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잎·마흔
행선(行禪)의 효험
The Benefits of Walking Meditation
우 실라난다 큰스님 지음
우철환 옮김
BODHI LEAVES NO.137
Published in 1995
▲ 차례
1. 행선이란 무었인가.
2.행선과 사대
3. 행선과 명색(名色)
4. 행선과 삼법인(三法印)
1. 행선이란 무엇인가
우리 선원(禪院)의 수행자들은 네 가지 자세로 마음챙김[正念] 공부를 합니다. 걸으면서, 서서, 앉아서, 그리고 누운 채로[行·住·坐·臥] 마음챙김을 닦지요. 어떤 자세든 늘 마음챙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역시 마음챙김 명상의 으뜸가는 자세는 가부좌(跏趺坐)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몸은 움직임 없이 이런 가부좌 자세로 여러 시간 버틸 수가 없고, 따라서 수행자는 좌선(坐禪)과 행선(行禪)을 번갈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선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그렇습니다. 이제 행선의 성질과 의의, 그리고 그로부터 생기는 이로움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마음챙김 공부는 물을 끓이는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을 끓이려면 우선 물을 탕관에 부은 다음, 탕관을 화덕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핍니다. 불은 연속적으로 물이 담긴 탕관을 달궈야 합니다. 잠시라도 불이 꺼진다면 다시 불을 붙인다 해도 물은 잘 끓지 않습니다. 불을 때다 말다 반복한다면 물은 결코 끓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챙기는 시간에 사이사이 공백이 생긴다면 마음챙김의 힘을 얻을 수 없고, 집중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이곳 선원에서 수행자들에게 권하는 바, 아침에 잠깨어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깨어있는 내내 찰나의 공백 없이 수행에 임하도록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마음챙김 수행을 그치지 않고 이어 나가려면 좌선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이 수용할 수 있는 행선이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행선을 해봤자 아무런 이익이 없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행선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행선을 맨 처음 가르치신 분은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대념처경(大念處經)』(장부 22경)에서 행선에 대해 두 번이나 가르치셨습니다. ‘자세’를 설한 대목에서 “비구는 걷고 있을 때 ‘나는 걷고 있다’고 알고, 서 있을 때 ‘나는 서 있다’고 알고, 앉아 있을 때 ‘나는 앉아 있다’고 알고, 누워 있을 때 ‘나는 누워 있다’고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선명한 알아차림[把知 sampajāna-kārī]’를 설한 대목에서 비구는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 돌아설 때나 선명하게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명한 알아차림’이란 관찰하고 있는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수행자가 관찰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얻어야 하고, 집중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챙김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선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명한 알아차림뿐만 아니라 마음챙김과 집중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께서는 명상하는 사람들에게, 걷고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가고 되돌아 서”는 순간에도 마음챙김과 집중, 그리고 선명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기를 권고하셨습니다. 좌선과 다음 좌선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수행방법으로서, 이렇듯 행선은 명상수행 과정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경전에 부처님께서 행선에 대해 상세하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언젠가 그러한 가르침을 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어김없이 배웠을 테고, 그 후 여러 세대를 통해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옛 스승들은 자신의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법을 나름대로 체계화시켰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대단히 상세한 행선 수행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행선 수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여러분이 초보자라면 가르치는 사람은 행선 중에서 단 한가지만 마음에 챙기라고 지도할 것입니다. 걸음을 옮기는 행동에 유념하여 ‘걸음, 걸음, 걸음’ 또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며 마음 속으로 조용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수행할 때는 보통 걷는 속도보다 더 느리게 걷는 방법이 좋습니다.
