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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론(李箱論)
제1부
시간(時間)의 아들, 십자가 지다.
유 승 우
1.들어가는 말
이상(李箱)에 관한 논의(論議)는 너무나 많다. 논의에는 반드시 찬반(贊反)이 있게 마련이다. 시인(詩人)에 관한 한 찬반(贊反)이라는 말보다 정(正)과 반(反)이란 말이 좋을 것이다. 시인의 작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正)과 반(反)은 시간에 의해 판결이 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 당시에는 반(反)이 이기게 되어 있다. 그러나 반(反)은 정(正)이 아니다. 정(正)이 아니라는 것은 진(眞)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反)이 이길 당시에는 정(正) 곧 진(眞)은 죽게 되어 있다. 정(正)이나 진(眞)이 죽는 것을 가리켜 십자가를 졌다고 한다. 예수는 십자가를 졌다. 그러나 부활해서 2천년이 넘도록 슈퍼스타로 살아 있다.
정(正)과 진(眞)은 반드시 부활(復活)한다. 그것은 우주적(宇宙的) 원리(原理)이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을 가리켜 작은 우주라고 한다. 우주(宇宙)의 우(宇)는 공간(空間)이고, 주(宙)는 시간(時間)이다. 공간은 <전후-좌우-상하>의 기준이 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땅 곧 지구(地球)이다. 땅을 기준으로 해서 달라붙고 모여드는 구심력(求心力)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物)이다. 물의 성(性)은 고성(固性)이다. 단단할수록 지구에 밀착해서 오래 견딘다. 인간이란 우주의 구심력은 육체의 단단함이다. 육체가 단단한 사람은 지상에 오래 머문다. 시간(時間)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머물러 있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얼굴로 나아가기만 한다. 눈에 보이는 물(物)로서 시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은 물(水)이다. 물은 계속 흐른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시간(時間)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란 우주에서는 영혼(靈魂)에 비유한다. 영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썩는다. 큰 우주의 시간을 따라 작은 우주의 영혼도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는 것이 진보이며 원심력(遠心力)이다. 공간이란 구심력과 시간이란 원심력을 형상화한 것이 십자가이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는 것처럼 영혼이 변화하지 않으면 변질된다. 시간이 쉬지 않는 것은 천행(天行)이기 때문이다. 주역(周易)에서는, “천행이 쉬지 않으니 영혼이 살아있는 군자(君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않는다.”고 했다. 영혼이나 마음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괴테는 “자신에게 명령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하인으로 머문다.”고 했으며, “변화란 손잡이가 안에 있는 문이다. 자신이 열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역사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시간의 아들이다. 시간의 아들은 땅에 연연하는 구심력에 매달리지 않고, 시간의 뜻을 따라 새롭게 거듭나는 원심력에 의해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천재들의 운명이다.
2. 수평과 자유의 바다, 그 현대성.
18세기까지는 정형시(定型詩)의 시대다. 정형(定型)이란 구심력의 승리다. 틀을 만들어 고정시키고, 그 틀에다 생명을 맞추는 것이다. 구심력은 고성(固性)을 만든다. 이 단단함의 고성(固性)이 난공불락의 고성(固城)을 만들어 정형시는 말 그대로 고성(古城)이 되어 버렸다. 사회제도도 정형(定型)이 되어 왕족, 귀족, 평민, 노예라는 틀에 갇히게 되었다. 이 틀에 갇혀 인간의 영혼은 흐르지 못하고, 고성(古城)에 갇힌 늪이 되었다. 이 고성(古城)에 구멍을 내는 일은 천재의 몫이다. 천재란 하늘을 닮은 사람이다. 하늘을 누가 가둘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영혼은 누구도 가둘 수 없다. 물처럼 자유롭게 흐르며 생명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 영혼의 몫인 사랑이다. 사랑에서부터 단단한 성에 구멍을 내고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그것이 낭만주의이다.
마르크시즘
○ 낭만주의적 인문주의 〉 형식주의 〉독자중심주의
구조주의
낭만주의적 인문주의는 시인의 삶과 작품에 표현된 정신을 강조한다. 영혼의 자유를 존중한다. 작품은 곧 시인의 정신을 표현 것이란 표현설의 관점이다. 어쨌든 정형의 틀을 무너트리는 자유의 정신이다. 그래서 자유시가 탄생하게 된다. 정신은 자유를 존중하나 사회적 제도는 아직 봉건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사회의 제도적인 단단한 고성(固城-古城)을 허물고자 한 것이 마르크시즘이다. 다음 형식주의 이론들은 글쓰기 자체의 본질에 집중한다. 그 중에서 러시아 형식주의가 대표적이다. 구조주의 시학은 의미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 곧 언어구조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기호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독자중심주의(현상학적 비평)는 독자와 영향론적 경험 자체에 중점을 둔다. 라만 셀던 교수의 저서 『현대문학이론개관』초판에는 위에 인용한 다섯 가지 이론뿐이었지만 피터 위도우슨과 피터 부루커 교수가 페미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게이, 레스비언 및 퀴어(queer) 이론과 같은 최근의 것까지 보강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가 낭만주의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주요한, 김억, 황석우,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 노자영, 박영희 등에 이르러 자유시의 개화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자유시는 형식주의나 구조주의의 정신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낭만주의적 서정시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상(李箱)의 자유시와는 그 위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少女의 마음은 봄 잔디풀!
