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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특집>
6,25란 무엇인가?
6가지 질문에 답한다
1- 6,25는 왜 일어났는가?
2- 6,25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나?
3- 미군은 어떻게 개입했나?
4- 6,25는 언제 어떻게 끝났나?
5- 6,25는 사람을 얼마나 죽였나?
1- 6,25는 왜 일어났는가?
6,25는 조선인민군총사령관의 직함을 가진 조선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 남조선(대한민국) 국군을 기습공격 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그런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그 지침서인 「이겨레 살리는 통일」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침’이냐 ‘아니냐’ 하는데에 교육의 초점을 맞출것이 아니라, 이 전쟁을 통해 분단극복을 위해 필요한 역사적 교훈을 깨닫게 하는데 교육의 초점을 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중시한다
공산당은 관점이 중요하다>
친북좌익적인 전교조가 초,중,고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김일성이 쳐들어왔다는 사실보다 그가 왜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느냐,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됐나, 그 비참성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마치, 누가 사람을 죽였느냐는 범죄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한 동기를 중시해야 하며,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됐으니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되게 한 그 동기가 문제라는 혁명논리인 것이다.
혁명의 논리는 세상을 뒤집어 엎어야 하기 때문에 역사의 진실보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혁명이 불가피했다는 등)는 관점이 더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역사를 「어떻게」 보기 전에 역사적 사실 먼저 알자>
그러나 우리는 누가 사람을 죽이는 범죄를 저질럿느냐, 살인행위는 왜 했느냐를 규명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이 왜 6,25 남침을 하게 되었느냐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마자 외세(미국과 소련)에 의해 국토가 분단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국토분단을 고착시킨게 누군가는 잘 따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미국과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이라고 좌익들은 무턱대고 모함한다.
그게 아니다. 역사를 「어떻게 보기」전에 역사의 진실은 어떤것 이었느냐를 살펴보자.
<일본에 두번째 원폭 떨어지던 날
소련군은 조선반도 북단 웅기에 상륙>
외세들은 「코리아」에 대해 원래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제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수상, 중국의 蔣介石(장개석) 총통간에 채택된 카이로선언이 발표되기까지는 그랬다.
카이로선언은 2차대전 종전후의 적대국 처리에 관한 규정들에 합의했는데, 그중 일본의 영토제한 규정에서 「코리아는 전후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것」을 약정했다.
이 약속은 독일항복(45.5.8)직후인 1945년 7월 6일의 베를린 외곽 포츠담에서 채택된 미,영,소 3국 수뇌선언에서도 재확인 되었다.
그러나 세계 공산화 야욕을 가진 소련의 스탈린은 포츠담 선언이 있기 5개월전인 1945년 2월 8일의 얄타회담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과대평가한 미국대통령과 친소적인 미국무성의 관리(앨저 히스등)들의 조언에 따라 독일이 항복하면 수개월내에 對日參戰(대일참전)을 하겠다는 약속을 따냈다.
그리하여 소련은 국제법(1941년에 체결된 일,소 불가침조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 다 쓸어져가는 빈사상태의 일본의 虛(허)를 찔렀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일본 長崎(나가사끼)에 미국의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던날 재빨리 한반도 최북단 도시 雄基(웅기=북한당국은 선봉이라고 부름)로 상륙했다.
조선 주둔군중 최정예부대로 알려진 羅南師管區(나남사관구) 예하 부대들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8,15를 맞았다.
소련군 항공기는 8월 9일에 함경북도 會寧(회령)상공에 나타나,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 했다. 소련군은 조선인민 해방을 위해 進攻(진공)한다. 조선인민은 각기 소재지에서 궐기하여 일본인을 殺傷(살상)하라」는 조선어와 일본어 비라를 뿌렸다.
<한반도 점령 機先잡은 소련군
일군 무장해제보다 소비에트(공산)화 주력>
소련군이 북한에 재빨리 진격한 이튿날인 8월 10일 일본은 國體護持(국체호지=천황제존속)라는 조건을 달아 포츠담선언 수락을 연합국에 통보했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된 이때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미군의 위치는 한반도 바다건너 1천km나 떨어진 오끼나와 였다. 같은시기 이미 淸津(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북한전역을 석권하고 있었다.
얄타에서 소련군의 진군한계를 북위 38도선으로 한정하기로 (미,영,소 3개국 수뇌간에) 약속됐지만 트루먼대통령은 이를 최종결정 하기전에 번즈국무장관으로부터 미군의 주둔범위를 되도록 38선 이북까지 넓히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군부가 이를 반대했다. 38선이북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고(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병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사령관 스티코프대장은 8월 26일 평양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를 설립시켰다.
순 군사적인 사고방식에 묶인 미군과 달리 소련군은 정치훈련을 받은 공산당의 정치장교들이 북한을 소비에트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군의 한반도 進駐(진주)상황을 엮은 朝鮮終戰の記錄(조선종전의 기록)을 쓴 森田芳夫(모리다 요시오)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御前會議(어전회의=천황앞에서 정부의 주요각료나 군간부들이 모여 하는 회의)는 8월 9일밤 이었는데 만약 그게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8월 6일이었다면 소련은 참전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고 아마도 조선의 38선분할이라는 비극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 점령의 機先(기선)을 잡은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원래의 목적과 함께 조선을 소비에트화(공산화)하는 작업을 전력을 다해 추진했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 咸興(함흥)형무소에 있던 조선인 정치범 2백여명이 소련군에 의해 석방됐고 그중 좌익들이 그날밤 함경남도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이것이 소련군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공산당조직이었을 것이다.
<소련군은 소련군대위 '김성주'를
조선인의 영웅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켜>
한편, 평양에서는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실시(8월 26일 0시)하기도 전인 8월 15일 민족지도자 曺晩植(조만식)선생이 주도하는 평안남도치안유지위원회가 발족되는 한편 조선공산당평안남도지구위원회는 15일밤 平壤神社(평양신사)를 습격,방화했다.
