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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보물섬여행사의 인원모집 저조로 디디투어 여행사 인원과 함게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대한항공 KE 915 편으로 문헨공항까지 12시간의 긴 비행.7시간의시차로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하여 7시30분에 늦은 오후에 도착,, 무척 긴 하루라 모두가 지친 몸이다.
계획은 문헨에서 투숙하기로 했으나 ....
문헨에는 10월 첫째 일요일의 15일 전부터 시작되는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세계적인 맥주축제가 한창이었다. 그 중심이 되는 도시가 바로 뮌헨이다.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 테레제공주와 루트비히1세가 결혼할 때 하객들에게 경마등 볼거리를 제공하며 잔치를 연 것이 유래가 됐다는데, 지금은 1,270개 맥주회사중 50%가 뭔헨이 속한 바이에른 지방에 거점을 두고있어 축제기간은 뭔헨의 도시는 물론 호텔도 초 만원이고 호텔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나...
그래서 지친몸을 싣고 독일의 남쪽으로 3시간동안 버스로 이동하여 퓌센지방의 유로 파크호텔( Euro park hotel)에 투숙을 하고 퓌센과 슈방가우부터 관광이 시작됐다.
슈방가우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성과 호엔슈방가우성.아름다운호수가 있는곳이다. 출발부터 가량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더니 미니버스로 노이슈반슈타인성이 잘보이는 마리엔다리서니 온몸이 떨려왔고 겨울날씨처럼 손이 시러 디카에 사진담기가 어려웠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알프호수 위로 우뚝솟은 가파른 절벽, 푈랏슐루흐트의 소용돌이 치는 계곡물위에 루트비히대왕2세가 1869~1886년, 무려17년이란 긴세월과 엄청난 경비가 들고
당대 최고 건축기술을 동원하여 초호화판으로 건축하여 지금 보아도 감탄사를 연발한다지만, 사전예약이 되어있지않아 실내입장은 안되어 멀리서 조망만하고 사진 몇장으로 대신했다 ....
...루트비히2세는 1845년에 태어나 1896년에 사망해 그리 길지않은 생애를 살았으나 왕인데다 잘 생기기까지 했어 수많은 여인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으나 왕은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고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도 없다고 전해지고, 아름다움과 이상을 추구했던 왕은 노이슈반슈타인 성, 린더호프 성, 헤렌 힘제 성 등 계속해서 화려한 건물을 지어 국가의 재정이 곤란에 빠져 신하들에게 배신당해 교외의 성에 유배되어 갇힌 뒤 뮌헨 근교의 슈타른베러거 호수에 빠져 생을 마감했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문의 죽음이란다.
호엔슈반가우성은 알프호수와 슈반호수사이 숲이 우거진 산위에 지어진 노란색의 성으로 슈반가우의 영주가 즐겨 찾든 곳으로 루트비히2세의 부친인 막시밀리안 2세가 1832년 왕위계승 왕자로서 페허의 성을 상속받았는데 그는 상상속의 로만틱한 의도로 건축가이자 무대 미술가인 도메니코 콰글리오 로 하여금 중세양식으로 재건축하였단다.
일반 여행객은 호엔슈반가우성은 아버지성이고,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아들성으로 통한다.
점심은 불에구운 탕박한 돼지고기와 껍질채로 잘구운 감자. 와인 한잔으로 멋지고 맛있게
먹고, 오스트리아 알프스, 티롤의 산골짜기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도시 인스브루크를 향해 달리는 차창밖 풍경은 말 그대로 예술이다.
넓은 호수와 옹기종기 모여있는 호숫가 마을, 가파르면서도 웅장하게 솟아오른 산, 초록의 신록에 바라만 봐도 평화로운 오솔길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기대를 부풀게 했다.
인스부르크의 구 시가지로 이어지는 가장 번화한 대로인 “마리아 테레지”거리에 서니 남쪽으로 웅장한 개선문이 길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장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1756년 훗날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된 자신의 아들 레오폴드와 스페인공주 마리아 루도비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이 개선문을 건설했다
마리아테레지 거리안에 인스부르크의 상징이자 대표 관광명소인 황금지붕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황제 막시밀리안1세가 광장에서 벌어지는 마상시합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로열석 발코니다. 16세기초에 완성된 황금지붕은 2,738개의 도금된 동판으로 덮여 있으며 막시밀리안 황제의 재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처음에 황금지붕 이라길래 대단한줄 알았다 좀은 실망했지만 화려한 황금빛 지붕에 거리 전체가 환해지는 느낌을 뒤 늦게 알았네.
잠시의 휴식 시간에 같이한 일행들과 피자를 먹어며 카푸치노 한잔과 에스프레스 한잔의 진한 향기를 맛보며 한때의 여유를 보내고...
엘레베이트도 없는 Hotel Ceisler 에 힘들게 각자의 방을 찾아 짐을 풀고 인스부루크의 티롤 산골짜기의 설경을 카메라에 담기가 바쁘다. 저 멀리 보이는 설경은 말그대로 예술이네.
다음날 인스부르크에서 5시간 버스로 이동하여 이탈리아 베니스(베네치아)에 도착.
“물의도시”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형학상 가장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호화로운 베네치아의 옛 궁전들, 곤돌라가 소리없이 미끄러져가는 이름모를 운하, 수많은 박물관에 소장된 방대한 예술품을 통해 베네치아의 찬란한 역사의 숨소리를 느끼고, 가면축제, 세계적인 영화제로 잘알려져 있는 베네치아는 14세기까지 아무도 넘볼수없던 이탈리아 최강의 공국이었다.
1866년 이탈리아 통일국가에 합병되면서 지금은 베네토지방의 중심지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지만, 118개의 작은섬과 177개의 운하를 400여개의 다리가 연결하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풍경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 두칼레 궁전, 리알토 다리, 탄식의 다리, 무라노 유리공장을 관광하고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수많은 운하를 누비며 찬란한 역사의 흔적을 보며 가이더의 설명에 열심히 귀 기울인다.
산마르코 광장은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했던 곳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한때 채소밭이었던 이곳은 1723년 티랄리가 물고기 지너러미 문양의 광장 바닥을 설계하면서 크게 변모하여 수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역사,정치,문화사건의 무대가 된 곳이며 주변에는 유서 깊은 카페가 많은 곳이다.
산 마르코 성당은 12사도 중 한명인 산 마르코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절묘하게 혼합된 건축물이다.
