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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 三十八章 .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하덕위지이유이위,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仍之.
상인위지이무이위, 상의위지이유이위, 상례위지이막지응, 칙양비이잉지.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也,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也.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야,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야.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處其薄.
시이대장부, 처기후, 불처기박.
居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거기실, 불거기화, 고거피취차.
늘상 惠澤(혜택)을 누리면서도 주지하려 들지 않으려 하는 것을 윗 된 덕 上德(상덕)이라 할 것인데 이런 것은 덕이 된다할 것조차 없다 所以(소이) 利德(이덕)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德(덕)이 實狀(실상) 존재하는 것이다 아랫 된 덕은 그 利德(이덕) 되는 것을 잃치 않으려고 누구나 한다 實質的(실질적)으로 利德(이덕)을 주는 값어치 있는 것 값을 따져선 利害得失(이해득실)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實狀(실상) 利德(이덕)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없어선 안될 물과 불이나 공기 등은 이런 것은 누구나가 고른 혜택을 누리는 것으로서 그 값을 메길 순 없는 아주 윗 된 덕이라 할 것이라 그 일부러 그런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인 줄 注知(주지)하려 들지 않고 오직 目前(목전)에 자신에게 덕을 가져다 주는 값을 메기는 이해득실에만 拘 (구애)되어선 그 利德(이덕) 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라 그렇게 束縛(속박) 시키는 것을 갖다가선 무슨 德(덕)이라 할 것이 있겠느냐 이다
오히려 심신을 고달게 황폐한 방향으로 영악하게 馳騁(치빙)하는 것이지 좋은 上德(상덕)은 못된다는 것이다 오직 이해득실에 구애되지 않게 하는 德(덕)이라야만 그 진정한 값어치 있는 上德(상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라 그런 本然(본연)에 無爲(무위)한 자연에 덕 되어 돌아가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도 類推(유추)하여선 本(본)을 받으라 하는 그런 말씀인 것이리라 上德(상덕)이라 하는 것은 함이 없는 것이라서,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하려하여도 할 수가 없다 아랫 덕은 爲的(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서 하려들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所以(소이) 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이해득실을 논하는 아랫 된 덕들이라는 것이다 윗 된 어짊은 설사 할려 한다하여도 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윗 된 바름 도리 正義感(정의감)을 내포한 의로움이라 하는 것을 爲的(위적)인 것이라서 하려들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윗 된 禮儀(예의)라 하는 것은 할 수가 있는 것이어도 그 呼應(호응)함이 없다면 그 팔을 비틀어서라도 내가 예의 차린 데 대한 상대방에게서 그 예의에 대한 답을 되돌려 받고자한다