이러한 조선인끼리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소련군은 조직적으로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착착 진행시켰다.
그들은 11월 19일 북조선 5道(도=함경남,북, 평안남,북, 황해도)를 관장하는 「북조선행정국」을 만들어 조만식선생을 그 책임자로 만들었다. 조선생은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도 겸했다. 그는 11월 3일에 결성된 조선민주당 당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조선인민의 민족지도자인 조선생을 내세워 민심을 사는척 하더니 이듬해(1946년) 2월 8일 馬脚(마각)을 드러내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그들(소련군)이 데려온 소련군 제88특별전역정찰여단 소속 金聖柱(김성주,1972년 「조선로동당」 조직부장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對役(대역)을 하던 金英柱(김영주)가 김성주 즉 가짜 김일성의 친동생. 그는 일본군 헌병 보조노릇을 하다가 형의 덕으로 당 중책을 맡았었으나 조카인 김정일에 의해 숙청됨) 대위를, 일제하 만주에서 神出鬼沒(신출귀몰)하던 조선독립투쟁의 영웅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켜 그 우두머리에 앉혔다.
이보다 앞선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은 33세의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이라 속여 평양공설운동장에 모인 환영군중앞에 등장시켰다.
그러나 「김일성장군」을 흠모하던 조선군중은 소련군의 괴뢰 애송이 김성주대위를 보고 실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향산천을 버리고 38이남으로 이주했다.
젊은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날조한 것을 일본공산당이던 하기와라 료씨는 로베르토 롯세리니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로베레장군」(1959)에 비유했다.
對獨(대독)레지스탕스 투쟁으로 戰死(전사)한 이탈리아 저항투쟁의 영웅 로베레장군으로 거리의 사기꾼을 바꿔치기하는 영화가 연상 된다는것이었다.(1993년刊 朝鮮戰爭 320p. 한국논단번역 한국전쟁)
<정치권력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전 ‘조선인민군’이 먼저 등장>
그러는 동안 소련은 「김일성장군」으로 둔갑시킨 소련군대위 김성주를 선두로 남조선 침략군의 양성에 착수했다.
소련의 赤軍(적군), 중국의 紅軍(홍군)이 그랬듯이 북한의 「조선인민군」도 정치권력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벌써 무장군대로서의 완전한 조직을 갖추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정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방부에 해당하는 민족보위부와 함께 「조선인민군」이 발족한것은 1948년 2월 8일, 그러니까 「정부가 정식으로 발족되기 7개월전 이었다.
그중에서도 6,25때 맹위를 떨친 「인민군」 제1, 2사단은 1947년 3월에, 제3, 제4사단은 1948년 2월에 각각 창설되었다. 1,3,4사단의 장교 대부분은 소련군 출신이며, 제 2사단장교들은 중공군 출신, 4사단에는 중공군내 조선족부대 1개연대가 있었다.
소련은 1948년 2월 점령군을 「완전철수」시킨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때 이미 소련군 지도하에 전투능력을 갖춘 「조선인민군」은 구성돼 있었다. 소련군의 「완전철수」후에도 이들을 교육훈련 시키기 위한 소련군 군사고문단은 3천명이나 남아 있었다.
조선주둔 소련군 사령관이던 테렌티 F.슈티코프將軍(장군)이 「조선인민공화국」 발족후 職責(직책)을 大使(대사)로 바꾸어 그대로 눌러 앉은것도 김일성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적극적으로 남침을 하자고 한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직접개입 피하고
중공이 지원한다니까 남침계획OK >
김일성이 적극적인 남침 의욕을 갖게 된것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蔣介石(장개석)군대를 패퇘시키고 중국대륙 전체를 석권하면서 부터 였을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어쨌든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중국 동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한 1949년 3월 3일 김일성은 모스크바로 국제공산주의 두목 스탈린을 만나러 갔다.
니키타 후르시초프는 그 회고록에서 당시 김일성은 「(남침)공격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3일부터 3월 29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대외적으로는 상품교류, 차관공여협정등을 맺은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이 말하는 國土完整(국토완정=남북통일)과 즉 적화통일완수를 위한 원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때만해도 스탈린은 회의적 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노’라고 대답했다. 미국과의 대결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겼다. 1950년 1월 19일 슈티코프(북한주재소련대사)가 스탈린에게 친 電文(전문)의 내용은 이랬다.
『김일성은 흥분된 상태임. 중국의 완전해방이 목전에 와 있으니, 다음은 남조선의 해방이라면서스탈린동지를 다시한번 찾아뵙고 공격개시 지시를 받들어 허락해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 그것이 어렵다면 마오쩌뚱을 만나려 하고 있음. 마오는 중국내전이 끝나면 조선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음.』
이 전문을 받아본 스탈린은 11일후인 1월 30일 슈티코프에게 답신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랬다.『우리는 북조선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
2개월후 김일성은 다시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갔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상당히 변화한 결과 조선의 통일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1949년 5월의 시점에서 마오의 공산군이 중국전토를 거의 장악하게 됨으로써(「국제환경이 상당히 변화」한 것으로 판단)조선을 도울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소련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 「마오에게 의존할것」을 김일성에게 종용했다고 한다.
<김일성, 소련제 무기와 중공참전 약속 받아내>
즉 김일성이 남침을 시작해서 만에하나 미국이 개입한다 해도 소련은 빠지고 무진장의 인력(병력)을 보유한 중공이 미국과 싸우게 될것을 계산에 넣었던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의 생각은 마오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마오는 1951년 3월 1일(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앞으로 수년동안 미군 수십만명을 죽여 없애겠다」고 스탈린에게 다짐했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락한다는 최종타전을 했다. 이때 모스크바에 와있던 마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김일성 보고도 마오에겐 말하지 말도록 쐐기를 박았다. 대신 스탈린은 마오가 귀국한후인 1950년 3월 김일성을 따로 모스크바로 불러 들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때 한달이상 모스크바에 머물러 있었다. 4월에 김일성을 만난 스탈린은 『남침을 위해 어떠한 어려운 결과가 나와도 이쪽(소련)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이 없다. 지원문제는 전면적으로 마오를 의존하도록』 딱잘라 말했다.
