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도 인천법소 2017년 춘분치성 도훈
“죽어야 사는 길”
2017년 3월 20일 (음력 2월 23일)
오늘이
춘분인데요 산과 들에는 봄기운 피어나서 만물이 약동하려고 합니다. 따뜻한 봄기운을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겨울 동안 쌓였던 묵은 먼지를 털어내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오늘 인천법소 춘분치성을 맞이하여 종장님
종부님께서 참석해주시고 멀리서 충익도인께서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고 뿌듯한 마음입니다. 오늘 인천법소
도훈은 ‘죽어야 사는 길’이란 주제로 제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의 지난번 도훈 주제가 태을도의 길이 ‘한번도
안 가본 길’이고 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길’이란 주제로 말씀을 드렸는데,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죽여서라도 그 길을 가야 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보면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선에 대항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전투를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런 의미 인데요.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12척 대 수백 척”의 불리한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병사들에게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용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 한 말씀이라고 하더라고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정신력을 극대화하여 승기를 잡기 위한 충무공의 전략이고 또 승리를 해야만 조선을
구할 수 있으니까, 조국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죽고자 한다’는 얘기를 상제님 신앙 차원에서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데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제거하면 생사를 초월해서 일심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심의 경지가 되면 자신이 마음으로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되죠. 그래서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치가 성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살고자 한다’는 것은 적의 위세에 눌려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갖게 되어 싸움을 회피하거나 도망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적의 위세 눌려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얘기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군사들의 심리를 잘 꿰뚫어 본거죠. 이순신
장군은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자기를 죽임으로써
살아남는 방법을 성공시켜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증산
신앙의 목적이 ‘내 자신을 개조하여 상생인간, 태을인간으로
재생신시키는 것’이라 본다면, 현재의 상극인간인 내 자신을
죽여야 만 새로운 상생 인간으로 재탄생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육신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마음을 운용해서 시공간에 맞게 마음의 뜻을 펼치는 것 이거든요. 살아 간다는 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고 생각의 틀, 방향, 목적일 수 도 있고, 또 그에 따라 행동을 규정하는 행동양식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틀이라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틀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보면 그 마음을 운용하는
틀 자체가 생명 그 차체라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상극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마음의 틀을 바꾸는 것이고
마음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은 어려움과 두려움과 고통이 따르는 일 입니다.
현재
일류는 상극의 마음의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척과 원한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서 모든 관계가 폭력과 투쟁으로 변했고 결론적으로 원치 않는 참혹한
재앙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거죠. 우리 자신을 상생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극으로 운용되는
마음의 틀을 버리고 없애서 상생의 마음의 틀로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는 거죠, 현재의
인류가.
상제님께서도
마음의 틀을 바꾸는 것의 어려움을 말씀하셨는데, 상제님의 성구를 보면 ‘마음을 지키기가 죽기보다 어렵다. 마음을 바꾸기가 죽기보다 어렵다.’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 이유는 그 마음의 틀, 마음을 운용하는 구조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수천 년, 수만
년의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의 견고한 생명을 운용하는 이치로써 자리 잡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공부해서 머릿속으로는 상생을 생각하고 참는 걸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실제의 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했을 때 옛날의
습관, 상극의 습관이 스물 스물 피어 오른다고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게 나온거든요.
그래서
그런 견고한 구조로 마음의 틀이 자리잡고 있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옛날의 습관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냉철히 판단해서 마음에서 버릴 것과 치워버릴 것을 항상 관리하고 내 마음을 감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론적으로 배우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대로 상생의
길을 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컴퓨터 같은 경우는 리셋해서 다른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아서 바로 바꿀
수 있지만, 우리 마음을 그렇게 할 수 없다고요. 생명을
유지하는 마음의 틀은 견고하고 그 마음이 없어지면 생명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를 시켜가야 생명에 충격이
없이 자연스럽게 내 자신을 바뀔 수 있습니다. 서둘러서 하루 아침에 될 문제도 아니고 꾸준하게 하지 않으면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 마음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 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보는 인식의 방법을
상생으로 바꾸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나 자기 집단에 머무르던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서 우주로
확장시켜서 우주 전체 속에서 내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면서 기존의 상극의 마음의 틀을 하나하나 고쳐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마음의 방향과 뜻을 시천 태을에 맞춰서, 천주의 품성과 태을신성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우리 자신을 상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천주의 품성은 지극히 어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볼 수 있죠. 우주의
마음자리인 태을은 아주 자연스럽고 신성한 진리 그 자체이고, 우리 생명력의 근원입니다. 천주의 품성을 되찾고 태을신성을 밝혀서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다른 사람과 상생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천지가 시천의 마음과 태을의 신성을
근본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시천 태을을 깨달아서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야 비로소 내 자신이 천지와 더불어 영생할 수 있기 때문에 시천 태을을 깨달아야
하는 것 입니다.
상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생명에게 복이 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사물을 대하고 처리할 때는 모든 존재를
고려해서 사물을 대하고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와 나의 구분 없이 공평하게 처리를 해야 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어질고 자비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 어진 마음이 자연스럽게 표현돼서 다른 사람의 마음과 조화되도록
상황에 따라서 내 마음을 조정하고 마음의 표현의 강약을 조절해야 합니다.
봄이
되면 묵은 풀대에 새싹이 나오거든요. 새싹이 나오려면 옛날의 풀대가 없어져야 새싹이 나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상극의 마음이 없어져야 상생의 마음이 자라납니다. 기존의
낡은 나를 버려야만 새로운 내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순신 장군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정신력을 극대화하여 전쟁에서 승리해서 조선을 구했듯이, 오늘날 증산신앙인들과 태을도인들의
처한 위치가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자세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여야 내가 살아 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봅니다.
상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을 바꾸는 일은 죽음보다도 더 큰 고통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내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선천 상극세상에서는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기 때문에 내 자신의 적은 다른 사람이었다고요, 내 밖에 있는 존재였다고요. 나를 위협하는 현실적인 상대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렇지만
후천이 되기 직전에 다가오는 급살병은 우리 마음을 심판하는 것이기에 이제 나의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의 적이 돼 버린 거예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버리고 죽여야 되는, 어떻게 보면 황당하고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이런 이치를 수긍하지 못하고 상제님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가도 듭니다. 그러면 우리가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죽일지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증산상제님의 마음에 찾아야 하고 상제님께서 남기신 언행을 참고해서 내 마음속에서 버리고 죽일 것, 취할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정유년도 본격적으로 생명활동을 시작을 했습니다. 이 봄바람을 따라서 증상신앙인들도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찾는 일에 정진해서 다 함께 새로운 삶을 구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증산상제님의
신앙과 인연이 돼서 살수 있는 길을 가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이상으로 도훈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