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영월 관풍헌)
마당에는 어머니와 형님 내외가 먼저 나와 병연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 오거라"
어머니의 대답은 짤막했다.
그러한 어머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병연은 수심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읽지 못한 채, 옆에 서있는 형님 내외분께 인사를 드리고 뒷쪽에 서있는 아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사립문을 나와 백일장이 열리는 읍내를 향해 걸었다.
그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사이, 함평 이씨는 사립문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힘차게 걸어가고 있는 병연이의 뒤를 바라보며 지난 날을 떠올렸다.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는 순간 곡산에 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오면서, '어떠한 고통이 닥치더라도 두 아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쳐 멸문지화에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이루리라' 하고 이를 악물고 지금껏 잦은 솔가(率家)와 가난을 견디면서 글공부를 성취했는데.....
그러나 '오늘같이 기쁜 날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병연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남들과 달리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차분하고 여유롭게 시상 가다듬어
빠른 걸음으로 병연은 시루산과 봉래산과의 안부인 삼옥재에 잡아들었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붉은 빛을 발하는 진달래꽃이 산록에 빨갛게 물들어 있어 그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그가 삼옥재를 넘어 동헌이 가까운 읍내로 들어섰을 땐 이미 관풍헌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오고 어떤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왔다.
세인들이 부러워하는 통영에서 만든 갓과 가죽신에 오색찬란한 도포자락이 가는 바람에 휘날리는 경관은 일대 장관이었다.
그러한 그들에 비해 병연의 옷차림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초라했다.
그러나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그는 초라한 자신의 옷차림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그들의 허세를 속으로 비웃으며 함께 걸었다.
병연은 '관풍헌'이라 쓴 현판 앞에서 두 주먹을 힘껏 잡고 대문을 들어서니, 백일장이 열리는 넓은 마당은 더욱 가관이었다.
주인을 모신 하인배들은 시제(詩題)가 잘 보이는 앞자리들을 차지하고 오색찬란한 강화 화문석(花紋席)과 돗자리를 깔아놓고 주인이 앉기를 기다렸다.
간간히 허름한 차림으로 그들의 주변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두리번거리는 시객들은 억센 하인배들의 엉덩짝에 떠밀려 슬금슬금 뒤쪽으로 밀려났다.
병연은 애초에 그런 수모를 피해 느긋이 뒤쪽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등지고 앉아 두루마리로 말아온 한지판을 땅위에 깔고 그 위에 화선지를 가지런히 펴서 솔방울만한 돌을 주워서 네 귀퉁이에 올려놓고 화선지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필낭에서 벼루를 꺼내어 놓고 연적에서 물을 따라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의 지필묵을 다루는 솜씨가 순서를 따라 차분하면서도 여유로웠다.
잠시 후 집사가 나와 높은 뜰에 고정시켜 놓은 북을 울렸다.
뒤이어 나이가 지긋한 사관이 큼직한 두루마리를 들고 나와 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백일장에 참여치 않은 사람은 모두 과장에서 퇴장해 주시오!"
그 말이 떨어지자 주인의 시중을 들어주던 하인배들이 일제히 대문 밖으로 몰려 나갔다.
"자. 지금부터 백일장을 행하겠소이다. 그동안 여러 선비들이 갈고 닦은 글을 마음껏 필해주시기 바랍니다. 마감 시간은 미시(未時)이고, 합격자 발표는 유시(酉時)에 있을 터이니 시간을 엄히 지켜주시기 바라오."
말을 끝낸 사관은 두루마리를 벽에 걸더니 두루마리를 풀어 내렸다.
커다랗게 쓴 시제가 드러나 보였다.
병연은 맨 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시제를 훑어보고는 붓을 들고 먹물을 듬뿍 찍은 다음 화선지 위에 시제를 쓰기 시작했다.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정가산의 충절사와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음을 논하라.
시제를 쓴 병연은 붓을 벼루 위에 뉘어 놓고 잠시 눈능 감으며 시상을 가다듬었다.
1811년 12월.
서북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충절을 지키며 끝까지 투항하다가 죽임을 당한 가산 군수 정시(鄭蓍)의 충절과, 가산 군수보다 벼슬의 직위가 높은 선천부사와 방어사의 지위를 갖고도 반란군의 수괴인 홍경래에게 항복한 대역 죄인 김익순을 탄하라는 시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