김일성은 돌아온 직후인 5월 13일 마오를 찾아가 스탈린의 (남침)승락을 알렸다. 의심많은 마오는 즉각 스탈린에게 확인, 모스크바로 부터 확인연락을 받았다. 1950년 5월 15일 마오는 김에게,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군대를 파견, 지원에 나설것』을 약속했다.
6월25일 새벽 김일성은 자신만만하게 남침을 감행했다. 그는 소련제 무기와 중국의 참전보장을 받았으니 두려울것이 없게 된 것이다.
2- 6 25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상인 개성 송악산 아래 한국군 헌병초소에 근무하던 헌병 4명은 북쪽에서 이상한 굉음을 내고 굴러오는 공룡같은 탱크를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들고있던 카빈소총을 겨누었다. 탱크는 그대로 밀고와 이 4명의 헌병을 깔아뭉갰다. 6,25 최초의 국군 희생자였다.
<15만 대군이 탱크 앞세우고 밀려오는데
맞서는 병력은 2만여명, 탱크는 한대도 없어>
서울 용산구 삼각지 구육군본부 자리에 있는 전쟁기념관 정문 어구 시계탑에는 언제나 4시 정각에 시계바늘이 멈춰져 있다.
「조선인민군」 10개사단 병력 13만 5천명과 소련제 T-35탱크 242대, 각종야포 1천 6백여문, 항공기 196대를 거의 총동원해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250km의 38도선상 전역으로부터 대남 총공격을 감행했다. 「인민군」은 10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여단 및 1개 기계화부대등 기동성이 뛰어난 총병력 16만여명을 보유하고 그 대부분을 38도선 전역에 일거에 투입했다.
이에비해 한국군의 총병력은 8개사단, 6만4천6백97명, 그중 1사단, 6사단, 7사단 및 8사단만이 38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3개사단은 3개연대로 구성돼 있었으나, 제8사단은 2개연대밖에 없었다. 8사단을 제외한 3개사단만이 1만명 풀TO(편제상 1백%충원)였고, 8사단은 5천여명이었으므로 38도선 남쪽에 배치된 국군의 총수는 「인민군」의 3분의 1도 못되는 4만명도 안된 상태였다.
그나마 주말 외출로 일요일인 6월 25일 전방배치된 국군부대는 2만여명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북한의 13만대군을 마지해 싸우게 됐다. 이는 마치 1592년 4월, 왜군 15만이 부산에 상륙했을때 동래성을 지키는 수비병력이 20여명에 불과 했었다는 참담했던 4백여년전의 故事(고사)를 연상시킨다.
국군의 장비는 어땠나? 탱크는 한대도 없고 고무타이어로 구르는 경장갑차가 27대, 박격포까지 포함한 각종포가 전부 합해서 7백문, 그중 최대 射程(사정) 1만 2천m의 105m/m곡사포가 91문, 57m/m 無反動銃(무반동총=일종의 대전차 직사포)이 140문, 81m/m박격포가 384문, 60m/m가 576문 이었다.
<국군은 거의 맨주먹으로
적의 수도서울 침공을 사흘이나 막았다>
북한은 105,m/m포사정의 2배 가까운 위력을 가진 122m/m곡사포 172문(각사단에 12문)을 비롯해서 76m/m곡사포 380문(각사단에 24문), 120m/m박격포 226문(각 보병연대에 6문씩×3=18문), 82m/m박격포 1142문(각대대에 9문씩×9=각사단 81문), SU76m/m자주포 176대(포병연대마다 12문씩), 탱크 242대(제105기갑여단이 120대, 나머지는 7개 보병사단에 고루 배치), 야크기등 전투기 211대,,,등등, 도대체 상대가 될수 없었다.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과 중첩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즘 친북좌익들은 북한이 경제가 약해 남한의 국방비에는 비교도 안되는 적은 군사비를 쓰고 있으며, 도저히 남침을 할 능력이 없다는 괴변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56년전 우리가 한대도 없던 강력한 탱크 242대를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생전에 못보던 이 괴물을 상대로 전방의 한국군이 苦戰(고전)을 했듯이, 지금 한국군에는 전혀 없는 가공할 화학무기를 5천톤이나 보유하고 있다.
<6.7 김일성 통일성명 6.7~6.25 대남 평화공세
6.18 작전명령 하달 6.25 「폭풍」작전 >개시
한국군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못하는 장거리 미사일이 약 5백기, 마마보이가 대부분인 한국군과는 달리 험한 산악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는 특수 게릴라군단이 10만명, 게다가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다지 않은가.
56년전 오늘 그처럼 완벽한 전쟁계획과 전투준비 태세를 갖춘 「인민군」의 기습을 받은 한국군은 용케도 38선에서 50km도 안되는 수도서울을 사흘씩이나 버티며 싸웠다.
옹진반도에서는 38선을 넘어 침공하는 적을 맞아 싸우다가 잠시 북진까지 했었다. 김일성은 이것을 빌미로 국군이 먼저 북진해서 이를 격퇴코자 남진을 했다고 하나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당시 맨손으로 싸우다시피한 국군은 옹진반도의 17연대, 춘천의 제6사단은 오히려 쳐들어오는 적을 무찔러 잠시 38이북까지 밀고 올라갈 정도로 용맹히 싸웠다.
1950년 6월 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수상이며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직을 自任(자임)하는 김일성은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냈다.
『올 8월초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며 8월 15일에 서울에서 통일국회를 소집한다.』
이 김일성 성명은 6월 8일 「로동신문」등에 보도되었으나, 성명을 낸 바로 그 날부터 김일성은 대남 평화교섭을 소리높이 외쳐댔다. 북한당국이 억류중인 민족지도자 曺晩植(조만식)선생과 남한에서 체포된 간첩 金三龍(김삼룡), 李舟河(이주하)를 맞바꾸자고 한것도 이때였다.
