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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사 가는 길 포도밭
흥교사 앞에서 지평선 끝에 종남산 봉우리들이 안개로 거의 보이지를 않는다
흥교사 문 앞의 홍시, 원측 스님이 고국 신라 계림에서 온 손자녀석들을 반기며 건네는 선물이다.
장경루
가운데 현장법사 탑 좌에 원측 스님, 우에 규기 스님 탑
629년, 28세에 국경을 탈출하여 인도로 구법여행을 결행하여 당시 학생 수 1만명의 최대의 불교대학인 나란다 대학에서
106세의 총장인 쉴라바드라 밑에서 불교의 중요한 교의를 공부하였다. 17년을 머문 뒤 645년에 귀국하여 75개의 다른 문헌과 함께 <성유식론>을 번역하였다. 법상종의 교의는 제자 규기와 원측에 의해 설립되고 체계화 되었다. 원측의 실력이 규기를 능가하였다고 한다.
원측 스님탑(測師塔, 스승님의 줄임말이 스님!)
원측스님 얼굴을 돼지처럼 험상 궂게 빚어 놓았다. 중국인의 텃새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측 스님(613-696)
속명 문아(文雅). 자 원측. 신라의 왕손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627년(진평왕 49) 당(唐)나라에 건너가 법상(法常) ·승변(僧辨)에게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다. 중국어 ·산스크리트에 능통하여 당 태종(太宗)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고 원법사(元法寺)에서 《비담론(毘曇論》 《성실론(成實論)》 《구사론(俱舍論)》 등을 탐구, 고금의 장 ·소(章疏)에 정통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인도의 승려 지바하라(地婆訶羅)가 가져온 산스크리트본(本)의 18부 34권의 경전 번역에 참여하였고, 693년(효소왕 2)에는 인도의 보리류지(菩提流志)가 가져온 산스크리트본 《보우경(普雨經)》을, 695년에는 우전국(于闐 國)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가져온 《화엄경(華嚴經)》을 번역하였다. 당시 정통파로 자처하던 규기(窺基) ·자은파(慈恩派) 등과 경전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가 대립하였었는데, 규기나 자은파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서 죽어 지금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셴닝현[咸寧縣] 반천(樊川) 흥교사(興敎寺)에 원측의 탑이 있다. 저서에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인왕경소(仁王經疏)》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유식이십론소(唯識二十論疏)》 《유가론소(喩伽論疏)》 《인명정리문론소(因明正理門論疏)》 《반야바라밀다심경찬(般若波羅蜜多心經贊)》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구사론석송초(俱舍論釋頌鈔) 》 등 논소가 많다.
당나라로 건너가 특히 유식학(唯識學)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던 신라의 고승(高僧). 신라의 왕손으로 출생한 원측은 일찍이 출가하고 15세에 당나라로 가 법상(法常)과 승변(僧辨) 밑에서 유식(唯識) 등 교학을 힘써 연구하였다. 현장(玄奬, 600~664)이 인도로부터 돌아온 후로는 그에게도 사사했다. 그는 내내 당에 머물면서 인도의 승(僧) 지파사라(地婆詞羅)와 함께 밀엄경(密嚴經)을 번역하는 등 역경(譯經) 사업에도 종사하고 또 저술도 하여 유식학자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현장 밑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인 중국승 자은종(慈恩宗)의 규기(窺基, 632~682)와 그 후계자들을 가리켜 자은학파(慈恩學派)라 부르는 데 대해 원측과 그 후계자들을 서명학파(西明學派)라 했는데, 이는 그들이 서명사(西明寺)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측이 『해심밀경』(解深密經)ㆍ『성유식론』(成唯識論)ㆍ『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을 강의하거나 또는 저술함에 있어서 인도의 호법(護法, 530~561)이 유식학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곳을 지적하는 한편, 안혜(安慧, 470~550)와 그 밖의 인도 고대 불교 학자들의 유식론에도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로써 오로지 호법의 설(說)을 고집하는 규기와 그 후계자 혜소(慧沼, 640~714) 등 법상종(法相宗)의 자은학파는 스스로를 정통파로 자처하고 적의를 품어 서명학파를 이단시하고 배척했다.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등 모두 23부 108권 가량에 이르렀던 원측의 저서가 거의 없어지고 다만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등 3부만이 전해져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서명학파는 정통파로 자처한 자은학파보다 오히려 현장의 설(說)에 일치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유식사상 그 자체를 편파성 없이 공정하게 전한 학파였다. 한편 730년대에 서명사에서 수학한 담광(曇曠)이 원측의 『해심밀경소』 10권을 가지고 서북방 국경지대인 돈황(敦煌)으로 갔는데, 그것이 뒤에 티벳어로 번역되어 중국 본토에서 부진했던 원측의 유식사상은 돈황에게 크게 빛을 보게 되었다.
대개 유식사상이라 함은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 및 『성유식론』 등에 담겨진 일련의 사상체계로서, 객관의 외계는 다같이 우리 마음이 비추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마음의 구조를 설명해 가는 것인데, 여기서 식(識, vijnana)은 바로 대상을 인식하며 식별하는 마음의 작용 또는 그 본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법상종에서는 그 마음의 작용과 구조를, 감각 기관을 주관하는 '6식'(六識 : 안식眼識ㆍ이익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 생각하며 헤아리는 작용을 그 본질로 하는 말즉식(末卽識), 최후의 근본식(識)으로서 모든 경험과 기억을 잠재적인 인상으로 간직하는 아라야식(阿賴耶識) 등 팔식(八識)으로 나눈다.
또 6식사상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질과 존재의 방식을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ㆍ의타기성(依他起性)ㆍ원성실성(圓成實性)의 3자성(三自性)으로 나누기도 하고, 그 개념을 달리하여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선의무자성(膳義無自性)의 3무성(三無性)으로도 나눈다. 그런데 자은학파에서는 그 본질(性)과 현상(相)을 너무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음에 반해, 원측은 그 성(性)과 상(相)을 서로 조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또 원측은 삼시교판설(三時敎判說)에 대해서도 그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자은학파에서는 모든 존재의 구성요소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설파한 아함경(阿含經)과 같은 가르침은 제1시교(第一時敎)이며, 제2시교(第二時敎)는 반야경(般若經)과 같은 가르침으로 이는 모든 존재가 공(空)이라고 하여 단순히 부정만 가르친 것이고, 이어서 중도(中途)를 긍정적으로 설파한 『해심밀경』의 가르침과 같은 것을 가장 으뜸된 가르침이라 하여 제3시교(第三時敎)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원측은 포괄적인 입장에서 반야경의 뜻은 『해심밀경』에서의 3무성을 말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본 것이다.
원측의 독자적인 견해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오종성(五種性)에 관한 해석이다. 자은학파에서는 중생의 자질로서 정성보살(定性菩薩)ㆍ정성연각(定性緣覺)ㆍ정성성문(定性聲聞)ㆍ부정종성(不定種性)ㆍ무종성(無種性) 등의 다섯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무종성은 물론 정성연각과 정성성문도 다같이 영원히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원측은 『해심밀경』에서 정성연각과 정성성문을 열거한 것은 하나의 방편으로써 말한 것일 뿐 그들 정성연각과 정성성문이 결정적으로 영원히 생불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해심밀경』을 화엄경이나 법화경 등 일승(一乘)사상과 조화시킨 것으로서, 모든 학설이 화쟁(和諍)하던 당시 신라 불교학계의 학풍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대주(大周) 서명사(西明寺) 옛 대덕 원측 법사 불사리탑 비명 및 그 서문
공사(貢士) 송복(宋復) 짓고 더불어 씀
법사의 휘는 문아(文雅)이고 자는 원측(圓測)이며 신라국왕의 후손이다. 삼장을 배우기 위하여 15세에 출가하여, 처음에 법상(法常)과 승변(僧辯) 두 스님에게 학업을 청하였는데 강론을 듣자 천성이 총명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탁월하여 비록 수천의 말을 들어도 마음에 잊지 않고 핵심을 바르게 꿰뚫었다.
당태종 문 황제가 도첩을 주어 승려로 삼아서 서울의 원법사(元法寺)로 가서 <<비담론(毗曇論-비석에는 비운론(毗雲論)>>, <<성율식론(成唯識論)>>, <<구사론(俱舍論)>>, <<파사론(婆沙論)>> 등을 열람하고 고금의 장소(章疎)에 정통하지 않음이 없어서 이름이 자자하게 알려졌다.
삼장법사 현장(玄奘) 스님께서 인도에서 돌아오실 무렵 한 바라문이 과일을 주어 가슴 가득 품는 꿈을 꾸었다. 스님이 불법을 깨닫고 응험함이 일찍이 수승하여서 현장 스님이 한 번 보고 스님과 계합하여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현장 스님이 스님에게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유식론>> 등의 논서에 소를 붙이기를 명하셨다. 아울러 번역한 대소승의 경전과 논서에 밝은 것이 마치 나면서부터 아는 것 같았다.
뒤에 서명사 대덕으로 임명 받아서 <<성유식론소>> 10권,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疎)>> 10권, <<인왕경소(仁王經疎)>> 3권과 또한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관소연론觀所緣論)>>, <<반야심경>>, <<무량의경(無量義經)>> 등에 주석을 달아서 불전의 숨겨진 뜻을 드러내니 당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장 법사를 도와서 불법이 동쪽(중국, 신라,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으로 흘러 크게 일어나는 것이 무궁하도록 하는 사람이었다.
스님의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로 가서 머물렀다. 또한 절에서 30리 떨어진 한 곳에서 8년을 뜻을 고요하게 하며 머무셨다. 서명사 스님들이 스님을 초청하여, <<성유식론>>을 강의하였는데 당시에 중천축국(중부 인도)의 삼장법사 지바가라(地婆訶羅)스님께서 서울, 장안성으로 와서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대덕 다섯 사람과 더불어 <<밀엄경(密嚴經)>> 등의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는데, 스님은 그들 중 으뜸의 자리였다.
또한 동쪽 도읍, 낙양성으로 가시어 <<신화엄경(新華嚴經)>>을 강의하였는데 마치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하였다. 실로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 측천무후11) 7월 22일이었다. 스님의 춘추가 84세였고, 그 달 25일에 용문(龍門) 향산사(香山寺) 북쪽 계곡에서 다비를 하고, 곧 백탑(白塔)을 서울에 세웠다.
스님의 제자 서명사 주지 자선(慈善) 법사, 대천복사(大薦福寺) 대덕 승장(勝莊) 법사 등이 당시에 이미 스님의 다례(茶禮)가 이어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향산사에 장례를 하고 스님의 몸 한 마디를 보배함과 석함에 성대하게 모시어 따로 종남산 풍덕사(豊德寺) 동쪽 고개 위에 장례하였다. 스님이 일찍이 예전에 노니시던 곳으로 묘 위에 탑을 세웠고, 탑 기단에 스님의 사리 49알을 봉안하였지만, 지금은 그곳으로 가는 길이 거의 막혔다. 절벽이 깎아질렀고 숲이 빽빽하게 우거졌으며 험준하여 인적이 드물다.
빛이 묻히고 덕이 가리어 누가 알고 스님께 우러러 귀의할 것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동주(同州) 용흥사(龍興寺) 인왕원(仁王院) 광월(廣越) 스님께서 지극한 발원을 이루시니, 송 정화(政和) 5년(1115) 4월 8일에 곧 풍덕사의 동쪽 고개 사리탑 전에 나아가서 공양을 올리고 모든 불사리를 흥교사(興敎寺) 현장 법사의 탑 왼쪽에 새 탑을 세워서 장례하였다.
탑의 규범은 규기(窺基) 스님의 것과 한 몸처럼 다름이 없게 하였다. 아울러 규기 스님의 탑이 낡아서 새롭게 하였으며 금륜(金輪, 상륜)을 올리고 보탁(寶鐸, 풍경)을 층마다 달아서 두 탑이 나란히 신기루처럼 이루어졌다. 금륜과 보탁 아래에 각기 넓은 처마를 두고 스님들의 신령스러운 상을 깊숙이 모셨다. 현장법사의 탑 좌우에 두 탑이 붙어 있어서 탑을 참배하러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사이에 우러르고 그리워하고 신심을 내게 한다. 탑 앞에 수헌전(修獻殿)을 창건하고 경찬식(慶贊式)을 하는 날이 임박하여 글 잘하는 사람을 구할 여가가 없다. 그래서 내가 바로 이 일에 대한 서문을 쓰고 이어서 비명(碑銘)을 쓴다.
비명은 이러하다.
貝葉西來 予其功大 불경이 서쪽에서 전래함에, 그 공이 크다.
敎流中區 予斯永賴 부처님 가르침 중국에 흘러듦에, 이에 길이 의존한다.
法匠有憑 予誠際會 불학의 종장(宗匠)에 기댈 수 있음에, 진실로 이해의 지평을 가진다.
香山迢遙 予閟幽宮 향산사가 멀고 멈에, 그윽한 불사리탑을 숨긴다.
豊德峻阻 予藏靈蹤 풍덕사가 험준함에, 영골(靈骨)을 갈무리 한다.
後人依歸 予何適從 후인이 귀의하려함에, 어디서 따라야 하나.
有越作緣 予神助力 세월을 초월하여 인연을 지음에, 천우신조 얻네.
雙塔屹立 予基是式 쌍탑이 높이 세워짊에, 규기 스님 탑이 법식이 되었네.
以祔奘公 予豈窮極 현장 법사와 함께 다례를 받음에, 어찌 다함이 있으리?
終南相高 予峻倚天 종남산 높은 모습, 험준하여 하늘에 기대네.
盛德巍然 予銘石鎸 성대한 덕이 높음에, 돌에 새기네.
來者瞻仰 予千萬年 탑을 찾는 이 우러러 봄이, 천만년일세.
중수(重修)현장법사탑 승 회안(懷安) 감사(監寺) 승 운강(雲江) 유나(維那) 승 보조(普潮)
주지(住持) 관구(管句) 승 도승(道勝) 지고(知庫) 승 보연(普演) 전좌(典座) 승 도량(道亮)
발연(發緣) 화주(華州) 단장(壇長) 승 덕언(德言) 조연(助緣) 승 홍준(洪俊)
번천(樊川) 신사(信士) 유민(劉閔) 등 명독진(鳴犢鎭) 신사(信士) 래사행(來士行) 등
이수창(李壽昌) 간(刊)
창수전탑(創修殿塔) 동주 용흥사 인왕원 강경론승(講經論僧) 광월(廣越)
대송(大宋) 정화(政和) 5년(1115) 세차 을미 11월 병인삭 19일 갑신 비석을 세움
원래 비석은 본래 송나라 때 새긴 것이다. <<함녕현지(咸寗志)>>에 이르기를, ‘장안성 남쪽 흥교사에 있다’고 하였다. 중화민국 경오년(1930)에 자교(子橋) 주(朱)공 경윤(慶潤)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방문하여 다시 오래 보지 않고 탑비를 얻어서 장안성 동쪽 외곽의 팔선암(八仙庵)으로 가져갔는데 빗돌을 부수어 3단으로 만들었다. 빗돌을 어루만지면서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자은사(慈恩寺)로 옮겨 세워 참된 발자취를 보존하게 하고, 옛 탁본 중에 좋은 것을 가지고 정밀하게 모각하여 따로 비석을 만들어서 탑 사이에 넣었으니 이 비석이다. 각수(刻手)가 원래 비석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털끝만치도 잃어버리지 않고 날렵하고 오묘하게 새겨내었다. 원측 스님의 서명사 법상종이 이 비석으로 홀연히 그 옛 모습을 대략 되찾으니 비석의 문장과 글씨만이 보배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이 해 10월 장안사람 송련규(宋聯?奎) 적음.
관중(關中)사람 곽시안(郭市安) 새김.
( 원측 스님 입적한 뒤 1318년, 송복이 비문을 짓고 스님의 사리탑을 종남산 풍덕사에서 옮겨 이곳에 모신 지 꼭 900년이 되었다. 2014년 1월 25일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아서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감격에 젖어 김희준 삼가 옮겨봅니다.)