가로축과 세로축 길이가 꼭 같은 그리스 십자가 형인 평면도를 유지하면서 양파형의 돔 지붕을 가운데 두고 각각 높이가 다른 4개 돔지붕이 조화를 이룬다.
산 마르코 성당의 상징인 유명한 청동마상과 4개의 반원에 예수강가, 예수부활, 예수승천등이 묘사된 금색 바탕의 모자이크가 아름답고 다섯 개 돔 지붕위에 빛나는 십자가와 첨탑 장식이 특이하다.
대 성당 내부에는13세기의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화려한 바닥이 먼저 눈에 뛴다.
중앙 본당은 양측에 늘어선 아름다운 기둥으로 구분되어 있고 기둥 받침은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있다. 중앙제단에는 성경내용이 조각된 푸른 대리석 기둥4개가 천장을 받들고있고 제단아래는 산 마르코의 유골함이 보존되어있다.
두칼레 궁전은 9세기에 건축되어 15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인 틴토레토의 천국paradiso 가 유명하고 칼과창 등의 무기와 십자군 원정 때 기사들이 부인에게 채웠던 정조대가 전시되어있다.
리알토다리는 베네치아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로 도시를 관통하는 대운하에서 폭이 가장 좁은곳을 선택해 다리를 놓았으며 군선(軍船)이 드나들기 좋게 가운데를 높였다.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은 다리를 건너 프라지오니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게 된 죄수들이 한숨을 지은 것에서 유래하며 유명한 바람둥이인 카사노바도 이곳에 수감된적이 있다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수상택시를 타고 버스가 대기중인 자유의 다리까지 오니 가로등 불빛이 벌써 밤을 안고있어 우리는 3000m의 자유의 다리를 건너 예슬로시의 Hotel
Sant Ambrogio 에 짐을 풀고 우식이, 병현이, 용자씨 등과 소주를 마시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하고....
베니스에서 약4시간의 소요로 피렌체에 도착하여 두오모 성당과 시뇨리오 광장을 관광하고.
피렌체의 상징 두오모는 강력했던 피렌체공국의 종교적 중심지로 산타마리아 델피오레 즉 “꽃의 성모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1296년에 시작하여 170여년 만에 완성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으로 114m 높이의 내부에는 베네디토 마이아노의 십자가, 2개의 대규모 기마천상화, 로비아의 채색도판으로 만든 아름다운 부조가있다.
둥근 컵을 뒤집어 놓은듯한 원형의 지붕인 쿠폴라에 그려진 바사리의 프레스코화 창세기. 최후의 심판이 먼저 눈에 띄고. 본당 뒤에는 미켈란젤로의“피에타”가 있다.
세레당의 황금문은 일명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데 황금문 제작기간만도 27년이 걸렸단다.
성서의 창세기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청동문은 그 위에다 세월의 소요는 전혀 감안하지 않고 단지 명작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가 오늘날 이탈리아의 온갖 유적을 낳게된 근원인듯하다. 우리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세계의 인터넷 최강국을 탄생시켰다고치면 이탈리아에서는 세기의 걸작을 만들기위해선 세월이 오래 기다려야한다.
464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피렌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관망만 하고 시뇨리아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굉장히 넓은 시뇨리아광장은 도시의 구심점으로 토론을 벌이거나 거수로 정사(政事)를 결정하던곳이며, 많은 조각 가운데 잘생긴 미켈란젤로의 꽃미남“다비드”와 울끈불끈한 힘의 장사 “헤라클레스”가 나란히 서있으나 동상마다 세월의 풍진이 진하게 엉켜 추하다
시뇨리아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단테의 생가가 있다.
1215년부터 피렌체의 정치사는 두 정당의 격열한 내전으로 로마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피정당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리니 정당의 투쟁이 수년간 계속되어 구엘피정당을 지지하던 단테는 1289년 칼팔디노 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적수인 기벨리니정당이 유배형을 선고해 1302년 영원히 피렌체를 떠나야 했다.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피렌체는 예술의 황금기를 맞게되어 위대한 시인 단테를 추방한 것을 후회하고 단테의 무덤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웃한 상대국이 거절하여 국가차원에서 단테의 생가를 복원하고 생가안에 임시무덤을 만들어 위대한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 것을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4시간을 달려서 로마에 도착. 로마의 Tob Ruk Hotel 에 짐을 풀고....
아침 일찍 이탈리아 남부 폼페이 유적지를 향해 버스는 신나게 달렸다.
폼페이는 로마만큼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고대 이탈리아 민족의 일족인 오스코족에의해 기원전 8세기에 도시가 세워지고 폼페이라 이름지어졌단다.
내륙과 바다를 끼고있는 폼페이는 주변 강국이 노린 육로와 해로의 요지로서 그 풍광이 멋진 곳이다. 기원전 525년 ~ 474년간 50여년간 한창 팽창하다가 에투루스코족에 정복되고, 그후 산니타족에 다시 정복당한다.
그후 기원전 310년에 결국 로마인들에게 패배당해 로마로 흡수된다.
마찻길은 야광으로 되어 있을 정도이고, 인도와 마찻길이 구분되어 있는 인류최초의 계획도시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수난을 겪는 동안 정복자들은 이곳에 자기네 민족의 풍속과 예술을 폼페이에 이식시켜 화려한 발자취를 조성해오다 결국 서기 79년 8월24일 정오가 조금지난 시간에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눈 깜짝할 사이에 태양을 뒤덮는 어마어마한 검은 연기와 재가 3일간 계속되면서 두께 5~7m의 화산 재와 유황가스가 도시를 삼켜,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그 당시 27,000여명의 인구의 10%는 사망하고 90%는 탈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후 그 무서운 저주가 두려워손을 대지 못하다가 1600여년이 흐른 1748년부터 발굴이 시작 되었으니 건물의 지붕은 거의 원형대로 발굴돼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린 상태였다.
이곳에 이미 아름답게 개선문을 만들었는가하면 마차도엔 과속방지턱이 있고, 물이 귀한 것을 대비 지붕낙수물을 받아 사용하는 형태도 발견돼었으며, 수도를 설치하여 부유층은 수돗물을 음용했으며, 공창. 극장. 약국. 간이주점. 빵굽는집. 대중목욕탕 등 현재 우리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도시였다.
