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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
1.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법을 묻다
열 가지 일(十事)과 오대(五對)로써 상위(相違)함을 묻다
경문 저 때에 문수 보살이 각수(覺首)보살에게 물으셨다.
"불자여, 마음의 성품은 하나이건만 갖가지 차별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른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모든 근본이 원만 하기도 하며, 태어남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단정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고통을 받고 즐거움을 받는 것도 같지 않나이다. 그러므로 업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업을 알지 못하며, 마음이 '받음'을 알지 못하고, 연(緣)이 인(因)을 알지 못하고 인(因)이 연(緣)을 알지 못하며, 지혜가 경계를 알지 못하고 경계가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 합론
문수모살과 부처님의 경계는 같지 아니하다. 문수는 믿음을 주인으로 삼음이며 부처님은 소신(所信)인 연고라. 발심을 하는 것은 그 신심이 최초요, 소신(所信)은 그 후에 있다. 또 십신을 밝힌 바나 모두가 차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며, 부지런히 닦음은 마음 바탕에 나아감이요, 덕은 고요한 마음을 얻음이 되나니 심성이 무심함이 정(定)을 삼는다. 지혜는 혜심(慧心)이니 혜가 상수가 되어 자기 장엄을 얻는 연고라. 섭론에 이르되, 보살이 처음 배움에 여실히 응당 먼저 여실인연(如實因緣)을 관(觀)하여 바른 믿음과 바른 앎을 얻은 연고라 하였다.
십신에 십덕이 있으니 1은 친근선우(親近善友)요, 2는 공양제불(供養諸佛)이요, 3은 수습선근(修習善根)이요, 4는 지구승법(志求勝法)이요, 5는 심상유화(心常柔和)요, 6은 조고능인(遭苦能忍)이요, 7은 자비심후(慈悲深厚)요, 8은 심심평등(深心平等)이요, 9는 애락대승(愛樂大乘)이요, 10은 구불지혜(求佛智慧)이다.
십심심(十甚深)을 배치(配置)하면 1은 곧 정교심심(正敎甚深)이니 부처님의 선우를 친근하여 교법을 들음이요, 2는 곧 복전심심(福田甚深)이요, 삼은 곧 업과(業果)요, 4는 곧 연기(緣起)요, 5는 곧 정행(淨行)이요, 6은 곧 조도(助道)요, 7은 곧 교화(敎化)요, 8은 곧 일도(一道)요, 9는 곧 설법(說法)이요, 10은 곧 불경(佛竟)이니 부처님의 지혜가 곧 믿을 바 됨을 설한 연고이다.
2. 비유로써 밝히다
경문
비유컨대 강가에 흐르는 물이
빠르게 다투어 흐르건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큰 불 무더기에서
맹렬한 불길이 함께 일어나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바람이 불어 올 때에
물건에 닿으면 함께 흔들리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여러 땅 덩어리가
차례차례 머물러 의지하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 합론.소 네 가지 비유로써 모든 법이 서로 알지 못하는 연고를 통석(通釋)으로써 모든 법이 서로 같지 아니함을 말함이다. 1은 물에 의지하여 흐르고 멈춤이 있음이요, 2는 불은 불에 의해서 염기(焰起)하게 되며, 3은 바람은 바람에 의하여 움직이며, 4는 땅에 의하여 모든 이것이 임하여 갖게 된다고 하였다.
진(眞)에 의해서 망(妄)이 상속한다. 망은 진의 소지(所持)가 됨이라. 망념은 서로 아지 못함이 있어서 흐르고 머무름이 있음이라. 이는 바람에 의해 동작이 있으므로 망용(妄用)이 진(眞)에 의해 일어남을 비유한 것이다. 바람의 동작하는 모양을 가히 볼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가히 얻지 못하는 까닭으로 가히 서로 알지 못함이라.
☞ 해설
이 경의 뜻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아! 부처님은 참으로 위대하셔라. 어떻게 이런 법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항상 그렇듯이 비유를 드나 과하지 않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니 이는 필시 우리들을 구제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이 틀림없다' 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제 화엄경의 열 가지 믿음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셨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우리들이 행동(실천)을 하는가를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경을 읽어가면서 부처님께서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실천에 옮기는 자만이 비로소 불행(佛行)이 된다" 라고 하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나이가 철들게 한다고 합니다. 나이가 깨달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나이만큼 풍부한 것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이를 헛먹는다면 그보다도 억울한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나이는 나에게 있어서 선생님이요, 친구이며 보살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나이 헛먹었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나이 헛먹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공부가 된 사람입니다.
3. 모든 국토에 들어가다
경문
세간의 모든 국토에
일체가 다 들어간다.
지혜의 몸은 색상이 없으시니
저들이 능히 볼 수가 없도다.
