를 챙겨 넣는 그들의 모습에 은근히 배알이 뒤틀린다. ‘저놈들, 정말로 재미있게 등반하네!’ 안 봐도 훤하다.
나도 이제부터 저렇게 할 거다! 정확히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것,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한국에서도 분명히 이런 것들을 실험할 장소가 있다. 물론 시간과 멤버가 문제 되겠지.
오늘 EF팀으로부터 드디어 24피치에서 비박한다는 무전이 왔다. 망원경으로 보니 작은 점 두 개가 벽 위를 기어가고 있다.
괜히 민호형과 동훈이에게 짜증만 난다. 짜증을 감추려니 자연히 말이 없어지고, 이것 참 점점 게을러지기만 한다. 베이스에서 대기하고 있자니 날로 짜증만 더해가고 도저히 죽을 맛이다.
8월 4일
“베이스 나오라 여긴 백준기다.”
“예 베이스입니다. 말씀하세요.”
“지금 동영이와 둘이 정상에 서 있다.”
“꺄호! 형 축하합니다! 조심해서 하강하세요.”
이터널플레임 루트를 통해 준기형과 동영이가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총 34피치. 그러나 하강이 걱정스러웠다. 등정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인샬라”
임란은 새벽 4시에 일어나 EF팀의 등반과 그들의 안전에 대해, 그리고 날씨에 대해 기도했단다. 등정이 예상된다는 얘기에 저녁 때 온 베이스의 현지인들이 축하해주러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등정 시각이 너무 늦어 내일 온다고 약속을 취소하라고 했다.
무슨 파티냐고 민호형은 시큰둥한 내색을 비춘다. 아무튼 현지인들은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사고가 다르다. 현지의 룰을 어디까지 따라야 하는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
8월 5일
흥미진진한 등정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개 안 남은 소주 댓병을 꺼냈다.
멋지게 귀환한 두 명의 용사를 환영하기 위해 베이스는 오전 내내 분주했다. 사하왓(키친보이)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식당 텐트 앞을 꽃단장하기 시작하더니, 다들 달라붙어 돕는다. 콩단백으로 스페셜 디쉬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석형께 얻어온 소 앞다리를 요리하기 위해 옆 팀 황선배님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오후에 지친 모습으로 두 명이 내려왔다. 실컷 함께 먹고 마시고, 잠깐 쉬었다가 저녁 때 술 까지 마셨다.
현지인들 여럿이 몰려와 본격적으로 북을 두드리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
8월 6일
어제 간간이 쏟아진 장대비가 거짓말인 양,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옆 팀 세 명과 다시 유고루트팀 우리 세 명, 그리고 며칠 전 호수 맞은편에 들어온 남아공 팀 네 명이 함께 ABC로 향했다.
오랜만에 힘겨운 모레인 지대를 오르려니, 오 그간 실컷 먹어댄 위장이 처져 무거워서 잘 못 가겠다. 가뜩이나 부족한 산소가 위로 갈지, 장으로 갈지, 아니면 다리로 가야 할 지 온 몸에서 갈팡질팡한다.
다섯 번째 오르는 모레인지대. 마지막이겠지.
하단벽을 유마링하는데 하강하는 불가리아 부부를 마주쳤다. 단 둘이 며칠 전 숄더로 올라왔다는데, 부인이 고소에 너무 힘들어 내려간다고 한다. 오옷 땡큐! 그들은 마침 우리와 같은 유고루트로 계획했었던 것이다.
8월 7일
아침에 숄더 텐트를 열고 나서니 구름 한 점 없길래 잔뜩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또 눈이 펑펑 내려 비박하려다 말고 우루루 내려왔다. 이곳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구름 한 점 없다가도 어느새 가득 가스가 차올라 정신없게 만든다.
20, 21, 22 세 피치를 민호형이 선등으로 올랐는데 몹시 힘들어 하신다. 22피치에서 비박하려고 알파미까지 끓여 먹었는데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하강했다. 아마 비박을 고수했으면 밤 새 한 잠도 못 자고 죽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 오기 전 진성형(동국대 83)이 그랬다. “날씨 좋고 체력 되면 누가 못 올라가겠냐.” 악천후도 등반의 일부다. 지혜롭게 뚫고 나가는 게 바른 자세 아닐까.
한편 옆 팀 대장인 형일형은 그런다. “원정 오면 알피니즘이고 뭐고 자기가 재밌으면 그만이지 뭐!”
민호형은 등정이라든가 더 이상의 등반에 대해 이제 실증이 났나보다. 내내 삼겹살 얘기만 하고, 얼른 내려가고픈 눈치다.
