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 해설가) 제13강은 조선시대 6대 간선도로(幹線道路)의 하나인 강화도 길을 가는 길목에 있었던 양천고을을 찾습니다. 따스한 봄기운이 강물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4월의 한강을 걸어서 건너 가 그곳에 깃들어 있는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과 허준(許浚, 1539-1615)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학교 제13강은 2013년 4월 21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마포구 지하철 6호선 상암월드컵경기장역 1번 출구 지상에서 모입니다(우천시 지하1층). 집합장소가 서울 외곽이므로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역→하늘공원→전망대(양천고을조망)→노을공원 아랫길→생태습지공원→가양대교→광주바위(광제바위)→허가바위(공암)→허준박물관→점심식사 겸 뒤풀이(<양천골해정갱>에서 야채전, 막걸리에 양반효종갱 또는 황태해장국)→겸재정선기념관→양천고성지→소악루→양천향교→양천향교역
▲ 서울학교 제13강 답사로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양천고을은 지형적(地形的)으로 한강의 남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 건너편에서 바라다보면 한강 너머로 확 트인 시계(視界)가 확보되어 총체적으로 풍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은 한강 하류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되어 있는 옛날의 난지도에서 양천고을을 조망하며 인문지리적인 교양을 쌓고 가양대교를 건너가 허준과 정선의 자취를 더듬어 볼 예정입니다.
▲ 노을공원 ⓒ맹가이버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은 지금은 두 개의 산봉우리로 보이지만 본래는 삼각산(三角山)의 문수봉, 비봉, 수리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서쪽 능선으로 흘러내린 물길인 불광천(佛光川)과 남동쪽 능선으로 흘러내린 홍제천(弘濟川)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있었던 퇴적물로 형성된 난지도(蘭芝島)라는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홍제천은 다른 이름으로 모래내[沙川]라고 불릴 만큼 많은 모래들이 흘러왔던 곳으로 하구(河口)에 와서 한강의 거센 물살에 주춤하며 그 모래가 쌓여 난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난지도는 난(蘭)과 지초(芝草)가 자라던 아름다운 섬이라 해서 난지도라 불렀고 섬의 모양이 오리가 물위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오리섬 또는 압도(鴨島)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웠던 난지도에 1977년 제방(堤防)이 만들어지고 1978년부터는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섬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산업폐기물과 서울시민들이 배출한 쓰레기를 15년간이나 버린 양은 8.5톤 트럭 1,300만대 분량에 이르렀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거대한 두 개의 산봉우리가 만들어졌습니다. 1991년 새로이 김포에 쓰레기 매립지가 생기면서 1993년부터 난지도의 쓰레기 반입은 중단되었으나 쓰레기에서 배출되는 많은 공해물질로 몸살을 앓아오다가 다행히 지금은 자연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선시대의 주요 간선도로는 여섯 갈래로 나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경기도를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길과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이르는 두 길, 북쪽으로는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에 이르는 길과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에 이르는 두 길, 동쪽으로는 경기도를 거쳐 강원도 동해 바닷가에 이르는 길, 서쪽으로는 김포 지나 강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중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서쪽 길은 지금은 양화대교가 놓여 있는 양화나루[楊花津]에서 배로 한강을 건너 양천고을[陽川縣]을 거쳐 김포를 지나 강화로 가게 되어 있어 양천고을은 예로부터 한양도성을 나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양천고을은 한강 남쪽에 위치하여 강변의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선상시회(船上詩會)도 즐기고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풍광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모두 파헤쳐져 흔적을 찾기가 어렵고 지금 남아있는 강변의 산봉우리는 상류로부터 선유봉(괭이봉), 쥐봉, 증산, 탑산, 궁산, 개화산이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리고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모래밭인 선유도(仙遊島)에 솟아 있던 두 개의 암봉(岩峰)으로 그 절벽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고 봉우리의 모양이 고양이가 쥐를 발견하여 발톱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괭이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섬에는 30여 가구가 살며 주로 농사를 짓고 양화나루 터에서 짐꾼으로 생계를 이어 갔으나 1925년 을축(乙丑) 대홍수 때 많은 피해를 입어 이주(移住)가 시작되고 1930년대 일제(日帝)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치루기 위해 김포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이곳에 채석장을 열었고 미군정(美軍政) 시기에도 비행장 건설과 도로 개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석재(石材)를 채취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때는 한강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강변북로 사업에 필요한 모래를 선유도에서 마구잡이로 채취하여 아름다운 선유봉은 본래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조그마한 섬으로 전락하여 영등포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정수장이 쥐봉 아래로 옮겨감에 따라 그곳은 선유도 생태공원으로 거듭났습니다.