6,25후 한국군에 투항한 인민군 제2군단 공병부 부부장 朱榮福(주영복)소좌(소령)는 6월 18일 소련군 군사고문 돌킨대좌(대령)로부터 러시아어로 된 작전(전투)명령 제1호의 번역을 명령 받았다. 러시아어 통역관을 겸한 주소령의 作命(작명) 제1호는 6월 22일 각전투부대장 앞으로 하달되었다.
<적의 제1主攻(주공)은 의정부,포천의 Y자 접근로
제2주공은 개성→문산→서울의 >취약지점>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푹풍」이라고 命名(명명)된 남조선침공기습작전은 시작되었다.
「작명」은 「조선인민군」의 대남 공격방향을 5개방향으로 정하고 일제히 38선을 돌파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각방향의 主攻(주공)부대는 다음과 같다.
▲ 옹진반도=제6사단 제14연대와 제3경비여단(약5천명)
▲ 개성방면=제6사단 제13, 제15연대 및 제1사단, 제203 전차연대(병력 약1만 5천명과 전차 54대)
▲ 의정부방면=제3사단, 제109 전차연대 및 제4사단과 제107 전차연대(병력 약 2만여명과 전차 1백여대)
▲ 춘천방향=제2사단과 제7사단 전차 30대(병력 약 2만명)
▲ 강릉방면=제5사단과 제766, 제424, 제200 특수부대로 이루어진 비정규전 게릴라부대(병력 약 1만8천명)
병력과 탱크부대 배치만을 봐도 제1주공이 의정부방면, 제2주공이 개성방면임을 쉽게 알수 있다. 당시 38이남의 한국군의 배치상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 옹진반도=제17연대(병력 약 2천5백명 적병력의 절반)
▲ 개성방면=제1사단예하 청단→적성 90km정면에 3개대대(병력 약 2천명), 예성강→백천→연안→청단 25km 정면에 3개대대(병력 약2천명). 병력 대부분은 주말 외출중.(적의 3분의 1 약)
▲ 의정부방면=동두천과 포천으로부터 서울을 향한 Y자형 최단거리 접근로(약50km, 의정부-서울은 약19km) 제7사단 예하 제1연대가 동두천방면, 제9연대가 포천방면에 布陣(포진).(병력 약 5천명, 적의 4분의 1)
▲ 춘천방면=춘천은 38선 남방 19km지점에 위치. 적어도 1개군단 2만여 병력의 적을 앞에둔 한국군의 전방포진은 3개대대와 4개중대(병력 약 8천명)는 춘천을 3일간 死守(사수)하는 善戰(선전)을 해 중부에서 동해안으로 이르는 접근로를 차단지연 시킴으로써 동부전선의 戰勢(전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때문에 이방면 공경주력부대 제2, 제7사단을 지휘하던 인민군 제2군단장 金光俠(김광협)소장이 해임됨.
<점령지마다 집단살인 자행한 「인민군」
대전에선 3천명을 타살,총살,목조르고 우물에 쳐넣어>
▲ 강릉방면=오대산(△1563m)에서 태백산(△1546m)에 이르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적의 유격대가 늘 출몰하던 이지역에 포진한 한국군 제8사단은 6,25남침 1년전인 1949년 6월 20일 강릉에서 창설. 8사단의 26km정면에 2개연대 약 5천명의 보병과 M3 105m/m곡사포 15문을 가진 포병제 18대대와 공병 1개대대가 담당.(총병력은 적의 절반도 안되는 약 7천명)
적들은 그들의 계획대로 제1 주공방향인 의정부를 공격개시 하루반만인 26일 밤에서 27일 새벽사이에 점령했다. 그들은 破竹之勢(파죽지세)로 27일 오후에는 창동과 퇴계원일대를 위협했고 28일 아침에는 미아리고개를 넘어왔다.
그 첫부대가 창경궁앞 서울대학 부속병원을 급습한것은 28일 오전 10시였다. 인민군 1개대대(약8백명)는 국군1개소대(30명)가 지키고 있던 서울대병원에 난입하여 입원중이던 일반환자 9백여명과 약간의 국군부상병을 무차별난사, 또는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죽였다.
6,25 최초의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그후 인민군은 남한 곳곳 가는곳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天人共怒(천인공노)할 학살극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과 지역 빨갱이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양민과 우익인사들 3천명을 총살,打殺(타살),목졸라 죽이거나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등 온갖 잔인무도한 수법으로 집단살인 한 사건이었다.(한국논단 2001 년 6월호 통권140호)
비운의 스미스 특공대,
3 미군은 언제 어떻게 개입했나?
「조선인민군」의 대남 총공격이 개시된지 7시간 20분만인 워싱턴DC시간 6월 24일 밤 11시20분(서울시간 25일 오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처음으로 이소식을 알았다.
<6,27 유엔 안보리결의
(모든 회원국은 한국에 군사지원제공 요청)
트루먼 미국대통령등 즉각 대응, 주일 美 24사단 1개대대 급파>
서울로부터 동경에 있는 연합군(이때는 아직 유엔군 구성 전이었고 2차대전 참전 연합군)사령관 맥아더원수에게 남침의 최초 전보가 도착한것은 6월 25일 오전 9시25분이었다.
이것이 즉각 국무성을 거쳐 트루먼 대통령에게보고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신속한 보고였다. 토요일인 이날 트루만은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덴스시 자택에서 쉬고 있다가 애치슨 국무장관의 보고를 받은 것이다.(서울로부터의 통신보도는 미국시간 6,24밤 8시) 그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요청하도록 지시했다. 마침 소련이 중화민국이 출석하는 유엔조직에는 불참한다는 원칙아래 6개월째 유엔 안보리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영국,프랑스,중화민국(이상 상임이사국),인도,쿠바,에쿠아도르,이집트,노르웨이등 9개국이 출석, 9대0으로 북한의 침공을 정지하도록 명령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거의 동시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을 철수시키고 한국군에게 탄약과 물자를 보급하도록 지시했다.
