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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장로님!! 샬롬~~~~
건강하신지요.
제 형편을 살펴주시는 마음, 항상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장로님의 형편도 원만치 않을 터인데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금년도에 들어서 장로님께서는 교회의 00위원장의 직임을 맡아 봉사하시고 계십니다.
예배의 형식도 과거와는 다른 시스템으로 진행하고 있지요.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여쭈어 보고자합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몇 개월이 흐르니 이제는 한 번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용이 조금 길게 전개될 것 같습니다.
1. 현재 예배하는 형식이 열린 예배를 지향하는 것인지요?
1) 열린 예배의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새들백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는 프리메이슨 33도 급에 있는 릭 워렌 목사이지요.
뉴 에이지적 경향이나 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형식을 파괴하는 예배를 하고 있지 요. 어찌 보면 예배인지 집회인지 모르겠습니다.
국내에서는 이촌동의 온누리 교회, 서초동의 사랑의 교회가 이 형식의 예배를 1주 중 한번 정도 예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신촌 교회는 지역의 특성상 청년 위주 로 열린 예배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습니다.
2) 예배는 의식행위입니다. 예배는 예식행위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형식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의식이나 예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 “형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되는 것 이 보편입니다.
형식주의를 강조하거나 실용주의를 경하게 보는 것은 아님을 이해하시기 원합니다.
3) 우리나라에서 “열린“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던 시기가 노무현 정권 전후인 것 같습니다. 포퓰리즘이 극성인 정치권에서 크게 유행시키며 일단의 성공을 보여준 사례 이지요. 그러면서 ”참여“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열린”의 반대는 아니지만 “열린”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닫힌”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보여 지고 있었 으며, 극단적으로는 전통이나 구세대적인 것은 “열린”이 아닌 것으로 매도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열린”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 언어의 효과로 인하여 다양한 곳에 “열린”이라는 것을 가져다 붙여 사용하였지요.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전통적 정서나, 고유한 습관이나, 과거의 형식화, 습관화되던 것은 “열린”이라는 것에 순식간에 밀려나는 현상이 급속하게 이루어 졌으며, 예배라는 측면에서는 “닫힌 예배” 로 전락하게 되었다면 좀 과장된 표현일까요?
2. 예배 형식의 다양성에 대하여
1) 예배의 본질은 구도자(Seekers Service)의 예배라고 혹자에게서 들었습니다. 저는 이 것을 지향하고 있는 편입니다. 구도자가 하는 예배, 초신자가 하는 예배, 상심자가 하 는 예배가 따로 있을 수는 없겠으나, 종국에는 구도자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 는 사람입니다.
2) 현대의 교회는 구성원의 다양성, 시공간의 편의성, 실험주의의 도입 등으로 보다 효율 적인 예배의 모범을 추구하며 발전적인 면도 있으나, 그에 대한 역작용 적인 사례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 즉 신본주의적 예배가 인본주의, 세속주의, 실용 주의로 변질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4) 예배를 하는 것인지, 집회를 하는 것인지....... 변칙적인 형태로 예배라는 명칭아래 행 하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5) 경건도 모르는 상태에서 놀이, 축제 형식?이, 온전한 형식을 파괴하는 문화가, 예배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집회일 것입니다. 저급한 소음이 난무하고, 뜻 모를 몸 부림을 과장하며, 지. 정. 의는 상실한, 묵상이나 회개 없는 집회는 예배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6) 형식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배와 집회의 성격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3. 이렇게 제안합니다.
1) 우리 교회에서는 수 개 월에 걸쳐 형식을 바꾸어 예배를 하였습니다. 긍정적인 효과 도, 장점이나 순기능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역기능이나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례를 충분히 검토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2) 교회는 예배의 시간별로 1부 靜, 2부 格, 3부 靈, 오후 興, 새벽 黙 이라는 성격을 부 여하여 예배의 형식에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이 모두가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의 정서나 취향에 맞는 예배를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 라는 배려?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예배에 동원되는 각종 악기나 구성원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신디사이저나 드럼, 일렉 기타 등에는 익숙한 사람입니다만, 때와 장소와 목적에 따라 그 사용의 예가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함에 있어 신령과 진정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찬미와 묵상과 간 구함을 예배시작 전에 잠잠히 준비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 하겠으며, 말씀과 봉헌과 기 도가 조화를 이루어 감사와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얻은 감동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예배를 마칩니다.
그러나 예배 초반, 후반의 굉음은 이러한 것을 방해합니다.
