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두 부분- 곧 육체를 “죽이는 일”과 영을 “살리는 일”- 으로 되어 있다. “죽이는 일”과 “살리는 일”- 이 두 가지 일은 그리스도 안에 참예함으로써 우리에게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진정으로 참예하면, 우리 옛사람이 그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몸이 멸하여져서(롬6:6), 우리의 본성의 부패성이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부활에 참예하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새로운 생명 속으로 일으킴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회개를 중생(重生)으로 이해하는데, 그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지워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로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는 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첫 사람 아담을 통해서 타락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의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가 양자로 삼아 생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신 모든 자들을 이렇게 온전히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회복은 한 순간에나 하루에, 혹은 일 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 그리고 때로는 아주 더디기도 한- 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들을 제거하시고, 그 죄책을 깨끗케 하시며, 그들을 성전(聖殿)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 참된 순결에게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며, 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된 것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굴레에서 자유함을 얻는다. 그러나 육체에서 오는 성가심을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유함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악을 불씨가 남아 있어서 정욕을 끊임없이 분출시켜서 그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가 죽을 육체를 벗을 때까지 언제나 죄가 그들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체 속에 의를 거슬러 싸우는 부패한 정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법이 제거되었으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9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