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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교직 생활을 마치며
나의 비겁, 우리 교육의 비겁들
주임 교수님의 소개장을 들고 첫 부임지인 경기도 양평군 용문중·고등학교를 찾아간 것은 1970년 2월 중순이었습니다. 극진히 반기는 교감 선생님의 친절로, 이 학교는 사람대접을 하는 학교구나 하는 고마움과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곧 기가 막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담임에다 중학교 2, 3학년, 고등학교 1, 2, 3학년 국어수업을 다 맡으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중학교 2학년 미술 한 시간에 3학년 실과까지 한 시간! 이렇게 시작한 교직생활이 올해로 만 39년이 됐네요.
39년의 세월이니 누군들 가슴 쓸어내리는 부끄러움과 회한(悔恨), 그리고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기쁨과 보람들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교직을 떠나면서 우리 교육을 돌이켜보니 좀 엉뚱하다 싶게도 <비겁(卑怯)>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릅니다. 쓴웃음이요 불행(不幸)입니다. 나 자신의 비겁들이 떠오르고, 우리 교육의 비겁들이 떠올랐습니다.
객관식 평가의 비겁
우리나라 교육은 너무 오랫동안 객관식 평가에 젖어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비중이 높은 수학능력시험을 완전히 객관식으로 보는 것은 교육의 본질을 한참 벗어난 것인데 아직도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오지선다형 문제들은 하나같이 정답 항목은 정답이 아닌 척, 나머지 4개 항목은 정답인 척하는 비겁이 도사리고 있지요. 객관식 문제는 정답이 반드시 있다는 것도 문제이고, 정답이 대개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문제지요. 삶의 현실에는 정답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고, 하나 이상인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객관식 문제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동일시하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문항 개발을 지속적으로 한다고 해도 이처럼 비교육적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육적이지 못하고, 21세기 평가 방식으로는 너무나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편리성과 객관성을 내세우면서, 더 나아가서는 낯 두껍게 공정성까지도 내세우면서 반복하고 있으니 얼마나 비겁합니까.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문제들을 보면 정말 땅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을 만큼 온몸이 부끄러워지곤 합니다.
선발(選拔)에 목매는 대학의 비겁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학생들의 전형료를 착취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요. 경쟁률 50대 1, 100대 1이 되어도 그 많은 학생의 전형료를 다 받아 챙깁니다. 엄청난 수입원이 되고 있다는데, 그 돈을 착취당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거의 많은 수험생이 떨어질 것인데도 원서를 내는 과정에서 전형료를 모조리 다 받아 챙깁니다.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토록 철면피적인 비겁을 해마다 자행하고 있으니 분노까지 일어납니다. 우리 대학들은 우리 학생들을 청소년, 젊은이 그리고 인간이나 생명으로 보는 시각이 거의 없고 다만 ‘수험생(受驗生)’으로만 보는 듯합니다.
선발이라는 말도 실은 옳은 말이 아니지요. 30명을 뽑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정말 대학이 필요한 30명을 뽑고 있나요.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뽑는 것이요, 30명 이외의 수험생들을 배제시키고 탈락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필요한 사람을 뽑는다면 어떤 해는 35명도 뽑고 어떤 해는 27명도 뽑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더욱 놀라운 비겁은 선발에는 목매면서 어떤 졸업생을 배출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졸업 이후에 대해서는 더욱 ‘나 몰라라’지요. 몇 천만 원 하는 자동차도 리콜이라는 게 있는데, 어찌 사람을 4년, 6년 가르쳐 놓고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습니까?
대학들끼리 이루어지는 치열한 경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대학 자체의 생존 싸움이지 학생들을 위한다거나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과 많이 다르니 그것도 비겁이지요. 이런 비겁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 교육 전체를 비겁으로 몰아가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선착순 집합>의 비겁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 교육은 더욱 철저하게 경쟁 일변도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는 불리한 것입니다. 경쟁을 강조하여 ‘자유 경쟁’이니 ‘무한 경쟁’이니 할수록 강자에게만 ‘무한 기회’를 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은 사실 ‘정책’은 없고 경쟁 극대화 방식만 있습니다. 진정한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니 생각할 리 없지요. 약자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도 있는 듯한데 그것은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꼼수요, 강자만을 위한다는 비난에 대한 면피용입니다. 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습니다. ‘선착순’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선착순이란 참으로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방법이긴 합니다.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지요. 정책을 입안하는 측에서는 고민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만 내리면 아랫것들은 죽자 사자 뛰어야 하니까요. 이것은 게으른 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걸 교육정책이랍시고 내놓고 있는데, 이런 게 교육정책이면 유치원 아이들도 교육정책을 낼 수 있을 겁니다.