이런 까닭으로 길을 喪失(상실)한 후에 德(덕)을 찾게되고 덕을 傷失(상실)한 후에 어짊을 主長(주장)하게되고 어짊을 상실한 후에 의로움을 주창하게되고 정의감이 사라진 후에 그 예의를 찾게되는 것이다 所以(소이) 道(도)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여기서는 말하여주는 것이라 그 利害(이해)에 얽메여선 근본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여기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것을 妄覺(망각)하게 됨으로 자연 나중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이리라 無爲自然(무위자연)의 질박한 순수한 길을 추종한다면 그 上德(상덕) 이나 하德(덕) 이나를 논할 것 조차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 내게 무엇이 덕이 되는가를 찾게 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덕되 는 것 조차 망각을 하는 시점에 온다면 무엇 어느 행위가 어짊이 되는가를 논하게 된다는 것이고 殺身成仁(살신성인)이라 하여선 자긴 心身(심신)을 獻身(헌신)하는 가운데 어짊이라 하는 것의 극한 점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라 그래서 할려 하여도 할 수가 잘 없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러한 어짊이라 는 행위 일은 어려운 것이라서 자연 추종할 것을 거더 치우게되고 망각하여 버리게 된다는 것이라 그런 다음 무엇이 그렇다면 정의감이고 오른 행위인가를 생각하게되고 그런 일에 종사하려 든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러한 오른 일은 하려한다면 얼마던지 할 것이 많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정의감을 내세워 일을 하다가보면 자연 是非(시비)黑白(흑백)을 區分(구분)하려 들고 그런 가운데 해서되고 해서는 안될 것을 가려선 그 예의라 하는 것이 생겨나선 자신의 할 도리 禮儀(예의)를 차릴려 든다는 것인데 그렇게 예의를 차리는 상태에 들어와서는 그 내가 예의를 차린 행위를 하였다면 반드시 보상 심리에 의해서 그 예의를 차려 받은 자에게 그 호응 답이 없다면 억지로라도 구하는 행동 그 '왜 이너마 먹었으며는 값을 치루지 않느냐'는 식으로 그 팔을 강제로 비틀어서라도 그 예의 먹은 것에 대한 값을 쳐서 돌려 받고자 한다는 것이라 그러므로 예의라 할 것 조차 사실은 없다 할 것이라는 것이리라 이런 원인들은 모다들 그 전단계를 차츰 멀어지고 망각 상실 함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무릇 예의라 하는 것은 충신이라 하는 개념으로서 사람들을 野薄(야박) 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어지럼 움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남보다 앞서가는 知識(지식)이라 하 는 것은, '道(도)' 所以(소이) 길의 꽃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 따서 먹는 맛있는 알찬 열매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모다 어리석음의 시발이 된다는 것이다 이래서 대장부는 그 후덕스러운 곳에 거처를 삼지 야박한 곳으로 몰아붙이는 행동거지에는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알찬 단 열매를 딸려 하지 그 지면 시들어선 흉함만 보이는 目前(목전) 화려하게 보이는 꽃이라 하는 것에는 머물지 않는다 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한다고 하고 있음인 것이다
* 말이 그렇치 각자 취향에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니 그 과정을 중시하는 자와 그 결과를 놓고 따지는 자와의 對立(대립)角(각)이라 할 것이라 개같이 벌어선 정승같이 쓰겠다하는 자와 정승 같은 일 행위에 종사하여선 그 결과야 어떻든 간 고고한 품위를 한번 지녀보다간 그 시들어 지면서도 그 향기를 내뿜어 보겠다는 것 이런 것들의 차이라 할 것인데 그 각자의 숭상하는 理想(이상)에 있는 것이지 어느 것이 比重(비중) 있다고는 하질 못할 것이다 老聃(노담)이 말을 추종한다면 흉악한 일을 해서라도 돈만 많이 벌으면 짱땡이라 는 말로도 들리고 그 열매의 값어치를 치중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꽃을 경시하는 풍조는 소이 꽃이 없으면 열매가 어디 있겟느냐 이다 다