발굴을 시작한지 300년이 가까워 옴에도 전체면적의 3/4 만 발굴한 상태라니 아직도 신비감이 그대로 묻혀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삶을 사는 내 자신이 1세기 당시 즉 20세기전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은 나만의 감회는 아닐성 싶다.
자연 앞에 서건 역사앞에 서건 인간도 하나의 티끌에 불과하다는 순리를 알게하는 곳이다.
.... 마리나 문. 제우스 신전. 티베리오 개선문. 마첼룸시장. 라리신전. 둠비리관청. 수도관.
법관사무실. 아폴로신전. 바실리카. 스타비아목욕탕. 아본단자대로.개인주택. 요정의 음화. 검투사들의 경기장을 둘러보고.실내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대부터 음악이나 무언극공연을 위해 마련된 실내극장. 기원전 80년에 두 집정관 C.구인티우스 발구스와 M. 포르치우스에 의해 지어졌다.
계단층의 상층과 중간층은 총체적으로 17개의 음회암으로 만든 큰계단이고 왼쪽 맨아래 다섯 개의 돌계단에는 폼페이 유력자들이 근접해서 구경하게 한자리,지금과 견주지면 vip석이다. 맨 윗부분에 남아있는 고리같은 것은 비나 햇빛을 피할수있게 천막을 친 것으로 건축되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폼패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나폴리로 향했다. 기차는 우리나라의 전철과 같으나 낡고 지저분했다. 많이 덩컹거리고 창문도 부서진 상태로 운행을 하고 있으며 철길 주변의 안전망 장치도 크게 허술했다. 그러나 기차를 이용하는 시민들은 국제적으로 다양한 국적이고, 젊은이들은 천진 난만하고 자유 분망했다. 간단한 키스는 예사다.
나폴리는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오데 자네이로“와 함께 3대 미항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네아폴리스“라불리며 휴양지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미항(美港)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나폴리를 방문하면 실망할 것이다. 역을 나서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무질서한 교통, 시끄러운 소음, 거리에 딩구는 쓰레기, 좁은골목길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빨래, 무허가 건물등등 우리를 너무 곤혹스럽게 만들고 지저분한 옥상을 보면서 생활수준을 짐작할 것 같았다. 우리는 1279년에 앙주가문의 샤를이 프랑스풍의 4개의 탑이있는 거대하게 건축된 남성다운성 누오보성과 나폴리만의 중앙에있는 오보성. 나폴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멀리서 조망하면서 쏘렌토로 향했다.
내가 만난 나폴리는 화려한것도 놀랄 것도 없고 낙후되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라는 노래로 잘알려져있는 항구도시로, 절벽만 남은 위에 가지런히 들어선 해안 휴양도시. 그 옛적에 미국으로 이민간 혈연이나 친구나 애인이나 그러한 사람들이 이미 애절함을 달랬다는 슬픈역사를 간직한 애절했던 언덕이 높다. 중심지인 타쏘광장 주변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며 전망대에서는 푸른 바다와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어우러져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카프리섬은 쏘렌토에서 32km 떨어져 있고 1시간이 소요되며 비용은120유로 선택사양이다.
우리는 돌아오라 쏘렌토로의 노래를 들어며 카프리섬으로 달린다.
쏘렌토항에서 1시간쯤 달리면 카프리섬에 도착한다.
바다가운데 그림같이 솟은 아름다운 자그마한 섬이다.
지중해의 물빛이 이런것인가 할 정도로 물빛이 곱다.
관광버스나 택시로 꼬불꼬불 벼랑길을 따라 달팽이 껍질모양으로 돌아 오르면 아찔한 절벽밑에 바다가 있다.
촬스황태자와 다이애나황태자비가 신혼여행을 간곳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섬이다.
카프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자연과 예쁜 집들이 어우러져 보는이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언덕.절벽.올리브농장. 포도원과 정원의 테라스. 앞에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지중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저 멀리 나폴리와 베수비오 화산이 어렴풋이 보이고 패리와 고속정이 움직이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섬 동쪽에는 카프리섬에서 가장큰 마을 카프리타운이 있는데 패리와 고속정이 도착하는
마리나 그랑데 항구에서 타운 중심부까지 오르막으로 되어있다.
아주좁은 절벽길을 버스나 택시를 타고 꼬불꼬불 올라가면 해발 299m로 가파른 언덕인
아나카프리 정상에 올라가기위한 리프트를 타는곳이 있다.
리프트는 1인용으로 10여분 정도 올라가는데 그동안에 아름다운 바다와 동화같은 집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카프리섬의 심장이자 사교의 중심지는 유명한 움베르토 1세 광장이다. 이 광장의 규모는 작은 정원에 불과할정도로 손바닥만하지만 고대 카프리섬에 마을이 형성된 기원을 증명하는 기원전 6~5세기의 담벽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광장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아름다운 시계탑이 유명하다.
카프리섬은 토속적인 정취를 진하게 느낄수있지만 세계부호들과 유명인들이 선호하는 최고급 관광지답게 최신유행과 사치가 공존하는 곳이다.
칸노네 전망대, 체르토자 수도원, 3개의 파랄리오니 기암절벽은 카프리의 상징이다.
티베리오 산 위에 남아있는 빌라 요비스의 잔해는 고대 로마의 티베리오 황제가 카프리섬에 건립한 여름 별장이며 황제의 동상이 세월의 풍진에 진하게 엉켜 심하게 얼룩져 외로이 서 있다. 일행들은 황제의 동상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찍고 갖고온 음식들을 맛있게 나누어 먹고 있다. 우린 카프리섬을 뒤로하고 쏘렌토로. 로마로 달렸다. 여행은 항상 달리면서 이루어 지는 것 같다. 우린 열심히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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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가면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유명한 말이 생각날 것이다. 로마제국의 찬란한 역사와 르네상스의 화려한 꽃을 피운 곳으로 쥴리어스 시저. 아우구스투스왕의 전성기를 보는듯하다.
오늘은 바티칸 박물관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바티칸은 세계의 관광객이 아침 일찍부터 장사진을 이뤄 줄을 몇 시간씩 서서 입장하는
것이 예사 일 이란다.