이 공부를 시작한지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여러분은 두 가지, 즉 (ⅰ)발을 옮김 (ⅱ)발을 디딤을 챙기면서 ‘옮김’ ‘디딤’ 하고 마음 속으로 되뇌도록 지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옮김, 디딤’ ‘옮김, 디딤’ 하면서 한 걸음에서 두 단계를 챙기려 노력하게 됩니다. 다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세 단계, 즉 (ⅰ)발을 듬 (ⅱ)발을 앞으로 내밈 (ⅲ)발을 디딤을 챙기도록 지시 받을 것입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여러분은 한 걸음에서 네 가지 단계, 즉 (ⅰ)발을 듬 (ⅱ)발을 앞으로 내밈 (ⅲ)발을 내림 (ⅳ)발로 바닥을 밟음을 챙기도록 지시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완벽하게 마음을 챙겨, ‘듬, 내밈, 내림, 밟음’ 하고 발 동작의 네 단계를 마음 속으로 뇌도록 지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 수행자들은 걸음걸이를 늦추는 행위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관련 동작 하나하나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나면 점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에 따라 저절로 천천히 움직이게 되지요. 일부러 걸음걸이를 늦추려 하지 않아도, 주의를 면밀히 기울임에 따라 저절로 천천히 움직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운전해 갈 때 시속 100, 혹은 120킬로미터나 14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낸다고 합시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운전한다면 길가의 표지판 가운데 일부는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운전자가 표지판을 읽고자 한다면 누군가 “천천히!”라 말하지 않아도 운전자 스스로 속도를 늦출 테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들이 발을 들고, 발을 앞으로 내밀고, 발을 내리고, 발로 바닥을 밟는 동작에 좀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한다면 저절로 느리게 움직이게 됩니다. 이렇게 느리게 움직일 때, 비로소 이러한 동작을 통해 진정으로 ‘마음을 챙길’ 수 있고, 자신의 동작에 대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속도를 늦춘다해서 수행자가 모든 동작과 단계의 일체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 하나의 동작과 단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의 연속동작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집중력이 강해짐에 따라 수행자는 한 걸음 속에 포함돼 있는 여러 단계를 점점 더 명확하게 관찰하게 되고, 적어도 네 단계 정도는 쉽게 구분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발을 떼는 동작이 발을 앞으로 옮기는 동작과 뒤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고, 발을 앞으로 옮기는 동작이 발을 떼는 동작이나 발을 내려놓는 동작과 뒤범벅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동작 하나하나를 명확하게 구별하게 됩니다. 그처럼 ‘마음을 챙겨’ 매사를 ‘알아 차리’면 모든 것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2. 행선과 사대(四大)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수행자들은 훨씬 더 많은 걸 관찰하게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에는 발의 가벼움을 경험합니다. 발을 앞으로 내밀 때에는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자신이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발을 아래로 디딜 때는 발의 무거움을 느낍니다. 발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점점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발로 땅을 밟을 때 그들은 발뒤꿈치가 땅에 닿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발을 듬, 발을 앞으로 내밈, 발을 내림, 발로 땅을 밟음 등을 관찰함과 더불어, 들어올리는 발의 가벼움, 발과 신체의 이동, 아래로 내리는 발의 무거움, 발로 땅을 밟을 때 발에 닿는 단단하거나 물렁함도 지각하게 됩니다.
수행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지각함과 아울러 4대 요소[四大 dhātu]도 지각하게 됩니다. 네 가지 요소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입니다. 행선의 네 단계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개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과정, 궁극적 실체로서 사대(四大)의 본질을 느끼게 됩니다.
행선에 있어서 사대의 특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논해 봅시다.
첫 번째 동작, 즉 ‘발을 들어올림’에서 수행자들은 가벼움을 느낍니다. 이때 그들은 사실상 불이라는 요소[火大]를 느끼게 됩니다. 불이라는 요소의 한 가지 특색은 사물을 가볍게 만드는 성질입니다. 사물이 가벼워지면 상승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발이 위로 올라갈 때 느끼는 가벼움 속에서 불이라는 요소의 본질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에는 가벼움 외에 움직임도 있습니다. 움직임은 공기라는 요소[風大]의 한가지 특색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벼움, 즉 불[火]의 요소가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발을 드는 단계에서는 불[火]의 요소가 주가 되고 공기[風]의 요소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요소는 수행자가 발을 드는 동작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때 지각됩니다.