나물될 잎은 떡잎 부텀 알아본다고 그렇게 위장 을하고선 그 질박이니 뭣이니 순수성을 내세우는 것 갖지만 그렇게 꼼꼼하게 이해득실을 저울질 하여선 열매를 취하겠다는 식의 간악한 심보를 가진 것을 무슨 그 道(도)라 할 것 조차 없다 할 것이다 이미 주장하는 理想(이상)이 글러 먹었는지라 그 움나는 떡잎이 바르지 않으니 그 나중 활착 무성한 그 道(도)라하는 주장이 그 무슨 바르게 비춰질 리가 없다는 것이리라 인생이 그 나중 쭉정이 삶으로 비춰져선 그 걸림 없는 벗어 버림이 될 망정 그 삶의 足跡(족적)을 바로 남겨야 한다 할 것이다 老聃(노담)이 필자가 이런주장을 하게 되면 말을 얼른 둔갑질 하여선 그게 바로 내가 주장하는 알찬 열매라하는 것이다 요렇게 술책을 부리듯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체의 주장이 다 말 장난에 불과한 것인지라 말을 돌린다면 如反掌(여반장)이라 그 생각 바꿔놓기 엮음은 순간이면 뒤잡아 놓는 것이라 하나도 그 信用(신용)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무슨 이론 이던간 그 병폐가 다있고 矛盾(모순)이 다 있게 마련이고 그 말이 씹히는 경향이 다 있게 마련이라 그 트집을 잡으려면 자연 상채기가 나게 마련이고 연약한 곳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 본연에 완벽한 것은 없는 것이라서 그 완전 추구를 목적으로 그 행위가 이어지는 것인지라 그러면서 자꾸 舊態(구태)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옷 象(상)을 하여선 내어 보이는 것인데 이것을 그 佛家(불가)에서 말하는 所以(소이) 解脫(해탈)이라 하는 것이고 世人(세인)은 그 文化(문화)繁榮(번영)이라 하고 發展(발전)이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時空(시공)우주 는 그 앞으로 향하여 전진 굴러 간다할 것이다
* 本文 三十八章 = 윗덕은 덕이 아니다 (*譯者言= 덕이란 큰 덕이라 하는데 그 어떤 대상체나 뜻하는 게 제격을 원만하게 갖춰 갖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윗덕은 덕이 아니다 또는 이래서 덕이 존재한다 아랫덕은 덕을 버리지 않는다 이래서 덕이 없다 윗덕은 함을 없애고자 해서 (또는 할게 없어서 할려고자 않함으로써) 함을 씀이 없고(하지 않고) 아랫덕은 할려해서 함 씀이 존재한다 위는 어짊을 할려해서 함을 씀이 없고 위는 의로움을 할려해서 함 씀이 있고 위에서 예를 할려해서 (*무위나 유위나) 적응(대응)할게 없다 한다면 곧 팔뚝을 비틀어서라도 손에 잡은걸 빼앗듯이해서 (*仍之=잉지) 즉 원인을 제공 받을려 하는 것이므로 길이 길의 眞價(진가)를 억지로 버리게 한 후에 덕이라 하고 덕이 덕된 진가를 억지로 버리게 한 후에 어짊이라 하고 어짊이 어짊을 억지로 버리게 한 후에 의로움이라 하고 의가 의를 억지로 버리게 한 후에 예의라 하는 게 될 것이다 대저 예란 것은 (*사람이 심신 행동거지에 있어서 가져야 할 덕목을 갖다 예라 한다) 충성 믿어움을 엷게하여서 어지러움(*다스림)의 머리가 된다 (즉 겉치장만 할려 하는 게 되니) 속심의 충실함과 미더움을 소홀히 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식이 앞서는 것은 길의 꽃이라서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래서 대장부는 그 두터움에 머물르고 그 엷은 곳엔 머물르지 않는다 그 알찬 열매에 머물르고 그 꽃엔 머물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함인 것이다 *譯者附言= 소이 허례의식에 치중치 않고 충실함에 비중을 두겠다는 뜻이다 뒷 소씨 주석을 본다면 충실하고 예의가 없음 충실함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예의를 세워서야 만이 충실함의 아름다움이 밖같에 넘쳐 피어나게 된다 한다
* 윗 된 덕 은 공로가 있고 자랑하려 들지 않는 겸손한 사람처럼 덕이 아니라 한다, 아랫 덕은 조금만큼 이득을 주곤 덕이라 생색을 내려든다 소위 그 덕 준 것을 잃지 않을 가를 겁을 낸다 이래서 덕이랄 것도 없다, 상 덕이라 하는 것은 함 없는 가운데서 됨됨이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요 아랫 덕은 하려고 해서 갖게된 것이다
