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작-이혜리]
끝없는 여자 외 4편
이혜리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의 머리를 쪼개서
한 여자 뛰쳐나온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별처럼 비가 내리고
계단에 앉아 귓바퀴에 앉은 빗방울을
굴리고 있던 또 다른 여자
벌떡 일어나서 뒷걸음질 친다
창문에서 미끄러지는 빗방울의 진동을
기록하고 있던 어떤 여자
뒷걸음질 치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서 흘러내린 내장에 입김을 불고 있던 여자
뒷문으로 뒷걸음질 친다
그 옆에서 피아노 건반을 쓰다듬고 있던 여자
늘리다 만 음표를 주워서 어깨에 걸치고
외출 준비를 한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골목길에서 묵은 문장들을 바닥까지
긁어 먹고 있던 여자
뒷글음질을 치는 여자들과 맞닥뜨린다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목만 굴러다니던 여자
하반신을 내팽개치고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들의 선두에 선다
허공에서 빗방울의 돌기가 경련하는 순간
음표를 어깨에 걸치고 외출하던 여자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들 중 한 명을 잡아서
허벅지를 갈라 그 틈 사이에 넣고 박음질한다
갑자기 촉수처럼 곤두선 빗방울
빗방울들이 여자들의 목덜미에 내리꽂힌다
뒷걸음질을 치는 한 여자의 머리를 쪼개서
여자 뛰쳐나온다
국자를 끓이는 시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할 때
나는 버릇같이 고양이를 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거해오지
길고양이 변장술인 거 몰랐지?
골목길에서 등을 쫑긋
곤두세우고 있던 고양이야
한번쯤 줄무늬 그려줄까?
수프 맛은 국자에 달려 있어
국자를 끓이면 고양이 맛
수프에 가득 섞이겠지
전화벨이 잠꼬대처럼 울리고
나는 날로 살이 찐다
점점 휘어가는 국자로
시간을 수프처럼 저을래
냄비에서 김이 오른다
흐릿해진 줄무늬들이
뛰쳐나오겠다는 신호
수프가 알맞게 걸쭉해졌어
고양이 냄새가 온 동네 가득해지면
한 국자 떠 볼까?
달의 뒷면 탐사기
발걸음이 이끌렸다
울컥, 라면가락이 목울대로 솟아오른다
달싹이는 혓바닥을 누르니
물이 들이찬다
버짐처럼 피어오르는 경련에
척추가 휜다
달무리를 내뱉었다
목덜미에서부터 돋아나는 소름
지금나를보고있나요
눈이 마주쳤다
윤곽이 일그러지고
눈코입 뭉개진 당신
나는반쯤엉긴채로당신은반쯤멀어진채로아직한데있어요
가지말아요내가테두리를잘라줄게요
돋음새김된 당신에 가려진
뒤통수에 손가락이 가려다 말고
당신,손가락새흐느끼던머리칼은여전한가요
잠, 잠
오랫동안 잠을 앓았다
벽에 등을 밭기고 모로 눕는다
나는 여기저기로 향하는 시선 속에서 온데간데없다
돌아눕는다 진득하게 들러붙은 낮이 두피를 간질인다
날 것으로 뒷모습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불안해지는
나는 눈꺼풀 안에서
떨어진다, 무릎 뼈가 움찔 들리고, 나는 떨어진다, 자궁 안에 있는 동생을, 또 떨어지다가, 미안해, 말하다 말고, 끄집어내서 연애를 하다가, 벌써 함몰하고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떨어진다, 앞으로 목덜미에서 오소소 돋아날, 동생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떨어진다, 서늘하게, 바람이 불고, 나는 달력 속에서, 부풀고 있는 숫자들과 휩쓸리다가, 튕겨져 나간다, 여기야, 여기, 잠긴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조각조각 나눠진 동생이, 나무에 하나씩 걸려있다, 그때, 뼈만 남은 손이 어디선가 다가와서,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고,
나는 좀처럼 잠잠해질 수 없어서
몸을 일으킨다 시계바늘의 움직임을 끌어내려서
달려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눕는다
점점 확장하고 있는 허공에 얼굴을 내민다
눈꺼풀을 끌어당겨서 시선을
천천히 동공에 입힌다
다시 뒤척이며 돌아눕는다
언제든지 찌푸릴 수 있는 이불에
살갗을 베이면서도 나는
동그라미 친 날짜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나는 오늘도 귓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귓바퀴에서 흘러내린 시간을 주워 먹는다
펭귄의 야간비행
펭귄들의 비행을 돕느라 나는 밤마다 동네를 돕니다
골목 한 모퉁이에서 펭귄 한 마리
부리까지 덜덜 떨면서 번식합니다
어린 내가 펭귄 옆구리를 기어올라요
날개자국의 봉제 선은 너덜거리죠
펭귄이 내 달팽이관의 속살을 헤집으며 속살거려요
(나는 아빠 발등에 올라서서 엄마를 조금씩 파먹었어요)
내 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귀지를 뱉더니
(나는 당신의 시선이 돌아다니는 새벽을 간질이고 싶어요)
갑자기 멀미처럼 펭귄의 귀가 어지럽게 돋아나요
붉게 상기된 귀들이 기지개를 깜박, 깜박 반복적으로 펴요
갑자기 펭귄이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무릎관절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군요
동네 한 바퀴 다 돌기도 전에 흰 뼈가 튕겨 나와요
펭귄 등가죽에 장착된 나는 잠꼬대를 합니다
펭귄 귀에 점점 야위어 가는 그을음을 채워 넣고 있는데
펭귄 날아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