다음은 ‘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의 단계입니다. 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의 주된 요소는 공기라는 요소[風大]입니다. 움직임이 공기[風]의 주된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행선 중 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때 가지는 느낌의 정체는 공기라는 요소[風大]의 본질입니다.
다음 단계는 ‘발을 내려놓는 동작’입니다. 수행자가 발을 내려놓을 때 발에는 무거움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무거움은 물이라는 요소[水大]의 성질인데, 물은 무게로 인해 아래로 떨어지거나 스며 나오게 마련입니다. 수행자가 발의 무거움을 느낄 때 사실상 그들은 물이라는 요소[水大]를 지각하는 것입니다.
‘발로 땅을 밟는 동작’을 취할 때, 수행자는 땅을 디딘 발을 통해 단단함이나 물렁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흙이라는 요소[地大]의 성질에 속하는 느낌입니다. 땅에 발을 디디는 동작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수행자는 사실상 흙이란 요소[地大]의 본질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지 한 걸음에 불과하다고 여기던 그 동작에서 수행자는 여러 과정을 지각해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그는 사대(四大)와 사대의 본질을 지각하게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3. 행선과 명색(名色)
수행자들이 행선을 계속 닦다보면 동작 하나하나에 그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즉 ‘주시하는 마음’도 더불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릅니다. ‘들어올리는 동작’이 있고, 그 들어올림을 ‘알아차리는 마음’ 또한 있습니다. 다음 순간 앞으로 내미는 동작이 있으며, 또한 그 동작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도 있습니다. 더욱이 수행자들은 그 동작과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 두 가지가 순간에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순간에는 발을 내려놓는 동작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발을 내려놓는 순간에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동일한 과정이 발을 땅에 딛는 동작에도 일어납니다. 즉 땅을 디딤과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행자들은 발의 움직임과 더불어 알아차림의 순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순간 순간은 빠알리어로 ‘나마 nāma’, 즉 마음[名]이라 하고, 발의 움직임은 ‘루빠 rūpa’, 즉 물질[色]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마음과 물질이 매 순간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지각하게 됩니다. 한 순간 발 들어올림과 들어올림의 알아차림이 있고, 다음 순간에는 앞으로 발을 내밈과 내밈의 알아차림이 있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마음과 물질은 짝을 지어 매 순간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면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수행자들은 관찰의 매 순간마다 마음과 물질이 짝지어 나타남을 지각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게 됩니다.
수행자들이 이러한 행선 수행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 한 가지는 동작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의도의 역할입니다. 그들이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도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고, 발을 앞으로 옮기는 동작도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고, 발을 내려놓는 동작도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고, 발을 땅에 딛는 동작도 그렇게 원해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동작마다 의도가 선행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들어올리려는 의도가 있고 난 후에 들어올리는 동작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이 조건부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움직임이든 조건 없이 스스로 생겨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신이 만든 일도, 어떤 권위자가 만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움직임이든 원인이 없으면 결코 생겨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는 원인이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바로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 선행하는 의도입니다. 이것이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자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발견입니다.
수행자들이 모든 움직임에는 반드시 조건이 함께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또 그러한 움직임이 어떤 권위자나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그 움직임이 어떠한 의도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의도야말로 움직임을 일으키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건 지움과 조건 지어짐,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납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자들은 마음[名 nāma]과 물질[色 rūpa]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게 됩니다. 마음과 물질이 조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마음과 물질에 대한 의심을 벗어버리면, 그 수행자는 ‘소 예류과’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예류과란 깨달음의 첫 단계에 도달한 사람, 즉 ‘흐름에 든 사람’을 말합니다. ‘소 예류과’란 진정으로 예류과에 든 사람은 아니지만 천상계나 인간계와 같은 행복한 영역으로 재생할 수 있는 자격이 마련된 사람이라 합니다. 그 말은 ‘소 예류과’에 든 사람은 지옥의 어느 곳이나, 혹은 축생계 등 네 가지 악도(惡道)에 태어나는 일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행선만 닦아도, 발걸음에 수반되는 여러 움직임에 면밀한 주의만 기울여도, 이런 ‘소 예류과’ 상태에 들 수 있습니다. 이 점이 행선 수행의 커다란 효능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도달하기란 그리 쉽지 않지만, 일단 이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는 거기에서 추락하지 않는 한 행복한 영역으로의 재생이 보장됩니다.