예배가 아닌 집회에 사용 된다면 유용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4) 참고로 아래의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열린예배에 참석한 후기
예전의 나는 말하자면 꽤 똑똑한 체하는 소비자의 태도로 교회를 대했다. 무슨 물건이든 내 앞에 내놓아라, 정확히 감식하여 값을 매기리라 하며, 나는 예배를 한 차례의 즐거운 공연으로 간주했다. 어디 내 마음에 드는 즐거운 예배인가 보자.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일러 쇠렌 키에르케고로(Kierkegaard)는, 사람들이 교회를 극장(劇場)의 일종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좌석에 않은 관람객으로 무대 위의 배우를 열심히 쳐다본다. 배우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배우의 공연이 만족스러우면 우리는 박수와 환호성으로 답례한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극장이 아니다. 아닐 뿐 아니라 정반대의 구조를 보여준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무대 좌우편에서 배우들에게 은밀히 이것저것 일러주는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중들의 마음에서 발생한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오늘 내가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질문하며 교회 문을 나서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이제 나는 예배에 임하면 위를 본다. 강대상 너머 하나님을 향해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다시 말하면 시선의 변화이다.
그러한 시선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여러 교회에서 당면했던 재능부족이란 문제에 대처하도록 도와주었다. 어떤 교회들은 목회자에게만 집중되던 각광을 평신도에게로 다양하게 분산한다. 평신도들은 회중 앞에 나와 스스로 지은 노래나 시를 발표하고, 단막극을 실연하며, 삼중창을 부르고, 깃발을 만들어 흔들며, 성무(기독교 무용)를 통해 그들 자신을 표현한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러한 시도들은 객관적인 미학적 관점에서 보나, 한 발 양보해서 예배를 돕기 위한 보조수단의 취지를 인정한다 해도, 내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들이 극성스러워질수록, 가장 중요한 관객은 회중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망각되는 듯하다.
나는 C.S. 루이스에게서 배우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교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그들이 부르는 찬송이 싫었다. 내가 보건대 그들은 2류급 시에다 3류급 음악을 맞춘 듯이 보였다. 그러나 계속 듣고 보니 그들의 찬송에는 대단히 본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고무 반장화를 신은 늙은 성도 한 분이 부르던 그 찬송은 진정 은혜로웠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그 노인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이 고독한 자만에서 우리를 건져낸다.
교회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혹은 약한 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혹은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교제를 장려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점에 미치지 못하면 교회는 그 무엇에도 미치지 못한다. 목회자나 음악이나 성례전이나 기타 예배를 돕는 수단들이 결국은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의 교통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점이 의심스러우면 나는 언제나 구약성서로 돌아간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약성서가 그리스도의 삶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하듯 구약성서는 장막과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위한 세칙에 그만한 정성을 쏟고 있다. 전체를 개괄하건대, 성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예배의 핵심에 분명한 강조점을 둔다.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라고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말한다.
교회에서 나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 강대상을 바라볼 수도 있고, 그 너머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희생제사에 관한 세칙들을 애써 설명하시던 하나님이 후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시50:9-10). 이스라엘인들은 예배의 형식에 몰두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핵심은 놓쳤다. 하나님은 마음의 희생, 순종과 감사라는 내적인 태도를 보신다. 이제 나는 교회에 가서, 비평가처럼 미학적 판단이나 일삼는 태도를 버리고 마음의 희생에 전력하고자 애쓴다.
그리스도 편지에서...
율법이 기록한 대로
번제를 드리면서도 그 번제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율법의 행위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예배의 형식이 어느 새 모든 사람에게 각인이 되어 있고
그런 행위를 따라 행하고 있는 자기들의 믿음을 흡족해 합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의 모습은 다 사라졌고
그저 보이는 모습으로 웅장하고 거룩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행위에 빠진 이스라엘과
지금의 교회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의 형식
호주에서 한 달 여 머물다 보니 그들의 우리나라와 다른 것 세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는 계절이다. 우리가 월동준비를 하는 11월이 호주에서는 초여름이다. 그래서 12월 25일 성탄절에는 무더위의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른바 화이트 크리스마스 대신에 비키니 크리스마스를 맞는다는 사실..
둘째는 전기 스위치이다. 우리는 통상 아래에서 위로 치켜 올리면 불이 켜진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그 반대이다.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야 불이 켜지고 전원이 들어온다.
