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법칙이자 유일한 진리를 시험할 수 있으며 유일하게 논쟁을 판정하는, 성령님께 맡겨진 절대적 초월성이다.
말씀에 쓰이지 않은 것, 혹은 그 말씀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성경과 동등한 다른 어떤 안내자가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성경의 지상적 권위는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체제의 초석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성경에 자명하게 기록된 바를 보여주라. 그리하면 현세의 인간성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고 믿을 것이며 또한 그것에 순복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신앙으로써 성경에 위배되는 바를 증명해 보여주라. 그리하면 아무리 허울 좋고 진실같이 그럴듯할지라도, 제 아무리 아름답고 명백히 바람직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항이 성경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면 성경으로부터 추출해 낼 수 없으며, 성경과 명백하게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할 것이다. 금단의 과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히 그것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혹은 성경의 논증들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의지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반석이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은 모래일 뿐이다.
2. 인간의 죄악됨과 타락에 대해 그것이 부여하는 깊고도 탁월한 의미이다.
그 이론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본래의 의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비참하고 가련하며 파국적인 상황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책과 임박한 위험, 그리고 유죄 판결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조물주와 적대관계에 있고 천국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저희 조물주를 섬기려는 아무런 의지도, 저희의 조물주에 대한 아무런 사랑도, 천국에 대한 아무런 부응되는 요소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강도(强度)의 영적인 병은 그 치유를 위해 강력한 영적인 치료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치명적인 상처를 쉽게 치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부추기는 듯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체제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형식주의와 예식주의, 그리고 단순히 외적이며 대리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모든 종류의 기독교를 배격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신앙은 인간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적합하지 못한 생각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보다는 영혼을 구원하고, 대속하고 성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 성자 하나님의 피가 양심에 적용되며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요하다. 타락의 영향에 대한 무지, 원죄에 관한 전반적인 교리에 대한 무지야말로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 신앙을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중대한 하나의 이유라고 믿는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빌1:10). 이 말씀은 사도의 명령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임에 대하여 최고의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가 인간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성격에 지고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인들을 위한 완전한 구원, 그리고 죄책과 죄의 세력과 결과로부터의 구속이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용서받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들과 관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죄인인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사이에는 오직 단순한, 어린 아이 같은 신앙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들과 도움들, 성직자들과 규례들은 이 신앙을 돕는 범위 내에서만 유익하며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써 의지하고 의뢰할 때에 그것은 영혼에 독약과 같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넉넉함과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그 단순명료함을 아무리 강조해서 말하여도 결코 지나치니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교리는 엄밀히 말하여 본성적인 인간의 마음들이 대부분 싫어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굳게 확신하고 있다. 사람이 추구하는 종교는 이목과 감각의 종교이지,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그 본질이 “믿는 것”인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영속적인 삶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리고 단순한 개인적인 믿음으로 매일같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4. 사람의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내적인 사역에 높은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이 어떠한 사람에게 있어서 활력있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와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마음 가운데서의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내부에서 진정한 체험적인 일이 있기까지는 그의 신앙은 단순한 껍데기, 쭉정이, 이름 내지는 형식 뿐이고, 그는 위로를 받을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될 필요가 있는 사항들은 성령의 능력이 있는 사역들, 내적인 회개, 내적인 믿음, 내적인 소망, 죄에 대한 내적인 혐오,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내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중요한 은혜들을 알지 못한 채 세례를 받은 것이나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자체에서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실수일 뿐만 아니라 명확하게 참혹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내적인 사역은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 일이며 인간은 또한 이를 내적으로 느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러 감정들은 종종 믿지 못할 거짓된 것들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회심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떠한 창조도, 영혼의 새로운 탄생도 있을 수 없음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우리는 비록 남용될 여지가 많기는 할지라도 영혼의 증거는 진정한 것이요 참된 것이라는 의견을 고수한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하는 것 만큼이나 그 정도와 위치에 있어서 사모해야 하는 것을 엄중한 의무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으면 진정으로 아무것도 소유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5.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의 성령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사역에 대해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언제나 그 은혜를 소유한 사람의 여러 행위나 품행, 취향, 방법, 선택, 습관들에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그 은혜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 안에 내재된 채 정지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의 씨는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 안에 거하는 씨이다(벧전1:23, 요일3:9). 성령께서는 그가 거하시는 곳마다 항상 그의 존재를 알려지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지 않는 한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늘나라의 후사들”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우리는 “열매”야말로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확신 있게 단언한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생활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꼭 성령의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열매가 보이지 않는 은혜는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2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