동훈이도 민호형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부분은 있다. “정상은 가보고 싶어요.” 얌마 헬기 타고 가라.
나만 괜히 고집을 피우는 것 같다. 나 역시 고소에 따른 체력 저하로 빌빌대는 주제에 말이다. 언젠가 준기형이 그랬다. 내려가자는 한 사람이 있다면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왜냐하면 내려가고픈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8월 8일 - 9일
텐트를 때리는 눈발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오늘은 공친다.
그나저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낸다? 식량도 3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었다. 그리고 낮잠도 자면 안 된다. 밤에 통 잠이 안 와 다음날 컨디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훈이가 혼자서 잘도 재잘대기에 텐트가 무덤 같지는 않다. 그놈 쓸만한 때도 있네.
90년 솔로로 A4급 루트를 개척한 미나미우라라는 작자가 있다. 그는 둥게 빙하에서 짐을 올리고 북서면에 신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하기 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서 환상적인 등반을 마쳤다. 그런데 죽으려고 환장을 했는지,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시도한 것이다. 정상까지 글라이더를 올렸다는 것도 입이 벌어질 일이다. 등정 후 모든 장비들을 빙하 쪽으로 던지고, 글라이더를 타고 나른 순간…! 절벽의 상승기류로 글라이더가 뒤집혀 추락했는데, 다행히 부근 바위 모서리에 걸쳤다.
이 후 그레이트 트랑고를 등반하던 동료들이 무전을 듣고 구출하러 오기까지 보름 동안 벽에 매달린 자세로 버텼다. 그의 구사일생 생환기는 도저히 믿겨 지지가 않았다.
어쨌든 그는 트랑고를 가장 크고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 솔로등반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등산을 통해 느끼는 산친구와의 우정이야말로 매우 값진 것이라고 한다.
마음이 맞는다는 것이야말로 등반보다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8월 9일
한국에 가서 가장 하고 싶은 것? 인수봉에 가서 마음 놓고 등반하는 것이다.
오늘도 갑작스레 들이닥친 눈보라로 끝까지 유마링했다가 도로 내려와야 했다. 한 피치도 못 올렸다 한 피치도! 성과라곤 22피치에 데포해 둔 홀백을 뒤져 알파미 2개를 챙겨온 것이 전부다.
두꺼운 얼음으로 코팅된 로프로 유마링하기는 무척 힘들다. 유마가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놀라면 잠깐이지만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러면 더 숨이 차고, 결국 한참을 쉬었다 가야된다.
숄더에 있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좁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침낭이 너무 얇아 침낭커버를 씌워도 춥다. 베이스의 큼직한 텐트와 두꺼운 침낭이 그립다.
옆 팀은 20피치 우측에 포타렛지를 설치해 놨다. 그동안 작업하던 세 명은 내려가고 우리와 함께 숄더에 올라 온 김형일, 김팔봉, 왕대식 세 명만 남아있다.
신루트 개척 상황은 유고루트와 만나는 23피치까지 모두 마친 상태고 그 위로 계속 전진했으나 28피치에서 막혀 ‘등반불가’ 판정을 내린 상태다.
크랙에 눈과 얼음이 많이 껴 있어 확보물 설치가 어렵고, 그렇다고 믹스등반도 만만한 게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뜸을 두고 몰아치는 눈보라가 도저히 견뎌내기 쉽지 않다.
우리의 등반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내일 모레면 ABC까지 짐을 내려야 한다. 12일 고소포터가 올라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4일은 베이스를 철수한다.
집에 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옆 팀 고정로프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등반을 마치고 내려가자는 민호형. 새로운 경험을 해 보고 싶긴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하는 동훈이.
등정은 물거품이 되는 건가…. 그렇게도 정상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싶어 했던 동훈이와 함께 숄더캠프 옆 바위 위에서 학교 부기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등정 못 하고 내려가면 서운하겠지.
그러나 실패도 항상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사는 법을 배우자.
8월 11일
10일차 기록은 없다 왜? 비박했으니까.
“오늘 해 보는데 까지 해 보고, 눈 오면 짐 싸고 내려가자.” 제발 눈 오지 말아라! 하늘을 노려보며 유마링한다.
식량도 없다. 아침 일찍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올라가야 했다.