트루먼은 북한의 남침공격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과 합병,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침공, 일본의 만주침략과 같은 것으로 연상하고, 이번에 북한의 남침을 허용하면 공산주의는 아시아 전역으로 번지고 궁극적으로 3차대전을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각 육해공군 3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소집했다. 유엔의 요청에 대비한 군사적준비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는 북한군 침공소식을 전화로 보고받고 『이건 유엔에 대한 도전이다』라고 외쳤다.
트루먼이 워싱턴으로 날아가 군수뇌부와 회의를 하고 있을때 유엔 안보리는 9대 0으로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그 주요내용은 ●L 적대행위의 즉각중지 ●M 북한군의 38선으로의 즉각철수 ●N 모든 (유엔)회원국은 이 결의안 실천을 위해 유엔에 대해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남침 6일만인 1950년 7월 1일
아침 이다쓰께 비행장 떠난 스미스부대>
6월27일 유엔안보리는 제2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의 불법 침공을막기위해 모든 회원국은 한국에게 필요한 군사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에 즉각 대응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휘하부대의 활용을 허가했다.
유엔과 미국의 이 신속한 대응이 맥아더 휘하의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장 찰스 B.스미스 중령에게 출동명령이 하달되기 까지는 꼬박 나흘이 걸렸다.
6월 30일 저녁 일본 규슈(九州)의 구마모도(態本)에 주둔중인 24사단 캠프 우드의 장교숙소에서 막 자리에 들려는 스미스중령에게 부인이 『연대장님 전화받으세요』라고 했다. 저녁 9시쯤 이었다. 연대장 리처드 W.스테픈스대령은 즉각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웨스트 포인트(미국육사) 1939 학번인 스미스중령(당 34세)은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 베테랑 보병戰士(전사)였다. 그는 숙소에서 120km거리에 있는 이타즈께(板付) 비행장까지 밤을 새워 대대를 이끌고 갔다. 7월 31일 아침 8시 30분이었다. 여기서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지시했다.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가라. 우리는 적을 되도록 부산으로부터 멀리서 저지 하고자 한다....대전에서 더 갈수 있으면 갈수 있는데까지 가라...이상이다. 더이상 정보를 못줘 미안하다.』
딘소장의 지시를 받은 스미스 중령 휘하의 24사단 21연대 제1대대는 충원이 덜된 A중대와 D중대, 그리고 제3대대로부터 충원을 받은 B.C소총중대등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반수밖에 안되는 본부중대와 역시 T/O반의 통신소대, 4대의 75m/m 무반동총(대전차)소대, 4.2인치 박격포 4문, 6대의 2.36인치 바주카포(대전차용)(B.C중대에 배속), 60m/m 박격포 4대. 병사들 각자는 30구경 소총 탄환 120발과 2일분의 C-레이숀이 지급되었다. 대대원 총수 440명 가운데 한국전선으로 투입된 수는 406명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지 5년. 일본을 점령통치하고 있던 주일미군은 승리감과 평화무드에 잠겨 한반도에서 인민군과 다시금 전투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때였다.
그런 무방비한 상태에서 상부의 명령으로 부랴부랴 兵員(병원)을 충원하고 장비를 두둘겨맞춰 이다쓰께 비행장을 떠난것은 1950년 7월 1일 아침이었다.
<오산 북쪽에 布陣한 스미스 특공대장
처음 視野에 들어온것은 적탱크 8대>
이들을 수송할 C-54수송기는 6대밖에 없었다. 첫 비행기가 뜬것은 1일 08:45시. 그러나 제1, 제2의 C-54는 부산 수영비행장이 안개로 내릴수가 없어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그날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각각 부산에 도착할수 있었다.
스미스 부대는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곳곳에서 성조기와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부산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날밤 8시 군악대의 환송속에 철도편으로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에 도착한것은 이튿날인 7월 2일 아침 8시,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대전에서 오산 근처까지 사전지형 정찰을 한 스미스 중령은 평택근처에 대대본부를 두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7월 2일밤 일본으로부터 LST(상륙용 舟艇)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제52 포병대대(대대장 밀러 O.페리중령)가 7월 4일 스미스 부대와 합류했다. 이때 105m/m 야포 6문을 갖춘 A포대와 본부 및 지원중대 뿐이었다. 전투태세는 갖추어진 셈이다.
그러나 탱크부대를 앞세우고 쳐내려오는 인민군에 비하면 너무나도 취약하고 준비부족인 상태였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미군은 자신들의 존재만 (적에게) 알려도 적은 공격을 주춤할것으로 기대했다고도 한다. 어림도 없는 自信(자신)이었다.
어쨌든 7월 5일 새벽 17명의 장교와 사병, 하사관 389명, 포병 134명(장교 9, 하사관병 125명)등 총병력 540여명의 미군은 오산북방 竹嶺(죽령)에서 C-레이션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아침7시쯤 스미스 중령은 비가 오는데도 멀리 수원방면으로부터 몰려오는 적 탱크대열을 관측할 수 있었다. 처음 視野(시야)에 들어온것은 8대였다.
<포탄 명중됐는데도적 탱크들 끄떡않고 전진>
08:16시. 한국전 최초의 미군의 砲火(포화)는 불을 뿜었다. 이때 미군포대가 보유한 105m/m 곡사포탄은 1,200발. 최대사거리 12,000m의 이 포탄은 HE탄(High Explosive)이며 그중 6발만이 HEAT(High Explosive Anti tank) 즉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對戰車砲彈(대전차포탄) 이었다.
적탱크는 야포대로부터 4천야드(약3천650m)전방, 미군보병 최전방으로부터는 약 2천야드(약1530m) 전방에서 전진하고 있다. 처음에 두발, 이어 포대의 6대의 105m/m포들이 함께 불을 뿜었다.