윗 어짊이라 하는 것은 일부러 하려고 하여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윗 된 의로움이라 하는 것을 할려고 한다 면 야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윗된 예의라 하는 것은 한다하여도 호응함을 굳이 원함이 없는 것인데 곧 팔뚝을 비틀 듯이 하여선 그 호응하길 원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있게되는데 소위 그렇게되면 길이라 하는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길을 잃은 다음에야 덕을 찾게되고 덕의 존재를 잃은 다음에야 어짊을 생각하게되고, 어짊을 잃은 후에야 의로움을 찾고 의로움을 잃은 후에야 예의를 찾게된다는 것이다
대저 예의라 하는 것은 그 충성스러움과 미더움이라 하는 것을 몰아 재켜선 각박하게 하는지라 어지러움의 머리가 된다 이상 앞에 여러 나열한 것들은 길이라 하는 것의 꽃이 될 뿐이라서 어리석음의 시작이 된다 이래서 대장부는 그 돈후한데 머무르려 하지 그 각박 한데는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그 알참에 머무르려하지 그 보기 좋게만 여겨지는 꽃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하는 것이다
蘇註
소주
聖人從心所欲不踰거 非有意於德而德自足 其下知德之貴 勉强以求不失
성인종심소욕불유거 비유의어덕이덕자족 기하지덕지귀 면강이구불실
蓋僅自完耳 而何德之有 無爲而有以爲之 則猶有爲也 唯無爲而無以爲者
개근자완이 이하덕지유 무위이유이위지 즉유유위야 유무위이무이위자
可謂無爲矣 其下非爲不成 然猶有以爲之 非徒作而無術者也 仁義皆不免
가위무위의 기하비위불성 연유유이위지 비도작이무술자야 인의개불면
於爲之矣 其所以異者 仁以無以爲爲勝 義以有以爲爲功 耳 德有上下 而
어위지의 기소이이자 인이무이위위승 의이유이위위공 이 덕유상하 이
仁義有上無下 何也 下德在仁義之間 而仁義之下者不足復言故也 自德以
인의유상무하 하야 하덕재인의지간 이인의지하자부족복언고야 자덕이
降而至於禮 聖人之所以齊民者極矣 故爲之而不應 則至於攘臂而强之 强
강이지어례 성인지소이제민자극의 고위지이불응 즉지어양비이강지 강
之而又不應於是刑罰 興而兵甲起 則徒作而無術矣 忠信而無禮 則忠信不
지이우불응어시형벌 흥이병갑기 즉도작이무술의 충신이무례 즉충신불
見 禮立 而忠信之美發越於外 君臣父子之間 夫婦朋友之際 其外燦然而中
견 례입 이충신지미발월어외 군신부자지간 부부붕우지제 기외찬연이중
無餘矣 故順之則治 違之則亂 治亂之相去 其間不能以髮 故曰亂之首也
무여의 고순지즉치 위지즉난 치란지상거 기간불능이발 고왈난지수야
聖人玄覽萬物 是非得失畢陳於前 如鑑之照形 無所不見 而孰爲前後 世人
성인현람만물 시비득실필진어전 여감지조형 무소불견 이숙위전후 세인
視止於目 聽止於耳 思止於心 冥行於萬物之間 役智以求識 而偶有見焉
시지어목 청지어이 사지어심 명행어만물지간 역지이구식 이우유견언
雖自以爲明 而不知至愚之自始也 世之鄙夫 樂其有得於下而忘其上 故喜
수자이위명 이불지지우지자시야 세지비부 낙기유득어하이망기상 고희
薄而遺厚 采華而棄實 非大丈夫孰能去彼取此.
박이유후 채화이기실 비대장부숙능거피취차.
* 소씨 주석하대 성인이 마음을 쫓음에선 그 각도기로 재는 듯한 공식적인 원리원칙을 넘지 않고자 하는데 있다 덕에 뜻을 두어서 덕이 스스로 넉넉지 못하다 해서 그 아랫 된 덕의 귀함만 알아서 힘써 강제로 찾아선 잃어버리지 않을려 함 대저 겨우 자신만 완성시킬 뿐일 진데 무슨 덕이 존재한다 할 수 있겠는가? 할려함이 없다 하면서도 함을 씀이 존재하면 오히려 할 려 하는 것이요 오직 할려 함이 없어서 함을 씀이 없는 자라야만이 그렇게 바르게 하염이 없다 할 것이라 그 밑에서 해서 이루지 아니함이 없음 그러나 오히려 함을 씀을 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니 도대체 (*만들어)일 할려 하는 것이지 (그일하는걸) 꾀함이 없는 자 라고 할 수 없다 어짊과 의로움 모두 한다하는 뜻에선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그 씀에서 다른 것은 어짊을 함을 씀이 없음으로써 더 나은 것을 삼고 의로움은 함을 씀을 둠으로써 공을 삼을 뿐이다 덕은 위와 아래가 있어도 인의는 위는 있고 아래는 없다 이는 어찌 되어서 그런가? 