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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
* 말 씀 : 눅11:1, 22:39-46 *찬양: 480장, 484장
* 제 목 : 기도, 생명의 호흡
*눅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특새(특별새벽기도회)는 우리 교회를 지탱하는 강한 원동력입니다. 한결같이 1년에 두 차례씩 갖는 특새를 통해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 위로의 말씀, 축복의 말씀으로 늘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회에도 하나님께 주실 말씀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새벽을 깨우며 나아갑시다.
이번 특새는 ‘습관’이란 주제를 갖고 주님과 함께 21일간 새벽여행을 떠나고자 합니다. 습관은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좋은 습관이 있는가 하면 좋지 않은 나쁜 습관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습관을 바꾸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습관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는 하지만 결국 주저앉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결심만으론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습관, 더 나은 습관, 거룩한 습관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만이 우리가 사모하는 진정한 부흥, 진정한 변호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습관, 거룩한 습관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서에서 친히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속에 드러난 아름다운 습관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습관 가운데 첫 번째로 기도 습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습관으로서의 기도
오늘날 습관이라는 말은 때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되고, 성품은 운명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 준다면 자녀 교육의 90%는 이미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규칙적으로 독서하는 습관, 예습하고 복습하는 습관,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교회 가는 습관, 성경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 주고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도 이런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이 기도하는 습관이었습니다.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무엇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까? ‘습관을 따라’였습니다.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상 습관이었습니다.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눅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제자들을 목마르게 했습니다. 그들도 주님처럼 기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기도는 일상적인 습관이 아닌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호흡을 멈추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호흡은 곧 생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바로 생명의 호흡이라고 가르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문제입니다. 살고 싶으면 지금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거룩한 습관으로 만들어 갑시다.
2. 그때그때 달라지는 기도의 모습
기도는 호흡과 같아서 언제나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특별한 위기를 만나면 더욱 특별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범을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분 생애에서 위기 중 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직면하셨습니까? 기도로 직면하셨습니다. 그 날 밤도 그곳에서 주님은 습관적으로 더욱 기도하셨습니다.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여기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의사 누가가 동원한 수식어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우리 한글 표현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비상한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잠잠히 기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의 기도가 필요한 것처럼 강청의 기도도 필요합니다.
이 밤의 상황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침묵이 필요할 때는 침묵으로 기도하지만, 통곡이 필요할 대는 통곡하며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뻐할 때는 기뻐할 줄 알아야 하지만 울어야 할 때는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상황이 눈물을 요구한다면 우십시오.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솔직한 눈물을 보시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예) 왕상20:3, 5절 /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
기도하는 것, 그 자체가 위기의 극복임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에게도 기도는 위기극복의 능력입니다.
3. 우리의 사역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역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생을 복음서를 통해 연구해 보면 그분은 사역을 오직 기도로 실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 공생애를 광야의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시기에 앞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고자 밤바다에 보내 놓고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가버나움 동네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지친 다음 날 tour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그날 어느 동리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분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에게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었습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맙시다. 교회 모든 청지기들은 기도로 사역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기도를 거룩한 습관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번 성회에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 적용과 실천)
1.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개달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2. 나는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는가? [5분,10분,30분,1시간,2시간] 주로 어디에서 기도하는가?
찬양/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2)
* 말 씀 : 막1:36-39, 눅19:10 *찬양: 260장, 268장
* 제 목 : 전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땀방울
*막1:36-39 /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즐거움은 영혼을 구원할 때 오는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고 있는 불신자의 영혼을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다는 것이다.’ 상당히 도전적인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전도’ 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부담부터 옵니까?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입니까? 늘 생각은 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입니까? 어떤 생각이 들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새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전도습관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1. 전도, 내가 이 땅에 사는 이유
우리 교회에도 사명 선언문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가 되어 3천 3백 세계비전을 이루는 생명공동체’(마28;18-20)입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혹은 “인자가 온 것은”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사명 선언문을 선포하셨습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위해 사셨고 그것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 길만이 자신을 이 당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 길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셨습니다. 더 낭가 그 길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랬기에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당부, 마지막 교훈마저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고 하셨습니다.
예) 애플 컴퓨터의 공동창시자 ‘스티브 잡스’.................존 스컬리(38세,펩시콜라의 CEO)
‘당신은 설탕물을 팔면서 여생을 허비하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지시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당신의 남은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온 그렇고 그런 방식으로 적당히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명령과 모범을 좇아 지금 이 순간부터 세상을 바꾸는 전도 사역에 헌신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전도를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사명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거룩한 습관을 만드는 첫 걸음입니다.