그는 밟으면 으크러지고
그는 불때면 타진다.
소녀의 마음은 琉璃 풍경
그는 바람 부디치면 울리고
그는 내던지면 깨진다.
-황석우의 <少女의 마음> 전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幄手를받을줄모르는-―幄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다면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해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거울> 전문.
위에 인용한 황석우의 <少女의 마음>은, 소녀의 마음을 봄 잔디와 유리풍경에 비유한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그 형식은 자유시이다. 이상의 <거울>도 자유시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낭만주의적 서정시와 모더니즘적 서정시로서의 차별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시적 형식과 기법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진보했다고 할 수도 있고, 진화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상 시인은 우주의 시간인 천행(天行)에 따라 스스로를 가다듬어 쉬지 않고 변화하는 시간의 아들이었다. 이 변화의 결과가 1934년에 ‘中央日報’에 이태준의(李泰俊)의 소개로 연재한 <烏瞰圖>이다. 이 작품은 발표와 동시에 <무슨 개수작이냐>, <미친놈의 잠꼬대냐>, <당장 집어치우라> 등의 비난 때문에 연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찬반의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이것을 찬반이 아닌 정(正)과 반(反)의 논의로 보겠다고 서두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의 <烏瞰圖>가 반(反)에 부딪힌 것은 그들의 눈에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작품은 형식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낭만주의에서 실현된 자유시가 형식주의를 거치면서 ‘낯설게 하기’까지 실현하여 현대성(modernity)을 획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형시를 반대하여 자유시를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새로운 형식의 창조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자유시의 기본 정신인 새로운 시를 창작한 시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조주의 시학의 기본 관점인 인간의 근본적 2항 대립의 구조주의적 시 구성을 위의 작품 <거울>에서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간은 큰 우주(宇宙)의 영혼이다. 그렇다면 작은 우주인 인간의 영혼은 시간을 따라 새롭게 거듭날 수밖에 없다. 그 새로운 얼굴을 그려내는 것이 시의 이미지이며, 새로운 형식을 만들기 위한 ‘낯설게 하기’이다. 그러니까 이상(李箱)의 작품에 대한 논의는 찬(讚)이냐 혹은 반(反)이냐가 아니라, 진(眞)이냐 혹은 반(反)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李箱)의 시에 대해 반(反)의 피켓을 든 사람은 일반 독자가 아니라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었다. 1920년대 낭만주의적 민요조(民謠調) 시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김억(金億)에 의해 “<어린애의, 意味조차를 分明히 알 수 없는 더듬이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酷評을 받았다. 김억에 의하면 李箱은 경박한 流行兒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反)에 대한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數十年 떠러져도 마음 놓고 지낼 作定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 하느냐. 열아문개쯤 써보고서 詩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二千點에서 三十點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三十一年 三十二年 일에서 龍 대가리를 떡 끄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깜빡 新聞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李泰俊 朴泰遠 두 兄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 준데는 절한다. 鐵―이것은 내 새 길의 暗示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屈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勿論 다시는 무슨 다른 方途가 있을 것이고 위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工夫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烏瞰圖 三十篇이 十五篇連載로 中斷케 됨으로써 쓴 것. 當時 發表가 되지 않았음)
위의 인용은 이상(李箱)이 <烏瞰圖> 30편을 연재하려다 반발이 심해 15편으로 끝내고 쓴 <烏瞰圖 作者의 말>이다. 그는 “남보다 數十年 떠러져도 마음 놓고 지낼 作定이냐”고 항변한다. 그리고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하느냐”라고 반(反)의 쪽에 대해 타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간적 차이의 문제다. 시인은 시간의 아들이다. 이 말은 시인이야말로 시간을 닮아야 한다는 의미다. 시간은 모습이 없다. 그러면 무엇을 닮아야 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인 성(性)을 닮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의 성(性)은 쉬지 않고(不息) 앞으로 나아감이다. 시인의 성(性)도 나아감이며, 영혼(靈魂)의 성(性)도 나아감이다. 시인은 영혼의 새로운 얼굴, 시간의 새로운 얼굴을 그려야 한다. 새로운 얼굴을 그리는 힘은 상상력(想像力)이며, 상상력이 그린 그림이 이미지이다.
