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르 -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이야기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 5곡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라벤나 시 군주 구이도다 플렌테의 딸 프란체스카는 1275년 경 라미니 영주의 아들 지안치오토 말라테스타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혼인은 명백히 사기였다.
말라테스타 가문은 추남이요 절름발이인 지안치오토를 플렌테 가문과 결혼시키기 위해 더러운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그들은 잘생긴 지안치오토의 동생 파울로를 맞선 볼 장소와 혼인식장에 대신 내보내 결혼을 성사시켰다.
플렌테 집안과 신부감 프란체스카는 준수한 용모의 파울로에게 호감을 느껴 결혼을 흔쾌히 승낙했으나 정작 신혼 초야에 신부를 찾은 사람은 흉한 외모만큼이나 잔인한 성품을 지닌 지안치오토였다.
그녀의 슬픈 운명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잉태할 수 밖에 없었다.
결혼 후 프란체스카는 신랑으로 여겨 마음을 주었던 시동생 파울로를 숙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유부남 파울로도 역시 아름다운 형수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면서 비극적인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서로의 연정을 애써 감추며 가슴 졸이던 두 사람은 마침내 렌슬롯과 귀네비어의 키스장면을 묘사한 책을 읽다가 격정의 물살에 휩쓸려 첫 키스를 하게 된다.
첫 키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두 연인은 정열의 물살에서 도저히 헤엄쳐 나올수 없었다.
밀회는 거듭되었고 마침내 두 연인의 불륜을 알게 된 지안치오토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단테는 '신곡' 의 지옥 제 2원에서 떼지어 형벌을 받는 연애병 환자들 사이에서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이 한쌍에게만 관심을 둔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큰 동기는 단테가 이탈리아를 떠들썩하게 만든 두 사람의 스캔들을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는 단테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더구나 단테는 불행한 프란체스카 아버지와 안면이 있었다.
또 프란체스카의 친척인 폴렌타는 단테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망명생활을 할 때 시인의 후원자를 자청해 그에게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은덕을 베풀었던 지인이다.
이런 소중한 인연에 친밀감이 겹쳐 그는 가련한 연인들의 로망스에 마음이 끌렸으며 그 연애담을 시적 연금술로 변형시켜 사랑의 전형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지옥편 제 5곡은 단테가 연인들에게 관심을 두는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스승님 바람결에 날리듯 저리도 가볍게 가는 두 사람과 가능하다면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단테의 간청에 마음이 동한 베르길리우스는 제자의 청원을 허락한다.
"그들이 좀 더 가까이 우리 곁에 다가 올 때 저 두사람을 이끈 사랑의 이름으로 청하라. 그러면 그들이 올 것이다. "
단테는 목청을 돋우어 망령들에게 소리쳤다.
" 오 고뇌로 괴로워하는 영혼이여. 신께서 거절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 다가와 이야기나 나눕시다. "
그의 간절한 부름을 받은 두 사람은 저주받은 망령들의 무리를 떠나 하늘을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왔다.
<세페르 -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의 망령>
연인들 중 프란체스카가 먼저 자신들을 불러준 것을 시인에게 감사한 후 입을 열었다.
"오 상냥하고 친절하신 분, 당신은 현세를 피로 더럽힌 우리들을 찾아서 이 어두운 대지에 오셨습니다.
만약 우주의 왕이 우리의 벗이었다면 당신은 우리의 비뚤어진 죄악을 동정해 주신 분이오니 그대의 평안을 그 분께 부탁드릴 수 있었을 것을, 지금 칼바람이 조금 주춤하니 그 틈을 타서 당신이 듣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들려드리고 또 듣기로 하겠어요."
단테와 상견례를 끝낸 프란체스카는 구슬픈 목소리로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포 강(이탈리아 북부에 흐르는 가장 긴 강)의 지류가 온화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해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상냥한 마음에 순식간에 타오르는 것이지만 그이는 나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산 목숨을 죽게 한 소행, 그 일이 지금도 나를 괴롭혀요.
사랑을 받은 이상 사랑을 갚는 것은 사랑의 숙명. 좋아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고 보다시피 그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우리 두 사람을 똑같은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들의 목숨을 빼앗는자는 반드시 카이나(육친을 살해한 사람이 떨어지는 곳으로 지옥의 맨 아래층에 있다)로 떨어질 거예요."
피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보고 한없는 연민에 빠진 단테는 이렇게 탄식한다.
'아 가엾어라. 연인들을 정말 끔찍이도 서로를 사랑했구나.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랑이 덫이 되어 이 비참한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어.!'
다시 궁금증이 생긴 단테는 계속 질문을 했다.
"프란체스카. 당신의 쓰라린 괴로움은 너무 참혹하고 불쌍해서 절로 눈물이 나는군요.
그러나 들려주시오. 달콤한 한숨을 쉬던 그 무렵 일을. 당신들은 어떻게 연인의 불 같은 욕망을 알아챘으며, 그 사랑을 허용했단 말인가요?"
단테는 두 사람이 어떻게 상대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무슨 계기로 그처럼 불같은 사랑에 빠졌는가 궁금했던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프란체스카가 답변을 한다
<William Dyce -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불행 속에 있으면서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 만큼 쓰라린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 시작을 당신이 그토록 알고 싶다면 울면서 이야기 하는 사람(사도 바울을 가리킴)처럼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심심풀이 삼아 사랑이 어떻게 렌슬롯을 옭아매었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단지 둘뿐이어서 거리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책을 읽는 도중 우리 두 사람은 눈길이 몇 번이나 마주쳤으며, 그때마다 얼굴을 붉혔습니다. 순간 우리를 사로잡은 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던 귀네비어의 입술에 렌슬롯이 입을 맞추는 구절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었을 때 그이는 오, 나에게서 영원히 떠날 수 없는 그이는 온통 부들부들 떨면서 나에게 입을 맞추었답니다.
책을 쓴 이는 갈레오토입니다. 그날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안젤름 포이바흐 - 프란체스카와 파울로>
이렇게 프란체스카는 단테에게 두 사람 사랑에 불길을 당긴 것은 갈레오토의 책에 나온 키스 장면임을 밝혔다.
연인들은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의 달콤한 입맞춤에 자극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입술을 찾은 것이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에게 키스의 열망을 불러 일으킨 갈레오토는 그 유명한 켈트 족 신화 아더 왕 전설을 다룬 책으로 호수의 기사 렌슬롯과 아더 왕 부인 귀네비어 왕비의 금지된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갈레오코는 소설의 저자임과 동시에 렌슬롯과 귀네비어의 사랑을 맺게 해 준 원탁의 기사 이름이기도 하다.
갈레오토는 상사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렌슬롯을 부추겨 귀네비어와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장본인이며 그런 까닭에 후세인들은 사랑의 촉매 역할을 맡은 갈레오토를 ' 사랑의 사자, 혹은 뚜쟁이' 로 부르고 있다.
이처럼 프란체스카가 한 많은 사연을 풀어놓자 서러움이 복 받친 파울로는 오열을 금치 못하고 단테는 억장이 미어지는 슬픔에 그만 혼절하고 만다.
<신곡>은 두 사람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한다.
' 한 사람의 망령이 기구한 사연을 고백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은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너무나도 애처로워 정신을 잃은 채 시체가 넘어지듯 쓰러졌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를 주제로한 그 외 작품들]
<로댕>
<Watts -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귀스타브 도레 -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카바넬 -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울로 마라테스타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