바티칸 박물관과 산피에트로 대성당이 속해있는 바티칸시국은 세계에서 제일 작은 인구 900명의 나라로 카톨릭의 총 본산이자 전 세계 카톨릭 신도의 정신적 구심점인 교황의 본거지다. 무솔리니와의 협약을 거쳐 1929년 2월 교황령에 의해 독립국가가 됐으며,
우체국. 신문사. 라디오 방송국을 자체적으로 운영하며 주 수입원은 박물관 입장료와 기념화폐 및 우표다. 바티칸시국의 경비는 스위스 용병 만 맡을수 있는데, 이 전통은 1506년부터 시작됐다. 현재 100명의 용병이 바티칸을 지키고 있으며 그들의 유니폼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 시국 안에 있는 바티칸 궁전에는 각 시대의 예술품을 소장하고,바티칸의 셀 수없이 많은 갈레리아. 전시실. 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예배당. 정원에는 귀중한 예술품과 진귀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어 바티칸 궁전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볼만하다.
각 시대별로 방대한 규모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박물관에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현재까지 세계 예술사에 발자취를 남긴 유명 예술가의 작품이 모두 전시되어있다.
..기원전 1세기의 고대 로마 전차 조각상. 촛대의 갈레리아. 소크라테스, 소포크레스, 플라톤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조각상. 사지(四肢)가 없는 토르스(기원전1세기 그리스의 아폴로니우스가 조각,미켈란젤로가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굴) 로마황제의 두상과 그리스.로마신상. 부리아시스가 조각한 유명한 제우스의 두상... 네로의 궁전에서 가지고온 엄청난 크기의 대리석 욕조.. 헬레나와 콘스탄자의 석관...죽은지 3일만에 다시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벽화.. 입체처럼 느껴지는 콘스탄티누스의 방의 생생한 천장벽화등등을 관람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 카톨릭의 중심이며 1506년 4월 교황 줄리오2세 때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광장으로 손꼽히는 성 베드로 광장은 그 웅장함에 감탄하며 마치 두 팔을 벌려 전 세계의 인류를 포옹하는듯한 인상을 준다. 광장 중앙에는 그라니토 화강암으로 만든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다. 광장 양쪽에는 분수대가 있고 반원을 그리며 양측에 서있는 웅장한 기둥들은 무한한 창의력이 보이는 걸작중 걸작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 지붕( cupola)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상징이며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피에타”상이란 미켈란젤로가 20세가 채 되기도 전인 1499년에 완성한 걸작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숨진 그리스도가 성모의 팔에 안겨진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형언 할 수 없는 고통이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피에타 예배당에 소장되어 있다.
베드로 성당의 평면도는 하늘에서 보면 열쇠 모양이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의 영상이란다.
인간의 의지나 고행으로 천국을 향할수 있다면 끝없이 기도 해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성 베드로 성과과 접해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시스토 4세의 명으로 1475년에서 1483년 사이에 건축가 조반니 데 돌치가 건립했다. 교황 시스토 4세는 신변 안전을 위해 외부와 단절이 가능하고 단순하고 검소한 건축양식의 교황 전용 성당을 원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 시작하여 1512년에 완공됐는데 푸른바탕색에 금색별이 빛나는 대형벽화다.
관람객이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서 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나가면서 천장 가운데 이르기까지
창세기의 아홉설화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1. 술에 취한 노아. 2. 대홍수. 3. 노아의 제사. 4. 인간의 타락. 5. 이브의 창조. 6. 아담의 창조. 7. 바다와육지의 분리. 8.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 9. 마지막으로 빛과 어둠의 분리 등이고 양쪽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장면과 예언자와 여자 예언자. 그리스도의 조상이 그려져 있다.
첫 네 장면은 대지와 물과 불과 바람을 통해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는 이야기다.
성당을 양쪽으로 갈라 놓았던 격자 바로 위에 있는 다섯 번째의 “ 이브의 창조”에서 이브는 교회를 의미하고, 교회는 앞 입구쪽의 인간의 타락 장면과 뒤쪽의 하나님의 창조권능을 묘사하는 네 그림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상징한다.
이 그림의 목적은 창조주와 교회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일으키는데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회오리 바람속에서 나타나 천둥의 소리로 말씀하시는 무서운 권능의 신이다.
미켈란젤로는 중앙 제단 뒤 벽에 있는 최후의 심판( Giudizio Universale) 벽화를 또다시 23년이란 긴 세월에 완성했다.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무려 391명으로 치밀한 구도와 건축학적인 설계하에 율동적이고 조화롭게 배열되어 공간 배치가 뛰어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세상의 마지막 날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가 최후의 심판을 위해 재림하면 세상이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하느님을 믿는자는 부활하지만 이를 외면한 자는 지옥의 나락에 떨어진다”는 요한 게시록의 극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림에는 391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예수를 중심으로 꼭대기의 천상계. 튜바를 부는 천사. 죽은자의 부활승천.그리고 지옥으로의 추락장면으로 나누어져있다. 최후의 심판 때 벌어질일은 속세의 지위와 아무상관이 었다. 교황의 의전담당관이라도 지옥의 첫 자리에 갈 수 있고 비천한 계급의 흑인 노예도 믿는자는 천국으로 올라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그림속 인물은 모두 나체였으나 1564년 미켈란젤로의 제자 볼테라가 그림속 인물에 옷을 입히는 작업을 했고, 그로인해 그는 “기저귀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게됐다.
항상 명화뒤에는 비판의 소리가 있고 가이드의 비판또한 일리가 있었다.우린 또 성당을 뒤로하고 떠난다.
“로마의 휴일” 영화속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게하는 트레비 분수를 찾았다. 로마의 분수중에 가장 유명한 분수다.
트레비광장으로 오는 길이 세갈래, 즉 3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트레비”를 붙였단다.
이 분수는 1730년경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지시로 만들어 졌으나 이 분수의 물을 공급하는 수로는 2000년 전에 만든것이란다.
공사기간은 1732년 ~ 1762년으로 30년 걸려 완성한 M. 살비 설계작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위에 해신 넵 투누스상이 거대한 조개를 밝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반구형 돔 가운데 남성은 수로건설을 지시하고있는 아그랍파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목마른 병사에게 샘이 솟는곳을 알려주었다는 신비의 처녀를 형상화 했단다...
그리고 이 분수에도 전설이 있다네.
등뒤로 동전을 한 개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수 있고, 두 개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다나????
던질때는 반드시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뒤로 던지란다. 잘못 던지면 허탕이래..
분수의 고인물에 가라앉은 동전은 수거해 불우 이웃돕기에 쓴답니다.
