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잎·서른 여덟
참된 길동무
Your Best Friend and other essays
웨라삐띠야 지음
M.B. Werapitiya
서형석 옮김
(Bodhi Leaves·B90)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 차례
참된 길동무
진리의 나무
볼줄 아는 사람의 눈
아버지의 유산
향상의 길잡이
인생이라는 컴퓨터
지혜의 길
이 책은 고요한 소리 역경원에서 이루어진
2001 신사년 우란분절 삼칠일기도에 동참하신 분들의
성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참된 길동무
부처님께서 석 달 뒤에는 열반에 드시겠다고 밝히시자 수석 시자인 아난다는 승단을 수호하고 이끌어 갈 후계자를 지명해달라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당신으로서는 고(苦)를 끝내기 위해 오직 스스로에게 의지해 왔을 뿐이기 때문에 누가 승단을 이끌어나가는가 하는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마음을 잘 방호하여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각자 스스로 해야 할 책무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따라서 밖에서 의지처를 찾지 말고
그대 스스로가 그대의 섬이 되고 의지처가 되도록 하여라.
법이 그대의 의지처이지 달리 딴 의지처가 있을 수 없느니라.
이렇듯 법이란 마음[意]1) 바로 그것이지 달리 어디에 감춰져 있는 비밀스럽고 심오한 그 무엇은 아니며, 미래의 어느 날 인류를 위해 저 높은 하늘 꼭대기에 갈무리되어 있는 행복 같은 아득하고 멀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욕망, 갈구, 승리, 패배, 믿음과 신념, 다시 말해 상(想)과 수(受)의 전 영역이 모두 우리의 생각[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생각이 지어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입안하고 시작하게 만드는 이 마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마음을 어떻게 써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주인이 되는 길을 걸을 것인지 노예가 되는 길을 걸을 것인지, 죄 없는 사람이 될 것인지 죄 많은 사람이 될 것인지, 구원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저주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인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인지, 그 선택은 각자 개인의 몫입니다. 긍정적 사고는 정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가장 믿을 수 있는 처방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긍정적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마음은 방심하지 않고 성실한 가운데 다섯 감각기관과 여섯 번째로 뜻[意]이라는 이 여섯 감각기능을 잘 제어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이런 마음은 원만하고 또 각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경계들을 정확한 관점에서 파악해 내는 명징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색입니다. 반대로 부정적 사고는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장애가 되는 마음, 즉 관능적 욕망, 걱정, 게으름과 둔함, 안절부절못함 그리고 의심에 의해서 야기되는데 이것은 이미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무력(無力), 혼란, 무질서를 조장합니다.
당신의 본래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 그림자 같아서 당신의 가장 좋은 벗이라 할만합니다. 도덕성, 공정성, 정의로움을 굳건하게 수호해주는 것이 바로 그 본래 마음이니까요. 가령 당신이 자유와 행복과 평화를 찾기 위해 소송을 건다면 그 심리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법정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라는 법정일 것입니다. 그 법정이 깨끗하여 공정할 것인지 불순하여 불공정할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남을 순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눈에 먼지가 적게 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만큼 적은 수에 불과한데 반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심사 경책 받을 생각은 않고 무명의 잿더미에 파묻힌 채 신음하며 만사가 성가실 따름이요 인생은 고문실 같다고 불평만 해대고 있습니다. 세상 소식들이란 하나같이 인간을 인간이하로 끌어내리는 뉴스로 꽉 차있는 것을 보십시오. 어찌 사람의 세상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막히는 사태들, 그것도 전지구적 범위로 거창하게 벌어지고 있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인간답지 못한 짓들, 기본 인권을 가차없이 유린하는 따위의 소식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습니까. 눈만 뜨면 인류를 전멸시킬 새로운 방법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접해야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생각을 잘못해도 너무나 잘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제 본 마음을 살지 않고 온갖 광기에 팔려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탓하지 않고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탓하려면 자신을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바깥세계에만 정신을 팔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면을 주시함으로써 자기자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순간을 두고 명멸하는 것이며, 변화무쌍한 것이며, 지키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며 부처님께서 비유하셨듯이 바로 물에서 건져내 땅 위에 던져놓은 물고기 같이 팔딱거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칩시다. 가해자는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도 마음의 상처는 당신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는 거의 성격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압도적 강도로 분출하게 되는 경우마저 없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당신의 관심을 사로잡는 어떤 것을 보았다고 칩시다. 당신의 마음은 즉각 숙달된 사진사에다 재판사를 겸한 솜씨로 그 대상에다 초감도(超感度)의 렌즈를 들이대어 온갖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대고 다시 그것을 당신의 정신이라는 암실에서 현상·인화·확대해버립니다. 사실 우리의 육근(六根)은 자극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자극 정도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는 술이나 약물 등을 써서 자극 강도를 높입니다. 이런 짓이 자제되지 않고 계속되어 인간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사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소중하게 다룸으로써 자기를 스스로 방호합니다. 감관이 항상 제어되어 있고, 자만심을 소멸시키고, 마음의 때(kilesa)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마음과 말과 행동[心·口·身]의 삼행이 고요하며, 늘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고, 완벽하게 평화롭고, 중도를 잘 견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살펴서 탐욕을 걷어내라.