전방의 보병들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순간 미군보병들은 깜짝 놀랐다. 아군의 포탄이 명중된것 같더니 적탱크들은 끄떡도 않고 계속 이쪽으로 전진하는것이아닌가.
대대장 스미스중령은 야포사격중지를 요청했다. 대신 적탱크가 700야드까지 접근해오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75m/m 무반동총을 쏘도록 지시했다. 105m/m포탄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적탱크 2대가 7백야드 전방에 당도했을때 미군보병의 75m/m 무반동총 두개가 불을 뿜었다. 이 직격탄 2발도 탱크에 명중했다. 그러나 선도탱크 2대는 85m/m탱크포와 7.62m/m기관포를 쏘아댔다. 두 탱크는 보병부대 바로앞까지 다가왔다. 이때 2.36인치 로켓 런처가 도로옆 배수로에서 발사됐다. 올리 D 코너소위는 적탱크가 눈앞을 지나갔는데도 약15야드나 지나간 탱크 뒷부분을 겨냥하고 로켓포 22발이나 쐈다고 증언했다.
거의 동시에 야포의 HEAT탄 두발이 두대의 적탱크에서 작렬했다. 비로소 효과가 있었던것 같다. 두대의 적탱크는 길옆으로 비스듬히 물러나 기웃둥하며 불이났고 포탑을 연 병사 두명이 뛰어내렸다. 그러나 한놈은 두손을 들고 투항했으나 다른 한놈은 기관단총으로 마구 쏘아댔다. 미군병사 한명이 쓰러졌다. 이것이 한국전 최초의 미군전사자로 기록되고 있다.
뒤를 이은 적탱크들은 미군보병부대들을 거침없이 지나 후방의 야포진지까지도 깔아뭉개고 말았다. 적 탱크대열은 모두 33대였다. 9시, 상황은 끝났다. 적탱크포화로 살상된 미군은 20명. 전과를 올린 탱크부대는 인민군 제4보병사단을 지원하는 제105탱크사단의 제107탱크연대 소속이었다.
<한국전 초전 3개월 동안 적 탱크(242대)는 전멸>
그 이튿날(7월 6일) 천안으로 후퇴한 스미스 특공대는 자세히 세어보니 150여명의 손실을 냈다. 전사상자와 실종자의 총수였다. 스미스 대대와 조우한 인민군 4사단의 손실도 비슷했다. 확인된 전사자 42, 부상자 85명이었다.
105m/m야포 6문을 최대무기로, 거의 빈손으로 적탱크 30여대를 상대로 싸운 스미스 특공대로서는 큰 손실은 보았지만 기대이상의 戰果(전과)를 올린것이다.
그러면 당시 한국군과 미군을 울린 소련제 T-34탱크는 어느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기였나? 미군정보기관도 6,25발발 3주후에야 알아냈다는 T-34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중량-35톤
길이-5.91m(포신제외)
너비-2.4m
높이-2.3m
85m/m主砲사격속도-분당 7~8발
최대속력-시속 약55km
中型(중형)경탱크로 알려진 T-34가 최초로 등장한것은 제2차대전 중인 1941년 7월 독일전선에서 였다고 한다. 키가 작고(사람키보다 약간높다), 민첩하며 두터운 장갑(heavy armor plate 라고만 알려짐)으로 보병의 대전차 바주카포나 75m/m 무반동 총탄으로도 관통이 안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정상급 탱크였다. 그러나 한국전 初戰(초전) 3개월동안 T-34는 전멸되었다.
4- 6 25는 언제, 어떻게 끝났나?
김일성의 남침극은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뺏고 낙동강까지 일사천리로 몰고갔으나 석달만에 역전되고 말았다.
<지친 공산측(소련,중공,북한)
51.6.23 휴전을 제의, 유엔군 수락>
1950년 9월 28일 석달만에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敵都(적도) 평양을 점령했고 그로부터 불과 1주일 남짓한 10월 25일 압록강변 혜산진과 청천강 근처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조우하여 또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오쩌퉁은 10월 1일 김일성의 다급한 SOS(구원)편지를 받고 원래 약속했던대로 압록강변에 대기시켰던 중공군 3개군, 9개사단 약10만명을 10월 13일밤부터 압록강을 건너게 했던 것이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중공군에게 내어준 국군과 유엔군은 오산 남쪽 북위37도선 가까이까지 물러서야 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미군장병을 귀국시키겠다던 승승장구의 맥아더 장군은 51년 4월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후임 매슈 B.릿지웨이 대장은 51년 6월 더이상 물러설수 없다는 캔사스 라인을 설정, 총력을 다해 중공군을 압박했다. 캔사스,와이오밍라인은 서울북방 32km지점인 임진강 河口(하구)로부터 동쪽으로 38선에서 약40km북상한 태백산 끝자락까지로 그어졌다. 이무렵 중공군의 병력손실은 수십만명에 달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더 싸워봤자 별수없다는 판단아래 휴전을 제의했다. 1951년 6월 23일 소련 외무차관겸 유엔수석대표인 야콥 말리크는 ‘평화의대가(Price of Peace)’라는 야릇한 제목으로 휴전을 제의하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은 서로 38선까지 물러나자는 것이었다. 먼저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 휴전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유엔군측은 이에 곧 응답했다.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은 6월 30일 역시 라디오 방송으로 상대방에게 날자를 정하고 첫 휴전회담은 원산 앞바다에 떠있는 중립국 덴마크의 병원선에서 하자고 제의했다. 이에대해 공산측은 7월 4일, 예비회담을 7월 8일 개성에서 하자고 역 제의해 왔다.
결국 공산측 역 제의대로 유엔군은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예비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개성은 敵陣(적진)이다. 어떻게 전투지역을 통과해서 적진까지 갈것인가?
