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톡톡] 찌그러진 피망, 휘다 못해 두 끝이 서로 붙어버린 오이, 사람 다리처럼 갈라진 당근... 독일 베를린의 'Culinary Misfits'라는 케이터링 업체가 다루는 식재료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그동안 외면 받던 못난이 야채와 과일을 맛있는 음식으로 변신시켜 공급하는 일이다. "단지 모양 때문에 버려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저희는 사람들에게 이런 재료들의 진짜 맛과 매력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환경과 좋은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요즘, 이들의 캠페인이 초기부터 꽤나 큰 호응을 얻었다. 유럽연합은 2008년부터 많이 구부러진 바나나와 오이 등의 판매 제한 조항을 해제하였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새벽의 가락시장, 무 경매가 한창이었다. 한 도매업자에게 '좋은 무'의 기준을 물었다. "껍질이나 뿌리 상태도 중요하지만 역시 생김새죠. 구부러지거나 원뿌리가 여럿이면 절대로 좋은 등급 못 받습니다." 그렇게 걸러진 '못난이' 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UN 식량농업기구(FAO)가 작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선진국의 경우 과일·야채 총생산량의 20~40%가 '못난이'라는 이유로 시장에서 팔리지도 못하고 버려진다. 녹색소비자연대 박인례 대표는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식품의 1/7, 약 25조 원 정도가 버려진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의 식품이 폐기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버려지는 음식물의 양도 문제지만, 세계적으로 닥쳐올 '식량 위기(Food Crisis)'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6월 <민중의 소리>를 통해 2000년대 이래 세계 총식량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매년 약 6천만 톤 정도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식량을 재배할 경지 면적이 줄어들었고, 농산물 자유무역화 이래로 소수 글로벌 자본이 식량 생산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식량 자급률이 낮고 수입량 의존도가 높아 '식량 위기'에 상당히 취약하다. 즉, 버려지는 음식물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먹고 사는' 미래는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개 농산품은 그 생김새에 따라 특, 상, 보통 등급으로 나뉜다. 정말 모양과 맛은 관계가 있을까? 박인례 대표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유전자 조작이나 약품 처리 등을 통해서 겉만 예쁘게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품질이 좋아도 유통 과정에서 변형되거나 흠집이 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감귤의 경우,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꼭지 주위가 푸르스름한 색을 띤 것이 잘 익고 신선한 감귤이라고 한다. 과육이 무른 복숭아 같은 과일은 몇 번 만지기만 해도 쉽게 흠집이 날 수 있다. 맛과는 별개로 유통·판매 과정에서 충분히 '못생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시내 씨(슬로푸드청년네트워크)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요새 과일 선물이 흔하잖아요? 더 크고 예쁠수록 인기가 좋다 보니까 농가에서는 껍질에 첨가물을 발라 인공적으로 커지게 하거나 착색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비용이 늘면서 과일값도 오릅니다. 악순환이지요."
많은 소비자들이 농산물의 '진정한 맛'을 잘 모른다는 지적도 나왔다. '꿀수박, '설탕사과' 라는 홍보 문구처럼 과일 맛은 당도에 달려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마트의 과일 코너에서 브릭스(Brix: 당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물 100g에 녹아있는 설탕의 g수를 나타낸다) 표기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더 달수록 더 높은 값이 책정되는 식이므로, 당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품종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장시내 씨는 이에 비판적이다. "단 맛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사과를 예로 들면, 단 맛, 떫은맛, 새콤한 맛이 조화를 이루잖아요? 과일의 다양한 맛을 제대로 알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잘생긴 농산물만 쳐주지 않고 두루두루 제 값을 매겨 유통시킨다면, 농민 소득 증대는 물론 농산물 가격의 폭등이나 폭락을 막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더불어 소비자들의 구매의 폭을 넓히고 합리적인 가격대를 형성하는 데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못난이 농산물의 제값을 쳐주지 않는 현행 품질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보다 공정한 유통경로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이미 일부 지자체에서는 직판장을 운영하고 유통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녹색소비자연대와 이마트가 함께 지난 4월부터 실시 중인 스마트 소비 캠페인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현재 서울 14개 지점에서 못난이 과일과 유통기한 임박한 식품을 싸게 판매하고 있다.
'맛'과 '인정'의 가치를 내세워 호응을 얻은 사례도 있다. '맨땅에 펀드'는 전남 구례군 농민들에게 일정 금액을 투자한 이들에게 제철 유기 농산물을 연 7번 정도 보내주는 상품이다. 작황에 따라 실하게 자라도, 상처나 흠집이 나도 그대로 작물을 보낸다. 투자자들은 매주 웹사이트에서 농부들이 직접 올린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농산물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응이 좋다. 작년 출시 이후, 100구좌 가운데 70구좌가 재투자했으며, 올해는 총 334구좌가 참여하고 있다.
한편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직거래장터도 못난이 농산물 거래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겉보기보다는 실속을 따지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는 증거다.
맛은 같지만 가격은 더 저렴한 '못난이' 농산물이 불경기인 요즘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인례 대표는 "못난이 농산물의 구매는 알뜰한 소비를 넘어 그 자체로 윤리적이고 똑똑한 소비"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음식의 '참맛'과 중요성에 더욱 관심을 갖고, 정보를 접하고 나누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올바른 먹을거리에 관한 인식의 변화는 더 빨리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