이명박 정권이라고 해서 그 정책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양심 있는 교육학자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양심적인 발언은 듣기 어렵습니다. 경쟁을 하라면 죽자 사자 경쟁할 것이고, 그러면 경쟁력이 생긴다는 단순한 계산이 너무나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잘 알면서도, 권력의 치마폭이 그리워 비겁하게 숨는 것이지요.
청소년 학대(虐待)를 모르쇠 하는 비겁
한나라당은 ‘사교육비 절반’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권을 쥔 후 사교육비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원이 경영난을 겪는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서민 경제가 너무 심각하여 그런 것이지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 때문에 그런 것이 전혀 아니지요.
그 ‘사교육비 절반’이라는 구호를 따져 보겠습니다. 이 구호는 사교육비를 부담하는 어른들만을 위한 구호인데, 이 사교육비 절반이라는 것은 입시 학원들의 부당한 착취 구조만 막아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선거권이 없으니 한나라당의 눈에 아이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고, 단지 표를 가진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구호만 내세운 것이지요. 아이들을 의식했다면 당연히 ‘사교육 시간 절반’으로 구호를 바꾸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거국적으로 청소년을 학대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친엄마’가 없는 고아들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왕이 여럿 나타나도 친엄마를 찾아주지 못할 것입니다. 청소년을 학대하는 일에는 학교, 입시 학원, 대학, 교육청, 교과부, 거기다가 학부모까지 다들 한통속이니까요. 아이들의 건강, 아이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여유가 없어서일까요. 그러니 누구한테 질세라 번득이는 눈빛만 있지 조금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연례행사로 <졸업(卒業)시키는> 비겁
해마다 졸업식을 하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정말 졸업을 시켜도 되는가, 모든 학생을 다 졸업시켜도 되는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제대로 가르쳤기에 졸업을 시키는가, 아이들의 삶의 태도에 어떤 변화를 주어 졸업을 시키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면 대답이 궁색해지고 부끄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삶의 변화 중에서 학교가 한 역할은 무엇이었던가를 확인이나 하고 졸업을 시키는가, 상위 학교나 사회로 무책임하게 방출하거나 인계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3년 동안의 세월을 채운 것이지 ‘학업’을 마치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를 묻고 또 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까지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요. 많이 성숙했다고,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고, 영혼이 많이 맑아졌다고, 세상을 살리는 지혜를 배웠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온갖 정성을 다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습관적으로 졸업을 시켜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침묵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비겁
39년 동안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혀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지요. 목도 아픈데 왜 그리도 많은 말을 했는지요. 한때는 아이들이 숨쉴 틈을 주면 그것이 곧 불성실(不誠實)인 줄 알았습니다. 내 많은 말 속에는 중요한 지식과 고급 정보가 가득 담겨 있다는 확신까지 하면서 쏟아냈습니다.