배의 바닥에 괸 물을 퍼내듯 욕망을 버려라.
거센 물결을 넘어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라.
진리의 나무
웨삭카 축일에 부쳐서
연등불[燃燈佛]의 법(法)이 행해지던 시대에(지금은 석가모니 불법(佛法)의 시대임) 고행자 수메다는 아라한이 되기에 필요한 모든 덕성을 갖추고서도 아라한이 되기를 접어두고 기어코 부처가 되어서 우리 모두가 이 생의 고해를 건너도록 도와주고자 마음먹고 성불을 향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기 무수한 세월, 마침내 그분은 생래의 대원을 성취할 모든 가능성을 구족한 채 바로 오늘, 웨삭카 축일에 룸비니의 사라수 아래에서 싯닷타 태자로 윤회의 마지막 몸을 나투셨습니다. 그분은 왕위를 계승할 몸인지라 예술·학문·통치술 등 제반 공부를 빠짐없이 배우고 연마했지만, 바깥 세계와 접촉하면 할수록 그 세계의 비애·슬픔·회한이 점점 더 견딜 수 없도록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남들을 지배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조복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고(苦)의 일어남, 그 원인[集], 그 그침[滅], 그침에 이르는 길[道]을 발견하고자 출가를 단행하셨습니다.
그분은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세상에 알려져 있는 공부길은 모두 애써 힘차게 수련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부들은 각기 나름대로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분께서는 새로운 길을 탐색하기로 결심하고 호흡챙김을 시작으로 하여 ‘중도(中道)’를 추구한 결과 마침내 무명의 장벽을 깨트릴 수 있었습니다. 유사이래 탐·진·치의 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해 그처럼 오랫동안 용감하고 끈기있게 싸운 사람이 그분 말고 또 있을까요. 바로 오늘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한 인간이 기어코 노·병·사를 이겨내고 완전히 깨달은 분, 부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해탈의 향기로 가득 밴 한마디 한마디로 거룩한 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떤 계급에 속하든, 어떤 생활신조를 지니고 있든, 또 사회적 지위가 여하하든 간에 맹목적으로 사물을 편견에서만 보지 않고 검토 연구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각자 노력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아라한과를 성취하기도 했고 예류과에 들기도 했으며, 이도 저도 못 이룬 사람일지라도 최소한 올바른 길을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는 있었습니다. 구경의 목표를 추구하고자 결의한 사람들을 돕고, 여느 사람들의 정신적 욕구에 부응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래의 순수성 그대로 보호·보존하기 위해 승가라는 고귀한 단체가 창설되었습니다. 45년간에 걸친 전법활동을 통해 법의 광휘는 당시 널리널리 퍼져갔으며 자·비·희·사의 보편타당한 원리를 통해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또 고결한 수준으로 끌어 올려주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오직 각자 자기자신에 의지할 것과 정진 노력하여 스스로를 구원해 낼 것을 간곡히 타이르시며, 당신의 감관기능을 완벽하게 통어한 가운데 쿠시나라의 사라수 아래서 바로 오늘 반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시대를 안팎으로 얽어매고 있는 이 엉킴을 누가 풀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시자 부처님께서는 계가 확고하고 정념·정지를 닦는 현명한 사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법의 내용과 목표는 인식·느낌·생각을 곁들인 이 대여섯 자밖에 안 되는 몸뚱이를 실험실로 삼아 