이상(李箱)은 “열아문개쯤 써보고서 詩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二千點에서 三十點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고 하며, 게으름 때문에 뒤떨어진 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시인은 시가 곧 종교이며, 구원의 길임을 설파하는 시인의 자존이다. 그는 1931년과 32년의 작업 중에서 “龍 대가리를 떡 끄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고 한탄한다. 이처럼 앞서가는 시인들이 당한 수난에 대해 김용직(金容稷) 교수는, “물론 이런 경우에도 그를 이해하는 두어 사람의 具眼者 는 있다. 그러나 그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거침없이 돌팔매를 던지는 가해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헐떡이며 골고다의 언덕을 기어오르는 受難者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상(李箱)은 이런 상황을 “鐵 ―이것은 내 새 길의 暗示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屈 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다. 반(反)의 세력을 철(鐵)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 철옹성(鐵甕城) 앞에서 “제 아무에게도 屈 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지만, 물론 그의 영혼은 반(反)의 철옹성에 굴하지 않았지만, 시간(時間)이 그를 1937년 3월에 미래로 데려가 버렸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문학의 십자가를 진 것이다. 그리고 6.25 이후에 그는 부활해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연구되고 논의된 시인이요 작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땅에 달라붙으려는 구심력의 본질을 고성(固城)이라고 했다. 이 고성(固城)을 이상(李箱)은 철(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고성(固城)으로 굳히려고 하는 구심력(求心力)은 “구해서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의 힘”이라는 뜻이다. 정(正)과 진(眞)은 물(物)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이를 따르려는 사람은 모두 수난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상도 그러한 천재 중의 한 사람이다.
정(正)과 진(眞)을 따르려면 먼저 땅에 달라붙으려는 고성(固性)을 벗어야 한다. 이 인간의 고성(固性)이 만든 고성(固城)이 고성(古城)이 되어 시간의 원심력(遠心力)을 무시하고 엄연히 군림(君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첫째가 씨족개념인 족벌(族閥)이며, 족벌의 표현이 성명(姓名)이다. 이 족벌(族閥)을 다른 말로 문벌(門閥) 혹은 가문(家門)이라고도 한다. 이상(李箱)의 본명이 김해경(金海卿)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성과 이름을 다 바꿨다. 김해경이란 고유명사를 벗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다. 고성(古城)에 모여 있는 족벌(族閥)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족벌을 배반할 만큼 못 된 놈에게 하는 말이 “성(姓)을 바꿀 놈”이란 욕이다. 그는 김해경이란 고유명사를 벗고, 그 당시에 가장 많이 불리던 이상이라는 보통명사로 쓴 것이다. 이 이름까지도 안 쓰고, 그냥 그의 모든 작품을 어느 산 속에 묻어 두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면, 아마 그의 작품들은 신비의 경전(經典)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인간들의 고성(固性)의 대표적인 표현인 세속(世俗)과 제도와 법률을 거의 부정한 글들이기 때문이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도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이상이 이들과 다른 것은 제자들을 거느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剝製가 되어버린 天才를 아시오? 나는 愉快하오. 이런 때 戀愛까지가 愉快하오.>
肉身이 흐느적흐느적 하도록 疲勞했을 때 精神이 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蛔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의례히 白紙가 準備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布石처럼 늘어놓소. 可憎할 常識의 病 이오. -<날개>의 서두.-
스물 세 살이오―3月 이오―喀血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 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藥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新開地 閑寂한 溫泉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기를 펴지 못한 靑春이 藥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 하는 수가 없다. 旅館 寒燈 아래 나는 늘 억울해했다.
사흘을 못 참고 나는 旅館 主人 영감을 앞장 세워 밤의 長鼓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錦紅이다. -<逢別記> 서두.-
그의 소설 <날개>와 <逢別記>의 서두다. 두 편이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위의 서두만으로도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다. 도대체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때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우리의 고전소설인 이야기책을 읽는 이가 많았으며, 좀 깨었다는 사람들도 신소설이나 춘원(春園)의 소설을 읽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剝製가 되어버린 天才를 아시오? 나는 愉快하오. 戀愛까지가 愉快하오.>”라든가, “스물 세 살이오―3월이오―喀血이다.”라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서두를 내 놓았으니, 돌팔매를 맞을 만도 하다. 그는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剝製가 되어버린 天才”라고 한 것이다. 천재(天才)란 ‘하늘을 닮은 사람’이란 뜻이다. 하늘을 닮았다는 것은 시간을 닮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천재가 시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런데 현실의 고성(固城)에 갇혀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것이다. 족벌(族閥)의 고성(古城)에서는 남녀가 만나는 자유연애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재에게는 가능했다. 그래서 “이런 때 戀愛까지가 愉快하오.”라고 했으며, “사흘을 못 참고 기어 나는 旅館 主人 영감을 앞장 세워 밤에 長鼓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錦紅이다”에서 보듯, 연애가 시작됨을 예고한다.