침묵(沈黙)으로도 가르쳐야 하는데 언어로 다 가르치려 했습니다. 아, 우리는 침묵이 가진 그 엄청난 에너지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침묵의 힘을 번연히 알면서도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비겁입니다. 침묵이 없다면 달마대사도 없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마 거사의 침묵, 달마 대사의 침묵 같은 거대한 침묵까지야 바랄 수 없겠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 말수를 줄이고 아이들이 말하게 하는 시간을 확보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질문하게 하고, 아이들이 고민하게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침묵을 통하여 오히려 큰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입시 위주 교육의 비겁
누구든 인성교육을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성에 문득문득 의문이 갑니다. 선생님들도 혹시 암묵적으로 입시교육에 찬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입시교육 때문에 인성교육이 안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인지, 맞는다면 몇 % 정도 맞는 말인지는 역시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최근 3년 동안 정규고사를 보지 않는 교과의 수업을 해 왔습니다. ‘도덕심화’라는 재량교과를 맡았는데 교과서도 없고, 시험도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원했던 수업이기에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을 살려내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세상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고, 생각의 틀을 바꿔주고, 행복을 느끼고 누리게 해주고, 호기심을 불러내어 창의력을 길러주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깨우쳐주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수업자료를 준비했습니다만 수업 만족도는 실망스럽습니다. 2007학년도는 궁합이 좀 맞았는지 80점은 되는 것 같았는데, 2008학년도는 60점도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로 학부모들이 인성 교육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람 되라’고 가르친다는데 그것을 마다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인성 교육에 대한 기대를 접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시험 때문에, 입시 때문에 인성교육을 할 수 없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중학교에서 졸업고사가 끝나고 대체로 많은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은 하지만 수업은 별로 하지 않고 다른 행사 등으로 시간을 때웁니다. 고등학교에서도 수능이 끝나면 학교 밖으로 내몰 생각만 하지요. 우리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바요, 참다운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입시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수업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엉뚱한 상상을 해 봅니다. 정말로 하루아침에 입시교육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성교육을, 사람교육을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입시교육은 절대로 하지 말고 큰 사람을 키우는 교육을 하라고 다그친다면,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사람교육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입시교육이라도 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잔소리도 하고, 큰소리도 치고 그러는 것 아닐까요. 입시교육에 매몰된 이 현실, 생각해 보면 우리 선생님들의 비겁이 어느 정도 끼어 있습니다.
사립학교 교장(校長)들의 비겁
2004년인가요. 전국의 사립학교 교장선생님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는 집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개정안 중에 사학법인이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교장에게 준다고 한 것을 반대한다면서 그 인사권을 반납하겠다는 결의를 했습니다. 아마도 세계 교육사에 길이 남을,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인사권은 학교 현장, 교육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현장에서 꼭 필요한 사람을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시킬 수 있는 것인데, 1년 몇 번 정도 학교에 들르는 이사진들이 그 권한을 행사하니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왜곡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교장선생님에게 인사권을 준다고 한 것인데, 바로 그 교장선생님들이 그 인사권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 선언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학의 현주소가 얼마나 기가 막힌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야말로 비겁의 극치였지요. 더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 비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행복(幸福) 유보의 비겁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왜요?”라고 아이들이 물어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이유를 친절히 말해 줍니다. 그래야 어른이 되어 ‘잘’ 살 수 있다고. 그래야 어른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그런데 정말 어른이 되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요. 사실 그다지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을 역시 뻔히 알고 있으면서 아이들을 속이는 것이지요. 그러니 비겁입니다.
행복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은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태(懶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땀을 흘리더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대학에 가면 행복한가요, 어른이 되면 행복한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행복을 그런 식으로 유보하고, 지워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교육 <개혁>의 비겁
새 정권만 들어섰다 하면 으레 ‘개혁’하고 ‘혁신’합니다. 수많은 정권이, 대통령들이 정신없이 개혁을 해댔습니다. ‘교육’이라는 게 5년마다 그렇게 ‘개혁’을 해대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의 살갗은 다 벗겨지고 이제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또 개혁의 칼을 높이 빼듭니다. 전 정권의 교육정책을 비웃고 거꾸로 가기만 하면서도 그것을 개혁이라면서 속여대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스스로를 개혁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개혁의 대상을 찾아 추상같이 호령하고, 개혁의 칼을 멋들어지게 휘두릅니다. 그 멋에 겨워 5년 동안 내내 팔만 아프다가 끝납니다. 우리 교육의 근본에 대한 아픈 성찰이 그 바탕에 없다는 말입니다.