각자 내부에 윤리적 행위[戒], 정신적 훈련[定], 지혜[慧]를 조장하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미시적 관찰을 해 보면 이 몸과 마음은 실체가 없는 형성물에 불과하여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성질의 것임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이 생명이라는 것도 덧없고 불확실한 것이어서 현재 이 순간동안만 계속되다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짐으로써 일종의 순간들의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 감관이 고요해져서 사람들은 덜 고집스럽고 덜 탐욕스럽게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실 생명은 제 멋대로 흘러가는 성질 그대로 존재할 뿐인데도 우리는 무지한 탓으로 그 생명에 대해서 소유권 및 지배권을 주장하려드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재 이 순간이 당신에게, 나에게, 모든 유정(有情)에게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짐을 벗어버리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이 순간을 완전히 철저하게 살 때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 겹으로 축복받은 오늘, 부처님의 생애와 덕성을 꼼꼼히 되새겨보는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남들을 어떻게 살도록 도울까 하는 데 영감을 얻고자 합니다. 그분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어릴 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촌인 데와닷타가 활을 쏘아 떨어뜨린 새를 빼앗아서 상처를 치료해 준 이야기가 게송으로 읊어져 있습니다.
… 이봐 안돼! 그 새는 내 것이야, 자비의 고귀한 힘으로내 것임을 주장할 수 있는 수많은 것 중 첫 번째 거야.
그리고 구도자 시절에 수자타라는 여성을 만났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가히 여성다움의 완벽한 구현이라 할만하였는데,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는 남편과 자식, 친구, 친척과 하인들에게 해야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자, 그분께서는 찬동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에게서 아직도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겠노라.
여기서 따뜻한 인간관계가 인류를 유지시켜 준다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신 후, 대자대비하신 그분께서는 하루 중 2시간만 당신의 휴식에 쓰시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다른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할애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임종이 박두했음을 선포하셨을 때, 공부가 아직 어떤 ‘과(果)’도 이루지 못한 일부 스님들이 자기네는 슬픔에 잠겨있는데 담마라마 비구는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냉혹한 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담마라마에게 사실여부를 물어보셨습니다. 이에 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아라한과를 성취해야겠기에 지체없이 선정에 들었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를 모범으로 내세우셨습니다.
법을 공경하는 자,
여래를 가장 잘 공경하는 자이다.
오늘 웨삭카의 날, 우리는 마음속에서 증오와 탐욕, 미망과 환상을 모두 털어내버립시다. 그리고 사심 없이 일체를 껴안는 사랑인 자비로 우리 자신을, 우리 사회를, 우리 국가를 그리고 이 세계를 영구한 평화의 보금자리로 바꾸도록 도와나갑시다.
