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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34
제 7장 날마다 좋은 날
도락산 광덕사를 나온 고명인은 문득 ‘돌아가시는 길에 석종사가 있습니다. 충주시에 가면 내 사제(師弟) 혜국스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혜인의 말이 떠올랐다. 혜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미국에서 왔던 탓인지 고명인은 누군가에게 더 많은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아 있던 참이었다.
고명인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펼쳤다. 과연 충주시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여주에서 남쪽으로 뻗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진입하면 금세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충주시였다. 또한 그곳에 가면 석종사를 안내하는 이정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혜국스님.
작년 가을 해인사에서 혜각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 번갯불처럼 뇌리를 스쳤다. 일타스님의 제자들 중에 세 사람을 자신더러 꼽으라고 한다면 혜인, 혜국, 법타라고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며 장담하듯 말해주었던 것이다. 선정하는 기준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심 없이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했던 혜각에게 고명인은 새삼 고마워했다.
고명인은 무언가 빠트린 것 같은 허전해진 마음도 달랠 겸 충주시로 가기로 하고 승용차의 시동키를 돌렸다. 마음을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혜국에 대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그를 만나면 그토록 보려고 했던 일타스님의 진경(眞景)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고명인은 달리는 승용차의 속도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야, 일타 큰스님의 상좌스님들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떠돌고 있음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원력이 작용한 것일까. 원래는 어머니의 혼을 위로하고 싶은 바람으로 해인사를 갔던 것인데, 이제는 어머니의 혼이 나를 일타스님께 인도하고 있는 셈이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차창에 굵은 빗방울이 달라붙고 있었다. 산악지방에 형성된 비구름이 느닷없이 비를 뿌리고 있었다. 먼 하늘은 뻥 뚫려 있어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비구름은 산악의 분지에만 오락가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승용차가 긴 터널을 지나 평야지대에 이르자 빗방울은 더 이상 차창에 달라붙지 않았다. 고명인은 라디오를 켰다. 마침 귀에 익은 ‘동심초(同心草)’라는 제목의 가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느냐.
고명인은 봄비소리처럼 속삭이는 진행자의 말솜씨에 빠져들었다. 원래 이 가곡의 작사자는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아니라 중국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薛濤)의 ‘춘망사(春望詞)’ 4수 중 세 번째의 시라는 것이었다. 진행자는 친절하게도 가곡 ‘동심초’의 모태가 된 설도의 한시(漢詩)도 소개해주고 있었다.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낮은 계급의 관리였던 아버지가 죽고 살림이 어려워지자 설도는 16세에 유녀(遊女)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무르익은 나이 때 열 살 연하의 선비와 절절한 정을 나누었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이 어렸을 때 이미 그녀의 고독한 운명을 예감하고는 울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뜰에 자라고 있는 늙은 오동나무를 소재로 하여 시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마당에 늙은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에 솟아 있네(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하고 읊조리자 그녀가 ‘가지는 남쪽 북쪽 새들을 맞고/ 잎은 오고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라고 했던 바 아버지는 짝 없이 홀로 늙어가는 오동나무가 딸의 장래운명처럼 보여 울었던 것이었다.
고명인은 갑자기 설도의 아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설도를 동정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문득 노래의 가사가 자신과 어머니와의 아득한 이별을 노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머니와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일까.’
이제 어머니와 다시 만날 날은 아득하여 기약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여린 풀잎으로나마 어머니와 자신을 묶으려 하는 마음이 노래가사처럼 헛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석종사 이정표는 충주시 인터체인지를 막 벗어나자 짙은 갈색 바탕에 흰 글씨로 서 있었다. 도시 맞은편의 높은 산봉우리 아래의 산자락에 석종사가 있지 않을까 짐작이 됐다. 고명인의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승용차로 10여 분 직진해가다 우회전하여 또 다시 이정표가 표시하는 대로 달리자 도로가 갑자기 좁아진 석종사 입구 산길이 나타났다.
산중인 이곳에도 비가 내렸는지 산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고명인은 차창을 열고 좀 전의 노래가사가 준 허허로운 기분도 전환할 겸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산속의 공기가 폐부를 찌르듯 했고,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상쾌하게 들려왔다.
산허리에 비구름 자락이 걸려 승용차는 산길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구름 위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몽환적인 그러한 느낌은 짧은 토막 꿈처럼 금세 사라졌다. 약간은 긴장감을 띠고 질서 있게 자리 잡은 석종사의 가람들이 왕조시대의 행궁(行宮)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조사전과 선방, 그리고 크고 작은 요사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명인은 마침 마당가에서 포행을 하고 있던 혜국을 만나 또 한 번 더 놀랐다. 석종사의 거대한 규모에 비해 그의 키는 종각에 매달린 종처럼 작았지만 그의 체구에서는 장중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짙은 눈썹 밑에서 내쏘는 눈빛이 강했고, 그것 때문인지 인상은 차돌처럼 강개해 보였다. 고명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혜국스님이시죠.”
“그렇습니다만.”
“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혜인스님의 소개로 찾아 왔습니다.
저는 고명인이라고 합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혜국은 겉치레의 인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방문한 목적을 물었다. 고명인은 잠시 당황하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복잡한 심정과 가정사를 짧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명인은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차 안에서 ‘동심초’라는 노래를 들은 때문인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왔습니다.”
“하하하. 노래에 빠져 무심히 달렸군요. 그럴 수도 있어요. 나도 그 가곡을 좋아합니다.”
“감상에 젖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석종사에 도착했지 뭡니까. 사실입니다.”
고명인은 혜국을 따라 조사전으로 들어가 엎드려 절을 하고 앉았다. 혜국이 다관에 찻잎을 넣으면서 말했다.