교육 정보화의 비겁
언제부턴가 우리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곁에 없어도 심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적만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면, 엉뚱한 말썽만 부리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만나지 않고도 하루 온종일을 아쉬움 없이 보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찾아오면 우리의 시선은 컴퓨터에 가 있고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할 말은 다 합니다. 아이의 말을 듣는 일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기로 합니다. 아이들과 웃고 몸을 서로 부딪쳤던 일은 어느덧 아련한 추억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육정보화는 물론 우리 학교 현장을 21세기의 모습을 띠게 해주었고, 생동감 넘치는 자료로 풍부한 수업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아이들과 선생님 사이에 컴퓨터라는 담이 가로놓이게 되었습니다. 컴퓨터는 아이들과 선생님만이 아니라, 선생님과 선생님 사이에도 소통을 차단하는 벽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담장과 벽은 서서히, 아니 급속도로 산이 되고 산맥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합니다. 학교에서 컴퓨터 부수기 운동을 해야 하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문명의 이기는 이제 아이들에게서 선생님을 훔쳐가는 도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반통일교육의 비겁
아이들에게 ‘통일을 원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는 말을 하기가 겁이 납니다. 30여 명 중 많으면 10여 명, 적은 반은 5, 6명입니다. 통일의 필요성을 한 시간 내내 침 튀기면서 말을 해야 아이들의 생각이 좀 바뀝니다. 정부가 통일교육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막상 아이들은 암암리에 반공 교육과 ‘경제’ 교육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반 토막이 난 지 무려 6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민족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어른들이 많습니다. 신음을 내던 분들이 한을 간직한 채 자꾸 세상을 떠나니 신음 소리 자체도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60년 분단 역사의 처절한 외침도 그들에겐 아무런 깨우침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들에게는 분단 100년, 분단 1,000년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듯합니다. 이건 무지가 아니라 비겁입니다. 분단 60년이 된 나라가 아직도 반공 이데올로기 하나로도 대통령을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지금의 정권은 10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이룩한 통일의 싹과 줄기를 혓바닥 몇 번 잘못 놀려서 깡그리 난도질했습니다. 그러고도 원칙대로 의연히 대처하겠다니 기겁을 할 노릇입니다. 요즘은 통일 얘기만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친북 올가미를 씌워 숨통을 죕니다.
교육용 민주주의의 비겁
민주적인 학교는 구성원 모두가 주인이 되는 학교입니다. 긴 수염 쓰다듬으면서 주인 노릇만 하는 학교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서로 주인으로 대접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학교 현장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기(生氣)와 향기로 가득합니다. 저절로 상생(相生)의 공간이 됩니다. 이 민주적 에너지는 구성원들에게 자존감을 주고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교에서 민주주의는 ‘교육용’일 뿐입니다. 사실, 진짜로 학생들이 민주적인 청소년이 되거나, 진짜 민주적인 학생회가 될까 내심 두려워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맛보거나 겪어 보지 못한 어른들은 민주적인 학생, 민주적인 교사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퇴출시켜야 하는 문젯거리로 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그것은 교육용이거나 시험문제 출제용이지 삶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권은 철저히 반민주적인 작태를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어 많은 국민이 민주주의를 갈망하게 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민주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으니 차라리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듯합니다.
<비겁 사회>로 몰아가는 이(李) 정권의 비겁
지금의 정권은 국가의 온갖 권력을 움켜쥐고 안하무인의 독단과 독주를 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했더니 아름다운 국토를 제 부동산쯤으로 생각하고, 나라 전체를 제 소유물로 착각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1년 동안 겪어 보니 이는 지도자는커녕 형편없는 소인배요, 소인 잡배였습니다. 게다가 30년도 더 된 녹슬고 무딘 칼을 새로 꺼내 마구 휘둘러대고 있습니다. 독주(獨走)요, 독주(獨奏)요, 독재(獨裁)라는 말로도 표현이 모자랍니다.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나날이 초라해지고 추레해지는 ‘소(小)한민국’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본색을 감추기 위하여 온갖 꼼수를 다 동원합니다. 짙게 분장(扮裝)한 그들의 정책 용어들은 화려하기까지 합니다. 경제 살리기, 4대강 살리기, 녹색 성장, 녹색 뉴딜, 원칙 중시, 의연한 대처, 폭력 방지, 위기는 기회…. 그러나 아무리 좋은 단어들도 이 정권의 용어가 되면 지독한 냄새가 나서 코를 움켜쥐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들 자신만 모르고 있습니다. ‘경제’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라는 것은 모르고 그저 ‘돈’이라고만 알고 있지요.