우리나라도 흥교사와 뭔가 우호관계를 맺으면 좋겠다.
빨리어로 마하망갈라수따, 한문으로 불설길상경, 우리말로 최상의 행복경(행복경).
한국불자들이 애송하는 반야심경이 산스크리트어에서 현장법사가 한역한 것이다.
중국역경사에서 구마라즙이 구역이라면 현장법사는 신역이다.
빨리어 초기불교경전의 경장인 4부(맛지마, 쌍윳따, 디가, 앙굿따라) 니까야가 최근에
초기불전연구원 각묵, 대림 스님에 의해 한글로 직역되어 있다.
산스크리트어 초기불교경전의 경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아함경인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도 물론 들어있다.
그런데, 흥교사 벽에 놀랍게도 빨리어에서 직역한 것으로만 접해온
<최상의 행복경>이 붓글씨로 종남산 심일 스님이
쓰서 이렇게 걸어두고 있지 않은가!!!
과연 현장법사의 탑이 있는 흥교사 답다.
이번 중국문화답사여행에서 맛 보는 큰 기쁨이고, 선물이고, 축복이다.
이 경을 날마다 독송하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최상의 행복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 사위성의 제따숲에 있는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셨다. 어느 날 깊은 밤 한 천신이 제따숲을 두루 비추며 나타났다. 세존께 다가와서 인사를 한 다음 한 켠에 서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1. 수많은 천신들과 인간세상은
행복을 소망하고 축복원하니
최상의 행복한삶 설하옵소서
2. 우매한 사람들과 사귀지않고
현명한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훌륭한 스승들을 공경하나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3. 알맞은 곳에살며 공덕쌓았고
스스로 바른서원 세워사는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4. 기술을 숙련하고 많이배우며
계율을 잘지키고 늘실천하며
유익한 언어생활 하고있으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5. 동반자 부모자녀 잘돌보는것
모든일 정연하여 혼란치않아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6. 베풀며 정의롭게 살고있으며
친지를 보호하고 보살피나니
남에게 비난받을 행동안하네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7. 악함을 멀리하고 술절제하며
덕행을 쌓아가고 복을지으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8. 존경과 겸손함을 길러가면서
만족과 감사함의 마음으로써
알맞은 때에따라 법문들으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9. 인내와 용서관용 온화함으로
진지한 태도갖춰 수행을하며
선지식 친견하여 법을논하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10. 열심히 정진하고 청정히살며
거룩한 진리세계 관조하여서
궁극적 열반세계 실현하나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11. 세상의 온갖일에 동요치않고
안온과 담담함이 충만하여서
슬픔과 욕심에서 자유로우니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어라.
12. 이처럼 수행하며 살아간다면
그어떤 경우에도 좌절치않아
언제나 평온함이 함께하리니
더없는 행복함이 충만하리라
* 번역: 미산, 상도선원 아라한전, 2011년 1월 15일
(2월 10일 최종 수정)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서양풍속사를 쓴 저명한 곰브리치 교수의 아드님인 세계빨리성전협회의 회장인 곰브리치 교수 밑에서 초기불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상도선원 선원장 미산 스님의 <<행복경>> 법문을
스크렙하여 붙입니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행복하십니까? 예. 우리가 <행복경>을 가끔 일요법회 끝에 합송하지요. <행복경>이 그냥 겉으로 보기엔 아주 일상적 언어로 평범하게 설하신 경이기 때문에 읽으면 감동이 있는데 실제 경의 구성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경 자체 내에 전체적 수행 체계가 스며있다는 것을 저도 최근에 행복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알았습니다. 너무 평범한 말씀을 아주 자연스럽게 시적으로 하셨기에, 우리가 그냥 무심코 독송하고 넘어가기 쉬운 경인데 제가 이번에 행복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이 <행복경>을 빼놓을 수가 없더군요. 제가 행복에 관한 분석적 논서들도 읽으며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시간엔 <행복경>을 다시 살펴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전학당 공부하신 분들은 제가 초기경전 강의 마무리하면서 <행복경>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갔습니다. 제 책 <<초기경전 강의>> 맨뒤에 <행복경>은 해설을 많이 붙이지 않고 그냥 경을 수록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그때 책을 내면서도 관계자 분들이 좀더 해설을 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안했습니다만, 시간도 그랬고 자료를 수집해야 되는 난점도 있어서 그냥 책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법문에서 <행복경>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면 그걸 보충할 수 있고요. 또 앞으로 출판될 책 속에도 초기불교에서 보는 전반적 행복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갈 것입니다.
<행복경> 첫머리를 읽어봅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스승은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셨다.
어느 날 밤 한 신이 기원정사 전체를 비추면서 나타났다.
신은 부처님께 가까이 와서 인사를 한 다음 옆에 섰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저 수많은 신들과 인간들은 축복을 원하며, 또 행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최상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
이 경이 설해지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서두에서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행복경>은 원래 숫타 니파타(초기경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경)에 들어 있죠. 숫타 니파타는 쿳타카 니까야(5부 니까야 중 5번째 니까야)에 속해 있습니다. 쿳타까 니까야에는 <담마빠다(법구경)>도 들어 있죠 이 두 경전은 거의 시(詩)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 각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리고 많은 번역이 나온 경전입니다. 특히 숫타 니파타는 아주 오래된 말씀들이어서 읽노라면 오리지날 사운드트랙을 듣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감흥이 바로 오는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자애경>, <보석경>, 그리고 오늘 살펴볼 <행복경>은 백미 중에 백미입니다. 이 경들이 어떻게 설해졌는지를 서두에서 간략히 말씀하십니다.
기원정사(제따와나)는 부처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신 아름다운 도량입니다. 그 땅을 제따 태자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아나타삔디까 장자 - 부(富)를 항상 어려운 사람들과 나눈 분, 그래서 이름이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 붙을 정도였죠 - 이 분이 부처님 뵙고 불법에 감동하여 부처님 가르침대로 꾸준히 수행하고 살아가면서 부처님께 큰 도량을 보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위성에 가장 아름다운 숲이 있었어요. 그 숲을 부처님께 희사하려고 보니, 그 땅의 주인이 제따 왕자였습니다. 왕자의 땅을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으나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을 하죠. 그랬더니 태자가 도저히 승낙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당신이 이 땅 전체에 황금을 깐다면 내가 팔 수 있다"고요. 그러자 며칠 후 정말 황금을 깔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제따 태자가 감탄해 땅을 내줬다는 얘기가 있는 도량이죠. 부처님께서 거기에 기원정사를 지으시고 많은 대중을 교화하셨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한밤중에 하늘에서 밝은 빛이 제따 숲에 쏟아지면서 천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처소에 와서 예를 올리고 행복에 대한 질문을 하는 광경이 지금 서두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상식으로 보면 천상에서 신이 빛을 좍 깔면서 내려온다? 이것이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는데 초기경전에 여러 군데 천신들이 부처님 법을 청해 듣는 부분이 나옵니다. <행복경>도 대표적인 그런 경 중 하나죠.
대개 천신이 나타날 때는 한밤중입니다. 그리고 나타날 때 불빛이 따로 필요 없고 그 나타남 자체가 광채이기 때문에 천신이 나타나는 것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삼계를 이야기하죠. 욕계 세상은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짐승들, 그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다는 겁니다. 또 인간보다 더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존재들이 욕계 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욕계 내의 천신들이 부처님께 내려와 법을 청해 듣는 흔적들이 초기경전에도 있습니다. <행복경>에도 이런 광경들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서문에 나옵니다.
그런데 '천신들은 이미 행복한데, 행복이 왜 필요하지?' 이런 의심이 들지 않나요? 천상에 가면 행복하잖아요. 안 가보셔서 모르겠다고요?(웃음) 행복합니다. 거긴 즐거움만 있는 곳이라고 하죠. 우리도 열심히 선업을 지으면 그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나는데, 천상은 욕계 내의 천상도 있고 색계, 무색계 천상이 있는데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을 닦으면 갈 수 있는 데고, 욕계 천상은 선업을 부지런히 닦으면 그 공덕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지요. 천상의 특징은, 즐거움이 계속 내가 지은 만큼은 있어요. 그런데 지은 만큼의 즐거움이 시간이 지나면서 소진됩니다. 문제는, 천상엔 괴로움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괴로움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자극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업을 더 지으려는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유복하게 좋은 집안에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가끔 있지요. 괴로움이 뭐냐고 물으면 전혀 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드물지만...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한번 괴로움을 당해보면 저항력, 면역성이 없기 때문에 아주 큰 타격을 받아요. 이와 같이 천상의 존재들은 동기부여가 안 되기에 더 이상 좋은 일 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점점 이게 줄어들어요. 타이어에 구멍이 조금만 있어도 공기가 없어지듯이, 아니면 어떤 용기에 물이 가득 들어 있다가 어딘가 실구멍이 나면 서서히 빠지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완전히 빠져 더 이상 물이 차 있지 않은 것처럼, 천상의 행복도 그렇게 계속 새어 나갑니다. 이게 천상의 문제점입니다. <행복경>이 설해진 동기를 보면, 아마 천상에서 회의를 했던 것 같아요. "왜 우린 행복한데 행복이 자꾸 줄어드는가? 완전하게 할 수 없는가? 우리가 가진 행복은 최상의 행복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논의를 하다가 자기들끼리 해봤자 지혜가 부족하여 특별한 지혜가 없어요. "아! 그러면 지상에 내려가면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는데 그분께 가서 물으면 해결책이 있겠다" 하여 메신저가 한 분 와서 이런 질문을 한 거겠죠.
<행복경>은 12개의 시(스탄자, stanza)로 이루어져 있는데 간단한 이 경 속에 불교의 수행 체계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은 무엇입니까?”입니다.
많은 신, 신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많이 있고 사람도 누구나 다 행복을 바라는데
천상의 행복이라도 영원치 않고 시간에 따라 퇴색한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영원히 행복해지기 위해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냐고 여쭙는 겁니다. 부처님은 이에 11개의 게송으로 답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 존경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요건을 말씀하십니다. 하나하나 덕목으로 분석해보면, 38가지 행복의 조건들이 들어 있습니다. 내용이 평범한 단어로 되어 있기에 38가지를 끌어낸다는 게 막연할 수 있는데, 제가 빨리어 원본을 보며 추려내보니 38가지가 되더군요.
행복의 조건 첫 번째는 어리석은 사람을 멀리하는 것. 두 번째는 슬기로운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 그리고 존경스런 사람들을 공경하는 것 첫 게송에서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해지고자 하면, 주위 사람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나가다 보니 교보문고 건물에 시구절이 써붙여져 있는데 '그 사람의 면모를 보려면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쓰여 있더군요. 불교수행하는 것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거죠. 그 점에 있어서도 똑같아요. <행복경>에서도 첫 구절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후에 인도 중국 한국 큰스님들도 항상 이런 방식으로 수행의 기본을 갖추도록 예시를 한 것입니다.
<초발심자경문>에 보면 출가한 사람들은 행복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거든요. 부처님은 호화로운 쾌락적 행복도 다 경험하시고 최고의 교육을 받아 성취주의적 행복도 만끽하시고, 이 둘로부터 오는 실망감(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때문에 실의에 젖어 허무에 빠지는 삶도 겪고 나서 극도의 고행을 통해 진정한 행복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출가를 결정하셨죠.
스님들도 세속의 방향에서가 아니라 출세간의 방향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부처님처럼 출가한 거죠. 부처님은 이를 다 경험하시고 우리에게 "애써 고행하지 마라. 아주 최적의 삶을 살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이미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안전하게 부처님 가르치신 길을 따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초발심자경문> 첫 구절에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은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 친근현선(親近賢善)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가해서 맨처음으로 배우는 책이 <초발심자경문>입니다. 행복을 얻고자 처음 마음을 낸 사람은 모름지기 어리석은, 이롭지 않은 친구를 멀리하고 어질고 선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이죠.
행복경에서도 처음 부처님께서 조건으로 제시하시죠.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 말고, 어질고 슬기로운 사람을 가까이 해라. 그리고 삶을 정말 충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존경할 만한 분들을 존경해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선한 좋은 사람들, 늘 마음으로 존경심이 우러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지요. 이게 전부일 수도 있어요. 존경스러운 분의 가르침을 계속 받을 수 있고 좋은 도반을 통해 끊임없이 나를 비춰보고 수행할 수 있거든요. 이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최상의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스님, 불교가 좀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사람, 나쁜 친구는 교화를 해야지 그런 사람들은 친구로 안 삼으면 사회가 더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것도 일리 있는 말이지만 초심자의 경우엔, 좋지 못한 친구를 만나면 금방 물들지요. 그러니 이건 초심자에게 하는 이야기고요. 내공이 닦인 보살-적어도 5, 6, 8지(地) 이상-이 되면 정말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서라도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경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시면 안 돼요. 우리가 처음 마음 내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때는 어쨌든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해요.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은 꼭 스승 아니라도 도반이라도 친구라도, 주위에 꼭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게 행복의 첫 번째 조건 중 하나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최고의 행복학 강사 - 이름은 탈 벤 샤하르 - 는 처음에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강사로 행복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학생이 한 8명쯤 되다가 한 학기 끝나고 입소문이 나니까 80명 그 다음 학기에 300명, 그 다음에 1200명.. 이래서 하버드에서 가장 유명한 행복학 강사가 되었다고 해요. 이 분이 처음에 쓴 책이 <해피어(Happier)>라는 책입니다.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요. 두번째로 <완벽의 추구>라는 책도 썼는데 여기서도 강조하는 것이 ‘좋은 친구를 오랫동안 사귀는 것이 여러 사람의 행복의 조건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또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도 하버드에서 나왔지요. 하버드대 출신인 사람들을 선정해 72년간, 그들이 졸업 이후에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가를 죽 관찰하고 분류해서 지금도 연구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보고서가 발간이 되어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도 보면 ‘노년으로 가면 갈수록 좋은 친구가 매우 중요한 행복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합니다. 노년에 행복하게 편안히 잘 사는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좋은 친구가 오래오래 같이 삶의 고통과 행복을 나누고 있었답니다. 그 중 한분은 아주 특이한 게, 그리 부유하지도 않고 삶이 힘든 일도 있었지만 지혜롭게 극복한 원인은 좋은 친구가 늘 끝까지 곁에 있었다네요.
두 번째 게송을 봅시다.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스스로 서원을 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곳에 살면 참 불편합니다. 수입은 별로 없는데 어찌어찌하여 너무 큰 아파트를 샀든가 전세 얻든가 하여 들어갔다면, 그 때문에 오히려 삶이 많이 힘들어지겠지요.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행복의 요건 중 하나입니다.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는 곳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그렇게 집착을 해서 자기 역량에 맞지 않는 장소를 택해 살다가 오히려 큰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 세속뿐만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가 명당이다 하여 명당만 찾아 다니며 수행하는 분이 있어요. 그런 분들 보면 수행이 잘 되기는커녕 오히려 잘 안 돼요. 왜 기가 좋은 데 찾아다니는데 수행이 저 모양일까? 이야기를 해보면 수준을 알거든요. 안 되는 이유는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가 확 나오는 데 가서 앉아야 화두가 잘 들리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엉뚱한 생각, 외형적인 것에 끄달려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수행엔 좋은 장소가 필요하지만 분수에 넘치는 장소에 집착해 마음을 쓰면 해가 되죠. 분에 맞는 것, 적절한 것, 머물지 않는 것. 초기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비구들은 한군데 사흘 이상 머물지 말라 하셨어요. 삼 일 이상 머물면 집착심이 생깁니다. <숫타 니파타>에는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노래한 시들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요즘 한 절에 삼 일만 있다 가버리면 큰일이지만, 그 당시는 유행(遊行)하는 분들이 많아 이런 시들이 나왔습니다.
