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이단론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옳고 우리가 틀릴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그들이 잘못된 것 같다. 그렇지만 만일 그들이 성실하고 진실하다면, 그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같은 말은 자유롭고 자애롭게 들린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의 견해가 이와 같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성실한 사람”으로 설명함으로써 만족해할 정도로, 그리고 이 애매모호한 정의가 아주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일 정도로, 이 잘못된 견해는 극단까지 이른다.
이제 나는 그것들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러한 견해들은 성경과 완전히 위반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성경에서 단순히 진실함으로써 천국에 이르렀던 사람, 자신의 견해를 고수함에 있어서 오로지 성실했던 사람이 하나님께 용인되었던 예를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다. 바알신의 사제들은 피가 쏟아져 나오기까지 칼과 창으로 스스로 자해할 정도로 성실하였고 진실하였다(왕상18:28). 유다의 왕 므낫세는 몰록에게 자신의 자녀들을 번제로 드릴 정도로 성실하고 진실하였다(왕상21:6).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을 때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있어서 성실했고 진실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이 뜨였을 때 그는 이 일을 특별한 악행으로 생각하여 슬퍼했다.
우리는 신실함이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용납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그와 같은 식의 원리에 따르면, 드루이드교회의 제사, 아내가 남편을 따라 순사하는 인도의 풍습, 옛 인도의 종교적 암살단 체제하의 자객들, 그리고 대장장이의 불, 이 모두가 각각 옹호될 것이다. 그것들을 성경의 시금석을 통과해 내지 못할 것이다. 성실함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없는 신앙,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인가 떼어낸 신앙, 그리스도에 무엇인가를 덧붙인 신앙, 그리스도의 자리에 성실함을 집어넣은 신앙, 이 모두가 다 위험스럽다. 이 모두가 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그들은 나를 자비심 없고, 보수적이며, 편협하며, 완고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별 수 없다. 나의 교리는 극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신에 맞서서 엄중한 증언을 계속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시대의 감염에 대항하도록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내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범신론이다. 즉,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참이 아니라고 말하는 체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참이라고 말하는 체제이다. 그것은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체제가 아니라 참으로 많은 구세주가 존재하며 평화에 이르는 참으로 많은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체제이다.
그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체제이며, 그 어떠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 체제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참이라고 용인할 만큼 너무도 자비로운 제체이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여러 가지를 한 부류에 넣음으로써, 그 모두를 영예롭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모두에 대해 좋게 생각하려는 체제이다.
공자와 조로아스터,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인도의 브라만 승려들, 아프리카의 악마 숭배자들, 아리우스와 펠라기우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소시누스 이들 모두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체제이다. 성경과 코란, 랍비 작가들의 나이 든 아내들의 이야기,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잡동사니 저술들, 엠나누엘 스웨덴버그의 계시들, 조셉 스미스의 몰몬경,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경청해야 하는 체제이다. 아무것도 거짓이라고 비판받지 않는다.
허울좋게 자유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한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자비를 서투르게 모방한 제단 위에 진리를 희생제로 드리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림자요, 환상이요,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경배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대체 무엇에 관하여 성실한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내 성실”에 대해 만족히 여긴다고 고백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혹에 이끌림 받고 있지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무장하고 이 같은 물음에 대해 공정하게 응대하며 그것들에 대해 정직하게 답변해야 한다. 모두가 다 옳다고 말하는 자유로부터, 어떤 사람이 틀렸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금하는 자비로부터, 그리고 진리를 대가로 치르고 대신 오는 평화로부터, 선하신 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자유롭지 못하며 무자비하다고 말해도 좋다. 나는 성경 이외에는 그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죄인들을 위한 그 어떠한 구원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풍요를 본다. 그분 밖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 관해 아주 거북한 감정을 느낀다. “그 삶이 정의로운 사람은 그릇될 수가 없다”라는 유명한 시를 쓴 사람은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엾은 천재이었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8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