연애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이를 만들어 인간(人間)l 되는 길이다. 인간이 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세로(從)의 길이 그 첫째요, 내가 선택하는 가로(橫)의 길이 그 둘째이다. 세로의 길은 하늘이 만들어 준 길 곧 천도(天道)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천륜(天倫)이라고 한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선택된 길이다. 이것이 바로 혈연(血緣)이며, 족벌이며, 가문이다. 그 다음이 내가 선택하는 가로(橫)의 길이다. 이 가로를 위한 사랑이 연애이다. 인간의 길은 이 연애에서 완성된다. 이 가로사랑의 조건은 수평이다. 높고 낮은 것이 있으면 안 된다. 높은 것은 반드시 굳게 마련이다. 이 굳어지는 고성(固性)에 의해 고성(固城)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고성(古城)이 되어 설산(雪山)처럼 만년설(萬年雪)을 이고 사는 것이 족벌(族閥)이며, 가문(家門)이다.
가문에서 받은 고유명사를 벗은 보통명사 이상이 금홍이를 만나 연애를 하는 것이다. 이상이 금홍이를 만나고 헤어지는 봉별(逢別)에는 가문 따위의 개념은 아예 없다. 금홍이는 이미 가문에서 나와 “長鼓소리 나는 집”에서 술을 따르며 노래하는 여자이다. 금홍이란 이름도 가문에서 받은 본명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고성(固性)을 고집할 때, 인간이 아닌 눈사람(雪人)이 되어 설산(雪山)에서 살아야 한다. 천재(天才)는 눈사람이 될 수 없다. 시간의 뜻을 따라 녹아야 한다. 수평(水平)을 만들기 위해 녹아서 흘러야 한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물의 흐름에 비유한다. 물의 흐름은 수평을 위한 것이다. 수평만 이루어지면 인간의 길의 완성인 십자가가 된다. 이 수평을 이루기 위한 삶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삶이다. 세례 요한은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했다. 이사야의 말씀이란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 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를 이른 말이다. 세례요한의 <곧게 하라>와 이사야의 <평탄하게 되며 평지가 될 것>이란 말들은 모두 수평(水平)을 이른 말이다. 이 수평(水平)이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을 말한다. 이 평등사상이 곧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문학사에서는 현대성(modernity)의 기본인 것이다. 얼음의 고성(固性)을 벗고 물처럼 흘러서 바다에 이르지 않는 한 인간사회의 수평은 이룰 수 없다.
3. 사회구조와 시적 구조.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 물의 흐름이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는다. 인간의 영혼도 시간을 따라 변하지 않으면 변질된다고 했다. 그래서 “군자(君子)는 천행(天行)을 따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않는다.”고 했다. 역사의 흐름을 물의 흐름에 비유할 때, 작은 냇물로 흐를 때를 씨족시대, 큰 냇물이 되었을 때를 부족시대, 강물은 민족-국가주의 시대, 바다는 민주주의 시대라고 비유한다. 역사적 체제는 그대로 바다가 되어, 모든 것이 민주적인 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과거의 어느 시기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다. 어느 시기에 갇혀 있는 영혼은 고여 있는 물과 같이 변질될 수밖에 없다. 바닷물은 흐르지 않아도 썩지 않는다. 시인은 시간의 아들이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바다에 이르러야 한다.
문예사조(文藝思潮)도 역사와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다. 정형시가 정형의 틀을 깨고 자유시란 새 생명으로 거듭난 것은 민물이 바다에 이르러 바닷물로 거듭나는 것과 같다. 바닷물이 흐르지 않아도 썩지 않는 것은 바닷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왜 썩지 않을까. 바닷물은 짠 맛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짠 맛은 바닷물을 바닷물이게 하는 소금이다. 바닷물에다 누가 소금을 탄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를 가리켜 자율성이라 하며, 인간사회에서는 민주정신이며, 시학에서는 현대성(modernity)이라 한다. 그 맛이 짜야 바닷물이 되듯이 현대성을 지녀야 현대시(modern poetry)가 된다. 아이작스는 낭만주의 운동을 고대시가 근대시를 거쳐 현대시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첫 번째 파도라고 하고, 상징주의 운동을 두 번째 파도라고 했다. 그리고 낭만주의 운동은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한 운동이며, 상징주의 운동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했다. 낭만주의가 반대한 무언가는 고대시의 교훈성과 도덕성이며, 상징주의가 성취하고자 한 무언가는 그 형식의 현대성이다.
라만 샐던은 낭만주의를 ‘낭만주의적 인문주의’라고 했으며, 그 뒤를 이어 <마르크스주의, 형식주의, 구조주의>를 거쳐 독자중심주의(현상학)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낭만주의 시는 정형시의 틀을 반대하고 얻은 근대정신(자유와 평등)을 표현한 근대시이며, 상징주의가 성취하고자 한 시적 표현을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를 통해 실현한 것이 20세기의 현대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시사에서는 1920년대의 낭만주의를 거쳐 1930년대의 현대시에 이르게 된 것이며, 현대성을 갖춘 현대시의 대표적 시인이 이상(李箱)이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오.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 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 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烏瞰圖 詩 第一號> 전문.