볼 줄 아는 사람의 눈
질병, 쇠약, 늙음 그리고 죽음이라는 공포의 그림자, 싫은 것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면 안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중한 재산과 떨어져야 한다는 절망적 비참함, 충족을 모르는 갈망에서 생겨나는 저 실망감,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비애와 슬픔, 회한으로 몰아갑니다. 보살께서는 그의 윤회를 마무리짓는 이 마지막 지상에서의 삶을 ‘중도’로 걸으면서 온 심혈을 기울여, 마음이라는 것의 성격과 내용을 알아내고자 애쓰셨습니다. 차차 정정(正定)과 정념(正念)이 그의 내면에서 자리잡아 익어감에 따라 그의 마음을 뒤덮고 있던 장막이 한꺼풀 한꺼풀씩 벗겨나갔고 마침내 그분은 완벽한 깨달음을 성취하여, 해탈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때 그분은 갖가지 지혜로 충만하시어 과거생을 되돌아본다거나 존재들이 다시 몸 받는 모습을 본다거나 사물의 지멸(止滅)을 환히 보시는 등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 특이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읊으셨습니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일로
안목이 내 안에서 생겨났고
지혜가 내 안에서 생겨났고
직관이 내 안에서 생겨났고
광명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탁월한 것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이후 그분께서는 무량한 자비심을 발하시어 인류가 윤리적 행위[戒], 정신적 수련[定], 지혜[慧]를 더욱 향상시키게끔 끝없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이룩된 숭고한 법(法) 덕분에 지금 여러분들이나 나나 탐·진·치를 멀리하고 정도를 밟으며 이 세상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법은 ‘아빠마아다(appamāda, 不放逸)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2) 이 말은 주의 깊음, 지속적 마음챙김, 방심하지 않고 경계함, 부지런함, 선(善)을 부지런히 행함 등을 아우르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주의 깊은 사람은 죽지 않지만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주의 깊음이란 정(定)을 닦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정 중에서도 어떤 정인가 하면 감관적 욕구들, 그릇된 견해들,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갈구, 무지 따위의 격렬한 흐름에 압도당해 꺾이는 일이 없을 정도의 정을 이룬 마음이라야 이런 주의 깊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정에 든 마음은 고요하고 때묻지 않고 조각나지 않고, 사물을 현명하게 바라볼 수 있으리만큼 활력으로 넘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에게 사물은 생겨났다 사라져 가는 본성을 가진 것이라는 것, 순간적 존재라는 것, 지속성을 지닌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많이 지닐수록 놓기가 더 어려운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정확하고 공평무사한 마음이어서 모든 살아있는 유정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지니게 되며 남들의 고통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시기심 따위와는 아예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감각기능과 관련된 생각들은 느낌·지각·기억 등을 만들어냅니다. 생각이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그래서 영속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인데도 이런저런 것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입니다. 실은 우리가 생각의 배후에 당연히 생각하는 당체가 있으려니 여기는 버릇 때문에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생각하는 자를 따로 설정해놓은 것도 기실 생각이 한 짓이니, 생각하는 자란 결국 생각 그 자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생각을 아는 것일 뿐이고 그러므로 삶의 목적은 그 생각이라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각자가 옳고 그른 것[善과 不善]을 스스로 깨달을 때 이 목적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른 것[不善]은 갚아야 할 빚을 불려 놓고
옳은 것[善]은 구출·방면시켜준다.
그른 길[不善]을 피하고 바른 길[善]을 따르라.
네 자신을 지배하라. 이것이 길[道]이다.
수바아라는 비구니가 숲 속에서 경행하고 있을 때, 한 멋쟁이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이 비구니야말로 완벽한 미인이라 생각하고 비단, 황금, 진주 목걸이, 호의호식 등등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구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바아가 물었습니다.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고 묘지에 파묻혀 무너져버리고 말 이 몸뚱아리 어디가 그다지도 좋아서 당신이 반하게 되었느냐고. 그 청년은 당신의 영양처럼 순하디순한 눈이 나의 열정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니는, 아, 이 눈, 이것은 여러 가지 물질이 모여진 가합물에 불과하건만 그대가 이것에 속았군요 하면서 눈알을 뽑아내어 건네주었습니다. 청년의 욕정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비구니에게 용서를 빌어마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생을 윤회하도록 만드는 추진력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수많은 꽃잎을 가진 연꽃이 그 꽃잎들을 펼치려고 기다리고 있듯이.