사진이나 영화속에서는 트레비광장이 대단히 큰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행은 동전을 던지는 사람이 없는듯했고 나도 세 개의 전설이 필요없는 것 같아 던지지 못했네. 그러나 분수의 오른쪽에 있는 맛있기로 소문난 젤라떼리아 아이스크림을 병현이 옆지기가 사줘서 맛있게 먹었네. 물론 우식도 나보다 먼저 먹었지....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덕분으로 세계적인 명소가된 스페인광장 위로 바르크 양식의137개의 계단위로 보이는 성심회 소속의 삼위일체 교회와 계단아래의 작은 광장에는 로렌츠 베르니니의 작품인 ”난파선의 분수“가있다. 홍수가 났을 때 배가 이곳까지 떠내려온 것에 착안해서 분수를 만들었다 하는데 사람이 먹는 물이 나오는곳도 있고 동물이 먹는 물도 나오는곳이 따로 있으나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페인광장앞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상점이 몰려있는 콘도티 거리로 명품쇼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항상 복새통을 이룬단다. 우리 일행중에도 명품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돈 많은 분들이 몇분 있었서 항상 쇼핑 시간이 부족 하지만
나야 항상 남는게 시간 뿐이지.
판테온 신전( 일명 萬神展)
외형은 남루한데 내부는 신전답게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 라며 극찬했던 로마 최대의 원형건물로 가장잘 보존되어 있는 고대 건물로서 서기 118~128년경에 세워졌다는데 높이가 43.2m. 벽뚜께 6.2m. 천정에 지름 9m 의 원구가 뚫여 있는데 28열 격상의 모양이 모두 한개의 돌로 이루어져 수수께끼 란다. 그 원구로 빗물이 스며 들어와야 정상인데 내부의 공기가 세차게 치오르는 기류가 생겨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내부로 빗물이 들어오지 않아 신비를 더해주고 있어 서양 건축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단다.
그 내부에는 제우스. 아폴로. 아르테미스. 헤르메스. 등 일곱 지상신을 모신 것을 비롯, 라파엘로등 이탈리아 왕들이 매장된 국가적인 묘소이기도 하다.
내부에는 벽만으로 건물을 지탱하고, 9m 원구로 자연조명이되고, 기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유적지.
콜로세움과 카피톨 언덕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로, 여기서 로마의 사법.정치.종교활동이 활발히 진행됐었던 곳이다.
로마건국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이곳에 처음으로 도시를 세웠던 곳이다.
로마황제 시저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들을 맞이하고 로미시민들이 환호 하던곳.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로물루스신전. 원로원 Curia( 4층 벽돌건물로 카이사르가 전쟁에 승리하고 남긴“왔노라,보았노라,이겼노라 veni, vidi, vici. 말로 유명한곳.)
마메르티노 감옥( 성베드로가 갇혔던 지하감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 세베루스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해 203년에 세워짐) 등등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고 기둥이나 초석만 남아 있는곳이다.
포로 로마노 유적지는 유명한 “시저”가 친한 친구인 브루투스의 칼에 찔러 죽으면서 “ 브루투스. 너마저....” 라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브루투스는 “ 나는 시저를 사랑했다. 그러나,로마를 더 사랑했다” 는 말로 자신을 변호하는 기록이 있다고 전해진다.
진실의 입은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입구 한쪽 벽면에 진실을 심판한다는 입을 가진 얼굴모형의 원형 석판이 있다.
이것은 중세때 로마 하수도 뚜껑으로 추측되고있으나, 관광객들은 의례 이것을 배경으로 입에 손을 넣어 보이며 기념 촬영을 한다. 나도 열심히 기념촬영으로 진실함을 증명했고.
촬영을 끝네고 옆으로 보니 이런 광고가 있네. ...高聲禁止. 소리를 크게 지르지 맙시다...
한자와 한글이다. 한국과 중국 정말 시꺼럽고 몰염치하지. 우리 모두 생각해볼일이다.
대형원형 투기장겸 극장인 콜로세움( Colosseo)
수용인원은 5만명이고 AD 80년에 완공하였다니 벌써 1900년이 넘은 석조건축물이다.
폼페이 도시가 화산에 덮히는 재앙이 AD 79년이니 그 이듬해부터 이곳에서 군중이 모여 그 재앙의 아픔을 잊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공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황제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우스 황제가 착공하여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때 완공하였다. 帝政期 로마 시민들의 글라디아토르(검투사)의 시합. 맹수연기. 인간과 맹수와의 싸움. 대규모 전투장면 실현등을 선보였단다.
직경의 긴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높이는 48m. 아치형문이 80개.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로 설치 되어 있다.
영화 “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콜로세움의 모습과 당시의 갑옷. 검투사의 모습.왕과 서민의 복장을 볼 수 있다.
불과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을 완벽하게지은 로마인의 건축기술이 감탄스럽다. 이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오락은 5세기초 호노리우스 황제가 중지시킬때까지 계속됐다니 호노리우스 황제가 정말 인간다운 황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가족이 죽어면 비극이지만 비천한 노예가 죽는 것을 즐거워하고 한호를 질렀던 로마인들의 잔인성이 대 로마제국을 만든 기틀이 되었나?
콜로세움 옆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서있다. 폼페이의 티베리오 개선문과 흡사하다.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라이벌 막센티우스를 밀비아누스 다리 전투에서 물리친 것을 기념해 315년에 세운 승리의 개선문이다. 높이 21m의 개선문 벽에는 그의 업적과 전쟁장면을 새긴 부조가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길에 로마 건국 신화 발상지 팔레티노 언덕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로마 신화에 따르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 레무스가 성장하여 목동을 데리고 BC753년에 창국했다니 3000년이 가까워오는 유적지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중의 하나란다.
팔레티노 언덕아래 마차경기장이 있다. 여기서 2두.3두. 4두마차가 경기를 했다고 생각하니,
“벤허” 영화의 경기 장면이 떠오른다.
금년( 2008.4.5.)에 84세로 고인이된 영화의 주인공 주다 벤허( 찰톤 헤스톤)의 광채나는 눈동자와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마차의 바퀴가 생생히 떠오른다.
마차 경기장은 길이 664m. 넓이 124m 에 이르고 기록에 의하면 관광객석만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라니, 로마 제국이 이곳에서 말 발굽소리를 내기시작하면서부터 약소국을 짓밟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로마에서 피사로 이동했다. 4시간 정도가 소요된듯하다.