또 다른 요건은 공덕을 쌓는 겁니다. 많은 공덕에 의해 어쨌든 행복의 요건이 계속 갖추어집니다. <행복경>에서 말씀하신 38가지 덕목들은 죽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인간적인 덕목부터 시작해 천상세계의 행복의 덕목, 열반의 행복의 덕목까지 언급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세간적 행복과 출세간적 행복이죠. 세간적 행복을 다시 두 가지로 - 현생의 인간의 행복과 내생의 천상의 행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천상의 행복도 세간적 행복인지라 끝이 있죠. 그런데 열반의 행복은 출세간적 행복이라서 최상의 행복이고, 행복했다가 다시 불행해지는 게 아닙니다.
<행복경>엔 이 세 차원의 행복이 눈에 선명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깊이 있게 숙고해보면 그런 차원들이 여기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건 인간세계의 행복입니다. 인간세계에서 늘 공덕을 쌓으면 쌓은 만큼 돌아오고 천상도 공덕 쌓을수록 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아집니다. 수행의 공덕이든 나눔의 공덕이든 실제 행법-위빠사나, 사마타 이런 수행-도 꾸준히 하다보면 공덕이 많이 쌓입니다. <사념처경> 끝부분에 수행 기간에 대해 언급되어 있죠. 처음에 7년부터 시작해, 7개월, 7주, 7일, 그렇게 해서도 열반에 들지 못하면 최소한 보너스로 천상에는 태어난다고 말씀하고 계시죠. 그래서 공덕 짓는 것은 행복의 중요 덕목 중 하나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게송에서 세 번째 덕목은 '자신을 갈고 닦기에 온 힘을 쏟는 것' 이라고 되어 있네요. 법정스님 번역본에는 이걸 ‘스스로 서원을 하는 것'이라고 번역하셨네요. 빨리어 원본에 보면 이는‘삶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서원'이라 함은 대승적인 표현이고요. 의역을 한 것 같군요. 어쨌든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는 것,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전체로 보면 여섯 번째 덕목이죠.
누구나 다 행복을 추구하려면 방향 설정을 잘 해야 해요. 제가 어제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도 얘기했듯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대개 보면 성취주의자거나 아니면 쾌락주의자입니다. 또 이 두 가지에서 실패하면 허무주의자가 됩니다. 이 세 부류에서 아무리 행복을 성취하려 해도 이 방향으로 해서는 진정한 행복이 안 옵니다. 이건 이미 하버드 대학교 연구팀이 여러 방법으로 연구하여 보고서도 나와 있고, 부처님은 처음부터 그런 시도를 다 해보시고 그걸로는 진정한 행복이 없다고 다 놓아버리고 제삼의 길을 가신 것이 연기·중도적 행복 추구였거든요. 이게 바로‘삶의 방향 설정을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게송은 지식과 기술을 쌓고 말솜씨가 뛰어난 것. (이 또한 법정스님 번역인데 옛날 것과 조금 다르더라구요. 나중에 번역의 차이점을 다시 좀 살펴보죠). 우선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학문과 가르침이 있었는데 그것을 얼마나 많이 배우느냐에 따라 행복의 조건이 달라지는 거죠. 많이 배울수록 행복에 관한 좋은 정보들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이어 ‘기능을 익히는 것’ 여기서 기능이란 여러 가지 기술, 그림그리기, 말타기, 스포츠 등등 여러 가지를 통해 순간순간 인간의 행복들을 만끽할 수 있죠. 이런 것을 부처님은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런 것이 갖고 있는 행복의 요건을 삶 속에 익히는 게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스스로 수행함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앞에 말한 것들을 익히고 세속적 삶을 살되 항상 수행하려는 자세를 놓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도반과 스승들과 의미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솜씨가 뛰어난 것’이라고 번역해놓으셨는데 원전을 보면 ‘말솜씨’보다는 ‘의미 있는 대화’가 적절하겠습니다. 말솜씨만 뛰어나다 하여 행복한 건 아니거든요. 의미 있는 대화는 뭡니까? 내가 하고픈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통이 되고 진정한 행복이 있죠. 여긴 뭐라고 번역이 되었죠? ‘말을 훌륭하게 하는 것’. 이는 기교를 부려서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생각을 경청하며 적절한 대응을 해가며 소통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섯 번째 게송엔 네 가지 덕목이 들어가 있는데요. 첫째 부모를 섬김, 자식을 보살핌, 배우자를 돌봄, 그리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사는 것 일에 질서 있어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렇게 되어 있죠.
부모를 섬기고,
가족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거니
형편따라 남을 도우며 올바르게 사는 것,
친지들을 아끼고 보호하며
남에게 비난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거니
가족이 가장 중요한 행복의 단위라고 제가 늘 강조했죠. 가족을 떠나 행목을 따로 구한다면 최상의 행복을 구할 수 없죠.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잘 보살피고... 낳기만 하고 내버리면 안 되고 끝까지 보살펴야죠. 인도의 <수바하시타>라는 격언집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인간의 삶에서 가장 즐거움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자녀를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자녀는 웬수죠? (웃음) 그런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저는 경험을 안 해봤으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또 첫 손주를 봤을 때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하죠. 그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이만큼 귀에 걸립니다. 큰 즐거움 중 하나죠 그런데 삼 년, 사 년, 오년, 애들 여섯일곱 살 되어 속썩이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다 달아나죠. 또 사춘기 되어 말도 잘 안 하고 탈선하기 시작하면 “아이고 저 웬수 괜히 낳아 이 고생을...“ 이런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하면서 한탄을 하죠. 그럼에도 부처님도 인간의 행복은 부모 섬기고 자식 잘 낳아 보살피는 것, 그리고 아내 혹은 남편을 잘 보살피는 것이 행복의 덕목으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가정에서 가장이든 아내든 자녀들이든 서로 왔다갔다하면 안 되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규칙을 정했으면 꾸준히 실천할 때 가정의 행복이 있지 가장이라 하여 맘대로 규칙을 어기고, 가족들에게 명령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마음수행학교 불자님들의 숙제를 쭉 읽으며 많은 것을 느끼는데요. 어느 거사님이, 가족들이 결정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그냥 남자이기 때문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가족들의 의견을 다 듣지 말고 혼자 결정해서 이렇게 해라 하는 게 더 효과적이고 좋다는 생각을 하시더군요. 강력한 카리스마가 좋았던 시대는 수렵 시대, 농경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정보화 시대엔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아요. 충분히 의견을 구하고 서로 동의한 상태에서 일관성 있게 일을 처리하시는 것이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부처님 말씀이죠.
게송 6을 보면, ‘남에게 베풀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며 적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비난받지 않게 처신하는 것' 이것도 조금 더 살펴야 되는데... 우리가 법회에서 늘 읽는 행복경으로는 '형편따라 남을 도우며 올바르게 사는 것 친지들을 아끼고 보호하며 남에게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되어 있죠.
‘적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친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죠. 이것은 교정을 하겠습니다. 어쨌든 게송6은 늘 보시를 하는 삶을 체화하는 겁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보시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어제 초하루법회 때 이야기했지만 부처님 당시 때부터 초하루 보름 법회를 전통적으로 쭉 해왔습니다. 2주에 한번씩 정화 의식을 했어요. 지금은 와서 기도하고 공양 올리고 가는 게 초하루 보름 법회라 인식하고 있지만 부처님 당시엔 와서 같이 자기의 보름 간의 삶을 갖고 '자자' 라는 특별한 참회 의식을 했어요. 스스로 자기 허물을 드러내는 의식을 하며 같이 마음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1주일간 더러워진 옷도 빨고 길어진 머리도 삭발하고, 그런 의식들을 정기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전통이 거의 모든 불교 국가에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는 총림에서 결제 중에 특히 자자ㅡ포살 법회를 철저히 합니다. 초하루, 보름 되면 찰밥, 미역국을 먹고 쉽니다. 틱낫한 센터에선 6일간 수행 후 1주일 되는 날은 '레이지 데이(lazy day)'라 하여 책도 안 보고 편안히 쉽니다.
하루 정도는 게으른 날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도 아침마다 전쟁하는데, 하루쯤은 게으른 날을 가져도 됩니다. 깨울 때 소리지르거나 발로 차죠?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니면 문을 활짝 열거나 이불을 확 걷어버리죠. 그럼 신경질 내고.. 아침이 불쾌하게 시작됩니다.
마음수행학교 어떤 불자님은- 아주 좋은 아이디어에요- <부처님 말씀> 책을 갖고 짧은 말씀을 골라서 자는 사람 앞에서 읽어준답니다. 그래도 안 일어나면 또 다른 경을 읽어주면 그때는 분명히, 밝은 표정으로 일어난답니다. 실천해보세요. 일거양득이에요. 스스로 부처님 말씀을 읽기 때문에 욱하고 폭력행사 하던 것을 안 함으로써 업을 짓지 않고, 가족들은 부처님 말씀을 꿈속에서 듣기 때문에, 좋든 아니든 무의식 속에 입력되어 어느날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요. 불자 아닌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할 때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만약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읽어주세요 .요즘 좋은 책이 많으니 그런 내용을 읽어주시면 싸우지 않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가족의 화목과 행복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아껴서 <행복경> 강의를 다음 법회 때 이어서 하겠습니다. 다 하려면 한참 걸리니, 지금은 이어서 자애명상을 하겠습니다.
다리를 쭉 펴시고 편안하게 앉으세요. 허리, 목, 어깨, 다리, 관절 부분을 잘 풀어주면 몸이 빨리 이완됩니다. (이어 자애명상)
[출처] 11.7.팔정도법회 미산 스님 법문-행복경을 통해 본 행복(1) (상도선원) |작성자 소나
안녕하세요. 지금여기에 행복하십니까? 대답이 시원찮으시네요. 일주일간 행복하셨어요?
지지난 주 법회 때 (11. 4) 제가 행복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어서 이번 주에도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삼 주 동안 계속 행복에 관한 책만 보고, 빨리어로 된 경전, 주석서를 보면서 발표할 논문을 준비해 오늘 아침까지 거의 완성했습니다. 주를 못 단 것 한두 가지가 있었는데 페이지 수를 알아내, 이 법회 끝나면 바로 출판사로 보낼 것 같습니다. A4 용지로 44쪽이 되는, 행복에 관한 이런 논문은 저도 처음 써보았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속에 행복에 관한 주제로 설하신 것이 숫타니파타의 '망갈라숫따' 12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팔정도법회 끝에 가끔 독송하곤 하죠. 행복경. 읽어보면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는 평이한 말씀들이죠. 행복이 특별하고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경전을 통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전의 깊은 뜻을 간과하고 ‘좋은 말씀이다. 이렇게 살면 행복하겠지' 하는 정도의 이해만 하고 읽는 것 같아요. 저도 전엔 그랬습니다. 한번 읽으면 편안하고 좋다, 이 정도였는데 이번에 본격적으로 연구해보니, 이 짧은 12개의 게송 속에 부처님의 전체 행복론이 숨겨져 있고 이를 통해 수행하면 최상의 행복까지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2월 11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 반까지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밝은사람들 연구소' 주최로 행복에 관한 세미나를 합니다. 주제는 ’행복, 채움으로 얻는가 비움으로 얻는가‘입니다.
이 주제로 제가 '최상의 행복을 향하여 - 초기불교에서 보는 행복’을 발표하고 경주 동국대 최연철 교수가 ‘대승불교 행복론' 동국대 중문과 교수이신 박영환 교수께서 '선불교', 서울대 철학과 강상진교수가 '서양철학에서 보는 행복', 과기대 이진경 교수가 '사회학에서 보는 행복' 서울대 심리학과 권성만 교수가 '심리학에서 보는 행복'을 발표합니다.
이렇게 각 분야의 행복 전문가들이 와서 발표를 하는데, 불교 쪽 발표자는 세 사람입니다. 그 중 제가 초기불교를 맡아 심혈을 기울여 논문을 썼습니다. 원고를 책으로 먼저 출판하고 나서 세미나를 하니까 완성도가 높지 않으면 나중에 스스로 책임도 있지만 다른분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써보니 공부가 많이 되었고, 또 제가 선원에서 부처님 말씀을 전할 큰 축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가자의 삶 속에 부처님 말씀을 깊이 스며들게 하여 삶이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수행이 되게 할 것인가.
그런데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은 안 맞더군요.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 수행이 될 것인가 이거죠.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이미 행복에 집착하는 것인데, 행복에 집착하는 순간 초기경전에서 얘기하는 중도적 행복이 안 돼요. 잡는 순간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행복은 그냥 놓고 보면서 행복하게 그냥 살면 되는 거에요.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갈리는데, 이렇게 간단한 행복경에 모든 수행 체계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행복경 전체 구조는 말씀드렸습니다. 세미나도 하기 전에 여러분은 알짜 내용을 여기서 다 들으시네요. 복이 있는 분들이라...
행복경의 구조를 보면 12개의 게송과 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2개의 게송을 다 분해해보면 11개의 게송 내에 38가지 행복의 덕목들이 들어가 있더군요. 이를 염주처럼 죽 꿰어보면 전체 수행 체계가 나와요. 불교의 가장 간명한 수행 체계가 뭐죠? 계·정·혜 삼학이잖아요.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어떤 것이든 다 이 세 개의 수행체계 안에 다 들어옵니다. 계는 청정한 삶입니다. 맑고 밝은 삶. 불교수행 하신다는 분이 삶이 정리가 안 되면 매우 힘들어집니다. 수행해도 진전 없고 마장이 많게 돼요. 삶이 정리되어 청정한 삶, 바른 삶, 밝은 삶으로 전환시켜 놓으면 거기서부터 수행이 일취월장 향상일로로 갈 수밖에 없죠.
21개 덕목으로 일상 속에서 우리 인간이 행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이 나열됩니다. 배우는 것, 예능을 익히는 것, 규범을 지키는 것, 의미있는 대화를 하는 것, 부모와 자녀를 보살피는 것, 비난 받지 않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 술을 절제하는 것... 이런 덕목들입니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리 행복하려 아등바등 애를 써도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거죠.
그 다음에, 인간의 행복이 굉장한 것 같아도 천상의 행복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떤 종교든 인간을 ‘꾀어’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교는 극락, 기독교는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행복보다 더 수승한 높은 차원의 행복이 거기 있다고 제시합니다.
두 번째 주제로 이 경에선 천상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공경함, 겸손함, 만족함, 감사함, 적절한 때에 법문을 들음, 인내함, 온화함, 스승을 만나 적절한 시기에 법에 대한 점검을 받음, 이런 덕목들이 천상의 행복을 얻는 조건들이랍니다. 이건 바로 삼매 수행이에요. 정(定)이죠. 마음을 한군데 모아 몰입해 들어갔을 때 삶의 기쁨이 나오는 거죠. <몰입>이라는 책이 유명하죠. 서울대 황농문 교수의 이 책도 인기가 좋고 그 전에 칙센트미하이라는 긍정심리학자의 <몰입의 즐거움>, 또 최근 번역된 <몰입의 재발견> 이런 책들이 어디에 집중해 몰입했을 때 왜 즐거운가, 일의 성취 강도가 높아지는가를 과학적으로 정리해 일반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죠. 그런 책 읽으면 '나도 참선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신심이 저절로 날 정도로 설득력이 있죠.
정에 들면 왜 기쁨과 행복이 나오는가를 정리해놨는데, 여기 관련된 수행법들을 찾아보니 바로 사무량심 수행이더라구요. 이게 전부 삼매 수행과 연관돼 있어요. 또 아까 재가자의 생활에서 관계 속에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인가, 이건 사섭법 수행입니다. 초하루 법회 때 제가 이야기했죠. 이런 구체적 수행방법들이 예시되어 있고 자세한 수행 차제가 청정도론 등에 잘 나와 있지요.
그 다음에 이런 천상의 행복을 바탕으로 해서 어디로 지향하는가? 열반의 행복 쪽을 지향합니다. 열반의 행복에 관련된 것은 이 경에는 짧게 요약해놨는데, 여기서 많은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열반의 행복은 사성제, 팔정도 수행을 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요. 인간세상의 행복에서도 천상의 행복에서도 사성제 팔정도는 기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때 닦는 사성제 팔정도는 세간적인 팔정도죠.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제시하는 사성제 팔정도는 출세간적인 팔정도입니다. 출세간과 세간과 어떤 차이 있느냐? 세간은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계속 지어가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는 조작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세간법, 유위법이라 합니다. 이때는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불행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상대적 세계의 행복은 한계가 분명히 있는 거죠.