마지막은 운전대의 위치이다. 우리는 왼쪽에 운전대가 있어서 주행을 우측차선 주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호주는 그 반대이다. 운전대가 오른편에 있고 당연히 주행은 왼쪽 차선으로 주행하게 된다. 많은 유학생들의 고충이 여기에 있어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맞고는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춘삼월의 봄, 동지섣달의 추위... 그런 것들이 거기서는 전혀 다른 때에 진행된다. 당연한 듯 젖어 있는 전기 스위치 켜는 방향이 그렇게 다르다. 서울 시내의 수 만대의 자동차들이 한 결 같이 흘러가는 그 방향이 거기서는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한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예배 순서 중에 사도신경을 빼먹었다 해서 큰 소란이 났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 없는 헌신 예배가 어디 있냐고 장로님들 끼리 싸움이 났다.
개척 교회는 반드시(?) 강대상 위에 놓을 종을 사야 한다.
.... 이게 다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만 야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예배의 필수 요소는 단 2가지이다.
신령과 진정. 즉 성령과 진리(요3:24)라는 뜻이다.
예배는 영 안에서 드려야 한다. 왜?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이다. 본래는 인간도 영적인 존재였으나 죄로 인해 어두워졌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게 하셨다. 성령은 예배 중에 무엇을 하시는가? 오셔서 우리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생각나게 하신다.
그는 죄에 대해 깨닫고 회개케 하시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안에서, 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케 된다.
건강한 교인은 예배에 임할 때 마다 그것을 기대 한다.
진지한 회개가 있으면 반드시 그 뒤에 주시는 성령의 위로와 환희가 있다. 이때 비로소 예배는 축제가 된다.
성령은 이렇게 예배를 내적으로 주도하실 뿐만 아니라, 예배의 현장을 자유롭게도 하신다.
어려서부터 장로교에서 자라고 장로교의 신학대학을 나온 내가, 수학 중 미 버지니아의 토마스로우드 침례교회의 예배에 처음 참석했을 때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언제 예바가 시작된 것인지 몰랐다. 묵도가 없었다. 놀랍게도 끝을 맺는 축도도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와서 마이크를 쥐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 독창 중창... 그런데 분명 거기에도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계셨다.
영국에 사는 동안에는 주일 마다 TV에 방영되는 예배 실황들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때로는 거기 참석도 했다. 참으로 다양한 예배 모습들, 순서들, 형식들, 분위기들... 그리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성령님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의 모든 예배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순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예배에는 분명히 정해진 순서와 규모가 있어야한다.
그러나 한번 정해진 예배 틀이 무소불위는 아니다.
또한 예배는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진리로, 진리 가운데 드려져야 한다.
예배행위 자체가 진리의 틀 안에 있어야 하고
예배하는 자가 예배 속에서 진리를 들어야 한다.
예배중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설교는 어떤 강의나 교양 세미나가 아니다.
이 점 혼동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연약한 사람인 설교자를 쓰시자만,
하나님은 즐겨 그의 뜻을 당시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풀어서 주신다.
진정한 예배의 개혁은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건강한 성도는 자기 기호만의 어떤 특정 예배 순서나 분위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적용될 형식이면 된다.
하나님 외에 불변의 존재는 없다.
말씀의 진리 외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예배구성요소의 본질과 내용
올바른 예배를 위해 예배하는 자들은 우선 섬기는 신의 존재가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계속되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신교의 예배 가운데 최대의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예배의 형태와 내용과 메시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A. 오르간 전주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엄하면서도 경건한 음악 속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각자 마음을 정리하고 흠 없는 자세로 준비를 갖추는 뜻을 지닌 부분이다.
이상적인 연주는 시작을 조용하면서 부드럽게 이어 중간 음으로 발전하고 전음을 조화롭게 하여 연주하다가 마지막 4분을 남겨 놓고서 조용한 음으로 돌아와 정중하고 침묵의 분위기가 흐르게 하여, 예배하는 자가 묵상의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
B. 예배의 부름
"이제 다 같이 우리의 뜻과 정성을 모아 예배를 드립시다."라는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들을 예배 가운데 임하게 한다. 교회의 절기에 따라 언제나 신선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하는 자들에게 선포됨으로써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예배 현장에 임재하심을 알게 해야 한다.
예배의 부름에 관한 두 가지 형식은 하나는 인도자가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자의 선언에 응답하는 것이다.
C. 기 원
기원이란 짧은 기도로서 오늘의 예배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을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깨닫도록 해달라는 단순한 기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는 오직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을 감사하고 성령의 임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을 구할 뿐이다.
D. 찬양과 경배의 찬송
예배란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적 관계 속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인간들은 당연히 일어서서 죄인 된 자신들을 거룩한 존전에 예배하도록 불러 주시고 허락하신 그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찬양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E. 고백의 기도
모든 회중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앞에서 죄인 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의미 있는 순서이다. 고백의 기도가 끝나면 사 6: 1-7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는 죄를 사함에 관한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은 효과적이다.