“노래 가사 중에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란 구절에서 나는 대단한 선기(禪機)를 느낍니다.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내내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대답은 사람에 따라 천 가지 만 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수좌에게는 자성불(自性佛)일 수도 있고, 연애하는 사람에게는 이성의 임일 수도 있고, 고 선생에게는 어머니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스님에게는 왜 자성불입니까. 저는 자성불의 뜻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고명인은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부처(心佛)를 말합니다. 단박에 깨쳐 보는 것이지 설명을 해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부처입니다.”
혜국은 차를 서너 잔 마시고 난 뒤에야 자신이 부처님과 인연 맺은 이야기를 했다.
“자성불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진짜 나를 만나기까지의 삶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나의 불연(佛緣)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타가 도견이 머물고 있는 제주도 고관사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60년도 전후였다. 당시 고관사에는 혜인이 일타를 시봉하고 있었고, 혜국의 육촌형님도 재무소임을 보면서 살고 있을 무렵인데, 삼십대 나이의 일타는 태백산에서 자기 손을 태워 도를 이루어 나온 도인이라고 하여 대중들에게 큰스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육촌형 법장이 초등학생인 어린 혜국에게 출가를 권유하기도 했다.
“지금 고관사에 큰스님이 와 계시니 너 그 큰스님을 따라 가거라.”
어린 혜국은 육촌형 법장의 말을 가슴에 담고 있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 시험을 치른 뒤 고관사로 갔다. 그러나 일타는 이미 해인사로 떠나고 없었다. 그래도 혜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중학교 시험 성적이 자신이 욕심냈던 것만큼 나오지 않았으므로 자존심이 몹시 상해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혜국은 큰스님 일타를 만나게 해달라고 육촌형 법장에게 매달렸다. 할 수 없이 법장은 동생 혜국을 데리고 해인사를 가기 위해 부산 가는 배를 탔다. 부산 부두에 내린 혜국은 법장을 따라 금장사에 머물렀다가 김천까지 함께 기차를 타고 간 뒤 거창으로 내려가 도반에게 혜국을 큰스님 일타에게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고는 제주도로 돌아가 버렸다.
법장의 도반을 따라 해인사로 가게 된 어린 혜국은 겁이 더럭 났다. 일타를 보자마자 큰절을 올렸는데 일타가 육촌형의 도반에게 왜 데려왔느냐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난 상좌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도반이 신신당부를 하고 갔습니다. 더구나 도반은 이 행자의 육촌형입니다.
스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도반이 저를 믿고 간 것인데 이거 큰일입니다.”
그제야 일타는 퇴설당의 골방에서 사탕을 몇 개 들고 나오더니 덜덜 떨고 있는 어린 혜국을 달래듯 물었다.
“네 어머니가 허락하신 것이냐.”
“아니요.”
“그럼, 너 어떻게 절에 올 생각을 했느냐.”
“중학교 시험 봤는데 일등이 아니라서 화가 나 고관사로 육촌형님인 법장스님을 찾아갔더니 ‘너는 절에 꼭 살아야 할 거다’ 라고 말했습니다. 법장스님은 사주 같은 것을 조금 보는 스님이거든요.”
“고관사에 계시는 법장스님이라고 했느냐.”
“네.”
그러나 일타는 법장을 잘 모르는 듯했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휘휘 젓더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나직하게 말했다.
“육촌형스님이 사주를 좀 본다는 말이지.”
“네, 법장스님이 큰스님을 따라가라고도 말했어요.”
어린 혜국은 가슴이 울렁울렁했지만 일타의 미소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진정되는 듯했다. 혜국은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똘망똘망하게 생겼다만 절은 힘든 곳이다. 힘들어도 너 안 울 자신 있느냐.”
일타의 말에 그만 어린 혜국은 울어버렸다. 일타가 이 말을 물었던 것은 자신이 행자시절을 보내는 동안 은사 고경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거나 부모가 몹시 그리워서 통도사 개울로 내려가 몰래 울었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거 봐라.”
일타는 다시 골방으로 들어가 찰떡을 내왔다.
“배가 고플 것이다. 이 떡을 먹고 행자실에 가 있거라.”
어린 혜국은 울음을 삼키듯 떡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는 밖으로 나왔다. 일타의 따뜻한 음성이 귀를 간질이는 듯했다. 행자실에는 혜국보다 한 살 더 많은 행자가 있었는데, 그 행자가 저녁공양이 끝난 뒤 ‘큰스님이 퇴설당에서 부르신다’고 알려왔다.
일타는 또 어린 혜국에게 다짐이이라도 받듯 물었다.
“너 안 울 자신 있어, 없어.”
혜국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 같았으므로 어금니를 물었다 놓으며 대답했다. 일타의 자상함에 용기가 불끈 솟구쳤던 것이다.
“안 울겠습니다.”
“너 울면 집에 간다. 울지 마라.”
그때 일타는 어린 혜국에게 『반야심경』을 외우게 했다.
“이걸 자꾸 외워야 어머니 생각도 안 나고, 아버지 생각도 안 난다.”
혜국은 외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일타가 외우라고 한 것은 무엇이든 밤을 새워 외웠다. 칭찬도 받은 겸 부모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일타는 무심히 던진 말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어디까지 외웠어.”
“마지막 두 장 남았어요.”
“너 다른 절에 있었어, 없었어.”
“큰스님, 이곳이 처음이에요.”
“빨리도 외우는구나.”
일타는 어린 혜국이 숙제를 다 외워 바칠 때마다 당시에 귀했던 과자를 꺼내와 주었다. 사탕 맛에 재미를 붙인 혜국은 나무하러 산에 가서도 지게를 두드리며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하고 『천수경』을 외웠다.
정찬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