아버지의 유산
부처님께서 카필라바투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야소다라가 7살짜리 아들 라훌라에게 부처님을 가리키며 “저기 네 아버지가 계시다. 가서 너의 상속분을 달라고 해봐라.”고 일렀습니다. 어린 라훌라는 부처님에게서 풍기는 무언가 사람을 감복하게 만드는 힘에 이끌려 쫓아가서 부처님의 손을 잡고 따라 걸었습니다. 맑고 개운한 특이한 느낌을 맛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그늘에만 들어서도 이처럼 시원하군요.” 그는 행복에 겨워 어머니의 말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야 생각이 나서 어머니가 시킨 대로 요청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불멸의 상속, 당신 아들에게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지선지고한 사랑을 유산으로 주겠노라고 확약하셨습니다. 아들이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야소다라로서는 자신의 욕심이 라훌라로 하여금 백성들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출가하도록 만들게 될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이룩하신 더없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는, 물론 당신 내면에서 탐·진·치의 불길을 꺼버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남들에게도 당신과 같은 평화를 누리도록 이끄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고통,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인간답지 못한 짓들, 이 모두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려면 각자 자기 내면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의 모든 진행과정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파악해야만 합니다. 생각은 여섯 감각 기관에 대한 자극과 식(識)이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들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그런데 이들 기억들이란 것이 믿음, 가설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멋대로 가하는 첨삭, 수정, 명명 등으로 조정되어 실제로부터 멀어져 가공된 것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맛이 유난히 쓴 것으로 이름난 영국 엪섬 지방의 하얀 소금덩어리를 언뜻 달콤한 설탕으로 오인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생긴 것이 아닌 가공된 생각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되어 정신적 갈등과 불행을 일으킵니다.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은 우리가, 사실과 달리, 생각하고 경험하는 주체가 따로 있어서 그런 주체가 생각하고 경험한다고 믿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생각하는 주체가 따로 없고 생각만이 있을 뿐이요, 경험하는 주체가 따로 없고 경험만이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올바른 생각이 전개되는 과정을 간명하게 밝히신 법문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바히야 다루치리야라는 구도자에게 주신 매우 짧은 법문으로 그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볼 때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봄 그것일 뿐이요, 들을 때는 그것은 다만 소리인 것이요, 맛보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낄 때도 그것은 단순한 인식이요 느낌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인식하고 느끼려면 분산되지 않는 관심과 상당한 양의 주의집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우리의 마음은 잔류 기억과 망상 때문에 어지럽혀지지 않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최대의 기능을 발할 수 있게끔 명석하고 기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시간의 영역에 제약당하는 것이지만 생각의 지멸(止滅)은 마음을 무한대, 무시간의 상태로 활짝 열어 줍니다.
들뜨고 분주한 이 세상의 속성
고(苦)의 근저에 이것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불사(不死)의 평화에 깃든 마음의 평정을 얻으라.
자아는 잡다한 구성요소가 모인 무더기[五趣蘊]일 뿐이요
세계는 신기루처럼 공허한 것이다.
향상의 길잡이
믿음으로 윤회의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 인생이라는 큰바다를 건넌다.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모든 탐욕을 가라앉히고
지혜로 청정을 얻는다.
스라와스띠(사위성)의 백만장자인 수닷따가 절친한 친구인 라자가하(왕사성)의 백만장자를 방문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극진한 환대를 받았을텐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무언가 잔치준비 같은 것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다음날 부처님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린다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수닷따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환희심에 젖어 들었고 당장이라도 찾아가 뵈어야겠다는 욕망을 가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확인해 놓고서는 설레는 기대감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 날이 부윰해지자마자 길을 나섰습니다. 그에게 이 방문길은 여간 중대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확신감 때문에 으스스한 어두움을 겁내지 않고 자신감과 결단력을 가지고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충 목적한 곳에 거의 다 왔다싶었을 때 홀연 어떤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한눈에 저분이 틀림없는 부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나다를까 그분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닙니까. 