피사는 예술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역사깊은 피사대학과 활발한 문화중심지이자 산업도시다. 푸른 잔디가 곱게 깔린 “기적의 광장”에는 카테드랄레(두오모) 성당과 피사의 사탑으로불리는 종탑과 세레당 및 캄포산토(묘지)가 한 마당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건립 당시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해 원래 계획했던 높이 70m로 세우지 못하고 54.8m로남게 되었고, 몸체는 원통형으로 대리석으로 된 하단에 폐쇄형 아치가 둘러있고 그 위는 좁은 아치를 이루는 아름다운 기둥이 발코니 식으로 6층까지 올라간다.
성당과 사탑에는 니콜리 피노자의 걸작인 페르가모상(1300년대 작품으로 이태리식 고딕양식의 조각상)과 여러 가지 대리석 조각상. 수많은 보물. 청동 샹들리에. 아름다운 세레반(팔각형의 대리석 조각상). 유골함과 무덤 등이 보존되어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갈릴레오는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고 중력실험의 영감을 얻어 이 사탑에서 여러 가지 중력 실험으로 더욱 유명하고, 당시에는 무거운 물체일수록 빨리 떨어진다는 이론이 허구임을 증명했다.
사탑주변에는 많은 관광객이 넘쳐나고 흑인들의 길거리 상행위가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고도로를 따라 많은 길거리 상점들이 즐비하다. 많은 관광객은 기념촬영에 정신이 없고....
혹시나 한글판 안내책가 있나 서성이며 둘러보니 항상 허탕이다.
우린 바쁜 일정으로 사탑의 외관만 보고 기념사진 몇장을 찍고는 밀라노로 열심히 달렸다.
오후 늦게 밀라노에 도착했다.
비옥한 곡창지대 롬바르디아 평원에는 패션과 예술.이태리 최고의 산업도시 밀라노.
밀라노는 깨끗하고 정비되고 모든 건물이 계획적으로 건축되어 부의 냄새가 짙다.
아르마니와 프라다. 베르사체.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등 이타릴아의 명품들이 모여있고,
레오나르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작들.세계적인 오페라극장인 라 스칼라. 두오모로 대표돼는 아름다운 건축물. 열광적인 팬들을 거느린 명문 축구팀(AC밀란.인터밀란) 등은 밀라노의 자랑이고 밀라노를 예술과 산업중심도시로 만든다.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은 길이가157m. 폭92m. 높이 108.5m 건물로 성당으로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크다. 비스콘티의 명령에의해 1386년에 착공하여 1851년에야 500년이 걸려 완공했다. 화려하고 장엄한 외관은 꼭대기의 황금색 성모 마리아. 2천여개의 성인 조각상. 135개의 소첨탑으로 장식되어있다. 늦게 도착하여 성당 내부의 관람은 끝이났고 일행들은 두오모 광장에서 감탄을 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회랑으로 눈길을 돌렸다.
커다란 아치형 회랑으로 200m 길이의 내부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 대형서점. 고급상점들이 있고 지붕이 유리로 덮여있다.
십자가 형태의 건물로 두 회랑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있는 높이 47m의 둥근 천장은 건물의 중심을 잡아준다.
회랑을 빠져 나오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네 명의 제자 조각상이 있는 작은 광장이 있다.
길 건너편에는 유명한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이다. 오페라 가수면 누구라도 한번쯤 공연 해보고싶은 꿈의 무대. 유럽 3대 오페라 극장. 외관만 보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오는길에 유명한 귀족 스포르차 가문의 프렌체스코가 1450년에 요새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감독하에 개축하여 스포르제스코 성을 만들었고, 쾌적한 푸른 녹지 셈피오네 공원과 함게 있어 밀라노 시민들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일행들도 여기 이태리의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고대의 화려한 전통과 유물을 간직하며 현대의 최첨단 패션과 유행을 잘 융합시키고 있는 이탈리아는 유럽 대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장화처럼 뻗어있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다.
로마제국의 찬란한 역사와 르네상스의 화려한 꽃을 피운곳으로 4세기 말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세계 종교로 전파시겼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분열된 국토는 1861년에 통일되고,
1.2차 대전을 겪어면서 승전국과 패전국의 자리에 서게 됐으며 2차대전 뒤에는 자동차공업.패션산업.관광 등으로 경제를 재건했다. 북쪽은 공업과 패션으로 부유했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농업과 어업을 주로 하는 남부는 아직도 가난하다.
이탈리아는 자체 전력이 30%정도 돼고 나머지는 스위스에서 계약으로 사용하고있어 도시의 밤은 항상 어둡고 칙칙하다. 호텔이나 건물이 모두 200년이상으로 시설이 낡고 엘러베이트가 없거나 적고 사용이 불편한게 많다.
물은 석회석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오래 음용하면 몸이 붓고 비대해지고, 그 처방법으로 그들은 와인과 올리브유를 많이 먹는다. 이탈리아 나무(木)도 보면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우산소나무. 등으로 석회석 토양에 잘 자라는 것이 주류다.
국토 면적을 보면 301.2평방키로로 한반도의 1.4 배 돼고 산과 구릉이 많고 평야는 5/1밖에 안된다.
밀라노에서 4시간 소요로 인터라켄으로 출발했다.
밀라노를지나 스위스접경으로 접어든 순간부터 날씨가 흐리기 시작했어 종종 비가 내리고 안개가 우리의 시야를 가렸다.
리무진 차창 넘어로 스위스의 호수 주변은 날씨 탓에 선명하지 않은게 흠이었으나 아름다운산. 수많은 맑은 호수. 그 주변의 고풍스럽거나 자연의 풍요를 닮은 하나같이 멋진 가옥들. 이 모두가 나혼자 보기엔 참으로 부러운 모습들이다.
스위스의 도로곳곳에는 터널들이 참으로 많았다. 세계에서 제일 긴터널은23km로 이탈리아에 있으나 17km의 타르도 터널 10km 이상되는 터널이 스위스에는 수없이 많단다.
“베른의건너편”이라는 뜻을 가진 베러너오버란트 지방의 중심도시 인터라켄은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 양쪽에 툰호수와 브리엔츠 호수가 있는 인터라켄은 해발 567m에 위치해 여름에도 선선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우리는 인터라켄 도시에있는 “강촌”이라는 한식식당을 찾았다.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곰탕맛이 정말 한국맛 그대로다.