지금 정권의 교육정책이라는 것들은 ‘교육’은 없고 오직 ‘경쟁’만 있습니다. 그들은 ‘교육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틈이 조금도 없는 것 같고, ‘진정한 교육’을 생각하면 머리에 쥐부터 나는 사람들 같습니다. 너무도 단순하고 저급하고 성급한데다가, 멀쩡한 대낮에 선생님들의 목을 치는 폭력까지 자행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어른이고 장로이고 대통령이라면, 일제고사 파문을 보면서 이런 한탄을 했어야 합니다.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서 징계를 받는 선생님이 겨우 그 정도란 말이냐. 그런 야만적인 일제고사라는 것을 동의의 과정도 없이 밀어붙였는데…. 의인(義人)이 그리도 적단 말이냐고 한숨을 쉬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파면이니 해임이니 하면서 양심을 지킨 선생님들을 학교 현장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고 추방하고 있습니다. 겨우 한다는 짓거리가 이 정도입니다. 정말로 우리 교육에서 격리시키고 추방해야 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때는 언제쯤일까요.
우리 교육 현장의 구석구석도 비겁이 판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국제중학교가 서고, 자율형사립고등학교가 여기저기 서고, 철저한 차등 성과급을 주고, 교원평가를 하고, 일제고사를 강제적으로 보게 하고, 학교평가를 할 것인데, 모든 정보들은 잔인할 정도로 낱낱이 공개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선생님들이, 학교들이 ‘악!’ 소리를 내면서 죽어 자빠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의 철저한 비겁화, 말이 참 이상하지만 참으로 우려가 됩니다. 추측하건대 이제 공교육과 사교육은 완벽한 동반자 관계, 동업자 관계가 될 것입니다. 학교의 등수를 좋게 하려면 모든 학교는 그 학교 학생들이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열심히 학원에 다니도록 독려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더더욱 아이들에 대한 ‘교육’보다 이 험난한 세파에서 학교가 살아남는 일이 아주 시급한 당면 과제가 되었으니까요. 남들이 저러니 우리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다른 학교가 저러는데 우리 학교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느냐…. 이제 이 말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거대한 비겁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아, 우리나라 교육은 앞으로 더욱 찬란한 비겁의 봄을 맞이할 것입니다. 비겁은 새로운 비겁을 낳고 비굴과 굴종을 낳을 것입니다. 처음은 미약하였지만 나중은 창대할 것입니다. 이 비겁들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잉태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참담하고 두렵습니다.
밀머리미술학교에서 배웁니다
밀머리미술학교 홈페이지에서 학교를 소개하는 글을 옮겨봅니다.
예술이 심미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물 간의 단절된 관계와 소통을 열어주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픔을 쓰다듬고, 상처를 위로하며, 분노와 연민의 감정을 기쁨, 감동, 즐거움과 똑같이 소중히 여기는 예술을 지향합니다.
- 가슴에 불붙이기 미술
- 어깨 힘 빼기 미술
- 뱃살 자극하기 미술
- 머릿속 뒤집어 놓기 미술
- 벽에 구멍 내기 미술
- 쓰다듬고 보듬어주기 미술
윗글에서 ‘미술’을 ‘교육’으로 바꾸어 읽어 보면 글맛이 더욱 달라지면서 가슴에 와 꽂힙니다. 비겁하지 않은 교육, 당당하고 의연한 교육, 살을 맞대는 교육이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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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지난 2009년 2월 월간 '우리교육' 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비겁이란 단어가 너무도 아프게 찔러오네요...
학생, 교사, 학부모가 당당한 학교가 되어야 할텐데, 안타깝습니다.
출범식때 풍물치시는 모습 뵙습니다. 가슴에 팍팍 와닿으면서 아픈 글이네요. 다른 곳에 퍼가도 될지요?
교도소 담장보다 높은 담에 둘러쳐진 학교, '선생'이라는 스스로 쌓은 성에 홀로 갇혀있는 교사, 이기적 욕망에 물불 가리지 않는 학부모, 교복입고 머리 짧은 학생... 교육희망을 만들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고정된 틀을 벗어나서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이 생겨납니다. 만족하는 교사, 학생, 학부모가 거의 없는 교육현장...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절절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민주주의'를 관념용, 집필용, 홍보용으로 삼지 않았나 되돌아보게 되네요.
오늘 이 순간도 말로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구호만 회치면서 교육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습관으로 행복을 말하는 비겁을 바라보면서 우리 안의 비겁의 업장들로 한숨지어집니다. 이 순간 우리는 또다른 비겁의 삶에 몸을 실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