F. 영광송
용서를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용서의 선언이 끝나는 즉시 반주자의 첫 음만 듣고 지체 없이 시작하는 것이 예배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데 더욱 효과적이다.
G. 중보의 기도
예배 인도자가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리는 무리를 위하여 사제적 기능을 펴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탁받아 섬기고 살피는 책임을 가진 목양자로서 그들이 살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발생된 죄와, 모순의 용서를 구함은 물론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억눌림의 세계로부터 해방을 간구하는 것까지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는 사제로서의 당연한 기도이다.
중보의 기도를 위한 목회자의 준비는
첫째, 목회자가 성도들의 형편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
둘째, 5분 이내의 시간에 간절한 기도가 신선한 표현을 통해 드려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H. 말씀 봉독
봉독의 뜻을 깊이 새기도록 하기위해 개혁자들은 매주일 구약과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그 계절에 맞도록 선별된 성경말씀을 읽었다.
그러므로 봉독하는 자는 그 말씀이 있기까지의 배경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누구나 알아듣도록 설명한 다음에 봉독함으로써 회중들이 그 말씀을 아주 정확히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봉독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한다.
1) 봉독하는 자가 깨닫고 읽어야한다.
2) 먼저 주석을 읽는 것이 좋다.
3) 봉독 전에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 )서 ( )장( )절의 말씀입니다.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 후 말씀을 봉독합니다.
봉독 후에는 바로 "아멘"을 한 후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말씀을 통하 여 우리에게 은총을 더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한다.
4) 대명사로 시작되는 부분은 그 말의 명사를 찾아 바꿔서 읽는다.
5) 본문을 외워서 하지는 말아야 한다.
I. 찬양대의 찬양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아름다운 경외를 드리는 부분이며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함께 끌고 가는 헌신의 경험을 준다. 또한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시켜 준다. 찬양의 모습은 반드시 가슴에서 우러러 나오는 신앙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위해 정확한 발음과 함께 마음과 몸이 일체된 찬송을 불러야 한다.
지휘자는 언제나 설교와 관계된 찬양을 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사전에 목회자의 설교 주제를 전달받아 선곡해야 하며, 또 지휘자는 예배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그의 뜨겁고 간절함 속에 곡이 선정되어야 하고 연습도 진행되어져야 한다.
J. 설교 전 기도
말씀을 선포하기 전 성령께서 임재하시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달라는 기도이다. 그날에 적당한 내용의 기도문을 사용하기도 하고 회중들이 순서지에 기록된 기도를 함께 읽는 방법도 있다.
K. 설 교
설교에 있어서 최소한 지켜야 할 문제들은
1) 설교의 기본적인 목적은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도록 하는 데 둔다.
2) 하나님의 구속사건 속에 회중들이 신앙의 초점이 모아지도록 한다.
3) 설교의 내용은 언제나 예배의 내용과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예배 가운데서 선포된 설교는 은혜의 도구여야 한다.
5) 가능한 정해놓은 시간을 준수할 줄 알아야 한다.
6) 설교가 끝난 후 설교자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L. 감사와 응답 찬송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하여 선포된 다음에, 예배하는 자들은 즉각적인 감사의 응답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의 의미에 알맞다. 이 감사와 응답 찬송 또는 신앙고백을 함으로 말씀 앞에 예배자의 신앙을 새로이 다짐하는 결단적 행동을 갖게 한다.
M. 봉헌
봉헌은 예물의 드리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개신교 예배의 역사적 의미는 구약의 맥락을 이어받아 희생의 예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의 희생적인 신앙과 정성과 마음이 모아진 것이어야 한다.
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그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바치는 마음과 물질의 봉헌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은
1)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쁨이나 영광보다는 오히려 부담감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았다.
2)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보기 힘든 헌금의 종목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3) 하나님 앞에 바쳐진 예물의 사용이 교회의 중요한 문제로 등장 되어 야 한다.
4) 봉헌하는 마음과 봉헌의 기도 가운데 그릇된 관념이 나타날 수 있다.
N. 축복 기도
복을 빌어 주는 공식 행위는 제사장의 고유한 권한이며 그들의 특유한 의무로서 확정지어 주고 있다. 축복기도의 특별한 성격은
1)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축도는 단순한 기도라 기보다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실 것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2) 이 복의 선언은 아무나 원하는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고 세상에 나아가는 성도에게 내리는 것이 지금까지 기독교의 전통으로 되어 있다.
3)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세상으로 나가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실천하는 존재 를 위한 복의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