22피치 이후 옆 팀의 로프를 쓰기로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제 많은 얘기가 오갔다. 나는 계속 불만을 내비쳤지만 민호형은 더 이상 무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결국 28피치까지 올랐다. ‘등반불가’라는 29피치에 옆 팀이 매달려 있다. 과연 크랙에 잔뜩 얼음이 껴 있어 등반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등반 중인 팔봉 형은 크랙 우측의 칸테에 리벳을 박으며 오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26피치로 다시 내려와 비박하기로 했다. 작은 눈 사면을 깎아 엉덩이 붙일 자리를 겨우 마련했다. 셋이 나란히 허공을 향해 앉아 동훈이 다리 위에 코펠을 올려놓고 저녁을 먹었다. 그래도 실컷 먹을 수 있어 다행이다.
얼음판에 앉아 잠을 청하려니, 궁둥이가 몹시 시립다. 신발을 벗어 깔고 나니 이젠 발이 시립다. 뭐든지 다 껴입었는데도 으스스하다. 눈이 안 와 너무도 다행이다.
저 멀리 발토로 빙하 건너편으로 보이는 우루두카스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간다.
그런대로 잠은 적당히 잤다. 다만 너무 추웠다. 일찌감치 아침을 해 먹고 출발!
오늘 결정을 봐야 한다. 이런 중요한 날 선등은 나다. 이런 횡재가!
옆 팀은 어제 29피치까지 결국 로프를 설치해 놓고 20피치의 포타렛지로 내려갔다. 29피치 이후로는 올해 어느 누구도 올라보지 않은 꼴이다. 마음속으로 콧노래가 절로 나왔으나 아닌 척 심각한 척 했다. 30피치, 31피치, 32피치는 그런대로 쉬워 프리와 인공을 적절히 섞어 가며 빠르게 올랐다. 33피치는 동굴을 빠져 나오는 오버행 침니인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얼음이 별로 없으니 진척 속도는 빠르다.
세컨을 보던 동훈이가 동굴을 힘겹게 빠져 나오다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캠을 하나 회수 못 하고 온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캐머랏 아닌가! 나보다도 민호형이 하도 뭐라고 하셔서 동훈이가 많이 풀이 죽어 보였다.
확보 지점 하켄이 쑥쑥 삐져나오는 34피치에서 드디어 이중화로 갈아 신었다. 힘들게 아이젠도 차고 35피치 빙벽에 붙었다. 여기까지 올린 스크류가 쓸 데가 있어 다행이다.
얼음이 하도 안 찍혀 아이스바일을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어제 비박지를 깎을 때 너무 세게 휘둘렀던지, 피크를 조이는 나사가 헐거워져 있었다. 끄덕거리는 피크로 아예 얼음을 부숴가며 올랐다.
35피치. 아 정상이다! “형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정상에 도착한 기쁨이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뭔가 특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설산 같은 경우는 아직도 내려갈 일이 태산 같기 때문에 “반환점을 돈 기분”이라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암벽의 경우에는 사정이 약간 달라, 로프를 이용한 하강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니 더 기쁠 수밖에!
그런데 사실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최고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기업가들이 사업이 잘 되는지의 여부를 산에 비유해 왔기 때문에, 정상이란 ‘어떤 분야의 최고’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돼 왔다. 물론 산꼭대기가 제일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산의 최고’ 혹은 ‘등산의 최후의 목표’가 정상 등정인 것은 아니다.
왼쪽으로 약 15미터 더 올라갈 수 있어 보였으나 눈처마가 위태로워 보였다. 눈을 깎아 설 자리를 좀 마련한 후 다 같이 등정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30피치 이후로 옆 팀에서도 우리 로프를 이용했기 때문에 상부상조 한 격이 되니 서로 부끄럽지 않고 마침 잘 됐다.
숄더까지 고정로프를 회수하며 하강했다. 짐 정리를 대충 하고, 내일 ABC에 짐을 내리면서 베이스로 내려가기로 했다.
8월 12일 - 13일
짐을 잔뜩 싸 들고 ABC로, 그리고 베이스로 귀환!
마침 숄더에 올라온 남아공팀에게 남은 가스 몇 통과, 고정로프 한 동을 주고 왔다. 그러더니 이것저것 원하는 게 많다. 전날 밤에도 늦게까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서 우리팀은 물론 옆 팀도 제대로 잠을 못 이뤘다고 투덜댔다. 별로 좋지 못한 인상을 남겼다. 거의 찾기 힘든 남아공 팀, 그들이야말로 남아공의 얼굴일 텐데. 혹 우리도 누구한테 안 좋은 인상을 남기지나 않았을까?
지난번처럼 일주일 만에 내려오는 베이스다. 많은 사람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준다.
종일 실컷 먹고 마시고 푹 쉬었다.
저녁때는 EF팀 때와 같이 많은 현지인들이 몰려와 댄스파티를 벌였다.
8월 13일
여러 모로 아쉽다.