그 순간 그의 가슴에는 형언할 길 없는 희열과 찬탄심이 일어났습니다. 수인사를 끝낸 후 그가 정중하게 이런 숲 속에서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는지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모든 욕망을 뿌리뽑아버린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어 완벽한 숙면을 취하게 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서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베풀어주셨는데 이 법문을 듣고서 그는 자아에 대한 집착심, 부처님과 그 법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의례의식의 효험을 믿음, 이 족쇄들을 부술 수 있었고 그래서 예류과를 성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성문(聲聞) 제자로 자처하게 된 수닷따는 부처님께 스라와스띠를 찾아주시도록 청했고 부처님께서는 이 초청을 수용하셨습니다. 수닷따는 스라와스띠로 돌아가자마자 제따 왕자 소유의 이름난 공원을 턱없이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사들여서 거기다 제따와나 정사(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과 그분의 승단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천 명의 승가 대중에게 음식과 약품, 의복·좌복·침구 등 일체 필수품을 공양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닷따, 아니 널리 행한 보시 행위 때문에 아나따삔디까[給孤獨長子]로 더 잘 알려진 이 인물은 마침내 부처님의 신도 중에 제일 가는 공덕주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후 무려 25번의 우안거를 이 제따와나 정사에서 결제하셨는데 그러다 보니 그곳은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일이 많이 펼쳐진 현장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방대한 경전 삼장(三藏)에 담겨진 많은 법문들이 설해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불·법·승 삼보에 돈독한 신심을 가진 순례자들은 제따와나 정사의 유적지를 방문하면 탐·진·치 삼독심을 이겨내신 분에게서 발산되는 미묘한 서기(瑞氣)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탐·진·치를 이겨내신 그 덕으로 우리들, 지금 여러분들과 내가 이처럼 해탈의 길을 마치 생득적 권리나 되는 양 당당히 걸을 수 있도록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정직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셨습니다. 소문이 자자하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믿어왔다는 이유로,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여긴다는 이유로, 형이상학적 논의나 사변의 귀결이라는 이유로, 자기 취향에 맞는다는 이유로, 권위있는 설이라는 이유로, 스승의 높은 성가(聲價)가 높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타이르셨습니다.3)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진리는 어디까지나 그 본인이 ‘지금 여기서’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에 의해 자기 실현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는 방법론적으로 볼 때 비판적 검증과 몸소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방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말씀까지도 하셨습니다. 불·법·승 삼보를 비방한다고 상심한다면 그것도 자신을 해치는 원인이 될 따름이며, 부처님께서 찬탄받는 그 덕성이 실제로 부처님께 있는지 확인도 않고 공연히 우쭐댄다면 이 역시 장애가 될 것이므로 수행자는 이런 일들을 피해야 한다고. 인천(人天)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는 인·천이 혹시 실수를 범하거나 잘못 착각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시어 이다지도 마음을 세심하게 써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사는 것이어야지 삶을 떠나고 그래서 공허·고독·좌절을 우리 자신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파악해내야 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실제와 비실제가 각각 분명해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것 그것은 실제이고,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신화요 허위입니다. 삶이 진리의 구현을 위한 산고(産苦)라는 사실은 고통에 지쳐버린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만 여여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때 비로소 사람은 부처님께서 대각을 이루기 위해 취하셨듯이 윤리적 행위, 정신적 훈련, 지혜로 모든 도전에 대응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당신이 인생을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인생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컴퓨터
물질과 마음의 영역에 작용하는 질서는, 물질계의 무기적 질서, 생물의 유기적 질서, 행위와 과보라는 인과의 질서, 윤리규범의 질서, 마음 또는 정신의 질서 등 5가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완벽한 정밀성을 가지고 작용하며 그 어떤 창조자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전생과 금생에 자기가 지은 생각과 행위의 총화(總和)에 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만들고 부수고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 끊임없이 선업·악업·무기업4)을 유도해내는 그 마음이기에 밤낮없이 당신을 따라다니는 행·불행의 건축가도 오직 당신 자신일 뿐입니다.