위의 작품은 정(正)과 반(反)의 논의를 들끓게 한 <烏瞰圖 詩 第一號>의 전문이다. 그 당시에는 이런 시가 너무 낯설었기 때문에 “미친놈의 잠꼬대”라는 반(反)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6.25 이후부터는 가장 많이 연구되는 시인으로 부활했다고 전술한 바 있다. 이싱의 문학에 대해, “그의 詩는 의욕에 비해서 수확이 적은 急進的 實驗의 소산”이라고 하기도 했고, “적어도 그의 成功作에는 現代詩에 요구되는 意味의 縮約이 읽혀진다.”고 하기도 했다. 임종국(林鍾國)은 이 작품의 “<十三人의 兒孩>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最後의 晩餐」에 合席한 基督 이하 十三人을 指稱한다. 따라서 이는 基督敎文明을 거쳐 人類의 文明을 聯想 想起케 하는 語句다.”라고 했다. 이 작품의 13인의 아해가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예수와 그 제자를 지칭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 ‘기독(基督)’까지 포함해서 13인의 ‘兒孩’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는 <肉親의 章 >이라는 수필에서, “基督에 酷似한 한 사람의 襤褸한 사나이가 있었다.---중략----나는 이 模造基督을 暗殺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 일생을 押收하려는 氣色이 바야흐로 농후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기독 곧 예수를 혹사(酷似)한 모조기독(模造基督)을 암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가 예수를 포함해서 ‘兒孩’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12인의 제자 외에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그 한 사람을 이상(李箱) 자신이라고 하고 싶다. 왜 13인의 <兒孩>일까. 이 <兒孩>들은 막다른 골목인 줄도 모르고, 아니 알더라도 “道路로 疾走” 하는 아직 미숙한 인간이다. 그래서 13인의 <兒孩>들은 모두 “무섭다고그리오”라고 한다. 그런데 이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 그렇게뿐이모였오”라고 한다. 여기서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의 2항 대립이 성립된다. 그러면 李箱은 <무서운 兒孩> 쪽인가, 아니면 <무서워하는 兒孩> 쪽인가. 그것은 이상(李箱) 만이 알 것이다. 다시 말해 유다 쪽인가 나머지 11제자 쪽인가.
이것은 그가 자신이 정(正)이냐 아니면 반(反)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가 타인을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현대성을 가장했다면 그는 정말로 미친놈이며, 정(正)에 입각해 진(眞)을 그려냈다면, 그의 반(反)쪽에 있던 사람들은 미쳐 시간을 따라오지 못한, “남보다 數十年씩 떠러져도 마음 놓고 지낼 作定”인 지각생들일 것이다. 그는 왜 13인 속에 자신도 참여시켰을까. 그 대답은 이렇다. 그 당시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놈들이다. 절대로 앞이 안 보이는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인데도,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를 질주하오.”에서 보듯 돌아설 줄 모르고 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13인의 아해들은 모두 “무섭다고그리오”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모두 순교하거나 자살로 끝났다. 물론 이상(李箱)도 시간의 십자가를 진 것이다. 이것은 모두 비유와 상징의 내용에 관한 문제들이다. 그러면 이 작품의 형식은 어떠한가.
여기서 보면 우리 시에 있어서 처음으로 시의 押韻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즉 압운이라면 詩行의 종결형이 나타내는 脚韻과 거의 구별 없이 쓰여져 왔는데 箱에게는 종결형이 아닌 부분에서 운률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운률이 외형으로부터 속으로 내재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현상으로 보이는데 , 그렇기 때문에 脚韻 외에서 일어나는 압운은 다만 형태상의 문제를 넘어서 시인 인식의 깊숙한 골짜기를 노출시킨다.
위의 지적은 정확하다. 우리의 시에서 압운이라면 종결형에서 <-다, -오>의 각운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각운은 압운법에 의한 시인의 감각의 소산이라기보다 우리말 종결어미의 일반적인 형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상(李箱)의 <烏瞰圖 詩 第一號>에서는 두운, 요운, 각운까지 완전하게 구조된 형식이며, 그 압운법에 의해 “시인 인식의 깊은 골짜기까지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인 인식의 깊은 골짜기”란 앞에서 고찰한 13인의 ‘兒孩’의 비유와 상징의 내용이다. 김주연은 위의 지적에 이어 “李箱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을 이루는 것은 <거울>의 이미지 문제 같이 생각된다.”고 했다. 이상의 시에서 <거울 속>과 <현실>은 분명히 시인 인식의 깊숙한 골짜기에 존재하는 2항 대립의 세계이다. 2항 대립은 구조주의 시학의 기본 요소이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길은뚫린골목이라도 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첫 연과 끝 연이다. 이 두 연의 배치는 구조주의적 2항 대립의 교묘한 구조이다, 그리고 시 전체가 치밀하게 구조된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것도 드러난다. 떼어 쓰기를 안 한 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나는 이 시에서 벽돌 한 장 한 장을 빈틈없이 쌓아 올린 느낌을 받는다. 이상(李箱)의 시에서는 형식주의자들의 “문학의 철저한 과학화”를 볼 수 있으며, 구조주의자들의 “2항 대립의 철학”도 볼 수 있으며, 기호학의 수식(數式)과 기호도 볼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시인 인식의 깊숙한 골짜기”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13인의 아해(兒孩)를 예수의 12제자에 李箱을 더한 것으로 볼 때, 12제자 중 11제자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마침내 순교한 사람들이다. 나머지 한 사람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한다. 제자들만으로는 11:1로 정(正)과 진(眞)을 따른 사람이 그 반(反)에 비해 11배나 된다. 그 중에 베드로(반석)는 본명이 시몬(총명)이다. 부모가 지어준 본명에는 총명하게 살라는 부모의 바람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따랐으며, 결국엔 순교한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찬양)는 찬양하며 살라는 부모의 바람도 저버리고, 스승을 배반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 때의 사회구조는 거의가 가룟 유다 쪽이었을 것이다. 이상은 어느 쪽이었을까.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는中일까.