세간의 행복을 부처님은 부정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간의 행복을 충실한 선업, 사무량심 닦아서 이뤘을 때 출세간의 행복이 완성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두세 개 게송들은 출세간 행복을 향하는 내용입니다. 그걸 풀어보면 많은 수행 체계들이 나오지요. 제가 지금은 구상만 하고 있는데, 상도선원이 어차피 새로운 환경에서 수행과 신행을 만들어가려는 뜻을 갖고 출범했기 때문에 조금 더디고 기존의 것들과 익숙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더 참고 지켜보고 동참해주시면, 상도선원에서 독특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부처님 정법에 굳게 뿌리 내리고 현실의 삶에 바로 역동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수행 체계 행법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을 저는 행복경에서 보았습니다. 짧지만 평이하고 깊이가 있어요.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바로바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덕목이 다 들어가 있어요.
오늘 아침 다시 생각하며 확인했는데, 특히 11개의 게송에 끝마다 이 후렴구가 있죠.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거니’
이 말이 빨리어로는 '에땀 망갈람 웃다맘'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해보세요. ‘에땀 망갈람 웃다맘’.
'에땀'이 '이것'이고 '망갈람'은 '행복, 길상, 행운'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웃다맘'은 '더없는, 최상의'라는 뜻입니다. 열한 개의 게송 끝에 후렴구로 이게 반복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남편, 아내에게 잘하고 부모 섬기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아까 나온 출세간적 사성제만 닦아야 최상의 행복이 아니라, 자녀를 잘 살피는 것 자체가 최상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거사님들 이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까? 술을 절제하고 끊게 되면 새로운 삶의 세계가 열립니다. 술 먹고 순간적으로 쾌락에 젖는 행복 아닌 훨씬 더 맑은, 옹달샘 같은 행복의 샘물이 계속 나오거든요. 왜? 술을 안 마시고 중독성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지혜의 샘이 마르지 않아요. 술 마시고 마약 하고 게임 중독 같은 것을 끊지 못하면 지혜의 샘이 말라버려 머리가 희미해집니다. 나이도 얼마 안 먹었는데 판단력이 흐려져요. 그래서 머리가 명석하게 돌아가지 않으므로 삶이 힘들어집니다. 머리가 나쁘면 즉 지혜가 없으면 손발이 고생을 합니다. 이게 전부 연결돼 있어요. 그러니까 일곱 번째 덕목에 나오는 ‘술 절제’ 덕목 하나만으로도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술 끊고 어떤 경지에 올라 삼매 체험하고 도를 깨쳐야만 그것만 최상의 행복이 아니라, 술을 절제하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부처님 경전 말씀이 아주 역동적이고 통합적입니다. 만약 이게 그런 식으로 안 되어 있고 뒤에 가서 최상의 행복 하나만 딱 나온다면 너무 기계적일 겁니다. 선불교의 돈오적 관점, 본래성불, 본래부처, 즉 우린 본래 행복하다는 겁니다. 최상의 행복을 지금 누리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모르는 거죠. 만약 뒤에 가서 한 가지 최상의 행복만 강조했다면 이런 관점과 격리가 될 터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처럼 초기경전의 부처님 말씀은 순도가 참 높습니다. 이게 나중에 이런저런 주석서가 나오고, 문화 따라 지역 따라 해석되고 가미되고 하여 순수성이 오염될 수가 있죠. 숫타니파타 전체는 초기경전 중에서도 초기경전이에요, 그래서 말씀이 간명하고 핵심을 바로 겨냥하고 있어요.
제가 세미나에서 발표할 중요한 말을 여기서 다 하네요. 그래도 여기서 다 들었다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 오시면 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럿이 같이 토론하니까 더 재미있습니다. 그 행사가 해마다 열려 지금 다섯 번째인데, 번번이 삼사백명이나 모여요. 세미나 치고는 사람들이 참 많이 오는 좋은 행사입니다.
지난 시간에 앞의 게송 몇 가지 설명해드렸지요. 이 망갈라 숫따가 설해진 경위를 지난번에 말씀드렸어요, 부처님은 교화의 대상을 인간에 국한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행복을 총망라해 설하고 계십니다. 이 경의 맨앞 질문은 천신이 합니다. 천신 중에도 높은 천신입니다. 도리천의 왕자를 보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천상은 행복이 넘치거든요. 그런데 행복의 계좌가 자꾸 줄어드는 거에요. 쓰기만 하고 공덕을 닦지 못하기에. 그래서 천상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행복 계좌에 저축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계속 곶감 빼먹듯 빼먹는 시스템이에요. 그러니 오래 있으면 잔고가 제로가 되게 돼 있어요. 그래서 경에서도 행복을 저축하는 게 무엇인지 부처님께 여쭤보라고 특사를 보내서, 이 경이 설해진 거에요. 인간이 왜 좋은가 하면, 행복 계좌에 저축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누가 제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어디 선원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십 년 간 한번도 안 빠지고 열심히 했답니다. 남편도 모르게 아침 세 시 반에 시작하는 기도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알게 됐어요. 남편도 보살님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에 탄복해 불자가 되고 지금은 보살님보다 더 열심히 신행활동을 하신답니다. 그전에는 종교를 터부시하고 비아냥거렸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에 감명 받아 관심을 가진 것이죠. 인생이 아무리 순풍에 돛단 듯이 간다 하더라도 어떤 시점에서든 사고나 큰일이 날 수 있죠. 이 보살님도 뇌수술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 일이 닥쳤대요. 뇌수술 두 번하면 반신불수되거나 몸에 뭔가 흔적이 남게 마련인데, 그분은 흔적이 하나도 없어요. 그 분이 이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잘 안 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십 년 간 하루도 안 빼고 새벽기도를 한 공덕이 아닌가 싶답니다. 십 년 동안 새벽에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생각을 하고 경전을 읽고. 이렇게 했을 때는 그것이 갖는 엄청난 공덕이 있습니다. 그 공덕이 행복 계좌에 저금되겠죠. 잊고 있다가 필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찾아 쓰는 거지요. 그분이 참으로 밝아요. 제가 왜 절에 나오시느냐 했더니 행복 계좌를 다 쓰고 나니 불안해진다고... 그래서 잘 오셨다고 했죠
천신의 특사가 와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합니다. "행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최상의 으뜸가는 행복은 무엇입니까?"라고 여쭙죠. 천신들은 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중에만 내려와요. 공부가 좀 된 수행자들은 내려온 걸 알죠. 헤드라이트 켠 것처럼 환히 빛나니까요. 천신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떠나갔는데 다음날 아침 아난다 존자가 말하길,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은데요." 부처님께서 "어떻게 알았냐?" 아난다 존자가 "빛이 밝게 빛나서요." "그렇다. 어제 천신이 와서 행복에 관해 말해주었느니라."
그랬더니 아난다가 "우리에게도 말해주십시오"하고 청했기 때문에 이렇게 경으로 남은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주석서에 다 쓰여 있어요. 주석서가 행복경 연구에 큰 감명을 준 게 뭐냐하면, 38가지 덕목은 그냥 읽어서는 추출을 못 해요. 너무 평이하고 당연한 내용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주석서는 이걸 전부 추출해놓았어요. 빨리어로. 그리고 영어로 번역본이 있습니다.
사실 이건 학술 논문 성격이 강하기에 출처를 다 밝여줘야 합니다. 그걸 밝히기 위해 제가 세세한 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들어 여러분에게는 죄송합니다. 때로는 쓰다가 허겁지겁 와서 법문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을 용서해주시고요.
지난 주에 이 글을 쓰느라 토요 정진에 참여를 못 했는데 어제 정진 시간에 보니, 미산스님도 안 나오니 쉬자 하는 생각에서 그랬는지 글쎄 다섯 사람 밖에 안 나왔어요. 놀랐습니다. 토요 정진을 꾸준히 하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게다가 어제는 또 동안거 결제일인데도 5인만 나와서 제가 '참회하고 반성해야겠다. 결제날도 이렇다니..' 생각하고 어제 부처님께 굉장히 죄송하다고 참회를 했습니다.
수행은 시간을 정하고 함께 모여 꾸준히 쉬지 않고 하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 있어서 못 나오는 분도 있겠지만, 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 이렇게 법회에 나오시는 백 몇 십 명 중에 딱 다섯 명만 아무 일이 없어서 정진하러 오셨다고 볼 수는 없거든요. 이렇게 잔소리를 좀 해야 돼요.
결제가 어제 시작되었기 때문에, 혹 어제 놓쳤더라도 오늘부터 마음을 다잡고 진정한 행복의 삶이 뭔가를 정말 깊이 있게 사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초적인 행복에 놀아나게 됩니다. 그 행복은 하루, 이틀, 사흘도 안 가서 불행으로 변해버려요. 첫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죠. 쾌락을 추구하는 행복, 성취지향적인 행복, 허무주의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도 그 사람 나름으로는 행복 추구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항상 결과가 불행으로 나오죠. 왜 그런지는 후속 프로그램 구상해 자세히 얘기하려 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 가지 관점이나 태도를 지양하고 이걸로는 안 된다 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이를 요약하면 연기중도적 행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으로 향해 있고 실천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최상의 행복이에요. 지금여기에서 이 덕목 중 하나를 실천하면 바로 행복입니다. 여러분과 일 년 동안 이 덕목들을 갖고 죽 연결해서 수행할 수 있게 해보고 싶어요. 저에게 시간을 주시면 제가 그런 연구를 할 수 있는 도구를 갖고 있기에 해보고 싶지요. 그런데 저에게 "자꾸 얼굴 맞대고 신도들과 스킨십을 좀 갖고 해야 선원이 발전하지 맨날 책상 머리에 앉아 연구한다고 이 선원이 발전하겠습니까?"라고 하시면 그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 그래서 제가 시급하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일일이 곳곳에 가지 않더라도 시스템 속에서 여러분이 요소요소 그런 일을 해주시면 함께 최상의 행복을 이 선원에서 누리고 전파하는 게 되죠, 이런 점을 이해하고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행복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개되는가를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 게송을 단도직입적으로 부처님께 여쭙니다. 38가지 중 첫 번째 행복의 덕목은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명한 이를 가까이 하는 것, 세 번째는 존경스러운 이를 존경하는 것. 하나로 다 묶일 수 있는데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나눠야 구체적이거든요. 통합되어 있는 것도 분석하고 해체해서 보면 어떻게 해야되겠구나 하는 길이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수행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주위 환경이 중요합니다. 옆에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럼 그 파장을 바로 받아서 이걸 마음으로 복사를 합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밈(meme)'이라고 합니다. 들어보셨어요? '진(gene, 유전자)'의 상대어가 '밈'입니다. 진은 우리 육체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보 체계죠. 한편 정신을 구성하는 정보 체계가 '밈'입니다. 이 말을 만든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입니다. 최근에 그 분이 쓴 책으로는 <만들어진 신>이 있죠.
이 분이 <이기적 유전자> 책 말미에 '육체의 정보 체계가 gene이라면 정신 문화의 정보 체계는 meme일 수 있다'고 써놓은 뒤로 서양 학자들이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책도 있습니다. <Meme>이라는 책이죠. 제가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수전 그리피스(Susan Griffith)라는 심리학자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 사람이 불자예요. 강의를 너무 잘 해요. 영국 여왕이 주는 상을 받은 분입니다. 과학을 일반인에게 쉽게 전달하는 최고의 명강사입니다. 그 분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속으로 '저분이 불교를 아니까 저런 이야길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뇌의 어떤 특정 부위에서 어떤 특정한 사고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이 아니라 뇌의 모든 사고 정보 체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분이 연기법을 안다는 거죠. 뇌의 일정한 곳에서 일정한 사고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근시안적인 생각이죠. 뇌과학이 그리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분이 벌써 그런 말을 했는데요. 그래서 이 ‘밈’에 관심 갖고 체계화하고 단행본을 냈는데 10년만에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어요. 금년에 서점에 가서 보니 이 책이 있더군요. '밈'이라는 것은 유전자처럼 전해지고 상속되는 것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한 분과 같이 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첫 관문이라는 겁니다. 여기 오시면 공부하려는 좋은 분들이 다 모여 계시거든요. 최상의 행복 공부를 하는 데에 아주 좋은 환경이죠. 그렇게 어질고 덕이 있고 삶의 질적인 충고를 해줄 수 있는 분을 '빤디따'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선우(善友), 선지식(善知識)’ 빨리어로 '깔랴나 미따', 인도에서는 학식 높은 그런 스승을 '빤디따'라고 합니다.
선우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부처님이 강조하셨죠. 아난다가 참선하면서 아침에 생각이 떠올랐어요. '아! 도반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도반이 수행의 반은 시켜준다'라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자랑삼아 이렇게 말씀드리니, 부처님이 그 말을 받아서, “좋은 도반을 갖는 것은 수행의 반이 아니라 수행의 전부를 성취한 것이다”라고 잡아함경에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 좋은 벗이 있고 그 벗과 함께 있으면
수행의 절반을 이룬 것이 아니라 전부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좋은 벗에겐 언제나 순수하고 원만하고 깨끗하고 바른 행동이 따라다니지만
나쁜 벗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좋은 벗과 사귀고 좋은 벗과 함께 있도록 해야 한다
잡아함경 권2 195쪽
두 번째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쾌적한 환경, 편안한 주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죠. 서로서로 도와주고 상생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찾아야 된다는 거죠.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맹모삼천지교라고 하지요. 맹자 어머니가 맹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잖아요. 아들의 바른 교육을 위해 공부 잘 하고 열심히 사는 선량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고 하잖습니까. 행복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처음 수행하는 데는 좋은 환경이 좋습니다. 나중에 좀 지나면 좋은 환경, 나쁜 가릴 것 없이 자기 서 있는 곳이 다 좋은 환경이 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공동체에 와서 수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말씀이죠. 명당만 찾아서 다니는 것은 중도적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꼭 이상해지더라구요. 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중요하긴 합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여기 선원 입구에 백일홍 심은 위쪽 화단에 제가 처음 여기 집 짓고 나서 살구나무를 심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죽어가는 거에요. 나무가 죽어서 뽑아 내고 다시 수양버들나무를 심었는데 그것도 죽는 거예요. 박꽃나무를 심었는데 그것도.. '이상하다. 왜 여긴 뭐만 심으면 죽을까?' 하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좋은 대나무를 심었어요. 그런데 물을 아무리 주고 해도 이 대나무가 죽어가기 시작해요 참 좋은 나무인데... 그래서 제가 화원에 급히 연락해 아무래도 이것을 옮겨 심어야겠다고 했습니다. 파서 옮겨 큰 화분에 심어 뒷 베란다에 놓았는데 이틀만에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그 땅을 가서 보니 맨밑이 하얗게 말라 있어요. 무슨 수맥이 지나가는지.. 아니면 전선 같은 것이 묻혀 있어 전자파가 계속 올라오나보다 생각하고,거기는 아무것도 안 심고 있습니다. 명당이라는 게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대부분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떤 기운으로 사느냐에 따라 명당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상도선원은 원래 명당인데 더 명당이 되는 이유가 좋은 생각, 좋은 기운으로 최상의 행복을 향해 정진하는 분들이 모이시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관한 말씀을 게송 3에서 하셨고, 선업 공덕을 많이 닦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손꼽는 행복의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건강, 그리고 특히 젊은이들이 항상 신경쓰는 미모, 그리고 부유함, 좋은 가문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는 것. 세 번째 덕목의 선업 공덕을 지으면 이런 것들을 다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선업을 지으면 이런 것이 한꺼번에 성취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선업을 지으면 행복의 계좌에 가장 많은 것을 넣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계좌가 계속 불어납니다. 불어나는데 내가 써야겠다 하면 이게 미모, 부, 학식, 건강, 재능 등 여러 쪽으로 나타납니다. 계좌에 저금을 할수록 더욱 더 그렇습니다. 이게 전부 까따 뿐야(과거에 쌓은 공덕)의 과보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 번째 게송에 나오고 있습니다.