인정스레 덤으로 내놓는 밥이며 김치가 고향스러웠다. 배부르게 먹고 싶었지만 가이드가 고산증세가 있으니 식사를 적당히 하란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융프라우행 기차를 타고 달린다.
차창밖 초원과 풀 뜯는 가축들.아름다운 집.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모두가 아름다운 예술이다. 한참을 달리니 폭포수가 휘날리며 떨어지는 슈타트바흐 폭포를보고 와!~ 모두가 감탄의 함성을 지른다. 몇몇은 카메라에. 또 몇은 캠코드에 담너라 분주하다.
기차가 능선을 돌때마다 터지는 함성은 정상에 오를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럽의 최고봉인 스위스 융프라우행 중간기착역. 융프라우 정상은 해발 3454m로 중간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타이거.뮌히. 융프라우 등을 알프스3봉이라 한다.
최고지점 중간중간에 열차교차역겸 전망대가 있고, 종착역에는 레스토랑도 있다.
우리 일행은 물론 나도 친구 우식이와 한국 컵라면을 사 먹었다. 정상에서 먹는 라면맛이 일품이다. 기차 레일은 고산지대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3개 레일중 가운데 레일은 톱니바퀴로 되어 있다. 마치 천상으로 치닫는 이 철도는 아돌프 가이제가 설계했고 16년이나 걸려 완공했단다.
기차를 타고 오르긴 했으도 정상엔 산소가 부족하다며 주의를 요구했다. 저마다 무기력하고 머리가 무거워지고 구역질을 하는 증상들이 있었다.
우리 일행중 한분이 고산증세가 심하여 구토도하고 열차안에서 대변을 실례하는 일이 있어, 객차안 관광객이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소동이 있었고, 평생 좋은 추억 거리를 만들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설경을 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만년설을 밟으며 사진 찍기가 바쁘다.
부부끼리 친구끼리 모두가 멋진 폼을 잡으며 기념촬영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만년설위에 딩굴고 있다.
“따온글”
이곳의 철도를 설치한 내력은 이렇단다.
취리히 출신 철도기술자 아돌프 가이제 첼러( Adolp.G.Zeller)가 융프라우 정상까지 철도를 놓겠다고 제기 했으나, 정부로부터 비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되었으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0년만인 1893년 6월에 라우터브루넨 ~ 그린델발트를 잇는 벤겐알프철도를 개통했다. 이어 그는 고소노동에 대한 의학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아이거와 뮌히 사이의 산속을 뚫어, 융프라우로 가는 대역사에 착공하여 2년후 지금의 아이거글레처역(해발 2320m)까지 철도를 부설했고. 그리고 1899년 3월 아이거 내부 깊숙이 파 들어가 아이거 반트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아이거 반트역까지 진출한지 한달도 되지 못해 애석하게도 공사 총 책임자 첼러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지하등산 철도공사는 계속이어져 4년후인 1903년 이거반트역(해발2865m)까지 열차가 운행되게에 이러렀고. 1905년 7월 최초의 관광단이 아이스 메르(해발 3159m)까지 도달 할수 있었다 한다. 그후 공사는 현재고도인 융프라우요흐까지 진행되고 마무리 지어졌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파업이 수시로 있었고, 30,000kg이 넘는 다이나마이트 상자가 폭발하는 대 참사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니 신기하다.
이러한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인간은 기계의힘. 다이너마이트의힘을 입어 뮌히 산속을 뚫고 마침내 1912년 2월 융프라우요흐까지 진출했고. 그해 8월에 16년이라는 기나긴 공사를 마무리 했다. 해발 3454m 유럽에서 가장높은 산간 기차역을 개통하게 된 것이다.
당초는 4000m가 넘는 융프라우요흐 정상까지 철도를 부설할 계획이었으나, 1차 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융프라우요흐에서 종지부를 찍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한다.
인간의 지혜로 불가능해보이는것도 가능으로 바꿔 놓음으로서 나 같은 멍충이도 알프스 융프라우요흐까지 갈수 있었다.
인터라켄의 호텔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 도시락을 받고 버스에 올랐다.
프랑스의 동부 뮐루즈역까지 1시간 30분을 열심히 달렸다. 모두 취침이다.
차창밖은 어둠의 적막이 흐른다. ....
뮐루즈역에 도착, 잠결에 기상소리와 함께 하차, 여행가방 챙기려 분산하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로 기차역이 보인다. 이른 새벽이라 이동하는 사람들이 한산했다.
역 대합실에 쌍쌍이 모여 앉아 아침 도시락을 먹는사람, 역 실내를 두리번 거리며 서성이는 사람, 여기저기 다니며 안내 팜프렜을 챙기는 사람 등등 한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우린 프랑스 T.G.V를 탑승하는줄 알고 흥분했으나 조금 후에 우린 실망했네.
TIR 우라나라로 치면 새마을 열차를 타는게 아닌가. 돈 적게주고 온 여행이라 푸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랬네.
차창밖 프랑스 동부의 농촌은 온통 초지 뿐이였다.
더 넓은 초지위에 가축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놀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어릴 때 의 시골 소들은 항상 논.밭을 갈고 마차를 끄는일로 쉴 틈이 없었지....
파리에 도착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고대.중세.근대.현대.그리고 미래의 문화가 함께 숨쉬는 곳이다.
파리는 유럽 최대의 도시권 가운데 하나로서 2000여년전 세느강의 시테섬에 세워졌다.
세느강은 파리시의 한 가운데를 흐르며 시를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고, 북쪽은 상업이 성하고 남쪽은 소르본대학등 교육기관이 많아 문화활동이 활발하다.
지난 몇 백년간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도시가운데 하나였으며, 현재도
세계의 예술 패션 유행 등을 선도하는 주요한 도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파리를 “예술의 도시” “패션의 도시” “빛의 도시” 낭만과 고독이 함께 숨쉬는 도시“ ”꿈과 사랑의 도시“ 등으로 부르고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최대의 관광도시다. 파리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서울의1/5 정도로 추정, 가로9km.세로 12km)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파리는 밤이 더 아름답다.
연인들이 밤새워 애기를 나누는 세느강변, 상젤리제거리의 화려한 불빛 등이 파리의 꿈과 낭만을 보여준다. 파리는 유럽에서도 숲이 가장 많이 우거져있는 도시중 하나로서 , 현대식 빌딩사이로 수많은 정원과 공원등 녹지대가 조성돼있고, 무수히 많은 역사적인 건축물. 기념물. 박물관. 초현대적인 패션 및 예술이 있다.