罪를품고식은寢牀에서잤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傳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烏瞰圖 詩 十五號> 1.2.3 연.
위의 작품에는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가 있다. 거울 속의 <나>는 현실의 <나>의 그림자인 영상이다. 그러나 李箱은 이 두 개의 <나>를 동일화하려 한다. 라캉에 의하면 “나는 거울단계가 갖는 기능을 영상이 갖는 특별한 기능중의 하나로 간주하려 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유기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간의, 다시 말해 정신세계와 주위세계 사이에 어떤 관계를 수립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울단계는 유아기이다. 거울 속의 영상을 실재로 믿고 “거울 속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행위는 18개월 때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리비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상은 그때 유아기였을까. 아니다. 그의 생물적 연령은 성년이었지만 그의 거듭난 영혼이 유아기였다. 누구나 거듭난 영혼은 유아기이다. 유아와 같이 때 묻지 않은 순수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영혼은 언제나 유아기라야 한다. 언제나 시간을 따라 거듭나는 시간의 아들이어야 한다. 시심(詩心)은 곧 동심(童心)이기 때문이다. 순수를 회복한 영혼은,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에서 보듯, 죄의식으로 춥게 자고, 미래의 이미지에 대해 꿈도 못 꾸며, 현실적 거짓의 힘인 군화에 하얀 백지가 짓밟힌다. 백지(白紙)는 무엇이라도 그릴 수 있는 거울단계 유아기의 순수한 생명이다. 유아기의 순수성 회복으로 백지가 마련되면, 위의 3연과 같은 동화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가 전개된다.
4.나오는 말.
이처럼 백지가 마련되어야 예수의 제자에 가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이 자신의 본명을 버렸듯이 그 제자들도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고유명사인 본명을 버리는 것은 씨족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 부족관념, 민족관념까지 벗어버리면 순수감각과 사물(事物)만 남는다. 결국 탈관념(脫觀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탈(脫)이 아닌 벌(伐)의 역사였다. 자연(自然)은 사물(事物)이다. 사물의 사(事)는 보이지 않는 일이고, 물(物)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다. 일에는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이 있다. 살리는 일은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나를 벗어버리는 탈(脫)이고, 남을 이기고 마침내는 죽이는 일이 벌(伐)이다. 그런데 벌(伐)을 하기 위해서는 혼자보다 떼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벌(閥)이 된 것이다. 족벌(族閥), 학벌(學閥), 재벌(財閥) 들이 그것이다. 왜 이상은 예수의 12제자와 함께 했을까. 그들은 모두 나를 벗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인 줄 알면서도 도로를 질주해야만 하는 아해(兒孩)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이상 자신이며, 거울 속에 있는 영상이며,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영혼의 백지(白紙)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제2부.
시인은 모두 천재이다.
- 정서언과 백국희의 경우.
1.들어가는 말
천재(天才)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재주를 닮은 사람이란 뜻이다. 하늘의 재주란 무엇일까.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를 가리켜 창조(創造)라 한다. 하늘을 닮은 사람인 천재가 하는 일은 창작(創作)이라고 한다. 여기서 창조(創造)와 창작(創作)의 창(創)이라는 글자는 없음(無)에서 있음(有)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시인(詩人)은 창작(創作)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천재이다. 몇 편의 시를 남겼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창작품이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형식주의자들은 시 창작을 <낯설게 하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고 한다. 이상(李箱)의 경우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이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99%의 노력도 했으며, 1%의 영감도 발휘한 천재 시인이다. 99%는 인간이 하는 노력이고, 1%의 영감은 하늘에서 온다. 그렇다면 시인(詩人)이란 칭호는 99%에 연유한 이름이 아니라 1%에 의해서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장서언과 백국희는 분명히 시인이다. 그러나 이 두 시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장서언 시인의 존재는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자세히 읽어 본 적이 없다. 백국희 시인은, 이런 시인이 있었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99%의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다만 한 편의 작품이라도 창작(創作)의 창(創), 곧 1%의 영감에 의한 작품을 남겼다면 그는 천재이며 시인이다. 장서언과 백국희는 어떨까. 그들의 작품을 직접 고찰함으로써 알아보기로 한다.