[출처] 11.21.팔정도법회 미산 스님 법문-행복경을 통해 본 행복(2) (상도선원) |작성자 소나
안녕하세요. 이번 한 주도 행복하셨나요? 행복은 빨리어로는 ‘망갈라(mangala)’라 하는데, 보통 이를 ‘길상(吉祥)’ 혹은 ‘축복’이라 번역하곤 하죠. 지난 일주일 동안 축복의 날이 있었나요? 길한 일, 상서로운 일이 많이 있었나요? 절 이름으로 ‘길상사’가 있죠. 이때 ‘길상’이 바로 ‘행복입니다. 길상사는 ’행복사’인 셈이죠. 행복사라고 하면 좀 이상한데 길상사라고 하니 그럴듯하지요. 법정 스님이 회주로 계셨던 성북동 길상사가 있고, 봉천동 길상사도 있죠. ‘행복사’라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또 상도선원을 ‘행복선원’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옛날 책들에는 주로 ‘길상’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고 영어책을 보면 ‘blessing(축복)'으로 번역을 많이 해놓았지요.
요즘은 너무 불행하다보니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책 한 권 소개하겠습니다. <김영노의 행복수업>이라는 책입니다. 영한 대역으로 되어 있고 2010년에 나왔습니다. 김영노라는 분은 <영어순해>라는 참고서의 저자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권하면 영어 공부, 행복 공부에 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티베트 불교의 좋은 구절들을 영어, 한국어 번역, 그리고 수행 관점에서 정리해놓았습니다. 대학생, 청소년들의 영어 공부에도 유용할 것 같아서 추천합니다. 같은 분이 전에 번역한 책으로 <샨티데바의 행복수업>이라는 책이 있지요. 제가 대학생 때 영어공부할 때 이분이 가르치는 학원에 가서 <직독직해 영어순해>를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분은 불자로서 신심이 있고 수행을 열심히 하시는 분입니다. 자녀들에게 이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불교적 사유 방식이 몸에 배게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요즘 ‘행복경’에 푹 빠져 여러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경과 이에 관한 주석서들을 통해 선원 전체의 수행 방향을 잡아갈 생각입니다. 또 기존의 한역 경전에 나오는 염불 속에 행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녹아 있는지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길상 = 행복'이라는 것 모르셨죠? 그냥 '길상' 하면 행운인가보다, 좀 멀리 있는 것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불설소재길상(佛說消災吉祥) 다라니’가 있는데 이것도 행복 주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연원을 추적 중입니다. 분석해보고, 우리 의식 속에 이 다라니가 왜 들어와 있는지를 연구해서 이번 결제 기간에 ‘행복 다라니’ 독송도 하려고 합니다. 기대하시고, 동안거 기간에 좋은 수행을 공유하십시다.
원(願)성취진언도 있습니다.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훔’이죠. 예불 후에 하는 4대주(呪)가 있습니다. 보공양진언, 보회향진언, 원성취진언, 보궐진언 이렇게 네 가지 진언입니다. 백양사에서는 새벽 예불 때 천수경을 하지 않고 이 4대주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주문들에 익숙합니다. 이런 것들을 좀더 연구해서 행복하게 살려고 마음 모아도 잘 안 될 때 불보살님 위신력을 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해볼 수 있습니다.
진언 중에 비장의 무기가 제 경우엔 광명진언(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쁘라바릍타야 훔) 이고, 또 '옴마니 반메훔'도 흔히 독송하는 진언이죠.
현대화된 주문으로는 ‘지금여기불’ 또 ‘확.욱.멍’에 대응하는 ‘음.휴.짠’ 등이 있겠죠. 초기불교에서 설하는 행복과 맞춰서 이 다라니를 독송할 예정입니다.
저기 선원 법당 문을 보세요. 전통조각보를 유리 사이에 넣어서 문을 만들었습니다. 조각보를 잇는 바늘 한 땀 한 땀이 그대로 수행입니다. 이렇게 전통 소재가 현대적 틀 속에 들어가 어우러져서 새로운 에너지를 냅니다. 안과 밖이 은은히 통합됩니다. 부처님 가사는 전부 조각천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여서 하나로 연결된다는 연기적 불교 사상과도 통합니다. 이것이 선적(禪的) 안목입니다. 이런 안목, 지혜가 나와야 아름답고 윤택합니다. 행복경을 통한 다라니를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행복경 네 번째 게송까지 이야기를 했었죠. 이어서 봅시다.
‘부모를 섬기고 가족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효도와 보살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혼 생활이 원만하고 행복하면 모든 생활이 원만하고 행복합니다. 여기서 후렴구가 ‘최상의 행복’인 이유는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이어가면 그 자체가 최상의 행복으로 가는 중요한 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관성 있는 삶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관성 있게 살 때 나 스스로, 또 주위 사람이 봐도 좋은 행동이 나옵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체계에 따라 일관성 있게 자신감을 갖고 수행하면 됩니다.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면서 뿌리, 줄기가 없을 때 행복 쪽으로 못 갑니다.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 없이 흔들릴 때 일관성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면 허전해지고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디가 니까야 30에 나오는 시갈로와다 숫따(육방예경)와 바로 연결됩니다. 시갈라라는 사람이 아침마다 여섯 방향으로 절을 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니까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시지요. ‘초기경전 강의’ 책 끝부분에서는 이 경을 그냥 읽고 상세한 해설은 없이 넘어갔는데, 이 기회에 자세히 해설을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여섯 방향에 걸친 인간의 연결망을 설하신 것입니다.
12월 11일 행복에 관한 세미나에서 발표될 글을 모은 책이 다음 주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동쪽으로 절하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의미의 절인데, 여기 다섯 가지 항목이 있습니다. 첫째, 부모로부터 지원 받은 것과 같이 그들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지원 받은 것은 이 몸입니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합하여 23염색체 + 23염색체가 유전형질을 그대로 이어 받아 몸이 되지요. 그리고 정신적 영향은 잉태 순간부터 받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마음상태에 고스란히 영향을 받지요. 그래서 태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간화선 집중수행 때도 어느 분이 어머니 뱃속의 괴로움이 직감적으로 느껴져 그 괴로움을 심하게 느꼈는데 나중에 어머님께 물어보니 임신 5개월 때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태아가 기억한 것이죠. 부모로부터 혹 나쁜 것을 받았더라도 선법(善法)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둘째, 유산을 가치 있게 쓸 것.
셋째, 부모 돌아가신 후 그 분들의 이익을 위해 재산을 보시할 것. 동국제강을 하셨던 장경호 거사님의 유족들이 나중까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여러 가지 보시행을 하신 것은 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자녀가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는 폭과 깊이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을 행함으로써 지지해주고 삶의 기준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잘 하는 것을 잘 할 수 있게 북돋워주는 게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옛날엔 공부만 잘 해야 출세하고 잘 산다고 생각했지만 박지성 선수가 공부를 잘해서 유명해졌나요? 자기만의 재능을 발굴해 세계적 스타가 된 것입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평범한 아이도 세계적 선수로 성장할 수 있어요. 만화를 잘 그리는 아이는 애니메이션 분야로 키워주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요.
이 경에서 ‘기술’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울리는 배우자를 찾아줄 것. 아무리 성화를 해도 제 짝을 찾을 인연이 아니면 억지로 안 됩니다. 흐름에 맡겨두시면 됩니다. 부모의 강압이 불행의 요인이 됩니다. 공덕을 지어서 그런 인연이 나타날 수 있게 해주세요.
적당한 때에 유산을 물려줄 것. 가치롭게 쓸 수 있을 때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시기를 잘 봐야 합니다. 정리를 해놓지 않고 돌아가시고 나면 불화의 원인이 됩니다. 자식이 운용할 수 있을 만큼만 물려주라, 이런 이야기들이 육방예경에 나옵니다.
13번째 항목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라고 나옵니다. 존중하지 않고 얕보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생깁니다. 서로 마음 수행을 안 하여 처음부터 고리가 잘못 끼워져서 상대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부부지간에는 바로 전해지거든요. 서로를 부처님으로 섬기는 마음 자세가 존중을 낳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하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바람을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권한을 넘겨주라. 권한을 넘겨 받으면 또 이 권한을 잘 써야 합니다. 권한 밖의 일을 하지 말라. 넘겨줬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그 권한을 남용하면 안 됩니다.
또 장신구를 사줄 것. 비싼 것이 아니더라도 정성 들어간 것을 사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벌써 몇 번째 이 내용으로 법문을 했는데, 실천 안 하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보통 때 이런 것을 안 사주고 한 번 커다란 대박을 터뜨리려고 여행을 계획하고 막상 여행 가서는 진탕 싸웁니다. 그러지 말고 평소에 잘 해주세요.
그러면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보답할까요. 가정일을 원활히 처리하고, 집안 일을 돕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에게 친절히 대하고, 신뢰받지 못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를 잃는 일이 거듭되면 믿음이 없어져서 행복 추구가 안 됩니다. 또 가계를 보호해야 합니다. 충동구매, 장비, 생색 내려고 공연히 돈 쓰는 것 등을 하지 말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죠. 제가 봉사, 보살행을 늘 강조합니다. 그럼 어떤 분들은 깊은 삼매에 들어야 최고의 수행이지 보살행은 소진만 될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수행의 본질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보면, 남과의 관계 속에 나를 불태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삼매라고 나옵니다. 일념으로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것. 최상의 지혜를 개발하여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보살행을 할 때 최상의 행복이 옵니다.
오늘은 게송 5의 11, 12, 13 항목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 법회 때 계속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자애명상에 들어가겠습니다.
[출처] 12.5.팔정도법회 미산 스님 법문 - 행복경을 통해 본 행복(3) (상도선원) |작성자 소나
안녕하세요. 행복한 새해 맞이하셨나요? 2011년 새해가 열렸고, 어젯밤에는 철야 정진을 하고 자애명상, 촛불명상을 통해 새해 소망을 각자 말씀하셨지요. 소망대로 한 해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신묘(辛卯)년, 토끼의 특징은 슬기로움입니다. 용궁에 끌려가서 죽을 위기에 빠져서도 꾀를 내어 살아나잖습니까? 역경 속에 빠져서도 슬기를 발휘하면 빠져나오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토끼의 또 다른 특징은 다산(多産)입니다. 임신 주기가 짧고 새끼를 많이 낳습니다. 왜 그럴까요? 토끼는 연약한 동물이라 잡아먹힐 가능성이 많아서 새끼를 많이 퍼뜨려 종족이 끊이지 않게 본능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토끼해를 맞이하여 새벽 세알법회 때 금토끼를 분양했습니다. (웃음) 철야 정진을 하고, 통알을 올리고 - 통알은 불보살님, 역대 조사님께 세배를 드리고, 그 다음엔 대중 스님들이 선원장에게 세배를 하고, 또 불자님들이 스님들에게 세배를 하는 의식입니다 - 그러고 나서 제가 덕담을 해주면서 금토끼를 분양했지요. 못 오신 분들 부럽죠? 지금부터 내년 세알법회를 기약하세요.
한 해 첫 시작을 음력으로 하다보니 지금 현대인들에겐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연의 절기에 맞게 음력을 기준으로 살아갔었는데, 세계가 서양인들에 의해 재편되고 그레고리 력(曆)이 기준이 되고 서기(西紀)를 기준으로 쓰다보니 편의상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큰 흐름을 거스를 필요는 없고, 그러면서 전통도 무시하지 않고 잘 아울러 조화롭게 끌어가는 것이 지혜로움이죠.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지혜로움입니다.
지난 한 해, 안타깝고 마음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국회 예산 날치기 통과 등 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지나갔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계획해야 하는데, 새해에도 그보다 더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기후 변화가 아주 급속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남부도 지금 큰 폭설이 왔다고 합니다. 어제 일본에 유학중인 혜담 스님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일본도 눈이 많이 와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우리나라 남부 지방은 눈이 별로 안 오는데 느닷없이 큰 눈이 왔어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자연 재해가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더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잘 견디고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창출될 수 있게 불법을 제대로 공부하는 한 해, 슬기로움이 발현되는 한 해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번 팔정도법회 법문에 이어 행복경을 공부하겠습니다.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행복을 느끼려면 쾌락 지향, 성취 지향의 삶을 살아가면 되겠지만, 최상의 더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머물거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왜 중도가 마음의 중심 축이 되어야 할까요? ‘세상 일은 연기적으로 이뤄지더라. 인(因)이 주변의 많은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더라’ 이러한 우주 만유의 이치의 법칙성을 명확히 알고 삶 속에서 실천하며 연기성을 체득하는 것을 ‘지혜’라 하면, 그에 의해 살아가는 것은 ‘중도행’입니다. 연기적 지혜와 중도행이 두 축이 되었을 때 최상의 행복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관계 속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 현명한 사람은 가까이 하고, 존경할 만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기 좋은 적당한 처소에 거처하라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어떤 처소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있는 곳을 나 스스로 밝고 좋은 에너지가 가득한 장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공덕을 쌓고 서원을 세워 삶의 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까진 지난 번 이야기한 내용 복습이었고요.
지난 동지 때부터 여러분이 서원지를 써서 이렇게 법당에 달아놓았습니다. 동안거 백일 기도를 하여 입춘이 되면 선원 마당 도솔천 카페에서 태우는데, 그 전까지 서원을 결정 못한 분들은 지금 아직 자리가 있으니, 법회 후에 써서 매달아 놓으시고, 자리가 모자라면 다른 자리에도 할 것입니다. 누구나 서원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원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해에 원을 세우면 그것이 삶의 에너지가 되어 비슷한 에너지를 부르고, 그 파장이 퍼지면 바라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도반들이 만나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고 법담(法談)을 하고 부모를 섬기고 줏대 있게 일관성 있는 삶을 살라는.. 여기까지 공부했었죠.
오늘 읽을 부분은 행복경의 6,7번째 게송입니다.
형편 따라 남을 도우며 올바르게 사는 것,
친지들을 아끼고 보호하며
남에게 비난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거니
죄악과는 영원히 결별하며
술을 절제하고 덕을 쌓기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거니
여섯 번째 게송 안에 네 가지 덕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첫째가 보시의 삶입니다. 인간 세상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보시를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을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관계를 잘 맺는 것입니다. 행복경에 나오는 28가지 행복의 조건 중에 21가지가 관계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탄탄하면 천상의 행복, 열반의 행복 쪽으로 저절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갖추지 못해 방향이 자꾸 옆으로 틀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행복경을 연구하며 주목하는 점이 관계의 행복을 실현하는 체계적이고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수행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입니다.
어떤 불교 전통이건 보시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계의 행복을 가장 직접적으로 이뤄줄 수 있는 것이 보시행이기 때문입니다. 베푸는데 악화되는 관계 보셨나요? 그런 관계는 없습니다. 철천지원수 지간이라도 그 관계를 개선하는 마지막 방법은 보시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에서 자애관법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먼저 자신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충만케 하고, 존경하는 분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충만케 하고, 마지막으로 원망스럽고 싫은 대상에게도 자애심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게 안 될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 10단계로 자세히 기술해놓았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그래도 정 용서가 안 되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알아내 보시하십시오.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방법을 계속 써봤답니다. 예를 들어 알콜 중독자가 자신 때문에 가족이 피해를 입었는데도 오히려 자기가 가족 때문에 피해를 봤다며 가족들을 미워하는 경우에 자애관법을 시켜보니 효과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알콜 중독자들을 집단 치료하고 있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좋은 자료를 갖다가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제가 선원을 개원한 이래 보시 이야기를 통 안 한다고 어떤 분이 지적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법문 중에 보시 이야기를 했더니 또 어떤 분들은 ‘무슨 스님이 맨날 보시 이야기만 하냐. 그런 이야기 안 해야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하셔요. 그럼 저는 어쩌라고요? 보시란 재물 보시만이 아닙니다. 재시(財施)는 바탕이고 법시(法施) 즉 법음을 모두에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보시 중의 보시입니다. 무외시(無畏施)는 대승경전에 많이 나오죠. 요즘 정신 치료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치료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도 알게 모르게 이런 치료, 무외시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재물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보시가 7가지 있습니다. 잡보장경에 나오는 말씀이죠. 어제 철야 정진 법문에서 제가 무재칠시(無財七施)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1) 안시(眼施).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밝은 미소로 사람을 대하는 것.