2. 전도를 계획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라.
교회에는 각종 행사들이 많습니다. 그런 행사들이 그저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됩니다. 항상 전도와 연관된 행사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분은 늘 전도 계획을 갖고 날마다 살아가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는 바쁜 하루를 보내신 후 그 이튿날 새벽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를 마쳤을 때의 장면입니다. 37절에 제자들이 그분에게 나아와 오늘도 많은 병자들이 이 마을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한 마디로 제자들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다른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미 한 마을, 가버나움에서 어제까지 충분히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하신 주께서 그날은 복음 들을 기회가 없었던 다른 마을에서 전도해야겠다고 판단하신 까닭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모든 계획을 그날 새벽의 기도, 곧 아버지와의 대화 가운데 세우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복음 전도는 일상생활 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 사역을 이제 우리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마28:18-20 /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라.
우리 주님은 전도를 계획하셨을 뿐 아니라, 계획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분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포착하며 사셨습니다.
예) 요4장/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 .....전도의 기회가 됨
‘네게 물 좀 달라’(요4:7) ‘내가 주고자 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수가 있다’(요4:14)
본문 눅19장 1-10절 상황/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9절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에게 삭개오의 만남은 한 영혼을 찾으시기 위한 전도의 기회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만남의 기회를 전도의 계기로 삼으며 살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순 없을 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의 말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제부터 전도를 계획하며 사십시오. 전도를 위한 더욱 자연스런 기회를 갖기 위해 지역 주민들의 친구가 되십시오. 그리고 우연히 찾아 온 만남들, 그 만남들을 전도의 기회로 포착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평생 복음 전하는 것 외에는 내게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전도를 생활화 합시다.
전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땀방울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공적인 전도의 중요한 비밀은 전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게 하는 겸손에 있다. -존 스토트]
(말씀 적용과 실천)
1. 예수님의 발자취를 다라 가는 제자로서 전도에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계획하며 살고 있는가?
2. 나의 전도 계획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의 전도대상자는 누구인가?
찬양/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긍휼 베푸시는 주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3)
* 말 씀 : 눅2:46-49, 마18:19-20 *찬양: 85장, 53장
* 제 목 : 예배, 끊임없는 바라봄
*눅2;46-49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마18;19-20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군에 입대하게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훈련이 제식훈련입니다. 제식훈련에서 차려 자세는 모든 동작의 기본 동작, 기본자세입니다. 이 기본자세인 차려 자세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자세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에도 기본자세, 기본 동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기본 동작은 예배 자세입니다. 예배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편의주의 적 발상, 자기중심적 사고는 예배의 기본 동작을 아예 취하지도 못하도록 만들고 예배의 영성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의 전통은 이미 흔들려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나마 주일에 한 번 드리는 공 예배조차도 제대로 시간을 지키지 않고 5-10분 늦게 나와 적당히 40-50분 때우다가 돌아갑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명 썬데이 크리스찬, 주일만 반짝이는 성도들이 많아졌습니다.
점점 형식화되어가는 예배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셨고 어떻게 드렸는지 배우고 주님의 그 거룩한 습관을 닮아가고자 합니다.
1. 예배는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
본문은 소년 예수님이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을 맞이하여 그 부모인 요셉,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의 명절을 잘 마치고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떠날 무렵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은 12살 소년이었습니다.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 부모 마음이 어떤지 아실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신없이 이곳저곳 뒤지며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시내까지 찾아보았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찾았는데 바로 성전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그 때 어머니 마리아가 묻습니다.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불과 12살 소년이었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성경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놀랄만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요, 또 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칭하신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 문화에서 결코 익숙하지 못한 표현이었습니다.
*신약학자 데럴 보크는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필요한 우선순위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번역했습니다.
-큰 성전이든 작은 회당이든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은 모두 아버지의 집이었고, 그 아버지의 집에 삶의 중심을 주는 것은 당연히 최우선적 습관이요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전이 곧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예배하는 일, 이 일이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의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예배는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우리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까요? 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서 두 세 사람은 신약 교회에서 성도의 공예배가 성립하는 최소 단위라고 지적합니다.
이들이 진정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할 목적으로 모인다면 주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할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는 그분과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가운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의 주제가 되시는 주님을 찬양 중에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며 헌물을 받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유일한 초점이신 예수님을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전심으로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그분에게 우리의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말씀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예배의 성공열쇠는‘집중’입니다. [concentration, con- + center / '함께‘ ’중심으로‘ 나아간다] 함께 예배 그 한복판에 영으로 임재하시는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요 예배의 목적입니다. 예배의 성공은 곧 집중입니다.