아랫된 덕은 어짊과 의로움 사이에 있어서 어짊과 의로움의 아랫된 것은 유족하게 덕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덕이 스스로 내리어서 예의에 이른다 성인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극진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 그러므로 위하여 가대 적응할게 마땅찮으면 팔을 비틀어 빼앗듯이 강제로 함에 이르러 서라도 할려하고 그렇게 강제해서도 또한 적응할게 없으면 이제는 형벌을 일으키게되고 종당에는 군사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되면 도대체 인위적으로 지어한다는 게 꾀할 방도란 게 마땅한 게 없으리라 충성스럽고 믿음직해서도 예의가 없으면 충성스럽고 믿음직 한 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예의를 세워서야 만이 충성과 미더움의 아름다움이 밖같에 넘쳐 피어나게 되어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남편과 아내 벗의 사귐에 있어 그 밖이 찬란해져서 속에 여운이 있을게 없게 되리라 그런 까닭에 순응하면 다스리게 되고 어기면 어지러워지니 다스림과 어지러움의 모양이 서로의 거리가 그새가 털끝만큼이라도 능숙치 못할게 있는지라(*소이 治 亂의 거리새가 터럭끝 만큼의 간격도 안된다는 뜻) 그러므로 말하건대 어지러운 머리라 한다 (*즉 어지러운 머리= 어지러운 끝을 뜻함)성인이 만물을 그윽히 관찰컨대 옳고 그름 얻고 잃음을 마침내 펴 보이대 거울게 비치는 얼굴처럼 그대로 내보이는지라 보지 못할 바가 없어서 무엇을 앞세울게 있으며 무엇을 뒷전으로 한다 할 것인가? 세상사람의 봄은 눈에 머물러 있고 들음은 귀에 머물러 있고 생각은 마음에 머물러 있고 어두운 행실은 만물사이에서 하고 슬기를 짜내어 지식을 구하여서 우연하게도 나타남을 두게 된다 비록 스스로 써 밝음이 되어도 지극한 어리석음이 저절로 시작되는걸 모른다 세상에 더러운 필부 그 아랫된 곳에서 얻음 둠만 즐거워하고 그 고상한 뜻은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엷음을 기뻐하고 두터움을 버리고 꽃을 따고 알참을 버리게 된다 그러니 대장부가 아니면 누가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하는걸 능숙하게 한다 할 것인가?
呂註
여주
道之可道非常道 則庸有得而有之者乎 上德者 以無得爲得 唯其無得 乃所
도지가도비상도 즉용유득이유지자호 상덕자 이무득위득 유기무득 내소
以得也 故曰 上德不德是以有德 下德者以不失之爲得者也 唯其不失 故雖
이득야 고왈 상덕부덕시이유덕 하덕자이불실지위득자야 유기불실 고수
得而非德 故曰下德不失德是以無德 上德無爲非故無爲也 率德之自然而實
득이비덕 고왈하덕불실덕시이무덕 상덕무위비고무위야 솔덕지자연이실
無以爲也 下德不知出此而爲之 故不能不有以爲也 夫德無以爲足矣 而且
무이위야 하덕부지출차이위지 고불능불유이위야 부덕무이위족의 이차
有仁焉 則是爲之也 然上仁者之於仁 無所事仁而仁者也 是爲之而無以爲
유인언 즉시위지야 연상인자지어인 무소사인이인자야 시위지이무이위
也 仁則不可獨者也 必有義焉 雖上義 不得不爲者也 是爲之而有以爲也
야 인즉불가독자야 필유의언 수상의 불득불위자야 시위지이유이위야
仁者施之而已 義則擇所施之宜者也 未責所報也 禮則施報矣 來而不往非
인자시지이이 의즉택소시지의자야 미책소보야 례즉시보의 래이불왕비
禮 往而不來亦非禮 施報之義也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仍之 以其往
례 왕이불래역비례 시보지의야 상례위지이막지응 즉양비이잉지 이기왕
而不來 雖不以禮繼之 猶不爲非禮 以禮之理 固如是也 上仁上禮上義猶如
이불래 수불이례계지 유불위비례 이례지리 고여시야 상인상례상의유여
此 則其下者不論而見矣 由是觀之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차 즉기하자불론이견의 유시관지 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失儀而後禮 豈虛言哉 禮之相責望者如彼 則忠信自此薄 亂爭自此起 而智
실의이후례 기허언재 예지상책망자여피 즉충신자차박 난쟁자차기 이지
謀之所以用也 是禮雖所以治亂 適所以首亂也 前識雖所以用智 乃所以始
모지소이용야 시례수소이치란 적소이수난야 전식수소이용지 내소이시
愚也 夫何故 人之治常生於厚 厚則其性 薄則其僞 去性而作僞 未有不亂
우야 부하고 인지치상생어후 후즉기성 박즉기위 거성이작위 미유불난
者也 人之自知常在於明 明則其實 智則其華 離實而務華 則未有不愚者也
자야 인지자지상재어명 명즉기실 지즉기화 이실이무화 즉미유불우자야
是以大丈夫處其厚 不處其薄 居其實不居其華 故忘仁義 絶禮學 遺智慧
시이대장부처기후 불처기박 거기실불거기화 고망인의 절예학 유지혜
而志於道德之大全 是之謂去彼取此.
이지어도덕지대전 시지위거피취차.