마침 요즘처럼 과학기술시대를 만난 덕분에 우리는 컴퓨터가 작동하는 모습도 보고 그 원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컴퓨터와 사람이 다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어서 우리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하나의 컴퓨터이자 프로그램 작성자가 되는 셈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이 지은 생각과 행동[行業]이 자신이라는 컴퓨터에 입력되면 새로운 매순간이 그 안에 결과[果報]를 담아냅니다.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작동을 위해 따로 시간이 소요될 필요도 없습니다.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리고 시들어죽는 그 모든 가능성은 씨앗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남이 있는 곳에는 쇠약, 늙음, 죽음이 있게 마련이어서 삶은 전적으로 내부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둘 뿐이기에 이렇게 되면 자기의 구원을 실현시켜줄 중재자를 바깥에서 구한다는 것은 순전한 억측에서 저지르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삶이라는 과정은 집착[取]이 있는 한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의 연결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유지에 호흡이 필요하듯, 삶으로부터 극대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10가지의 바라밀 즉, 베품(보시), 계율을 지킴(지계), 비이기적이 됨(출리), 지혜(반야), 정진, 인욕, 진실, 결의, 자비, 평온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살(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시절)은 당신의 마지막 생애인 이번 삶에서, 부처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이 10가지 자질들을 더욱더 높은 수준으로 닦아감으로서 최고최대의 경지로 완성시켰습니다. 무명에서 깨어나시자 그분은 꿈이나 환상에서가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통해 극복해낸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탁월한 역량으로 삶의 비밀 전반을 밝혀내셨습니다. 자아의 환상에서 헤어나도록 요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도록 요구하며, 갈애를 팽개치고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이 법(진리)은 인생의 대로나 소로를 걸으면서 방향을 잃고 천상, 지옥 또는 그 중간의 세계들(아수라·아귀·축생 등)을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인생의 목적은 사람답게 사는 데 있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거나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우리 자신이 초라해지고 견뎌내기 어렵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실제의 세계는 우리가 부지런히 행복을 일구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인데도 우리는 습관에 갇혀서 생각놀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날의 삶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긴장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려고만 듭니다. 생각놀음은 마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비실제적 성격 때문에 우리를 오도할 수밖에 없고 괜히 온갖 망상의 태풍 속으로 몰아넣어 참담한 파괴를 맛보게 합니다. 반면에 마음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기에 행복을 지속시킬 뿐 아니라 온갖 활동을 통해 삶을 떠받치고 지탱해냅니다. 이처럼 실제와 비실제의 차이는 큰 것이며, 그 차이를 구분해내어서 우리가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을 살도록 만드는 기술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이 법의 목적이요 존재이유라 할 것입니다. 이 기술은 4염처, 즉 몸·느낌·마음의 활동·정신적 대상 또는 정신의 내용이라는 4가지 염처를 챙김으로써 얻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 스님들은 숲 속의 불편한 처소에 머물면서 하루에 한끼 그것도 검소한 식사로 겨우 몸을 지탱할 따름인데도 그 얼굴은 오히려 최고신들을 능가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현재의 순간을 살면서 모든 행동을 마음챙겨 행하기에 그처럼 환희와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아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인데도 이 현재의 순간을 헛되게 과거의 잿더미 속을 또는 미래의 꿈속을 사는 데에 써버리는 사람들은 혈액 순환이 불순해져서 안색도 나빠지는 것입니다. 명상은 이처럼 에너지를 증대시켜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활력이 넘치게 만드는 삶의 요체입니다.
명상하고 있는 마음은, 낮 동안에는 삶이라는 일체의 움직임을 연기적으로 주시하며 바라볼 따름이다.
말없이, 논평없이, 의견세움 없이 보고들을 따름이다.
그리고 밤에는 모든 유기적 조직이 쉬고 있을 때 명상하고 있는 마음은 꿈꾸지 않느니,
낮 동안 내내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길
옛날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았던 고행자 칸티와다(인욕설자)가 깔라부 왕의 청을 받아들여 왕가의 원림(園林)에서 우안거를 나며 인욕의 공덕을 설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어떤 행사 때문에 이 원림을 방문했습니다. 값진 술과 음식으로 배를 불린 왕은 풍악을 즐기다가 한 궁녀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왕의 낮잠을 편안히 해주려는 배려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물러나 고행자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혼자 있기가 무료해진 궁녀는 이참에 이득을 챙겨볼 궁리를 내어 다리를 갑자기 움직여서 왕이 놀라 깨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깔라부 왕은 측근 신하들이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수상하여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궁녀는 자기 혼자 왕에게 충실하여 남아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고행자와 어울리기 위해 가버렸다며, 그들에게는 왕보다 고행자가 더 소중한가보다고 꾀어바쳤습니다. 왕의 권위를 모독했다는 무고에 화가 동해버린 깔라부 왕은 서둘러서 고행자가 법회를 열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고행자의 법문에 몰두해 있었던 청중들은 왕이 나타난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것이 왕의 모욕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말았습니다.