3) 언사시(言辭施). 부드럽고 공손한 말을 통해 보시하는 것.
4) 신시(身施). 몸으로 돕는 보시행.
5) 심시(心施). 배려하는 마음,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6) 상좌시(床座施). 자리를 먼저 차지하지 않고 양보하는 것.
7) 방사시(房舍施). 머물 곳 없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주는 것.
이 중에 앞의 네 가지는 ‘친절’이라는 말로 함축됩니다. 친절에 돈이 듭니까? 재물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상도선원의 금년 핵심 덕목을 ‘친절’로 정하고, 어제 아침 종무회의 때도 “친절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실천하자”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종무실 분들이 웃으면 왜 웃나 하지 말고 같이 방긋 웃어주세요. 아무리 좋은 뜻으로 웃어줘도 불자들이 눈을 돌리고 못 본 체 하면 웃은 사람이 머쓱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안 합니다. 그러니 같이 반갑게 응대해줘야죠.자연스럽게 눈맞춤도 하고요. 그래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집니다. 상도선원은 오는 사람 누구나 밝고 명랑한 미소로 좋은 기운을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친절이 올 한 해 실천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먼저 하는 ‘심시’입니다. 대개 보면 자기중심적으로 사는데, 뒤에서 천상의 행복, 삼매의 행복을 공부할 때 사무량심을 공부할 텐데, 사랑과 함께 가는 것이 감사의 마음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친절과 같이 갈 때 가장 자연스럽지요.
그 다음 ‘상좌시’는 남에게 양보, 배려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회장 해야지’가 아니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건데, 그렇다고 절대로 회장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미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는 선원 내 여러 신행 단체들의 장(長)을 다음 주쯤에 정할 텐데, 민주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동의 하에 선출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도 배려입니다. 끝까지 부득부득 사양하는 것이 배려는 아닙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있어 다른 이들이 편안해진다면 이게 중도적 자세인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도적 잣대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머물 곳 없는 이에게 방을 내주는 ‘방사시’는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지만, 옛날 괴나리 봇짐을 싸서 짊어지고 가다가 해가 지면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 묵어가던 시대에는 방을 내주는 것이 참 중요한 보시였습니다. 경전 아닌 다른 문헌에는 이 ‘방사시’를 빼고 ‘찰시(察施)’를 넣기도 했습니다. 찰시란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보시의 항목에 여덟 번째로 하나 더 붙이겠습니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인사하는 게 누구죠? 컴퓨터 아닙니까. 컴퓨터부터 켜죠. 카페에 누가 글을 올리면 댓글을 달아주면 글을 쓴 사람이 힘이 나고, 좋은 내용이 빨리 퍼질 수 있습니다. 댓글을 달아주는 보시를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댓시’라고 합니다. (웃음) 저는 잘 못하거든요. 시간이 없기도 하고.. 그런데 선원에서 ‘댓시’를 잘 하는 분들이 있어서 남의 글에 꼭 댓글을 달아주더군요. 저도 수시로 들어가서 보기는 합니다. 이 ‘댓시’는 돈이 안 들거든요. 그러니 이젠 무재7시에 ‘댓시’를 붙여 무재8시가 되어야겠네요. 한 해 동안 댓시를 많이 해서 카페가 활성화될 수 있게 합시다. 카페에 좋은 정보가 많이 올려져 좋다는 칭찬을 듣고 있고, 또 제 법문이 올라간 것을 보러 들어오시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시와 함께 실천할 덕목이 ‘여법(如法)함’입니다. 보시는 빨리어로 ‘다나(dana)’이고, 여법함은 ‘담마짜리야(dhamma-cariya)’입니다. ‘법다운 행동’을 말하죠.
담마짜리야의 내용은 십선법(十善法)입니다. 몸과 말과 뜻으로 열 가지 좋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남을 보호하고, 남에게 보시하고, 함부로 성행위를 하지 않는 청정범행을 하는 것입니다. 말로 하는 것은, 진실된 말을 하기, 현혹시키는 말[綺語]을 하지 않기, 이간질 하는 말 하지 않기, 즉 혀 하나로 두 가지 말[兩舌]을 하지 않기 등입니다. ‘엄청나게 큰 생명체가 지금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라든가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라는 말을 퍼뜨리는 게 현혹시키는 말의 예가 되겠죠. 또 뱀이 혀가 두 개이듯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물어 뜯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모이면 남 얘기를 하게 되고, 남 얘기를 하면 싫었던 얘기를 주로 하게 되니 조심하십시오. 화합하는 말을 하고, 남이 기분 나쁘지 않게 마음을 한 번 더 써서 얘기를 전하고, 근본마음으로 이 사람이 바람직하게 변했으면 하는 친절과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가장 핵심 덕목으로 실천할 점입니다.
‘친절(親切)’의 ‘절’ 자는 끊는다는 뜻도 있지만 ‘간절하다’는 뜻도 됩니다. 간절하고 가식 없이 진정성 있는 마음은 우리의 너나 없는 본성과 바로 코드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 스님은 “나의 종교는 친절(My religion is kindness)”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한 해 동안 친절을 실천합시다.
십선법의 열 번째가 독설 즉 악담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존대말을 쓰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편하다고 반말하고 욕까지 하게 되면 최상의 행복과는 180도 틀어져 반대로 갑니다. 부드러운 말은 찾아보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니 행복경 안에서 분석을 해보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이 안에 다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종합 수행 체계를 만드는 것을 제가 생각하고 있는데 가능하겠지요?
경에 ‘친지들을 아끼고 보호하며’라고 했는데, 가족끼리는 또 괜찮아도 친지들을 명절 때 만나면 속상한 일이 생기죠? 미혼의 딸을 두고 “딸 왜 시집 안 보내?” 이런 말로 염장을 지릅니다. 시험 치른 아이가 있는데 “아이구, 이번에 떨어졌다며...” 이렇게 방정맞게 남의 아픈 데를 건드려 불편하게 만듭니다. 친지들을 아끼고 보호한다는 것은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반갑고 행복해야 하는데, 요즘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서로 아예 꼴을 안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절 때 보면 불교 집안 용어로 ‘각각등보체’예요(웃음). 이게 행복해지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 다음엔 ‘남에게 비난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어떤 행동을 하면서 이걸 하면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난 받고, 가족, 이웃, 사회, 국가로부터 비난 받을 행동인지 살펴서 그런 행동이라면 해서는 안 되죠.
일곱 번째 게송은 ‘악함을 멀리 한다’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악행을 멀리 하는 것은 ‘아라띠(arati)’ 그리고 절제하는 것은 ‘위라띠(virati)’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라띠’란 의무감을 갖고 조심스레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계행은 자동으로 지켜집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싶은데 돈이 없고, 탐심이 확 올라올 때 ‘훔칠 수 있어, 훔칠까 말까’ 라는 것이 일어나는 생각이죠. ‘만약 훔친다면 가족 전체가 망신이다’라는 생각으로 절제하는 것이 첫 번째 위라띠이고요. 두 번째 위라띠는 ‘도둑질하는 행위는 계를 파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체(戒體)가 형성되면 위반하는 행동을 할 때 절제가 저절로 됩니다. 세 번째 위라띠는 수행을 계속 꾸준히 하여 도둑질할 마음이 자연스레 절제되어 싹부터 잘려 자동 제어 시스템이 작동하는 겁니다. 아예 나지 않는 거죠. 이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최상의 행복으로 바로 방향이 맞춰지죠.
그 다음에 ‘술을 절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신묘년 한 해 술을 절제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거사님들 계십니까? 금주(禁酒)보다 절주(節酒)가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사회생활 하려면 술 한두 잔은 하게 되는데, 지난번 세미나 뒤풀이 때 술을 돌리는데 저는 스님이니까 안 마시지만 이럴 때 목에 힘을 주고 절대 못 마신다 하면 분위기가 깨지죠. 그래서 잔을 들어 입에다 대는 정도로만 하면 분위기가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거사님들 적당히 한두 잔 하면 중독성이 없는데, 술이 계율에 있는 것은 그 중독성 때문입니다. 술만이 아니라 마약, 게임, 채팅, 컴퓨터 중독 등 중독성이 있는 것은 여기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빨리어로 중독성 행위를 ‘맛자(majja)’라 하는데, 이는 영어의 ‘mad’와 어원이 비슷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신경 계통이 마비되어 정상적 사고를 못 하게 되고, 정상 행동이 안 나오고 미친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중독성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으로 향하는 덕목 중 하나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행복 고속도로에 행복 차를 몰고 가도,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으면 불행 쪽으로 가게 됩니다. 어떤 행위에도 중독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최상의 행복으로 향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7번째 게송에 들어 있는 21번째 덕목이 ‘덕을 쌓기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마도 담메수’라고 하지요. 지난 해를 돌이키면 게을러서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신묘년 한 해, 몸과 마음을 더 써서 부지런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행복한 해가 되기 위해 이 말씀들을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친절하고 배려하는 삶이 핵심 덕목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세요.
물론 ‘오버’하는 것은 중도적 태도가 아닙니다. 오버케어(overcare)는 차라리 케어 아니함만 못합니다. 지나친 배려를 자녀나 배우자에게 하면 그것이 우려, 걱정으로 변합니다. 어떤 불자들은 계속 걱정만 하고 삽니다. 자세히 보면 지나친 걱정입니다. 그 마음의 켜를 들추어보면 자기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주 강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행복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 사랑입니다. 관계를 걸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스트레스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심장 박동이 엉망이 되고 서로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합니다. 가족이라도 서로 주파수가 안 맞아 이혼하기도 하고 가출하기도 하여 불행한 삶이 전개되어 서로 망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중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올 한 해 연기·중도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출처] 1.2.팔정도법회 미산 스님 법문 - 행복경을 통해 본 행복(4) (상도선원) |작성자 소나
모두 합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에왕 메 숫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띠양 (...) 떼삼 망갈람 웃따망 띠
사두 사두 사두
(행복경 전체를 빨리어로 스님 독송하심. 행복경 빨리어 텍스트 참조)
안녕하세요. 지금여기에서 행복하십니까?
지금 빨리어로 마하망갈라 숫따(최상의 행복경)를 독송했습니다. 제가 지난 1월 11일 성도재일부터 아라한전에서 행복경을 중심으로 수행체계를 만들기 위한 정진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동참하셔서 나한전의 존상을 모시는 의미와 함께 저 스스로 상도선원의 수행체계를 정립하자는 분명한 목표와 동기가 있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 기간 동안 빨리어로 행복경을 계속 독송하고 있고요. 그와 함께 새로이 1차 번역을 마쳐서 카페에 올려 놓았습니다. 지난번에 독송했던 행복경은 산문으로 되어 운이 안 맞아 합송하기에 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제가 이번에 여러 문헌을 참고해서 3-4-5조로 만들어 올려놨으니 이따가 같이 합송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행복경 게송 8번의 행복 덕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게송 7에서는 ‘악함을 멀리하고 술을 절제. 부지런히 선법과 덕행을 닦음에 방일하지 않는다’ 해서 19번째가 악함을 멀리하는 것, 20번째가 술 절제하는 것, 21번째가 선법과 덕행 닦고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여기까지가 인간 세상살이 삶 속에서 행복을 어떻게 지어갈 것인가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속적 행복이 갖는 한계를 누구나 얘기하고 인정하지요. 이 세속적 행복을 떠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세속에서 구체적인 가정, 직장, 사회적 삶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최상의 행복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얘기하고 계십니다
게송 8은 제가 새로 한 번역을 보면
존경과 겸손함을 길러가면서
만족과 감사함의 마음으로써
알맞은 때에 따라 법문들으니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어라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도 네 가지 덕목이 (덕목 22~25까지) 들어가 있죠.
첫번째는 공경함, 존경함. 두 번째는 겸손함. 세 번째는 만족함. 네 번째는 감사함. 다섯 번째는 법문을 때맞춰 듣는 것. 이 다섯 가지 덕목이 게송 하나에 들어 있습니다.
공경함은 겸손함과 짝을 이루는 행복 덕목입니다. 살아가면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복입니다. 여러분이 가족 내에서 “아! 나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너무 존경한다. 우리 부모님을 잘 배우고 따르는 게 내 삶의 목표다.” 이런 분이 계신다면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 또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모범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참 중요하다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볼 수 있죠.
제가 말씀드렸죠. 부모가 자식 자랑 하고 다니는 집이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님 자랑하는 가정을 꾸리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라고요. 내가 남을 존경하는 것, 또 남에게 존경 받을 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최상의 행복으로 바로 직접 연결되죠. 저희 수행자들도 수행하면서 존경할 만한 스승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이야길 하거든요. 그 스승을 통해 끊임없이 향상일로로 간다는 거죠.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고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겸손합니다. 왜? 늘 자신을 살피기 때문이죠.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조금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자기가 이뤄놓은 공부에 빠져버립니다. 내가 이만큼 수행했고, 이만큼 경전 읽었고.. 이러한 상(相)에 자칫 잘못하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스님들도 정진 꾸준히 하시는 분을 보면, 끊임없이 내려놓고 도가 깊어질수록 겸손해지고 하심하는 태도를 갖추신 것을 보게 됩니다. 재가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오셔서 참선 수행, 기도할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마음을 아래로 내려놓는 수행이 구체화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할 수행법이 우리 선원 거사림(사무량회)의 이름인 ‘사무량심’ 수행입니다. 이 수행의 본질이 존경과 겸손함, 만족함과 감사함입니다. 빨리어로는 ‘산뚯띠’라고 하는데 자기 지금 현재 상태에 늘 만족한 마음을 갖는 거예요. 이게 바탕이 됐을 때 훨씬 더 깊고 높은 세계로 갈 수 있는 탄탄한 반석이 깔리는 것이지 만족 못하고 끊임없이 헐떡이면 아무리 큰 공부하고 대단한 것을 한다 해도 그 효용성이 반감됩니다. 늘 지금여기에 만족하면서 향상일로로 가는 수행이 게송 8에서 제시하는 수행입니다.
관계 속에서 아무리 여러 기법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감사함의 덕목 만큼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구체적 삶 속에서 매사에 감사할 때는 모든 게 받아들여지고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감사의 덕목이 게송 8에 들어있는 것은 적절하다고 봅니다.
게송 8부터는 천상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수행법이 연결돼 있습니다. 천상의 행복은 삼매의 행복입니다. 우리 생각이 잡다하게 왔다갔다하는 게 아니라 하나로 딱 집중되어 모아진 상태, 이게 삼매죠. 지속적으로 몰입되면 선정(禪定)이라 합니다. 몰입돼 있는 마음 상태는 이 감정 저 감정에 휘둘리는 마음상태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심리상태죠. 그래서 이걸 천상의 행복이라 합니다. 이런 삼매 선정에 들어가게 되면 적어도 색계천의 파장과 고유주파수가 맞게 되죠. 그래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정신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무량심 수행의 네 가지 덕목은 첫째 ‘마이뜨리’ (빨리어로는 메따, 한문으로 慈), 둘째 ‘까루나’ (연민, 悲). 남들이 힘들어할 때 그 고통을 나누는 마음, 이것이 비심입니다. 부처님, 보살님이 갖고 있는 이 비심은 중생과 구분하기 위해 대비심(大悲心, great compassion)이라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바탕이 됩니다. 왜? 중생이 괴로워하기 때문에 내가 보리심 내어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비심은 초기불교에서도 중요하지만 대승불교에선 더더욱 강조하는 개념이고, 이 비심이 있을 때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고 모든 이에 맞추어주는 심리 상태가 될 수밖에 없어요.