* 여씨 주석하대. 길을 그렇게 떳떳치 못한 길을 갖다 말한다 할 것 같으면 사용할 곳에 얻어씀이 존재한다 할 것인가? 윗된 덕이란 것은 얻는 게 없음으로써 얻음을 삼음이니 오직 그 얻음 없음을 이에 써 얻음을 말한다 (* 즉 얻음 없는걸 얻는 것으로 한다는 것을 윗된 덕으로 친다는 것은 흡사 석씨의 아뇨 다라 삼막 삼보리와 비슷해 無實無虛 그릇이 되어 있는 것을 윗된 덕이라 하는 거와 같다 할 것이다 = 사람이 욕망이 없어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게 쉽지 않다 보시나 해탈의 갈구 등이 어찌 생각해보면 큰 욕망으로 이보다 더함 없는 욕망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말하길 윗된 덕은 무슨 세속적인 잇속을 논하는 그런 덕의 성질이 아니니 이래서 덕을 가졌다 하며 [(*譯者言= 즉 자타의 무슨 이해득실의 덕을 논할 그런 의미의 덕이 아니란 것이다 사람이 견물생심이라 물심에 뜻을 두면 탐욕이란 어둠이 심목을 가려 진정한 덕목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덕은 모든 욕망을 접는 그런 모습을 띈 것이라 할 것이니 남 보기에 덕성스럽게 보인다는 게 쉽지 않으니 가증스러움 가면적인 것으로 상대자에게 느껴지지 않게 해야한다 물론 어떠한 모습이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덕을 주고 자신에 실속만을 차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화려하건 낭비적인 것이던 초라하고 치졸하고 추접하고 치사유치하고 부끄럽고 인색해 보이고 어떤 것의 궂은 병 된 것이라도 상관없다 할 것이니 양 고기 국이 비록 맛있으나 여러 입은 다 맞추기는 힘드는 법이라 내가 그 어떤 이에게만 독특하게 원인제공 한 것이 아니라면 대상의 비뚤어진 심사까지 모두 책임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독특한 원인제공이라도 덕을 베풀기 위함에서 했다면 또 뭐 그리 탈잡힐 일이 있다 하겠는가?) 곧 자신이 덕의 모양을 이룰려 할 적에 성의와 최선을 다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유족 한 것이 되어 성인이라 아니해도 성자의 옷을 입은 게 될 것이다)} 덕이란 게 하질이 있을 까 만은 무슨 利德(이덕) 보는걸 아랬된 덕이라하면 이러한 아랫된 덕이란 건 잃어버리지 않음으로 얻음을 삼는 것이니 오직 그 잃어 버릴려 않음으로 (*그 이덕 되는걸 잃을까 전전긍긍해 비장해두길 즐긴다) 비록 얻었다 해도 덕될게 못된다 그러므로 말하건대 아랫된덕은 덕을 잃어 버릴려 않는다 이래서 덕이 없다 한다 (*역자언= 흡사 진귀한 고려청자를 값비싼 것이라서 소중히만 여겨 비장만 했지 여럿이 감상할 기회를 없게 한다면 그것은 그 된 덕의 眞價(진가)를 잃어버린다 할 것이다) 윗 덕은 할게 없기 때문에 함이 없는 게 아니라 덕을 거느린 게 자연이 되나서 알참으로, 함을 씀이 없다 아랫된 덕은 이러함을 낼 줄 몰라서 함을 쓰게된다 그러므로 함 씀 두지 못함을 능숙치 못함이라 대저 그래서 덕씀이 유족하게 됨을 쓰지 못함이리라 이로 인해 또한 어짊에 있어서인즉 이(*是=어조자 군말 또는 바르게로 풀이됨= 즉 바르게) 한다함은 그러히 윗된 어짊이라 하는 것은 어짊에 있어서 어짊을 섬길게 없는 것을 어질다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은 할려도 함쓸게 없음이라 어짊이란 혼자만 한다는 것은 옳치 않는 것이다 (*譯者言 =쉽게 말해서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켜 그것만을 어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설령 