▲ 허준박물관 ⓒ강서구청
쥐봉은 관악산(冠岳山)에서 발원한 안양천(安養川)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있으며 괭이봉(선유봉)과 대칭되는 이름으로 먹이를 앞에 두고 있던 쥐가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모양을 닮았다 하여 쥐봉이라 부르는데, 조선 숙종 때 첨중추부사였던 강효직(姜孝直)에게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함으로써 진주(晋州) 강씨의 묘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한때는 대공방어시설이 있어 출입이 제한되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쥐봉의 남쪽 기슭에는 동양 최대의 인공폭포를 조성하여 지금도 여름이면 장쾌한 여섯 개의 물줄기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증산(甑山)은 염창동 끝자락에 솟아 있는 시루같이 생긴 돌산으로 산 모습이 아름다워 군자봉이라고도 하는데, 서쪽의 탑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양동과 동쪽의 쥐봉을 중심으로 형성된 염창동을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하며 서해 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天日鹽)을 한양에 공급하기 위하여 배로 싣고 올라와 도성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보관하던 창고인 염창(鹽倉)이 있었던 곳으로 염창동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곳에는 한때 골프연습장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다 철거되고 파헤쳐진 바위덩어리만 흉물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탑산(塔山)은 양화나루[楊花津]보다 더 하류에 있는 공암나루[孔岩津]에 있는 산으로 나루에 있는 산이라고 진산(津山)이라고도 하며 산에 오래된 탑이 있어 탑산이라고 부릅니다만 탑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탑산 아래에는 자연동굴처럼 생긴 구멍 뚫린 바위가 있는데 '구멍 난 바위'라고 구멍바위[孔岩]라고도 하고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허가(許哥)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설화 때문에 이곳을 양천허씨의 발상지(發祥地)로 부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암나루[孔岩津]라는 지명(地名)도 '구멍 뚫린 바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탑산 바로 옆 강물 속에 서 있는 두 개의 바위는 경기도 광주(廣州) 땅에 있었던 것이 큰 홍수로 떠 내려와 공암나루 근처에 걸려 지금에 이른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광주바위[廣州岩]로서 달리 광제바위[廣濟岩]라고도 부르는데 그 뜻을 새겨보면 한강변에 도읍을 정한 한성백제(漢城百濟)가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허준은 양천허씨로 양반 가문의 서자(庶子)로 태어났습니다. 서얼(庶孼)이라는 출신성분을 극복하며 출세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된 것은 조선시대에 개인의 일기(日記)로는 가장 방대하며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은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저술한 선조 때의 유학자(儒學者)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희춘은 허준이 그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하자 그를 신임하여 이조판서에게 천거해 내의원 의원이 되도록 하는데 2년 후에는 종4품의 내의원 첨정(僉正)까지 됩니다. 당시 의과를 장원급제하면 종8품의 관직이 주어졌다고 하니 서자 출신의 허준이 얼마나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당시 왕자였던 광해군의 두창(痘瘡, 천연두)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임진왜란 중에 다시 광해군의 병을 고쳐 양반 중에 문관(文官)을 뜻하는 동반(東班)에 올라 명실상부한 양반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 한 호종공신(扈從功臣) 열일곱 명 중의 하나인 허준에게 다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 벼슬을 내렸습니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의 지나친 총애에 시기를 하던 신료들이 그 죄를 묻자 광해군은 허준을 감싸 안았으나 계속되는 신료들의 질시와 견제에 어쩔 수 없어 허준은 1년 8개월의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귀양지가 바로 탑산의 바위굴(공암)이고 <동의보감>도 귀양살이 중에 편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허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탑산 아래 그의 호를 딴 구암공원을 조성하고 허준박물관을 세웠습니다.
