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우리에겐 치유하기 힘든 많은 상처가 남았다.
대한민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헬로 기브 미 원 껌”이 수시로 입에 오르내렸고,
본격적인 딴쓰(dance)가 규방처자를 대문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자유의 바람이 막 불어오던 1950년대 생겨난 자유부인(自由夫人),
생활이 넉넉하여 놀러 다니는 것을 일삼는 부인인 유한마담(有閑Madame),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미망인,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戰爭未亡人)이 생겨났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떠난 이뿐이가 이젠 이름마저 낯 설은 에레나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과 혼돈이 물결치던 1950년대.
그 50년대의 중반인 1956년, 사랑과 성의 문제를 대담하고도 원숙하게 다뤄,
‘서울신문’ 연재 당시 장안에 숱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한국전쟁 직후의 퇴폐풍조와 전쟁미망인의 직업전선 진출 등 당시의 사회 단면을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으로 봉건적 인습에 길들여진 한국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이때부터 우리는 폐쇄되어 있던 성에 눈뜨게 된다.
무료한 일상과 권태로운 결혼생활에서 벗어나,
본능에 몸을 맡긴 채 향락의 세계로 빠져든 한 대학교수 부인을 통해,
사랑의 참된 의미와 부조리한 사회상을 파헤친 수작으로 꼽고 싶다.
이 연장 선상에서 5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59년에 또 하나의 여성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소설이 아닌 가요로 탄생했다. 바로 <댄서의 순정>이 그것이다.
그 시대가 그러했기에 이 노래는 시대의 부름을 받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앞뒤로 노래 한곡씩을 담을 수 있는 SP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참고로 아래 음반 그림은 LP시대에 들어와 10인치 앨범으로
'땐사의 純情'(SLB 10312)을 타이틀로 하여 재발매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표기법으로 ‘댄서’라고 부르고 쓰자니 굉장히 어색하다.
최소한 ‘땐서’라고 불러야 그럴듯하게 들린다.
미국식 발음에 가까운 언어의 순화에 의해 댄서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노래에 관한한 당시의 표기법대로 땐사의 순정이라고 적어야 제 맛이 날 것 같다.
더불어 가사도 그때의 표기법으로 썼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네온싸인 아래 오색등불 아래
춤추는 땐사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섹스폰아
새빨간 드레스 걸쳐 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지며
비 내리는 밤도 눈 내리는 밤도
춤추는 땐사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섹스폰아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외로이 들창가에 기대서서
슬픈 추억 속에 남모르게 우는
애달픈 땐사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섹스폰아
작사가 김영일의 가사에 김부해가 곡을 붙여 박신자가 취입하였다.
김영일은 <불효자는 웁니다>(진방남 노래), <찔레꽃>(백난아 노래) 등으로 이름을 알렸고,
김부해는 <대전블루스>(안정애 노래), <영등포의 밤>(오기택 노래) 외에도 많은 히트작을 내면서
당대의 히트 작곡가였다.
그러나 가수 박신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니 내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가수 차은희가 어느 인터뷰에서 박신자가 가수 주현미의 큰 엄마라 했는데
나로서는 확인해 본 바가 없어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하여튼 간에 박신자는 이 노래 한곡만이 알려졌을 뿐,
얼굴조차도 모를 뻔했으나 다행이도 음반 표지가 있고 음원이 있어
이 모습이고 이 목소리구나 하고 알 뿐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생각보다 크게 불리질 않았다.
가사가 천박하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전문가의 입에서나 나올 말이고 대중에게는 천박하거나 표절했거나 상관이 없다.
그저 듣기 좋고 거기다가 자기와 조금치라도 연관이 있는 내용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니었겠는가.
무엇보다도 이 노래에 확실하게 타격을 준 사연이라면,
1968년 2월 한국공연윤리위원회(약칭 공륜)로부터
'가사 저속 퇴폐'라는 사유로 금지곡으로 분류되면서 공식적으로는 물밑으로 잠겨버린 것이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던 노래가 1974년 후반기에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상 기류에 편승하여 많은 가수들이 리바이벌하게 되었고,
대학가로부터 모처럼의 히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사다마랄까? 이 노래에 불이 지펴질 찰나,
1975년 4월 이번에는 방송윤리위원회(약칭 방륜)가 무드와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을 내려 불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또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는 노래가 되었다.
방송에서만 금지되었을 뿐 시중에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래의 제목이 그렇듯이 댄스홀용 음악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7년 8월 18일 금지의 족쇄에서 풀리면서 방송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는 박신자의 노래로 보다 김추자의 노래로 부활했다.
그러니까 14년 만에 규제가 풀린 것이고, 노래 탄생으로부터 따지자면 28년만의 일이다.
그래서 더 더욱 이 노래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는 것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래도 잊혀 가고 있다.
그러나 가사가 천박스럽다고 해도 내용은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다.
이렇게 험한 세파를 견뎌야 할 숙명으로 태어난,
아름다움 삶을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맡길 수밖에 없는 댄서의 숙명.
이런저런 사연이 많은 이 노래에 관한 내력과 에피소드를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점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씁쓸할 뿐이다.
또 이 기회를 빌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어느 분이 당당하게 인터넷에 "박신자 씨가 부른 <댄서의 순정>은 1956년에 개봉된 그 유명한 영화 <자유부인>의 주제가입니다."라고 했는데, 이건 큰 실수다.
앞에서도 밝혔듯 <땐사의 순정>은 1959년 말쯤에 나온 노래인데 1956년 제작 영화에 주제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첫댓글 좋은내용 잘 보고감니다
너브내7410님! 반갑고 앞으로도 많은 흔적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