4. 법계와 중생계를 모두 보신다
법계와 중생의 세계가
구경엔 차별이 없음을
일체를 다 밝게 보시니
이것이 여래의 경계로다.
5. 세계의 모든 음성을 모두 다 아신다
일체 가운데에
있는 바 모든 음성을
부처님의 지혜로 다 따라 아시나
분별을 하지 아니 하신다.
6. 여래는 중생의 마음을 한 순간에 아시도다
일체 중생들의 마음이
삼세에 널리 있거늘
여래는 한 순간에
일체를 다 통달하도다.
저 때에 사바세계에 일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바 법의 차별과 업의 차별과 세간의 차별과 몸의 차별과 근기의 차별과 생명을 받는 차별과 계를 지니는 차별과 계를 범하는 차별과국토의 과보 차별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나도다.
♧ 지식이 지식을 알아내다
지식은 자기 인식을 본질로 하며 그 지식이 자기 안에 있는 지식을 인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성찰로 자기 안에 있는 지식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기요, 인식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자기 자신입니다. 등불을 어두운 방에 들고 들어가면 어두울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책상이며, 책들이며, 옷장이나 기타 여러 가지를 모두 고루 비춥니다. 어떤 것은 비추고 어떤 것은 비추지 없습니다. 모두 비춥니다. 그러면서 등불 자신도 비춥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등불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식도 그와 같아서 지식을 얻기 이전에는 깜깜하던 것이 지식이 들어감으로써 내 안을 보게 해줍니다.
깨우침은 무엇인가. 깨우침은 늘 깨어 있는 '정신이 맑아 깨어 있는 모습'으로 영명한 모양입니다. 우매하다든가 혹은 미혹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어있지 못한 정신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깨침' 이라는 말을 씁니다,. 마음을 말하나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을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으로 봅니다. 마치 등불이 스스로 자신을 비추듯이 마음도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보는 자가 바로 당신의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게를 달기 위하여 저울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저울의 추의 정확한 무게를 알기 위하여 또 다른 저울을 사용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마치 우리들의 마음을 열기 위하여는 내 안에 있는 자기를 알지 아니하면 안 되듯이.
작은 것으로부터 연습을 하여 보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지식의 정보를 알고 있나 생각하여 봅시다. 부산 서면에서 어느 지점에 가야 택시를 쉽게 잡을 수 있는가를, 만약 어떤 사람이 빈 택시를 타기 위하여 서면 로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택시 잡는 지식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택시 잡을 수 있는가 또는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깨침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수도 없이 말을 하고 있는데 과연 마음을 말하는 사람은 마음을 알까.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깨친다는 것일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내가 아는가. 아니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잘못이었든 잘 한 것이었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알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처님은 분명 지금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그런 깨우침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깨우침은 연기법이요, 연기법은 불교의 교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성제라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등불이 자신을 비추듯이 마음은 언제든지 자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깨침'을 통해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깨침은 자신을 직관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따로 깨침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보는 하나의 눈을 얻는 것, 그것을 깨침이라 하였지만 그것은 마음을 본다는 것에 불과 함이요, 그것은 존재가 아닙니다. 지각과 '깨침' 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지각은 예컨데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아는 것이지만 '깨침' 은 지각하는 그 자체를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지각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A'라 하고 지각을 'B' 라 하고 인식을 'N'이라 합시다.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을 마음이라고 가정하면 (B+N)=A, 즉 BN=A이며 A=BN인 셈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음을 보는가? 지각인가, 아니면 인식인가? 인식과 지각 모두입니다. 인식과 지각 모두가 다 마음이라는 껍질 같은 것의 안에 들어 있습니다.
ABN 모두를 합한 것을 X라고 하면 'X'를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부처님은 '반야' 라 했습니다. 선(禪)이라고 하는 것, 그것도 마음을 알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공안(公案)도 마음을 알기 위한 방법의 하나입니다. 공안을 통하여 마음을 깨친다고 합니다. '깨친다' 는 것은 마음을 알아 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계란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말입니다.
♧ 뗏목의 비유
부처님은 마음을 수시로 뗏목에 비유하셨습니다. 뗏목의 비유라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의 강가에 가기 위하여는 뗏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뗏목이 거추장스럽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음은 건너야 할 강이요,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이 없으면 뗏목은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무심경계(無心境界)를 자주 말합니다. 무심으로 돌아가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무심은 무엇인가. 망념이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청정심도 오히려 진(塵)이라 한 것도, 청정하다, 더럽다 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예방한 것입니다. 어쨌든 마음에 일어나는 것은 모두 분별이요, 망상이라 하였습니다. 분별하고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 좋으냐 혹은 나쁘냐를 떠나서 분별심을 일으키면 번뇌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백일법문(華嚴經百日法門) -장산 저- 불광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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