우선 베이스캠프 옆의 커다란 벽에 짧은 루트를 내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못했다. 고소 적응 차 베이스에서 프리 클라이밍을 즐길 수 있다면 무척 신날 텐데! 몇 안 되는 볼더에서 깨작거리는 게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오후에 동영이, 동훈이와 함께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미국팀 베이스캠프로 가서 볼더링을 했다.
또 선물을 좀 더 가져왔더라면 임란 및 사하왓 등에게 여러 가지를 줬을 텐데. 줄 것이 없어 안타깝다. 파키스탄은 일상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관습화 돼 있다.
등반에 대해, 원정에 대해 미련은 별로 없다. 트랑고 타워 등반은 기대에 비해 위험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성공했다는 것에 대해 큰 짜릿함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원정을 간다는 것, 원정을 꾸리는 것에 대해 많은 점들을 배웠다. 여러 가지 신중하게 고려해야할 점들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
마지막으로 베이스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또 소원을 빈다. “여자친구랑 잘 되게 해 주세요…”
얼른 집으로 돌아가 늦춰진 신경을 조여야지.
8월 14일
“미국 팀이 간다니까 날씨가 이렇게 좋네.”
오늘은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팀도 베이스를 철수했다. 미국팀은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서 수차례 등반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눈보라로 인해 패퇴하고 말았다. 즉 그들은 날씨 때문에 가장 시달림을 당한 팀인데, 그들이 이제 떠난다니까 임란이 이를 비꼬아 하는 얘기다.
미국을 싫어하나? 임란에게 물어보니 많은 이유를 들어가며 미국을 비판한다. 그렇지. 파키스탄은 인도와 분쟁 중에 있으며 미국은 인도의 우방이다.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적인 문제도 한 몫 한다.
그런데 미국은 우리 한국의 우방이다. 여기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 점까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이런 날씨는 카라반에는 너무 힘들다. 특히 오늘은 빠유를 지나 졸라 못 미쳐 에발 쏙 이라는 평평한 곳 까지 상당히 긴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다들 피곤해 했다.
8월 15일
졸라를 거쳐 아스꼴리까지 내려왔다. 올라갈 때 사흘 걸린 길을 이틀 만에 온 것이다.
발토로 빙하가 녹아 흐르는 브랄두 강이 포효하듯 몰아쳐 내려간다. 강가로 난 오솔길로 이어지는 하행 카라반 길은 무척 지루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에 잠길 수 있어 더없이 좋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멋지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멋진 일을 한 가지 하고 왔으니, 한국에 가서도 멋지게 살아야 할 텐데… 많은 생각을 하며 묵묵히 걸어 내려왔다.
이제 몇 년 후면 빠유까지도 지프가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점차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게 되겠지. 다음에 다시 오면 얼마나 변해 있을까?
남은 식량을 모두 없애느라 베이스에서 이곳저곳에 나눠주고 오니 정작 우리 먹을 게 별로 없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스꼴리에 도착하니 블루스카이에서 온 셰르알리가 야채와 과일, 닭 한 마리를 가져와 또 포식했다.
8월 16일
스카르두까지 지프로 약 6시간 걸리는 길에, 지프 속에 앉아 있자니 너무 좁고 답답해 아예 짐칸으로 올라왔다. 지프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니 무척 재밌었다. 시원한 바람이 너무 심해져 나중에는 소나기로 변한 게 문제였지만.
스카르두에서 제일 좋다는 중국집, 시설이 좋다는 호텔로 셰르알리가 우리를 안내한다. 왜 이렇게 대접이 좋으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길, “Because You are Summitteers.”란다. 아무튼 파키스탄 요리만 나오는 중국집에서 그야말로 실컷 먹어치웠다.
8월 17일
스카르두 공항에서 사하왓과 작별하고 비행기를 탔다. 이틀 걸려 간 거리를 이번에는 한 시간 만에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다. 다시 찾은 호텔은 처음 때와 같은 리젠시 호텔이다. 친해진 난쟁이 도어맨이 반갑게 우릴 맞는다.
점심 때 시내로 나가 저번에 봐 둔 피자헛에서 피자를 먹었다. 사람만 현지인들이고 맛과 인테리어는 한국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만 빼고는.
옆에 아주 큰 신식 책방이 있어 장장 60불 이상 어치 책을 샀다. 오버차지 때문에 걱정될 정도로.
8월 18일 - 20일
이슬라마바드와 라호르까지 여러 군데 관광한답시고 돌아다녔다. 비행기 시간이 남았기에 관광을 어쩔 수 없이 한 격이다. 관광도 무척 피곤하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이제 지루한 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가야했다.
비행기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