세 번째는 ‘무디따’ (喜) 이 기쁠 희 자의 의미는 중생이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할 때 같이 공감하고 기뻐해주는 겁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 아픈 게 아니라 오히려 칭찬해주고 기쁜 마음 내어 박수쳐주는 심리상태. 인간 관계가 가장 소원해지고 문제 생기기 시작하는 게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질투심 때문이에요. “저것 봐라. 나보다 못 살았는데 잘 살게 됐네. 나보다 훨씬 밑에 있었는데 고속승진했네?” 그래서 질투심, 원망심을 내면 많은 괴로움이 양산됩니다. ‘무디따’를 실천했을 때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정신이 아니라 천상 차원의 정신이 열리기 시작하는 거죠.
사무량심의 마지막 덕목은 ‘우뻭샤’ (빨리어로는 ‘우뻬카’) 이것을 종래엔 버릴 사(捨)로 번역해놨어요. 사실 이것이 마음에 딱 와닿는 번역은 아니라서 요즘 젊은 학자들은 버릴 사 자 대신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우뻐’는 접두어, ‘익샤’는 동사 원형으로 ‘보다(see, look)'라는 뜻입니다. 가까이서 존재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우뻭샤의 본래 의미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인도어로 ‘우빠니샤드’라는 유명한 책이 있죠/ 부처님 당시에 유행하던 인도의 사상을 철학화, 일반화하려는 노력을 했던 수행자들이 만들어놓은 책들이죠. 여러 가지 우빠니샤드들이 있습니다. 그 말의 어원도 이와 같아요. ‘우뻐 = 가까이’ ‘니샤 = 앉는다’. 가까이 앉아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바로 전수받아 질적인 변화에 이른다. 본성과 코드를 연결한다, 이것이 우빠니샤드의 원뜻입니다.
'우뻭샤'도 가까이서 본래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해 체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비희가 온전해지려면 이 우뻭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중요한가? 사랑스러운 마음, 자애심을 내어 열심히 봉사하러 다닌다 하더라도 어떤 때 보면 자기 마음이 몹시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비심을 내어 남을 도와주고 같이 슬퍼해주는데 슬픔 때문에 자기가 망가지는 경우도 있어요. 희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같이 기뻐하다가 어떻게 돼요? 기절합니다. 중심이 잡혀 있을 때 이 자·비·희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중심이 없을 때는 이 세 가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진전될 수 있기에 불교에선 이 바탕을 항상 사(捨), 우뻭샤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뻭샤를 담담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담담한 마음은 아주 좋은 말인데, 세상 존재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별해서 보되 거기 끌려가지 않는 것이죠. 이걸 선가의 말로 풀자면 여여부동(如如不動)입니다. 여여해서 어떤 팔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마음 상태, 이게 '우뻭샤'죠. 사무량심 중에 핵심입니다. 이 핵심을 체득, 체화하려면 정진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어떤 상태의 정진이든, 죽 해서 하나로 마음 모아가는 실제적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간화선 해서 화두를 들고 바로 직관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만트라를 외워서 계속 마음을 하나로 잡도리하는, 일치시키는 방법도 있고, 사경 하면서 집중해 한 자 한 자 또박 쓰면서 정신통일하는 방법도 있고요. 몸으로 절을 하되 일념으로 하면 그런 과정 속에서 마음이 집중되어 몰입의 세계로 들어가 선정이 형성되어 삼매의 기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아니면 요즘은 춤을 추면서 아주 느린 동작 속에서 아니면 아주 빠른 동작 속에서 일념이 되어 깊은 마음의 세계를 드러내는 여러 가지 루트로 이를 현실화, 표면화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아라한전에서 행복 기도 하면서 만트라를 하나 만들어낸 게 있습니다. ‘만들어냈다‘고 표현하니 죄송한 마음이 드는데요. 사실 옛분들도 만트라를 '만들어낸' 것이거든요. 수행 도중 삼매에 들어 ’아, 이것은 이렇게 모든 분들과 나누면 좋겠다’ 해서 이것이 체계를 갖고 만트라로 형성된 것이니까요.
저는 인도, 영국에서 공부할 때 인도 종교의 만트라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계속 공존했던 종교가 브라만교지요. 브라만교는 불교 이전에 이미 몇 천 년 간 인도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었죠. 부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그 브라만교에 아주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왜? 너무 종교화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이성적으로 다시 재구성하는 작업을 부처님이 하셨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브라만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되고 자기들의 종교성 속에서 이론적, 철학적인 것을 끄집어 내어 그것이 행법화되고 인도에서 요가가 계속 발전하죠.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어느 시기가 되면 ‘샤이비즘’이라는 인도 고유의 밀교(密敎)가 힌두교 자체 내에서 자생하면서 많은 주문, 까다로운 의식, 행법들이 만들어지지요.
인도 펀잡 지방 쪽에 샤이비즘의 마지막 스승이 계셨는데 그 스승한테서 배운 영국인이 한 분 계셔요. 그분은 완전히 학문적으로 접근해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샤이비즘 문헌들을 계속 연구한 앤드류 산더슨 교수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계신데, 제가 그분 강의를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여하튼 계속 안 빠지고 들었어요. 자료 주면 받아 오고... 그분 강의에 의하면 티베트 불교에서 많은 만트라를 가져다가 현실화해 사용하고 이런 것들이 그 연원을 따져 들어가보니 인도의 샤이비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더군요.
물론 이게 불교로 들어왔을 땐 완전히 불교적 사상 위에서 불교적 색깔을 입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되었죠. 지금 구미 여러 나라에서 티베트 불교가 많은 현대인에게 영향을 주고 각광 받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신·구·의(몸, 말, 마음) 이 세 가지를 다 활용해 삼매를 얻게 하고 지혜를 성취하게 하는 여러 행법들을 만들어놓았죠. 신밀(身密, 몸을 통해 하는 것), 구밀(口密, 말을 통해 만트라 하는 것) 의밀(意密, 마음 통해 깊은 본성세계를 체득하는 것), 이렇게 삼밀(三密)을 통합적으로 정리한 게 티베트 불교죠. 그래서 티베트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이 만트라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도 원나라 시대에 의식이 전해져 만트라가 다 들어와 있어요. 그런데 이 의미가 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어떤 마음 자세로 어떤 음으로 해야 하는지 이런 것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지지 않고 그냥 신비화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만트라 하면 뜻은 몰라도 된다 하며 막 외우잖아요. 뜻을 모르고 와웠을 때 그 효과는 마음을 한군데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고유 주파수가 맞으면 그 주파수와 공조하는 존재계의 존재와 소통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소원이 이뤄지고.. 이런 식으로 구조가 되어 있거든요. 그런 것에만 초점을 맞추니 기복화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의미는, 그걸 통해 내가 변하는 거예요. 내 몸, 내 말, 내 마음이 변해 온전히 본래의 생명성과 계합하는 것이 만트라의 최종 목적인데, 엉뚱하게 옆가지로 빠지는 현상을 죽 봐왔거든요. 현대에서 만트라가 새롭게 해석되며 그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 하고 있었기에 이번에 정진하다가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무량심을 만트라로 만들면 금방 해설 들으면 다 알잖아요. 그것을 우리 삶 속에서 계속 자 비 희 사 마이뜨리 까루나.. 해서 외우다보면 그 음이 갖고 있는 파장, 주파수 이런 것이 자기도 모르게 체화됩니다. 또 그 의미를 알고 삶 속에 실천하려고 마음을 냈을 때 사무량심 수행 자체가 삶 자체가 되는 쪽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제가 8번 게송과 9번 게송을 중심으로 사무량심 만트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9번 게송까지 얘기하고 나서 만트라를 여러분과 같이 해볼 겁니다. 삼칠일 기도에 참석하시는 분은 아침, 낮으로 저와 같이 하시고 있지요. 진언의 이름을 ‘마하 망갈라 만트라’라고 했어요, ‘큰 행복 진언’입니다. 마하는 ‘크다’라는 뜻이지만, 이건 생각으로 크다 작다 비교할 수 있는 마하가 아니에요. 최상의(우따마, uttama)라는 말과 통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우리의 본래 청정진여성입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이 본성을 드러내면 그 자리가 최상의 행복이에요. 이 최상의 행복을 드러내는 말이 필요한데 이것이 진언(眞言, 참다운 말)입니다. 우리 본성의 주파수를 드러내는 게 진언이에요.
그 첫 구절을 '마하 망갈라'라고 했고, 그 다음에 ‘옴 마하 망갈라 마이뜨리 까루나 무디따 우뻭샤 훔’ 해서 사무량심을 가운데 놓고 '옴'과 '훔'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만트라가 나왔습니다. 처음엔 빨리어로 만트라가 떠올랐다가 만트라는 산스크리트어이기에 그렇게 바꾸는 등, 며칠간 수정을 거쳐 만들었습니다.
사무량심이라는 것에는 정말 모든 사람들을 사랑과 자애로 받아주는 그런 심소가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중요한 덕목이 용서와 관용입니다. 어느 누구도 용서해야 해요. 어떤 사람에게도 용서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용서했으면 아주 폭넓은 마음으로 가슴을 안아줘야 해요. 그런데 용서와 관용을 시작할 때는 인내로 시작합니다. 인내를 빨리어로는 ‘칸띠(khanti)’라고 합니다. 이 칸띠의 내용이 용서와 관용입니다. 불교에서 는 ‘아, 내가 참아야지 참아야지 한 대 때리고 싶은데 억지로 꾹 참는다’ 하는 그런 건 인내라고 안 해요, 그건 자기도 상하고 남에게도 좋은 영향을 못 줍니다.
불교의 인내는 용서와 관용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용서해주고 내려놓고 품어주는 게 인내예요. 주석서에 보면 칸띠를 용서와 관용으로 해설해놨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문에는 용서와 관용이라는 말이 안 나오지만 주석서를 근거로 이 두 단어를 넣어 구체화했습니다. 인내와 용서와 관용을 하게 되면 마음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아세요? 안온해지고 온화해집니다. 따뜻해져요. 훈훈해져요 자애심와 비심이 같이 드러나게 되는 거에요. 그런 에너지가 내 속에 충만해지고 상대에게 전달되고 자기도 모르게 훈습되는 상태로 진행되는 겁니다.
진지한 태도 갖춰 수행을 하며
앞에 말한 심리적 상태가 되면 진지한 태도를 갖춰 수행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삼매 체험을 하면 이제 하지 말라고 해도 수행이 즐거워요. 앉으면 환희심이 나고 행복감에 깊이 젖어들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해도 틈만 나면 가서 앉고 수행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선지식 친견하여 점검 받으니
선지식 친견해 점검 받는 것과 알맞은 때에 따라 법문 듣는 것,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따라 다녀요. 여러분이 팔정도법회에 와서 법문을 자꾸 듣는 것은 사무량심 체화에 아주 유용한 바탕을 마련해줍니다. 그리고 선지식에게 점검을 수시로 받아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어디에 가 있는지 좌표 확인이 안 되어요. 그런데 공부한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좌표가 바로 보이거든요. 자신이 지나왔기에, 지금 이 사람이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가 보여요.
예를 들어 간화선 하신 분들이 극적인 체험 하고서 마음이 확 맑아졌는데 그 다음 후속 발전이 안 되고 계속 헤매다보면 일상 속에서 수행이 순일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흔들리거든요. 안경을 딱 써서 존재현상을 확실히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열렸는데, 그 전에는 안경을 쓰지 않아 글을 볼 때 흐리멍텅하게 봤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분별이 잘 안 되어 그냥 넘어갔는데 지금은 분별이 되니 나쁜 것, 틀린 것 잡아내고 거기에 반응하고 저항하고 꾸짖고 화내고 하면서 자기 수행의 힘이 자꾸 흔들립니다. 이때는 빨리 점검 받아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이런 심리적 상태가 되는지를 분명히 인지하고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태로 들어갔을 때는 자꾸 선지식을 만나서 공부를 점검하고 옆에 좋은 도반들이 있으면 자꾸 나를 비추어봐야 해요. 그래서 도반들과 탁마하여 모난 부분을 갈아내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쓸데없는 허물들을 벗겨내는 것, 이게 탁마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영어로 탁마를 어떻게 표현하나 하고 망설일 때 송광사에 가 있는 제 상좌 진담 스님이 숭산 스님께서 설명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하지 감자를 막 캐어 껍질이 연할 때 포대에 넣어 물을 조금 담아 막 문지르면 서로 부딪혀 껍질이 쉽게 벗겨집니다. 도반들끼리 자꾸 부딪히다보면 가식의 허물이 떨어져나가고 알몸이 드러납니다. 이게 도반들끼리 할 수 있는 탁마입니다. 이런 상태로 진행될 때는 도반과 선지식의 역할이 참으로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어라
게송마다 끝에는 이 말이 반복됩니다. 최상의 행복이 따로 어디에 열반의 세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여기서 용서하고 관용하고 선지식 친견하고 이런 것 자체가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부처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부처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순간순간 인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면 그 찰나에 내가 부처에요. 그게 10분 연결되면 10분간 부처예요. 20분간 되면 20분간 부처고요. 10분, 20분 후에 ‘안 된다, 시기 질투심 나고 화가 났다’ 그러면 중생이에요. 그랬다가 다시 놓고 관용, 용서, 인내가 된다 하면 부처예요. 쉽죠? 참 쉽죠 잉? (웃음)
<5주만에 붓다 되는 법>이라는 책이 있어요. 원래 이태리 분이 이태리어로 써서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간된 책인데, 전에 출판사에서 그 책 번역 의뢰가 와서 제가 직접 할 수 있는 시간이 안 되어 소나님에게 번역하라고 하여 번역 다 한 원고를 제가 감수, 교정하고 있는데 서양인들은 부처님 가르침 핵심을 참 빨리 파악은 한다, 참 요리를 맛있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현대인들이 부처님 가르침 정수를 군더더기 없이 알 수 있게 재구성 했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다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분은 불교 학자가 아니고 불교 수행을 깊이 한 것도 아니고 심리학자로서, 틱낫한 스님의 <옛길 흰 구름(Old Path, White Cloud)>이라는 영어 책- 부처님 일대기를 소설로 쓴 두꺼운 책-입니다. 틱낫한 스님 특유의 시적인 필체로 쓰여져 있죠. 이 책이 서양에서도 유명하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돼 있습니다. 이 이태리 심리학자가 아마도 이 책을 보고 감명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서 사성제, 팔정도라는 엑기스만 뽑아 <5주만에 붓다 되는 법>이라고 제목을 달고 책을 내서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나봐요. 그 책이 번역서로 곧 출간되는데, 거기서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더군요.
이 저자는 서양인의 입장에서 불교를 자꾸 심리학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불교는 철학도 종교도 심리학도 아니라고 하면 정확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이라 규정했을 때는 또 그 함정에 빠져요. 물론 불교에 심리학적 측면이 참으로 많죠. 그래서 현대 심리학에서 불교를 정말 매력적으로 생각하죠. 그렇다고 해서 심리학이라는 틀로 딱 가두어버리면 불교의 큰 바다의 한 부분만 갖고 불교라고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이 책에선 ‘붓다 되기(becoming a Buddha)'라 했는데 저는 ‘붓다로 살기(living as a Buddha)’라고 바꿨으면 좋겠어요. 붓다로 사는 거예요. 부처 ‘되려고’ 팔정도 수행하면 계속 갈증이 생겨요. 이만큼 올라가서 ‘내가 이렇게 사무량심 수행해서 희열감 체험하고 행복감 속에서 했는데 어제 미산 스님과 할 때는 잘 됐는데, 집에 가서 혼자 하려니 안 되고 맨날 번뇌 망상에... 왜 이게 안 될까...’ 막 이렇게 추구하는 거예요. 뭔가 되려고 하고 뭔가를 구하고 이렇게 하면 이미 십만 팔천 리 방향이 다른 데로 가버렸어요. 되려 하는 게 아니라 지금여기서 바로 붓다로 살아야 해요. 불교 수행은.
팔정도 수행이 바로 그걸 말씀하시는 것이고, 행복경의 행복 수행도 전부 그런 구조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님 잘 섬기면 그 자리가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거예요. 남편 잘 봉양하면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거예요. 아내 잘 보살피면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예요. 이게 나와요. 앞에 5번 게송에서 이미 했지요.