어질다해도 그런 것을 할려고 추구치 않는 것이 실제엔 어질은 것이라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어질고 고임 받을 만 한게 특정 지어 있을 수 없고 그런 근거도 없고 해서 할 수 없다는 뜻임=어짊은 독단적인 게 아니란 뜻) 필히 의로움이 존재해야 한다함인 것이다 비록 윗된 의로움은 하지 않음을 얻지 못한다 할 것이나 (*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뜻임) 이를 갖다 할려해서 함쓸게 존재한다 함인 것이다 어짊이라 하는 것은 베풀어 갈 따름이다 의로움이라 하는 것은 베푸는걸 잘 선택해서 마땅하게 함인 것이니 베풂에 대한 갚는걸 나무라지 않는다 (*갚을걸 질책하거나 책임지라 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예의란 것은 베풂에 대하여 갚어 재키는 것(*모습 행위 뜻)이다 오는데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갔는데도 오지 않음도 또한 예의가 아니다 베풀면 갚는다는 뜻이다 윗된 예의를 차렸는데도 응답이 없으면 팔을 비틀어서 뺏듯 하더라도 원인제공을 받고자 하나니 그 보냇는 데도 오지 않음 비록 예의를 받을려 하는 것은 아니라 하나 오히려 (*그 하는 것이 *또는 =그 먼저 한 것이) 예의가 아니라서 하지 않는 것과 같음이라 예의를 쓰는 이치 이와 같음인 것이다 (*역자언= 두가지등 여러 뜻이 나오니,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의 한방편이란 뜻도 되고 먼저 그 보낸 예의가 저쪽 받는 입장에선 욕된 것이거나 마땅치 않은 것으로 여겨 예의의 회답을 않는다는 뜻도 된다) 윗 된 어짊 윗 된 예의 윗된 의로움 오히려 이 같으면 그 아랫 된 것은 의론치 아니해도 볼 것이리라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길을 버린 후에 덕이라 하고 덕을 버린 후에 어짊이라 하고 어짊을 버린 후에 의로움 이라하고 의로움을 버린 후에 예의라 한다는 게 어찌 빈말이라 할 것인가? 예의라는 게 서로들 바라보고 나무라는 게 저(*앞의논설)같으면 충성과 미더움이 저절로 엷어진다는 게 옳다할 것이고 어지러운 다툼이 저절로 일어난다 하는 게 옳게 여겨져서 지혜를 쓸데가 있으리라 여기 리리라 이러한 예의란 게 비록 어지러움과 다스림을 씀일진데 다만 머리 어지러움만 쓰는 것이라 할 것이다 앞선 지식을 (*또는 앞서의 논설한 기록을) 비록 지혜로 사용할 수 있다 할 것이나 이는 어리석음의 시작을 쓰는 것이다 대체 어찌된 연고로써 그러한가? 사람의 심상 다스림은 두터움 낳기를 떳떳히 여긴다 두텁다함은 그질박한 성품이고 엷다함은 그 거짓된 모습인 것이다 순수성을 버리고 거짓됨을 짓게됨 어지럽지 않을 자 있지 않 게 된다 사람은 저절로 늘 상 밝음에 존재할걸 안다 밝음은 그 알찬 것이요 꾀를 쓰는 것이면 그것은 꽃이다 알참을 버리고 꽃 되길 힘쓰면 어리석지 않을 자 있지 않게 된다 이래서 대장부 그 두터움에 머물르고 그 엷은 곳엔 머물르지 않고 그 알참엔 머물르고 그 꽃엔 머물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仁義(인의)를 잊고 禮學(예학)을 끊으며 지혜를 버리고 뜻을 도덕의 크고 온전함에 두게되니 이러함을 일러 저를 버리고 이를 취한다 함인 것이다
朴註
박주
不德不自有其德也 不德是以有德 惟其不居是以不去也 不失德 自有其德
부덕부자유기덕야 부덕시이유덕 유기불거시이불거야 불실덕 자유기덕
也 無以爲無心也 有以爲有心也 爲之而莫之 應以禮齊之而民不從也 攘奪
야 무이위무심야 유이위유심야 위지이막지 응이례제지이민불종야 양탈
也 仍繼也 攘臂而仍之民不從 而繼之以刑如怒人之不從其言者 攘臂而
야 잉계야 양비이잉지민불종 이계지이형여노인지불종기언자 양비이구