4. 행선과 삼법인(三法印)
수행자들이 매순간 일어나고 또 사라지는 마음과 물질을 파악했을 때, 그들은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의 과정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 이르고, 또 그 들어올림에 대한 ‘알아차림의 무상함’도 파악하게 됩니다. 들어올림을 알아차리는 일이 발생한 셈이고, 그것이 무상하다는 말이지요. 일어나는 일 뒤에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무상하다고 이해하게 되니까, 결국 무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 내지는 특성이 됩니다.
어떤 것이 무상(無常)한지 아니면 항상(恒常)한지 판정하고 싶다면, 우리는 명상의 힘으로 그것이 존재화의 과정에 지배받고 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라지게 되는 과정에 지배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명상력이 현상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실을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에 도달해 있다면,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그러한 현상들이 무상하다고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수행자는 발을 드는 동작과 그 동작의 알아차림을 관찰합니다. 이어서 이 단계가 다음 단계, 즉 발을 앞으로 내미는 동작과 그 동작의 알아차림에 자리를 넘기고 사라집니다. 이러한 동작들은 단지 생겨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사라지고 할 뿐입니다.
수행자들은 이 과정을 혼자 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외부 권위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음과 물질[名色]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파악할 때, 그는 마음과 물질이 무상하다고 이해합니다. 명색(名色)이 무상함을 보게 되면 다음으로 그것들이 만족스럽지 못함을 또한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명색이 끊임없는 생겨남과 사라짐에 항상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함과 만족스럽지 못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고 나면, 이 사물에 대한 통어력(統御力)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또한 관찰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사물의 내면에 그들의 영구함을 명할 수 있는 어떤 자아나 영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사물은 자연법칙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이것을 파악함으로써 수행자들은 조건지어진 현상의 제3의 특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 anatta)의 특성인데, 사물에는 자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아(anatta)의 의미 중 하나는 통어력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어떤 실체·영혼·힘 등, 어느 것도 사물의 본성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지배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단계가 되면 수행자는 조건지어진 모든 현상의 세 가지 속성―무상(無常 anicca)·고(苦 dukkha)·무아(無我 anatta)―을 파악하게 된 셈입니다.
수행자는 발을 드는 동작과 발을 드는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을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이 세 가지 특성[三法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동작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물들을 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조건지어진 온갖 현상들의 무상·고·무아의 속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 행선의 동작들을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누군가 발을 드는 동작을 촬영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발을 드는 동작이 1초 걸린다고 가정하고 카메라가 매초 36개의 영상을 찍을 수 있다고 칩시다. 촬영이 끝나고 영상 하나하나를 본다면 우리가 하나의 동작이라고 생각했던 발을 드는 동작에는 실제로 36개의 동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각 영상들은 서로 다릅니다. 차이가 너무도 미세하여 겨우 알아차릴 정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카메라가 매초 일천 장의 사진을 찍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진에 드러난 동작의 차이는 거의 식별하기 힘들겠으나 어쨌든 발을 드는 단 하나의 동작 속에 일천 개의 동작이 있게 됩니다. 카메라가 매초 일백만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가능해진다고 가정하고―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 하나의 동작일 뿐인데 그 속에는 일백만 개의 동작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행선을 하면서 카메라가 촬영하듯 우리의 동작을 한 커트 한 커트 면밀히 보려고 애씁니다.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과 동작 하나하나에 선행하는 의도를 보려합니다. 그로 인해, 실제로는 수없이 많은 동작으로 이루어진 한 동작의 실상을 낱낱이 볼 수 있었던 부처님의 지혜와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하고 있는 일을 ‘본다’든가 ‘관찰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직접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추론에 의해서도 봅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수백만 개의 동작을 모두 직접 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란 뜻이지요.