동반자 부모 자녀 잘 돌보는 것
모든 일 정연하여 혼란치 않아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어라
빨리어 원문엔 ‘동반자’가 아니고 ‘아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되죠. 혼나요, 여성들한테. 요즘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남성들이 편하려면 세 여자 말만 고분고분 잘 들으면 된대요. 첫 번째가 누군지 아세요? 어머니가 아닙니다. 마누라. 두 번째가? 장모. 세 번째가 내비게이션 여인이래요. 운전할 때 그 여인 목소리 안 따라 가면 엉뚱한 데로 갑니다. 좀 틀리더라도 참아야 결국 가고 싶은 데로 갑니다. 제가 처음에는 ‘아내’라고 번역했다가 ‘동반자’로 바꾸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아내에게 남편이 동반자니까요. 이렇게 8번과 9번은 사무량심 수행, 삼매 수행과 연결돼 있습니다
자, 그러면 만트라를 통해 어떻게 삼매에 들어가는가? 이건 아주 단순합니다. 만트라는 똑같은 음을 계속해서 느리고 빠르고 느리고 빠르게 반복하는 겁니다. 반복할 때 뜻을 머리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뜻은 내가 알고 체득해 있어요. 그렇게 딱 인정을 하고, 체득해서 일념이 되면 그 순간 내가 ‘부처가 되는’ 게 아니라 ‘부처인’ 거예요. 이 사고방식부터 바꿔야 해요. 간화선은 돈오돈수, 즉 돈교(頓敎)를 가르치는 불교 전통입니다. 뭘 닦아서 된다는 개념을 갖고 시작하면 항상 닦으려고 아등바등해요. 그런데 이미 이뤄졌다는 마음을 갖고 순간순간 깨달음을 실현해간다는 자세가 됐을 때는 가면 갈수록 힘을 갖게 됩니다.
여기까지 게송 해설을 했고 다음 법회 때 게송 10~12번을 같이 해설하려고 합니다.
금년엔 1월 법회가 다섯 번 잡혀 있지요. 네 번째 법회가 원래 초청법회인데 여러 스님들께 연락하여 모시려 했는데 1월은 다 바쁘시더군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월호 스님도 일요법회가 있어 비우기가 쉽지 않다 하시어, 품앗이를 하기로 하고 제가 그 스님 절에 가서 해드리고 스님이 이리로 오신다는 것까지는 동의가 되었는데, 앞으로 비는 시간을 찾아서 오시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초청을 안 하고, 계속해서 행복경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하네요. 여러분에게 다 전해주고 싶어서요. 기도를 하니까 자꾸 아이디어가 나와서 뭐가 자꾸 만들어져요. 마하 망갈라 만트라도 공유하고 싶고, 또 ‘지금여기불’을 정진하면서 해보니, 그것을 정식으로 정형화하여 기도에 사용하면 좋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여러분에게 마음수행학교에서 늘 얘기했던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 원리 네 가지 - 회광반조, 여실지견, 정념정지, 즉시현금-를 가지고 지금여기불의 앞부분을 구성해보니 딱 맞아요. ‘나무’는 돌아가 귀의한다, 이렇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거든요. 늘 회광반조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고 지금여기에 깨어 있겠다는 네 가지를 연결해 지금여기불을 하고 후렴구는 지금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 정근, 관세음보살 정근 하듯이 만들어서 하게 되면 좋은 수행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공개는 다음 법회 때 하겠습니다.
오늘은 마하 망갈라 만트라를 세 번 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꾸준히 깊이 있게 하고 싶은 분들은 아침 기도, 오후 기도에 오시다보면 운이 좋으면 진언을 아주 길게, 깊게 하는 때도 있고 빠르게 할 때도 있고, 때에 따라 다릅니다. 저도 지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 연구 하면서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 중에 오시면 더 구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오후 2~4시에는 처음 한 시간은 기도하고 세 시부터 네 시까지는 그날 제가 새벽 두 시부터 깨어 정리한 것들을 같이 얘기하고 실험해보는 시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은 오시면 뭔가를 많이 주워가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안 하는 말도 거기서는 하거든요.
그럼 마하 망갈라 만트라를 하겠습니다.
우선 ‘옴’을 일곱 번 같이 합니다. 자애명상 하듯이 합니다. 숨을 들이쉬라 내쉬라 말 안 해도...
제가 이 좌종을 칠 때는 들이쉰 상태에서 내쉬면서 ‘옴’을 합니다. '옴' 하다가 음이 사라진 그 자리 미세한 그 자리가 고요한 자리거든요 본래 진여 성품이 드러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보는 것이 요점입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옴...
다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옴......
옴...... 숨을 완전히 토해내고 끝에 가면 자동으로 숨이 들이쉬어지죠.
옴.......
옴......
옴......
옴......
옴......
마하 망갈라 마이뜨리 까루나 무디따 우뻭샤 훔
옴 마하 망갈라 마이뜨리 까루나 무디따 우뻭샤 훔
옴 마하 망갈라 마이뜨리 까루나 무디따 우뻭샤 훔
여운을 그대로 따라가보세요.
사두 사두 사두 (좌종 소리)
성불하십시오.
[출처] 1.16.팔정도법회 미산 스님 법문 - 행복경을 통해 본 행복(5)+행복 진언 (상도선원) |작성자 소나
모두 합장해주십시오.
행복경을 빨리어로 읽겠습니다. (스님 독송)
지난 1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오늘은 방금 읽은 행복경의 마지막 부분을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게송 10부터 오늘 함께 하겠습니다.
게송 8~9 안에 여덟 가지 덕목이 있어, 천상(삼매)의 행복과 연관된다고 했죠. 인간의 행복보다 한 차원 높고 깊은 것이 천상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인 사무량심 수행에 대해 지난 주에 말씀드렸어요.
팔정도법회 때 해오던 자애관법을 요즘은 아침 예불 시간에도 하고 있습니다. 수행방법을 구체화하고 공유하여 사찰 아닌 다른 곳에서도 같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리더십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심리학과 권석만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이를 개발하고 계신데, 그분이 어제 선원에 오셔서 함께 의논하면서 자료를 살펴보니 매우 고무적이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우리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어요. 외국 것을 들여오면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도 하고 우리와 딱 맞지도 않거든요. 불교 내에 얼마든지 그런 자료, 자원이 많으니까 앞으로 더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돼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삼매 개발법이 있어왔지만, 그것들이 체계 속에서 지도되지 않아 조각이 맞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삼매 수행의 위상을 분명히 알아야만 삼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을 하면 이상한 곳으로, 정법이 아닌 쪽으로 가게 됩니다. 이른바 ‘기경팔맥’이 통하는 순간, 훨씬 수승한 행복감이 지속되니 정확한 지도, 지견, 정견 없이는 집착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지요. 그래서 이런 것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정확히 해석되고 정리되도록 만들어가기 위해 <행복경>을 강의하고 삼칠 일 동안 정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송 10~12에서 말하는 최상의 행복의 방향성은 이 여덟 가지 덕목에 포함됩니다.
‘열반의 행복’이라 할 때 ‘열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적멸’ 즉 탐진치 번뇌가 멸해진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지고한 행복, 무위법적 행복입니다. 그럼 무위법적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열심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정진함이 없으면 일반적 행복도 만끽하기 힘듭니다. 정진은 꼭 필요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앞에서부터 세어서 32번째 덕목이 ‘청정한 삶’입니다. 불자건 아니건, 삶에 윤리적 기준을 갖고 사는 것이 청정한 삶입니다. 빨리어로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하지요. 이는 성생활과 관련된 용어로서, 맑은 부부생활 즉 도에 넘치지 않는 부부생활을 하며 결혼을 통한 관계 외에 다른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도덕적 삶을 산다’는 것, 즉 정법에 맞게 사는 삶이라는 뜻도 되죠.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는 데에 계(戒)가 빠지면 중간에 가다가 큰 사고가 납니다. 아무리 삼매 수행을 잘 해서 기경팔맥이 돌고 빛이 난다 해도 자칫 잘못하면 옆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삼칠일 기도 정진 기간인 요즘, 새벽 일찍 일어나 수행법에 관련된 책을 봅니다. 남회근 저
<불교수행법>이 최근 재번역되어 나왔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통과 정신병은 친구다’.
여러분들 신통 좋아하시죠? 그거 위험합니다. 이 욕계에서는 욕계의 환경에 맞는 행동을 하고 살아야지, 잘못하면 정신병자가 됩니다. 전에 만난 한 스님이 생각나네요. 그분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너무도 성실하게 살았는데 제가 만나봤을 때는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기운이 고갈되고, 눈동자가 계속 움직이고 불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산에 도(道)꾼들과 같이 있다 빠져 나왔다는데, 계속 그들이 자기 뒤를 좇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였느냐고 물었더니, 태백산에 신통력 하는 사람끼리 모여 산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 스님을 백양사에 데려 갔는데, 거기 가서도 적응을 못 했습니다. 지금 어디 들어가 있으시다는데... 그때 제가, 신통 같은 것에 빠지면 승려라도 엉뚱한 길로 가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구나 생각했었는데, 이 책 (불교수행법) 읽으면서 그 스님이 떠올랐습니다. 헤어나려 했을 때는 이미 발목 잡혀 있는 상태였던 거죠.
초기경전인 <사문과경(沙門果經)>에 보면 부처님은 신통을 금지하셨습니다. 신통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왜 그럴까요? 신통을 발휘할 때 내공이 깊지 못하면 교화는커녕 엉뚱한 정보나 기대감을 주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미산 스님은 자기가 신통을 못하니 저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웃음) 요즘은 신통을 손바닥 안에서 스마트폰으로도 부릴 수 있어요. 그 안에 대장경이 다 들어가 있는 시대입니다. 멀리 있는 손주가 보고 싶으면 컴퓨터로 화상통화도 가능합니다. 이게 천안통 아닙니까. 신족통? 아무리 멀어도 비행기 타면 하루만에 가지요. 타심통? 요즘은 뇌파를 읽어내는 기계들도 생겨났지요. 그래서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읽어내요. 조심하세요. 이런 시대인데 신통을 함부로 얘기했다가는 큰코 다치고 부처님 정법에서 자꾸 멀어집니다.
33번째 덕목은 사성제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사성제는 뭐죠? 고, 집, 멸, 도. 이를 명료하게 받아들이고 체득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가장 체득한 사람이 삶을 가장 깊이 있게 산다고 합니다. 불교는 소극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가늠할 수 없이 폭이 큰 종교입니다. 왜? 고통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니까요. 고통을 절대자에게 전가하는 의존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부처님께서 “고통의 본질을 직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성제 법문은 모든 불교 전통의 바탕이 됩니다. 모든 것이 괴로움에서 시작합니다. 고(苦)의 원인은 갈애(집착)입니다. 어떤 현상이든 있는 그대로 보고 흘려 보내면 될 텐데, 집착이 삶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고를 없애는 구체적 길[道]이 팔정도입니다. 고통이 사라지고 온전한 행복이 드러나는 곳이죠. 위없는 행복은 괴로움의 소멸[滅]입니다. 이것이 열반이죠. 니르바나(nirbana). 탐진치의 불을 훅 꺼서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지고의 행복만 발현되는 자리입니다. 이게 34번째 덕목입니다.
그러면 사성제를 관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행복경을 그냥 좋은 말씀, 지당한 말씀으로 읽어 넘길 것이 아니라 이 경에서 실질적인 수행법을 끌어내야 해요. 방법은 사념처 수행입니다. 대념처경에 나오지요.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깊이 본질적으로 관찰해 지혜를 발현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만들어진 존재 현상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챙겨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호흡관법 수행도 이에 포함됩니다. 무아를 신, 수, 심, 법을 통해 보는 것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여기서 생긴 지혜로 살아갈 때 인간의 행복, 천상의 행복, 열반의 행복이 완성됩니다.
사념처 수행을 바탕으로, 여러 지역과 역사를 통해 어떤 수행법이 발전했는지를 살펴보면, 지관(止觀,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의 구체적 방법이 나오고, 간화선도 이 바탕 위에서 정리해보면 훨씬 명료합니다. 실제로 접근 가능한 방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초기불교와 간화선 사이에 어떤 고리가 있는지? 제가 지난번 국제 간화선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보면 그 연결을 시도한 실마리가 있습니다. 상도선원에 ‘수처작주회’라는 간화선 모임이 생겼습니다. 수행 체계를 정립하는 입장에서, 철야 정진 때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다음 주 금요일부터 중앙승가대를 이번에 졸업하는 태원 스님이 오셔서 ‘붓다 요가’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앉아서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를 종합적으로 관찰하며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요가 시범을 보인 후, 만약 모두 원하면 이를 정식 프로그램으로 도입해 사흘간 집중 지도할 예정입니다. 간화선 공부를 제대로 하시겠다는 분들은 금요 정진에 꼭 참석해서 이걸 배우세요.
다음 11번 게송에도 맛있는, 감칠 맛 나는 얘기들이 많아서 다 하지 말고 좀 아껴뒀다가 다음 법회 때 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자애명상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 앞에 불교신문이 한 부씩 다 나누어져 있지요? 요즘 불교 집안 내에 큰 변화가 있습니다. 자주성 회복의 움직임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정부, 행정 쪽에 의존해왔다는 각성이 있었고 이제 정신 차리고 불교 자체 내에서 템플스테이, 신도 관리, 교육, 포교, 수행을 적극적으로 해나가자는 생각 하에 불교가 결집하고 이 힘으로 불교 중흥을 이루어나가자는 것입니다. 종단 핵심부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 종도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신문 매체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불교신문은 종단의 기관지인데, 지난번 여기 오셔서 간화선을 지도하셨던 수불 스님께서 사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구독자가 100만 명도 채 안 된다고 하여 구독 배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필진도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저도 여기에 행복경 38가지 덕목에 관한 글을 연재하려다가, 이미 이 주제에 대한 책을 내기로 출판사와 계약이 된 상태이므로 이를 감안해 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께 나누어드린 불교신문 9쪽에 상도선원 마음수행학교에 관한 기사가 있으니 읽어보시고 그 옆에 인경 스님의 명상 수행 에세이도 잘 읽어보세요. 명상 수행에 관한 연구를 해오신 훌륭한 스님이십니다.
이런 기사들이 많이 게재되어야 합니다. 제가 꼭 보시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불교 발전을 위해서 구독에 참여하시고 회사의 사장님들은 구독해서 직원들이 널리 보도록 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불교 변혁의 신호탄으로, 오는 1월 27일부터 시작해 매달 ‘승가교육 진흥위원회’가 열려 승가교육 전반에 관한 점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 큰 틀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하여 ‘한국 불교 중흥을 위한 연찬회’가 매달, 연 12회 열릴 것입니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실무를 맡습니다. 저는 3월에 발표하게 됩니다. ‘이 시대에 불교적 가치란 무엇인가?“에 관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럼 여기까지 하고, 이제 몸을 편안히 하시고 자애명상에 들어가겠습니다.
첫댓글 사진과 함께 훌륭한 해설과 풍부한 참고 자료를 덧붙여 주시니 답사 유적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김희준 선생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김선생님의 유교와 불교에 대한 해박한 학식에 대하여 새삼 감탄합니다.
윤현중 샘 이번 여행에서 만나뵈서 참 반가웠습니다. 택견을 지도하여 주시어 저에겐 뜻밖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좋은 사진들도 많이 촬영하여 주시어 더욱 고맙구요. 몇 가지 상식 이야기가 샘들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두 영광입니다. ^^
이걸 어떻게 다 읽을까요? 한 달은 걸릴듯 합니다. 이렇게 자료를 구해서 올려주시는 김희준 박사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을 계속 많이 해 주십시요.
괴로움에서 무너지지 않는 진정한 행복을 이루는 것이 불교라면, 이 행복경은 정말 좋은 경전인데, 날마다 독송하시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여겨요. 이런 행복경을 현장법사 원측스님 탑이 있는 흥교사에서 만나고, 또 이를 상세하게 풀어주는 미산 스님의 법문이 있음에 정말 우리는 행운이라고 보아야죠. 인연이 없으면 어떤 좋은 보배가 눈 앞에 나타나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이번 여행팀은 그간에 선업공덕을 많이 지었는가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