2.장서언의 삶과 문학.
장서언(張瑞彦)은 1912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37년에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여행사에 근무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여행사 상무이사,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휘문고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성북고교 교사로 옮겼다. 그 다음 1971년에 홍익공업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0년에 <이발사의 봄> 외 6편을 「東光」에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했다. 독특한 감촉과 신선한 감각으로 김기림(金起林)과 같은 계열의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극단 신협(新協)에 가입하여 이해랑(李海浪)과 함께 연극운동도 한 바 있다.
가지에 피는 꽃이란 꽃들은
나무가 하는 사랑의 練習
떨어질 꽃들 떨어지고
이제 푸르른 입새마다 저렇듯이
퍼렇게 사랑이 물들었으니
나무는 깊숙이 沈黙하기 마련이요
불다 마는 것이 바람이라
時時로 부는 바람에
나무의 마음은 안타까워
차라리 나무는 벼락을 쳐 달라 하오.
諦念 속에 자라난 나무는
자꾸 퍼렇게 자라나기만 하고
참새 재작이는 고요한 아침이더니
오늘은 가는 비 내리는 午後.
-<나무 1> 전문.
바람불어 거스러진
샛대 지붕은
고요한 달밤에
박 하나 낳았다.
-<박> 전문.
장서언의 시 중에서 임의로 뽑운 작품 두 편이다. 앞의 <나무 1.>은 나무의 푸름을 “이제 푸르른 입새마다 저렇듯이 / 퍼렇게 사랑이 물들었으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무의 푸르름을 사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푸르름은 초록(草綠)으로 생명의 피어남을 의미한다. 그 초록의 생명을 “사랑에 물들었다”고 표현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적극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時時로 부는 바람에 / 나무의 마음은 안타까워 / 차라리 나무는 벼락을 쳐 달라 하오.”에서 보듯, 식물적 사랑의 적극성을 노래하고 있다. 동화적 사랑의 스토리를 담은 서정시이다. 이 작품에선 이미지즘적 경향은 볼 수 없다.
장서언에게는 <나무> 연작시가 10편 있다. 그 외에도 그 제재가 식물적인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꽃이나 열매가 많이 등장한다. 꽃은 봄과 관계가 있고, 봄은 종달이와 관계가 있다. 그의 등단 작품도 <이발사의 봄>인데, “젊은 理髮師는 벌판에 서서 / 구름 같은 풀을 가위질 할 때, // 소리 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 / 壁畵속에 졸고 있는 종다리여.”에서 보듯, 이발사가 깎는 머리를 “구름 같은 풀”이라고 했으며, 이발소에 걸린 벽화속의 종다리에게 “소리 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고 부탁한다. 시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장서언의 예술정신임을 알 수 있다.
예술(藝術)의 예(藝) 자는 사람이 나무를 심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나무를 심는 목적은 무엇일까. 꽃과 열매이다. 꽃은 식물적 생명의 절정이며, 열매는 식물적 생명의 결실이다. 예술의 결실은 곧 예술작품이며, 예술적 생명의 결실이다. 그 예술적 생명의 결실을, 장서언은 위에 인용한 <박>에서 잘 형상화 하고 있다. “바람불어 거스러진 / 샛대지붕은” 예술인의 어려운 모습의 이미지이고, “고요한 달밤에 / 박 하나 낳았다.”는 예술적 생명의 결실을 형상화한 것이다. 4행으로 된 짧은 자품이지만, 시인의 예술관과 생명성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또한 이 시인의 예(藝)와 술(術)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장서언의 작품에서 자주 만나는 시어(詩語)가 <바람>이다. 우리말에서 바람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가 공기의 움직임인 바람(風)이고, 둘째가 마음의 움직임인 바람(願)이다. 공기의 움직임은 육체가 살기 위한 호흡에서 시작되고, 마음의 움직임인 바람은 영혼이 살기 위한 상상(想像)에서 시작된다. 공기와 마음은 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 오직 사물의 흔들림에서 공기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상상력이 만드는 이미지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장서언은 이처럼 아름다움을 꿈꾸는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백국희 삶과 문학
백국희(白菊喜)는 1915년 서울 唐珠洞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했다고 한다.학생 때부터 침정(沈靜)한 시상과 청초(淸楚)한 시풍의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청초미를 이루기 전에 불행한 결혼에 희생되어 1940년에 병사(病死)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신가정(新家庭) 지에, <밤>, <코스모스>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現代朝鮮女流文學選集』(조선일보편지부, 1938)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어 전한다.
빛난다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뽑은듯 나릿한 몸매
살랑거리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가벼운 속삭임이 흘러
눈썹을 간질인다.
밖엔
고달픈 애수가 헤매고 있다.