행선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수행자들은 한 걸음이 그저 하나의 동작이라고만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명상을 통해 그들은 한 걸음의 동작에 적어도 네 개의 움직임이 있음을 알게 되고, 더 깊이 들어가면 네 개 중 하나의 움직임만 해도 수백만 개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동작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nāma)과 물질(rūpa)이 무상함을 봅니다.
일상적 지각으로는 사물의 무상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무상함이 지속성이라는 환상에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지속적인 동작을 보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면밀히 살피면 지속성이라는 환상이 깨어질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리적 현상이 생겨나고 붕괴하는 과정을 점차적으로 잘게 쪼개나가면서 직접 관찰함으로써, 그런 환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명상의 가치는 무상이라는 본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지속성이라는 장막을 없애는 능력을 고양하는 데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자기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무상이라는 본성을 직접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란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그리고 이러한 조각들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난 뒤, 수행자들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애착을 가질만한 대상은 아무것도 없으며 갈망할 대상 또한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한때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물질에 흉한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꼴을 보거나, 썩어가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모양을 본다면, 그것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겠지요. 화판 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을 보게 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그림과 화판을 온전하고 견실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미술작품을 고성능 현미경을 통해 본다면 결코 견실한 물질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구멍과 공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대부분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고 나서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거나 집착을 거두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성능 기구를 이용하여 물질이란 끊임없이 변하는 입자이자 에너지의 파동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다시 말해 물질에는 견실한 실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행자들은 이와 같은 ‘끝없는 무상’을 깨달음으로써, 실로 현상계 어디에도 갈애(渴愛)의 대상이나 집착의 대상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명상수행을 하는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명상수행을 하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갈애를 없애려는 데 있습니다.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즉 무상·고·무아라는 사물의 본성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갈애를 버리게 됩니다. 갈애가 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고통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갈애와 집착이 있는 한 고통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면 갈애와 집착을 없애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이 단지 생겨났다 사라지는 마음[名]과 물질[色]일 뿐이라는 사실,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일단 이 사실을 깨달으면 사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집착을 없애려 토론에 몰두한다해도 결코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조건지어진 사물들은 위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에 의해 표지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걷고 있을 때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선만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애착을 완전히 없앨 능력을 갖게 해 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행선이 좌선이나 어떤 다른 위빠싸나[洞察] 명상 못지 않게 효험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행선은 정신적 성장에 공헌합니다. 그것은 호흡이나 배의 오르내림을 챙기는 방법만큼이나 효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때[煩惱]를 없애는 데 도움을 주는 효과적인 무형의 도구입니다. 또한 행선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좌선이나 그 밖의 명상수행을 부지런히 하듯 행선도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걷는 자세를 포함해서 온갖 자세에서 위빠싸나 명상을 닦음으로써 여러분과 수행자 모두가 바로 이 생에서 완전한 정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자에 대하여
우 실라난다 큰스님은 미얀마 출신으로 1979년이래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담마난다 수행원(Dhammananda Vihāra) 원장 겸 담마 짜카(Dhamma Cakka) 명상센터 고문이며 불교교리와 위빠싸나 수행의 스승으로 대단히 존경받고 있다.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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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리수선원 카페로 모셔갑니다.이곳의 모든이들이 몸 마음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나의 걸음걸이를 단계별로 분석함으로써 삼법인을 깨닫고 해탈의 계단을 오를 수 있다니! 훌륭한 법문에 감사드립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