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환(李民寏) : 1573년(선조6,癸酉)~1649년(인조27,己丑).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증조부 휘 세헌(世憲), 조부 휘 여해(汝諧), 외조부는 평산신씨로 인의(引儀) 휘 신권(申權), 처부(妻父) 휘 홍귀상(洪龜祥), 관찰사 부 휘 광준(光俊)의 아들이시며,
1597년(선조30,丁酉)에 정시문과(庭試文科) 을과에 급제하신 형(兄) 휘 민성(民宬)의 아우로,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셨다.
1600년(선조33,庚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셨다. 그뒤 검열․정언․병조좌랑을 거치시고,
1603년(선조36,癸卯)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가서 수령의 비행과 민정을 살폈으며,
1608년(선조41,戊申) 영천군수로 부임하셨다.
1618년(광해군10,戊午)명나라에서 군원을 요청하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여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셨다. 17개월 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시고,
1620년(광해군12,庚申)에 석방되시어,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사원을 가진 박엽(朴燁)의 무고로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생활을 하시다가,
1623년(인조1,癸亥) 인조반정으로 서울로 올라 오셨다. 이괄(李适)의 난 때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셨고,
1636년(인조14,丙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하셨다. 난이 끝난 뒤, 군자감정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오르셨고, 이어 동래부사가 되시어 번거로운 폐단을 근절하셨다.
그뒤 판결사․호조참의․형조참판에 임명되셨다가,
1645년(인조23,乙酉)에 경주부윤으로 나가셨다.
저서로는《건주견문록 建州見聞錄》․《책중일록(柵中日錄)》․《자암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시고, 시호는 충간(忠簡)이시다.
【참고문헌】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별집제18권 변어전고(邊?典故) 북쪽 변방, 속잡록1(續雜錄一)무오년 광해군 11년(1618년), 속잡록1(續雜錄一) 무오년 광해군 11년(1618년), 속잡록1(續雜錄一) 경신년 광해군 13년(1620년), 성호사설제2권 천지문(天地門) 서도관액(西道關?), 성호사설제4권 만물문(萬物門) 인마일심(人馬一心), 성호사설제10권 인사문(人事門) 여가오량(閭家五梁), 성호사설제21권 경사문(經史門) 만력무오지패(萬曆戊午之敗), 응천일록 2(凝川日錄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