벗은 나무들 피곤한 팔 드리우고
가을바람은 마른 잎을 뿌린다.
웃음과 눈물
좀더 가까이 서자.
빛난다.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밝게! 차게!
-<코스모스> 전문.
이 작품을 읽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작품이 1930년대 여류시인의 작품이라니. 참으로 이런 시인의 요절은 우리 문학사에서 너무 안타까운 손실인 것 같다. 시행 하나 하나가 너무 감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처음부터 “빛난다. /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 뽑은듯 나릿한 몸매”에서 보듯, 코스모스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이미지즘의 첨단을 보는듯하다. 이미지즘의 감각적 형상화 중에 촉각적 이미지의 형상화가 가장 어렵다. 그런데 “가벼운 속삭임이 흘러 / 눈썹을 간질인다.”와 같은 표현에서는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속삭임’이란 청각적 이미지를 ‘눈썹을 간질인다.’라는 촉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은, 백국희가 천재적인 언어감각을 지닌 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 연에서는 가을의 분위기를 “밖엔 / 고달픈 애수가 헤매고 있다. / 벗은 나무들 피곤한 팔 드리우고 / 가을바람은 마른 잎을 뿌린다.”에서 보듯, 독자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애수가 되어 헤매고, 낙엽을 밟으며 가을 길을 산책하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는 “웃음과 눈물 / 좀더 가까이 서자. / 빛난다. /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 밝게! 차게!”에서 보듯, 첫 행에서 웃음과 눈물을 제시하고, 웃음의 시각적 이미지를 ‘밝게!’로 눈물의 촉각적 이미지를 ‘차게!’로 끝 행에서 형상화하는 것은 놀라운 시적 구조의 재능이라고 하겠다. 이런 시인이 불행한 결혼으로 요절했다고 하는 것은 씨족적 가문(家門)에 의한 문화적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의 부끄러움은 오직 붉고
그 시절의 꿈만이 가물거린다.
뻗어가는 찰나(刹那)는
한 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이어……
연흥의 로맨티시즘을
초록빛의 현실이 앗았구나.
바람 불 때마다 움직이는
그림자의 빛
숨도 가쁘리라
바람 맞은 돛(帆)같이 이 마음은
있지도 않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녹음(綠陰)> 전문.
현재라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순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가 없는 것과 같다. 과거와 미래가 이어진 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간이 과거 쪽에 시선을 두는 것을 반동(反動)이라 하고, 미래 쪽에 시선을 두는 것을 진보(進步)라고 한다. 현재란 사실 없는데, 현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보수(保守)이다. 현재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수는 결국 반동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보수(保守)와 진보만 있는 것 같지만 진보도 현재에 존재하면서 시선만 미래에 두는 것이기 때문에 보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녀의 부끄러움은 오직 붉고 / 그 시절의 꿈만이 아물거린다.”에서 보듯, 볼 붉히던 소녀의 부끄러움은 ‘붉고’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존재할 뿐 “그 시절의 꿈만이 아물거린다.”로 형상화 된 것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는 순간뿐이라면, 시간은 개념으로만 있을 뿐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과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에 대한 관점을 “뻗어가는 찰나(刹那)는 / 한 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이어……”라고 현재의 개념을 형상화 하고 있다. 백국희는 언어 감각과 시적 재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철학적 실존 개념까지 파악해서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여류시인은 거의가 “연홍의 로맨티시즘”에 잡혀 있었다. 1920년대의 낭만주의적 시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백국희는 낭만주의를 “초록의 현실이 앗았구나.”라고 한다. 여기서 <초록의 현실>은 현재라는 시간의 개념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시간의 얼굴은 볼 수 없다. 공기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미지로 시간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천재이다. 백국희는 “바람 불때마다 움직이는 / 그림자의 빛 / 숨도 가쁘리라.”라고, 여름과 현재라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얼굴을 역동적 이미지로 그려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바람 맞은 돛(帆)같이 이 마음은 / 있지도 않은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마무리 한다. 시인은 “있지도 않은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했는데, 공간적인 고향은 세상에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시간적인 고향은 세계 내에 존재할 수 없다. 시간적인 고향을 유년이라고 하는데, 그 유년은 공간 곧 세계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 첫 행의 ‘오직 붉고’로만 형상화 할 뿐이다.
4. 나오는 말.
장서언과 백국희의 자품을 살펴봤다. 두 시인이 다 천재적인 재질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다. 그들의 이름을 잊고 있었지만 그들의 작품이 존재하는 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이번의 이 작업이 두 시인의 이름을 시단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특히 백국희 시인의 작품이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안타깝다. 시적인 천분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문학을 위해서는 모든 차별의 벽이 무너져야 한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남녀 차별, 인종 차별, 빈부 차별을 만드는 족벌(族閥), 학벌(學閥), 재벌(財閥)의 의식이 무너져야 하지 않을까.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모두가 바다에 이르러 수평이 되고, 하늘을 그 가슴에 품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