7월 8일 예비회담 첫날은 미공군의 앤드루 J.키니(Andrew J.Kinney)대령 일행이 문산에서 헬리콥터편으로 개성까지 갔다. 일행중에는 한국군의 李壽榮(이수영)중령, 리처드 언더우드(元一漢)중위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1년 7월 10일개성에서 첫 예비회담>
이날 來鳳莊(내봉장)이라는 옛 料亭(요정)에서 열린 예비회담에서 키니대령은 유엔군측 본회담 대표단 명단을 제시했다. 대표단은 수석대표는 극동해군사령관 C터너 조이중장, 한국군 대표로 白善燁(백선엽)소장, 8군 부참모장 헨리 I 호드스소장, 미극동공군부사령관 로렌스 C 크레이기소장, 그리고 미극동해군 부참모장 알레이 A 버크소장등으로 구성됐다.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이 미리 보낸 명단을 본 다음에야 그들의 대표단 명단을 비로소 제시했다. 공산군측은 「조선인민군」대표 3명과 「중국인민의용군」대표 2명으로 구성됐다. 「조선인민군」은 南日(남일)중장, 李尙朝(이상조)소장, 張平山소장이고, 중공군은 鄧華(탱후와)중장, 시팡소장이다.
남일은 휴전후 교통사고를 가장해 숙청됐고 이상조는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소련 붕괴후 한국을 방문, 옛 敵對者(적대자) 백선엽 장군과도 만나 옛일을 회고하기도 했다. 그도 김일성 부자를 반대하여 소련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명단을 교환한뒤 예비회담 대표들은 전투지역을 통과해서 유엔군 대표단이 어떻게 공산군 장악하의 개성을 드나드느냐, 회담은 어떤 형식으로 하느냐, 회담중 유엔군 대표단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등을 논의했다. 그 결과 전례없는 회한한 방법들이 공산측으로부터 제시되었다.
<敵陣인 개성 회담장으로 가는
유엔군은 백기를 달고오라, 그후 관례화>
공산측은 유엔군 대표단이 육로로 개성을 출입할때 차량에 白旗(백기)를 달고 오라, 그러면 유엔군 대표단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것이었다.
백기는 萬國的(만국적)으로 통하는 항복의 상징이다. 전투중에도 백기나 흰 손수건을 흔들면 투항의사 표현으로 알고 상대방은 쏘지않고 生捕(생포)하게 마련이다. 유엔군이 왜 백기를 달기로 합의했는지 모를일이다.
지금도 휴전선(남북으로 2km씩 4km 격리된)에 들어가려면 유엔군측은 백기를 달아야 한다. 유엔군측은 아마도 「까짓 백기면 대수냐 휴전만 성립하면 됐지」하는 식으로 간단히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산군측은 이걸 두고두고 선전자료로 울거먹고 있다. 공산군측의 심리전수법은 백기만이 아니다.
<이승만과 평양시민의 자유민주통일의 꿈 좌절>
7월10일 아침 본회담을 위해 유엔군측 대표단과 수행원 및 보도진을 태운 기나긴 차량 행렬이 일제히 백기를 달고 개성으로 향하자 板門店(판문점) 북측 「인민군」측 관측소(OP)에서 정지명령이 내려졌다.
비무장인 대표단은 하는수없이 서라는대로 섰다. 공산측은 「준비관계」로 잠시 정지시키는것이라고 했다.
얼마후 그 「준비」가 무엇인지 알게됐다. 유엔군 대표단은 모두 略服(약복)이나 작업복 차림인데 반해 공산군측은 正裝(정장) 또는 예복을 입고 탑승한 차량들이 유엔군 대표단 차량들의 앞장을 섰다. 누가봐도 勝者(승자)가 차량마다 백기를 달고 투항하는 敗者(패자)들을 인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공산측 사진사들은 이 「凱旋(개선)의 행렬」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며 촬영하기에 바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휴전회담은 장장 7백여일(약2년)을 질질 끌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12분 양측이 停戰(정전)협정문서에 서명을 마치고 22:00(밤10시)에 김일성의 동족상잔전쟁으로 비롯된 공산군과 유엔군간의 銃砲聲(총포성)은 실로 3년여만에 멈추었다.
마오쩌퉁의 지원약속과 스탈린의 追認(추인)을 받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김일성의 동족상잔전쟁은 비극으로 끝났다.
<이승만의 휴전협정 서명거부는
국토의 영구분단 동의 못했기 때문>
한편, 미국과 유엔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긴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은 위기를 통일의 기회로 잡고 50년 10월 15일 평양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그곳을 방문, 북한동포들을 격려하며 꿈꾸던 자유민주통일의 꿈도 접어야 했다. 3년간의 소모전에 지친 미국의 제한전쟁 때문이었다.
그러한 미국을 못마땅히 여긴 이승만은 한국민의 통일의 염원을 꺾고 공산군을 남겨둔채 휴전을 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그중에서도 세계를 놀라게 한것이 휴전협정이 성립되기 한달전인 53년 6월 18일 이승만이 극비리에 2만 5천명의 반공포로들을 「불법」 석방시킨것이었다. 이들은 부산, 마산, 논산 및 상무대(광주)등의 포로수용소에 분산수용됐던 인민군포로중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이었다.
휴전협상이 결렬될지 모르지만 2만 5천여명의 젊은이들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것은 그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자유를 구속하고 공산화통일을 하려던 김일성에의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석방에 앞선 6월 6일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대장에게 「한미방위조약을 맺음과 동시에 미국의 군,경 원조와 미국 해,공군의 한반도외곽방어 및 반도로 부터의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청한바 있다. 클라크는 물론 이 사실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알렸다.
그러자 6월 12일 국무장관 덜레스로부터 이승만에게 편지가 왔다. 워싱턴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주변상황을 핑게로 못간다고 거절하고, 대신 덜레스보고 당신이 서울로 오라고 했다.