궁산(宮山)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鎭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이 담당한 다양한 역할 때문에 여러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궁산(宮山)은 공자(孔子)를 배향(配享)하는 양천향교가 있는 곳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의미로 궁산이라 했고 파산(巴山)은 삼국시대 이곳의 지명이 제차파의(齋次巴衣)라서 파산이라 했으며 제차(齊次)는 갯가, 파의(巴衣)는 바위로 '갯가에 바위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양천고을의 옛 이름을 파릉(巴陵)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성산(城山)은 산 위에 삼국시대에 쌓은 옛 성터가 남아 있어 성산이라 했고 이 산성은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파주의 오두산성(烏頭山城)과 함께 삼국시대에 한강 하구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 건너 고구려의 행주산성과 마주보며 대치하였던 한성백제의 산성으로, 임진왜란 때는 권율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행주산성으로 옮겨서 행주대첩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안타깝게도 일제 때 김포비행장 개설공사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둔하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군이 주둔하여 궁산은 원형이 철저하게 훼손되어 옛 성터의 흔적인 적심석(積心石)과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약간의 석재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산(關山)은 한강을 지키는 빗장의 역할을 했다고 '빗장 관(關)'자를 써서 관산이라 했고 진산(鎭山)은 양천고을의 모든 관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진산이라 했습니다. 다양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준 명칭은 궁산이라고 합니다.
궁산에는 한강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정자가 지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중국 동정호(洞庭湖)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와 머금간다고 붙여진 악양루라는 정자가 제일 유명하였으며, 영조 때 이유(李楡)는 악양루 옛 터에 '다시 지은 작은 악양루'라는 뜻의 소악루(小岳樓)를 짓고 명사들과 풍류를 즐겼고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부임한 뒤 자주 이곳에 올라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작품이 <한수주유(漢水舟遊)>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소악루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樓淸風]은 양화강의 고기잡이 불[楊江漁火], 목멱산의 해돋이[木覓朝暾], 계양산의 낙조[桂陽落照], 행주로 돌아오느 고깃배[幸州歸帆], 개화산의 저녁 봉화[開花夕烽], 겨울 저녁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寒山暮鐘],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二水鷗眠] 등과 더불어 파릉팔경(巴陵八景) 즉 양천고을의 팔경 중의 하나였습니다.
▲ 겸재정선기념관 ⓒ강서구청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조선의 고유한 특성을 마음껏 드러낸 문화절정기인 진경시대(眞景時代)에 우리 고유화법을 창안하여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완성자입니다. 진경시대는 숙종대로부터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125년간의 기간으로 조선이 개국이념으로 삼은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거듭나는 시기로서 이때에 중국의 문화를 추종하던 관례를 깨고 조선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는데 회화에서는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 글씨에서는 '동국진체(東國眞體)' 시문에서는 정조의 문체반정을 불러온 '신체문(新體文)'이 유행하게 됩니다.
정선은 1740년 양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진경시(眞景詩)의 태두 이병연(李秉淵)의 시문(詩文)과 자신의 그림을 바꿔 보자고 약속하고 한강 주변의 많은 풍광들을 그렸습니다. 이병연은 목멱산의 아침 해돋이를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에 대한 화답으로 시를 짓고 안산의 봉화대를 바라보고 있을 정선을 생각하며 안현석봉(鞍峴夕烽)이라는 시도 짓습니다.정선과 이병연은 진경시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하(門下)에서 함께 수학한 동료이기도 합니다.
개화산(開花山)은 달리 주룡산(駐龍山)으로도 부르는데 그 모양이 코끼리를 닮아 강 건너에 있는 사자 모양인 덕양산(행주산성)과 더불어 한강 하류에 포진하여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한양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의 산세(山勢)로서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온 봉수(烽燧)를 받아 목멱산(木覓山)의 경봉수(京烽燧)에 전달하는 봉수대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이 주둔하면서 군사시설을 닦느라 그 터마저 흔적없이 사라졌고 지금껏 군사시설이 산 정상에 들어서 있어 출입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13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 1년간의 일정으로 12코스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12코스의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오전 9시 30분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첫댓글 이럴 때는 정말로 서울에 살고 싶습니다.. 서울이야기를 서로 서로 들으며 걷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