깔라부 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분풀이로 고행자를 심하게 두들겨 패도록 했습니다. 맞아서 터지고 피가 낭자하면서도 인욕이 지금도 유지되느냐는 왕의 질문에 고행자는 조금도 변함이 없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고행자의 팔을 자르라고 했고 끝내는 사지를 다 잘라버려 몸뚱아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고행자의 인욕심이 흐트러져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왕은 숨이 넘어가고 있는 그에게 인욕심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고행자가 인욕심은 자기 마음속에 지속되고 있다고 대답하자 참담해지진 왕은 더욱 분통이 터져 그를 세차게 걷어차 버렸습니다. 사지가 절단된 몸뚱이는 균형을 잃고 땅에 넘어졌고 대지는 그를 받아들여 흙으로 감쌌습니다.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기만 하던 대신들은 고행자에게 왕이 삼보를 훼손하는 큰 죄를 짓긴 했지만 술에 취해 잠시 정신을 잃고 한 짓이니 부디 왕과 이 나라를 저주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고행자는 용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인욕을 시험하여 힘을 최고도로까지 높여주어서 인욕바라밀의 최고의 성취를 이루게 도와주었다면서 오히려 깔라부 왕의 행위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고행자는 바로 부처 되기를 서원하고 정진하여마지 않던 석가모니의 어느 전신이었습니다.
왕은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깔라부 왕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사하였지만 그러한 면책특권이 없는 우리들로서는 결과가 두려워서도 사형(私刑)을 가하는 짓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탐욕과 증오와 미혹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또 뒤흔들고 있는 점에서 보면 우리 역시 깔라부 왕과 같이 될 가능성은 매우 짙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행위를 놓고 반드시 그 행위자를 떠올리며 경험을 놓고 경험자를 연상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행위의 주체자·경험자이기는커녕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여 매 순간 명멸하는 느낌[受]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된 합성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정말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 합성물을 두고 좋다 싫다할 것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탐욕과 증오 따위가 정작 우리가 싫어하고 피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리 싫게 보이더라도 자·비·희·사의 마음만 닦으면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며 지금 당장 행복으로 바뀌지 않더라도 계를 닦고 지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길입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뗏목을 비유로 들어 법을 설하였다.
뗏목은 우리가 고해를 건너는 데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를 붙들어놓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비구들이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선한 것[善法]마저도 놓아버릴텐데
하물며 나쁜 것[不善法]이야 일러 무엇하랴.
이 우화로 미루어 보아 부처님께서는 매우 실용주의적인 스승이셔서 사람에게 오로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만 가르치셨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The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 O. 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 잎 38
참된 길동무
2001년 11월 20일 1판1쇄 인쇄
2001년 11월 30일 1판1쇄 발행
지은이 M.B.웨라삐띠야
옮긴이 서형석
펴낸이 한기호
펴낸곳 (사) 고요한소리
로고 이철수
본문 및 표지 디자인 (주)끄레 어소시에이츠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우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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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부 053)425-4035 부산지부 051)513-6650
출판등록 제1-879호 1989.2.18
값 500 원
ISBN 89-85186-61-2 02220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해
1)『법구경』 첫 구절 참조. 필자는 현재 남방의 관례에 따라 심(心)·의(意)·식(識)을 같은 것으로 보고 두루뭉수리로 ‘mind’라고 쓰고 있다. 본문으로
2) 보리수 잎·스물 넷, ‘정근(精勤)’ 참조 본문으로
3) 법륜·둘, ‘구도의 마음, 자유: 칼라마 경’ 참조. 본문으로
4) 무기업(無記業): 선(善)도 불선(不善)도 아니며 과보를 가져오지 않는 업. 본문으로
보리수3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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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문 잘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전향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