덜레스도 바빠서 못오고 대신 대통령과 국무장관 양쪽의 신임이 두터운 월터 S.로버츤(Walter S.Robertson)국무차관을 보내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만약 미국이 자신의 6,6요구를 안들어주면 휴전을 거부하고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은 이승만의 遠慮深謀
이해하고 그의 5개항조건 모두 들어줘>
화들짝 놀란 아이젠하워는 급히 클라크를 이승만에게로 보내어 두가지를 분명히 했다. 그 하나는 휴전협정+한미방위조약+모든외국군철수는 안된다. 또하나는 한국군 단독으로는 북진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문제는 후에 대통령특사인 로버츤과의 회담에서 잘 해결되었다.
다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한국이 만약 이에 동의한다면 그건 국토의 영구분단을 뜻하기때문이라는 깊은 뜻에서였다.
미국은 이승만의 그러한 遠慮深謀(원려심모)를 이해하고 그가 로버츤에게 내놓은 5개항의 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그것은
●L 휴전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약속
●M 대한민국은 미국으로부터 장기 경제원조를 받으며, 그 첫 실천사항으로 2억달러를 공여한다
●N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은 참전국이 참가하는 90일(휴전협정규정)간의 정치협상에서근본적 문제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을경우 협상에서 탈퇴한다.(이승만은 소위 정치협상을 두려워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O 한국군의 증강계획을 계속 추진한다
●P 정치협상전에 한미간의 고위급 절충을 약속한다.
이승만은 여기서 단독 북진통일과 모든 외군국철수주장을 접었다. 그만한 대가를 받았다고 여겨서이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밤10시를 기해 김일성이 일으킨 「폭풍」은 3년 1개월만에 완전히 잦아들었다.
5- 6,25는 사람을 얼마나 죽였나?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6,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戰火(전화)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인민군」점령 3개월간 민간인 학살자만 37만명>
전투 병력의 손실만 해도 한국군(전사: 14만명, 부상: 178,632명, 실종 및 포로: 82.310명, 계: 319,759 )을 포함하는 유엔군(전사: 36,991명, 부상: 115,648명, 실종 및 포로: 6,944, 계: 159,583명 )의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 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6,25 남침 개시 이후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및 9,28 서울 수복으로 쫓겨 가기 시작할 때 까지 북한군이 남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3개월 동안 저 악명 높은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 계급’으로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민간인 사망(학살당한 인원 포함): 370,599명, 부상: 229,625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03,212명, 피난민: 240만 명, 전쟁미망인: 20만, 전쟁고아: 10만 여명으로 추산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집권 좌익세력들은 미군과 한국군의 좌익 민간인 학살만 있었던 것처럼 덮어씌우는 과장 확대 선전을 하고 있으나 공산 북한군 및 남한 좌익 빨갱이들의 무고한 남북한 민간인 및 학살은 무자비하고 처참한 전쟁 범죄 그 자체였다는 증언과 기록들이 남아있다.
한국에서 자행된 공산군의 대표적인 민간학살 대표적 사례는 저 악명높은 대전형무소 수감자 대량학살이다.
한국논단 2001년 6월호 육이오 남침 특집 글 「잊을 수 없는 공산당 만행 (이도형)」에 따르면 공산군과 내무서(북한경찰)에 의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양민은 경찰관 교사 학생 공무원 심지어 농민 이발사 운전기사 등 모두 3천1백 19명(반공애국지사 유족회 파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거의 전원이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이글은 1953년 유엔군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이 유엔에 제출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잘 전해주고 있다.
「...1950년 9월 20일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왔습니다. 공산당들은 야간을 이용해 1백 명 , 2백 명씩 수감자들을 끌어내 손을 등 뒤로 묶고 다음에는 그들을 연쇄적으로이어서 결박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학살 장소로 끌고 가 미리 파놓은 고랑에 쳐 넣고는 사정없이 사살했습니다. 생존자가 있는지 조사해 총 개머리 판으로 머리를 박살내는 확인 학살도 자행했습니다.
<민간인 백만명이 죽고 천만명이 이산가족되고
8만5천명이 북으로 납치된것이 6,25전쟁이다>
그리고는 흙을 덮어버리는 집단 매장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 수천 명(클라크 장군은 5천여 명으로 추정)중 생존자는 일반 민간인 3명, 한국군 병사 1명, 미국인 2명을 합해 불과 6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밖의 수천 구에 달하는 학살 시체는 모두 발굴되었습니다....」
서울대병원 후문 안쪽에 지금도 서있는 비문은 6,25당시 그곳에서 벌어졌던 공산당의 만행을 잘 말해주고 있다.
1999년 서울대 병원장 이름으로 세워진「이름 모를 자유 전사 비」에는 그 비석의 유래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공산군이 창경궁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을 때 서울대병원에는 거의 1천명에 달하는 일반환자와 부상 장병들로 병원복도까지 가득 차 있었다....북괴군은 병원에 난입하여 입원중인 국군 부상 장병과 일반 환자, 그 가족 9백 명 이상을 산채로 구덩이에 묻거나 불에 태워죽이고 총을 난사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이 바로 그 처참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라를 지키고 병원을 지키다 그 젊은 나이에 장렬히 산화하신 이름 모를 자유전사들, 그리고 환자들과 그 가족의 영령 앞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고이 잠드소서. 1999년 현충일에 세우다. 서울대학교 병원장」
무슨 말이 더 필요 하겠는가? (공산군의 6,25 남북한 민간학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논단 2001년 6월호(육이오 51주년 추모) 이도형 글과 7월호 이한수 글 참조)
학살에 못지않은 북한 공산군의 6,25남침 인명유린은 무수한 한국인 납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학자 종교인 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들의 생사확인도 북한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 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 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전쟁이 끝나고도 50여 년 동안 부모 형제 자식 친척 친지들과 생이별을 강요당하고 있는 이른바 남북 1천만 이산가족인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좌익정권의 도움으로 아직도 연명 하고있는 김정일 세습 독재정권의 완강한 핵 고집과 개방개혁 거부로 죄없는 1천만 생이별의 사람들이 아직도 계속되는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하고있는 것이다.
출처- 한국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