3. 적나라한 자신을 만나는 시간
예배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의 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는 거룩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예) 이사야가 체험한 일: 사6장
3절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새롭게 보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예배의 축복입니다.
예배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바라보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닮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 나다나엘 호손 [큰 바위 얼굴]
예배를 거룩한 습관으로 삼는 일생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그분 원래의 존귀하신 위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
(말씀 적용과 실천)
1. 오늘 우리에게 과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예배의 열심히 있습니까?
2.아버지의 집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안고 매주일 예배의 장으로 나아오는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까?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4)
* 말 씀 : 눅24:13-17, 30-35 *찬양: 499장, 442장
* 제 목 : 함께 하심, 경험해야 할 실체
*눅24:13-17 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신앙은 실제입니다.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주님과 함께함을 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도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채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순간부터 제자들과 ‘함께 하심’은 그분의 약속이었고 습관이었습니다. *눅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그렇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함께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지상 생애에서 마지막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마28:1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왜 그분의 함께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를 경험하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안식으로부터 오는 회복
눅24장은 엠마오 길을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 13절은 “그날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곧 지금의 주일입니다.
본래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금요일저녁부터 토요일까지입니다. 그 날 금요일, 주님이 죽으신 날은 제자들에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한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수용하며, 동시에 부활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경칩입니다.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 이제 봄을 맞이하는 시기입니다. 계절의 변화에는 금방 반응하면서 영적인 변화에는 우리가 너무나 둔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감동이 식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일에 중독되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중독을 심각한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중독은 자신이 빠져 있는 일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인생의 모든 기쁨과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쉼, 안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안식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관점을 제공하고 인생의 경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복된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재자들에게는 이런 안식의 여백이 있었고, 그리하여 부활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처럼 놀라운 진리 앞에 감격하지도 감동하지도 못하고 사는 것입니까? 부활 사건에 놀랄 마음의 여유 그 자체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부활의 감격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주님의 부활을 부활로 느낄 안식의 여백(쉼, 여유로움)이 우리 마음에서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2. 끝나지 말아야 할 이야기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그분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한 이들이었습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이 두 사람은 모두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들이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아직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두 제자에게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들이 나누던 대화 속의 성경 이야기가 한순간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말씀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예) 윌리엄쿠퍼 목사/ 자유주의 신학 영향으로 십자가 사건을 믿지 못하고 있던 때....
....수난주간 토요일 교회 주보를 보다가 구원받은 체험을 함.
*셀교제목: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마침 그 아래 ‘윌리엄 쿠퍼 목사’라고 써 있음...회심체험
여러분? 믿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에 대하여 묻고 이야기 하십시오.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를 계속하십시오. 그 대화 속에 어느 날 성령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붙잡는 날이 올 것입니다.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대화 속에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께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러면 믿음의 대화를 하십시오. 성경을 열고 질문을 하십시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것입니다. 오늘이 그 날이 되면 더 좋겠습니다.
3. 일상에서 ‘함께 하심’을 발견하는 눈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장소를 예배당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활하신 주께서 자주 자신을 나타내 주시는 장소는 일상생활의 현장이었습니다.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이들이 결정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한 곳은 다름 아닌 식탁이었습니다. 식탁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감격해 경험이 있습니까? 눈이 열리면 우리의 식탁에 함께 하신 그분이 보일 것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식탁을 “내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나의 지성소”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오래전부터 식당을 이런 신앙고백으로 장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식탁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우리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계신 분이시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 식탁의 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의 하나가 식사문화라고 그는 증언합니다. ....오병이어 기적현장, 최후만찬석상에서, 갈릴리 해변에서의 식사 등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식탁에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영의 눈을 열어 그분을 보십시오.
일상의 신비를 보는 눈이 열린다면 우리의 일상의 삶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증언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그분을 만나고 날마다 그분에게 헌신을 드리는 놀라운 부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식탁에서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33절에 보면 그들은 다시 소명의 일터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을 경험하는 제자들의 부활의 감격이요, 부활의 메시지요, 부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도 함께 외쳐 봅시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분을 믿으라. 예수님은 당신이 상상도 못할 만큼 가까이 계신다]-맥스 루케이도
(말씀 적용과 실천)
1.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주로 언제입니까?
2.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때입니다. 여유를 갖고 자연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해 보십시오.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