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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로서의 색色에 대한 인식에서든 관념으로서의 명名에 대한 인식에서든 언제나 인식은 그 대상과 함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식 대상은 인식되는 한에서만 그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식을 떠나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객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식識과 경境은 상호의존성을 보인다. 인식이란 인식 주관이 인식 객관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되는 활동 또는 그 활동 결과를 뜻한다. 이처럼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작용을‘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연緣’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식하는 주관은‘능히 연하는 것’으로서 능연能緣(alambaka)이 되고, 인식되는 객관은‘연해지는 것’으로서 소연所緣(alambana)이 된다. 유식은 인식 주관인 능연을 견분見分(drsti)이라고 하고 인식 객관인 소연을 상분相分(nimitta)이라고 한다.
유루식有漏識 자체가 생할 때에는 언제나 소연所緣ㆍ능연能緣의 상이 나타난다.……소연으로 나타 나는 상을 상분相分이라고 하고, 능연으로 나타나는 상을 견분見分이라고 한다.1)
그러므로 유식에서의 인식이란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을 연하는 활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견분이 인식 객관인 상분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 활동을‘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량量’이라 하기도 하는데, 능히 헤아리는 능량能量(pramana)은 인식 주관을, 능량에 의해 헤아려지는 소량所量(prameya)은 인식 객관을 의미한다. 인식 활동이란 곧 능량과 소량 사이에서 성립하는‘량’이며, 그런 활동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인식 자체는 헤아림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양과量果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식하는 주관적 측면이 식의 견분, 인식되는 객관적 측면이 식의 상분이다. 감각에 있어서나 이성적 사유에 있어서나 감각하고 사유하는 주관적 부분은 견분이 되고, 감각되거나 사유되는 객관적 부분 즉 색이나 명은 상분이 된다. 견見은 상相을 보는 것이고 상은 견에 의해 보여진 상이다. 그러므로 견분과 상분은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는 것으로서, 상분을 떠나 견분이 따로 없고 견분을 떠나 상분이 따로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책상을 인식한다고 하면, 책상을 보는 나는 견분이고 내게 보여진 책상은 상분이다.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이라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책상을 보는 나를 떠나 책상이 따로 없고 내게 보여진 책상을 떠나 내가 따로 없다. 책상 대신 인식 대상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이 의미를 한층 더 적절하게 실감할 수 있다. 즉 세계를 인식하는 나를 떠나 세계가 따로 없고, 나에 의해 인식된 세계를 떠나 내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견분과 상분이 동시적 인과 관계에 있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상을 보는 나와 내게 보여진 책상, 세계를 인식하는 나와 내게 인식된 세계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견분과 상분은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식을‘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의 관계맺음’으로 설명하는 인식론에서 궁극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가장 핵심적인 물음이 발생한다.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는 것, 견분이 상분을 연緣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주관과 객관의 인식적 관계맺음 자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가 책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내가 아닌 책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주관과 객관이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불붙여진 초의 경우, 타는 초와 타는 불이 동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해도 초가 불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불이 초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또 나와 세계가 동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해도 내가 세계를 인식할 뿐이지 세계가 나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이 서로 마주하여 의지하고 있는 동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에 대한 주관의 인식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마주 서있는 주관과 객관이 인식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둘의 표면적 상호인과 관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보다 심층적인 공통의 근거가 작용하고 있어야만 한다. 견분과 상분은 인식의 주와 객으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포괄하는 공통의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에 둘 사이의 관계맺음이 가능하고, 그 결과로서 인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의 근거란 과연 무엇인가? 2) 그것은 인식적 관계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므로 인식이 발생하는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인식되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관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의 인식적 관계맺음의 결과로서의 인식을 가지는 것은 인식주관이므로, 그러한 관계맺음의 근거 또한 주관 안에서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식 주관은 인식 객관과 구분되어 대립하는 주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맺음의 통합적 근거로서 객관을 아우르는, 즉 주객대립의 지평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주관이 주관이면서 동시에 주객 대립을 넘어 객관을 포괄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자체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 주관이 객관을 인식한다는 말은 주관이 이미 주관 밖으로 나가 있다는 말이다. 주관 밖으로, 다시말해 주객대립의 지평 너머로 초월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세계를 인식할 때 그 세계는 곧 나에 의해 인식된 세계인 만큼 나는 이미 밖으로, 세계에로 나아가 있다.3) 주관이 나아가 있는 그 자리,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그 초월의 자리가 나의 본래 자리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의 대립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 둘이 분리 대립되기 이전의 주객포괄의 초월적 근거로부터 이분화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견분이 상분을 연하는 것이지만, 그 내적 근거로부터 보면 그러한 견상이원화 이전의 통합적 근거인 식 자체가 견상으로 이원화되는 활동, 즉 식 자체의 주관과 객관으로의 자기이분화 활동이다. 유식에서의 식의 개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식識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비얍티(vijnapti)는 말 그대로 둘로 나눈다는 의미의‘비’(vi)와 알게 하다는 의미의‘얍티’(jnapti)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4) 인식이란 말 자체가 곧 스스로의 이원화 활동임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견분과 상분은 바로 이러한 식 자체의 이원화에 의해 이분된 결과이다. 5) 그렇다면 이러한 견상 또는 주객을 초월해 있는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견과 상,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는 지평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 자체의 활동은 과연 어떤 활동인가? 유식은 이와 같은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을 변變 또는 전변轉變(parinama)이라고 칭한다. 6) 변變은 식의 본체가 두 부분으로 전轉하는 것을 뜻한다. 7)
주객으로 이원화하는 식 자체와 이분된 두 부분에 대해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는 호법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식체識體는 자증분自證分이다. 전변하여 상相과 견見의 두 부분이 생한다. 8)
즉 이분되는 식체는 자증분이고, 그렇게 이분화된 주객은 곧 견분과 상분이다. 그렇다면 식체는 어떻게 견상으로 이분되는가? 식이 주객으로 이원화될 때, 그 과정에서 식과 다른 것으로서 시설되는 것이 바로 식의 대상 즉 상분相分이다. 우리가 객관적ㆍ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식의 대상 즉 소연경은 실제로는 식 자체의 전변 결과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 유식 식전변설의 요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식소변으로서의 대상과 마주한 인식 주관인 능연식으로서의 견분見分 역시 식 자체가 아니라 식이 전변한 결과일 뿐이다.이처럼 주객으로 관계하는 식이 소연경을 연하는 능연식能緣識이라면, 스스로 이원화하여 소연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은 그와 구분되는 능변식能變識이다. 능연식이 주객 또는 능소의 이원적 대립 구도 속의 한 항이라면, 능변식은 그와 같이 서로 대립하는 능소, 주객을 스스로 산출해 내는 식이다. 이상의 능연식과 능변식의 위상 차이를 간략히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문제는 능연의 식과 구분되는 능변의 식이란 과연 어떤 의미의 식인가 하는 것이다. 주객분리의 지평에서 성립하는 주관적인 능연식과 달리 주객 미분의 식 자체의 활동, 그러면서 주객의 분리된 지평을 스스로 형성하는 능변식의 활동은 과연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
첫댓글 _()()()_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