之也 上德無爲 而上仁則爲之 上仁無以爲 而上義則有以爲 若夫上禮莫之
지야 상덕무위 이상인즉위지 상인무이위 이상의즉유이위 약부상례막지
應 而至於攘臂 故曰失道而德 失德而仁 失仁而義 失儀而禮 道加於德者
응 이지어양비 고왈실도이덕 실덕이인 실인이의 실의이례 도가어덕자
道以言天德 以言人道 則無迹而德爲有迹也 文勝質衰而刑 多 故曰禮者
도이언천덕 이언인도 즉무적이덕위유적야 문승질쇠이형벽다 고왈례자
忠信之薄 而亂之首也 前識多識 前古者多識 前古以爲禮而不知 非道之實
충신지박 이란지수야 전식다식 전고자다식 전고이위례이불지 비도지실
旣以自愚又愚後人 故曰愚之始彼謂禮謂前識 此謂忠信謂道
기이자우우우후인 고왈우지시피위례위전식 차위충신위도
* 박씨 주석하대. 덕이 아니라 함은 스스로 그 덕을 가졌다 아니함인 것이다 덕이 아니라 하는 게 이래서 덕이 있게 됨인 것이다 (*겸손하여 나서지 않음을 겸양에 미덕을 갖췄다 한다) 오직 그에 머무를려만 않는다 이래서 버리지 않는다 한다 덕을 버릴려 않함 절로 그 덕을 가진 것이다 함을 씀이 없다는 건 마음에 의향이 없다는 것이니 즉 염두에 없다는 뜻이다 함 씀이 있다는 건 염두에 있다는 뜻이다 하려하는데도 적응해옴이 없다함은 예의로써 다스릴려는 데도 백성이 쫓지 않음이다 攘(양)이란 물리치다 덜다 빼앗다는 등의 뜻으로 이쪽에서 저쪽을 제압하는 용맹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所以 떨쳐보는 것이다 仍(잉)이란 조건 고리 원인이 이어지는 것을 말함이니 繼(계)라 한다 잇는다는 것은 래왕 수수거래에 있어서 한쪽편의 입장이니 즉 준데 대한 받음을 기다리는 입장 받는 입장이란 뜻이다 팔을 비틀 듯이 힘을 떨쳐서라도 받을려 한다함은 백성이 쫓지 않는데도 받아 낼려 하는 것 같음이니 형벌을 써서 사람들이 쫓지 않는데 대해 성내는 것 같음이다 그를 말로 할 것 같으면 팔을 비틀어서 몰아 온다 한다 윗된 덕은 할려 할게 없어도 윗된 어짊은 할려 한다 윗된 어짊은 함을 쓸데없어도(*쓸곳이 마땅찮아도) 윗된 의로움인즉 함을 쓸게 존재한다(*적용할 곳 쓸곳 있다) 이렇듯 한다면 무릇 윗된 예의라는 건 적응해 올게 없어서 팔을 비틂에 이르는지라 (*즉 할거릴 찾아 억지로 쥐어짜다 싶이 하는 것으로 허장성세 겉치레를 뜻함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말하길 길을 버려서 덕이라 하고 덕을 버려서 어짊이라 하고 어짊을 버려서 의로움이라 하고 의로움을 버려서 예의라 한다 길은 덕에 더 보탠 것이니 길은 써 하늘을 말하는 것이고 덕은 써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길은 자취가 없어도 덕은 자취가 존재한다 문채는 낳아지고 바탕은 노쇠해져서 형벌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말하건대 예의란 것은 충성과 미더움이 엷어져서 어지러움의 머리가 된다 앞선 지식이라 하는 것은 많은 옛날에 것을 기록해 아는 것이니 많은 앞선 옛의 기록을 갖고 예의를 삼음으로써 하는 것이라 길 아닌 알참임을 알지 못한다 [[* 앎[지식]을 앞세움은 앎이 많다는 것이다 옛을 앞세우는 것은 앞[지난]옛의 앎이 많아져선 예의를 삼으려[위하려]들므로 하여 그릇된 길의 알참을 모른다 = 길의 알차지 아니함을 모른다 = 길이 아닌 알참임을 모른다 그러니까 길이란 의미의 테를 벗어난 것이 열매 맺어진 것을 모른다는 그러한 의미임,]] 이미 자신을 어리석게 함으로써 또 뒷사람까지 어리석게 한다 그러므로 말하건대 어리석음의 시작은 저 예의란 거와 앞선 지식[다른 어느 것보단 우선 한다는 뜻]이란 것에서 비롯됨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를 일러 충성 믿어움이라 하고 길이라 (*譯者 附言=그릇되이)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