우리는 먼저 파리시 외곽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관광을 떠났다.
베르사유궁전은 1624년 루이 13세가 지금의 베르사유궁전터에 사냥을 하다 쉴 수 있는 작은 별장을 지었다. 그뒤 루이 14세가 자신의 절대 권력을 대변하고자 천재적인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와 건축가 루이 르보. 당대의 최고 실내 장식가. 예술가. 3만명 이상의 노동력을 동원. 엄청난 비용과 50년이란 긴 시간을 투자한 끝에 왕궁면적 2만여평. 방의개수 700개. 정원총면적 2400만평(현재는 250만평) 유럽 최고의 궁전을 완성했고, 107년간 여기서 머물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과 왕실 가족들이 파리로 간 다음에 여러 왕들이 이곳의 활용을 고심하다 루이 필리프 시대에 박물관으로 활용 할 것을 결정.
박물관 건물 입구 검열대를 통과하면 바로 왕실의 성당이 있다.
왕실의성당 천정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그리고 신의 영광을 알리는 천정화가 있으며, 왕자들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다음 방이 헤라클레스의 방이다.
대 연회장소로 쓰였으며 미사 장소로도 사용되고 천정에는 신의 대열에 들어 가있는 헤라클레스가 있고 정면 벽에는 베니스공화국이 루이 14세 에게 선물한 “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이란 작품이 있다.
다음이 왕의 방들로 매주 월.수.목에 있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는데....
풍요의방. 비너스의 방. 다이아나의 방. 마르스의 방. 머큐리의 방. 아폴로의 방. 전쟁의 방 들이 있고, 각 방마다 왕들의 초상화. 루이14세의 조각상. 왕의 침실. 당구대. 왕들의 흉상.등등이 진열되어 있다.
다음이 거울의 방이다.
건축가 망사르의 설계로 길이 73m. 넓이 10.5m. 높이 12.3m 의 거대한 회랑이다.
루이 14세 초기 친정(1661~1678) 17년을 상징하는 17개의 대형거울과 서쪽을 향한 17개의 창문을 통해 바라볼수 있는 대 정원과 대 운하. 그리고 천정화와 멋진 내부장식들.
다음이 왕비들의 방이다.
평화의 방. 왕비의 방. 귀족의 방. 부속실. 왕비의 경호실. 대관식의 방이 있고, 각 방마다 공주들을 위해 만든 그림. 대형 병풍. 천정에는 왕비의 덕목(자비.풍요.정숙.신중)을 상징하는 그림. 루이15세의 딸들의 초상화. 다비드의 그림 “나폴레옹의 대관식”. 독수리기수여.
뮈라장군의 이집트원정. 등 많은 실내 장식이 있다.
마지막 방이 전쟁의 갤러리이다.
프랑스 전쟁사를 그리고 있고. 흉상들은 대원수급이상과 왕실의 혈통을 가진 장군의 모습이다. 496년의 똘비악 전투부터 백년전쟁. 잔다르크. 미국독립전쟁. 나폴레옹의 승전 등다.
궁전 뒤편이 정원과 숲이다.
태양 왕 루이 14세에 의해 정원사 르 노트르가 설계한 이 정원은 당초는 2400만평. 현재는 250만평의 숲과 정원이다.
아름다운 조각 분수들과 기히학적 조경의 잔디밭. 거대한 운하 끝으로 이어지는 대 정원은 서쪽을 향해 무한하고 심오함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일행 중 일부는 선택관광으로 50유로에 야간 에펠탑과 세느강유람선 관광을 했다.
저녁 식사후 우리는 에펠탑을 광장에서 구경하고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서 1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파리 세느강변에 우뚝 솟은 철탑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박람회를 계획하면서 이에 적합한 기념물의 설계안을 공모했다.
100여점의 설계안이 제출되었으나, 100주년 기념위원회는 유명한 교랑 기술자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를 채택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189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세워진 파리의 상징인 건축물. 높이 320.75m. 총무게 9,700t.탑을 세울 당시는 불만과 반대가 많았으나 완성후에는 세계인들이 떠올리는 명소다.
우리는 한번에 50명정도 탑승하는 유압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에펠탑에 올랐다.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고 유명한 건물들을 둘러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개선문과 상제레제거리의 건물들. 우뚝솟은 몽빠르나스 타워.육군사관학교. 샤이오궁. 라디오 프랑스방송국. 미라보다리. 샤이오궁과 에펠탑을 연결하는 이에나교. 샹드막스 정원등 큰 건물은 보이나 조명이 어두워서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정각 8시.9시.10시에 에펠탑에 파란색 조명이 5분간 비친다. 노란색 조명이었으나 8월부터 10월까지 프랑스 대통령이 EU 위원장이된 것을 축하하기위해서 일시적으로 파란색 조명을 한다는데 관광객의 반응이 좋아 연장할지 모른단다...
에펠탑에서 알마다리를 건너 세느강의 야간 유람선 관광을 위해 선착장 꽁페랑스항구로
갔다. 선착장에는 많은 관광객이 붐비고 벌써 크루즈호에는 만원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불빛과 증기기관 돌아가는소리로 요란하고 초 만원(약500명)의 관광객의 잡담과 웃음소리. 일행찾는 고함소리. 강언덕의 환호하는휘파람소리. 다른 크루즈호의 관광객함성소리등 정신이 없다.
크루즈 관광선은 강위쪽으로는 “자유의 여신상”을 돌아 아래로 “일셍루이섬”을 돌아 오는 1시간 코스다. 크루즈호는 2층이며 자체 불빛으로 세느강 주변과 건물을 조명하고 있어
낮 처럼 밝아 사진 촬영에는 적격이다. 출발하면 바로 알마다리 아래로 거처 개선문. 에펠탑과 사이오 팔레가 보이고 라디오 방송국을 지나. 자유의 여신상을 돌아 알마다리.
엥발리드. 알렉산드르다리.부르봉팔레. 꽁꼬르드광장. 레지옹도뇌르. 오르세이 박물관.
루브르박물관. 까루셀다리. 국립미술학교. 프랑스 학사원. 뽕뇌프언덕.재판소. 조폐국.
시청. 라꽁시에르쥬리. 노트르담사원. 뽕루이 필립다리. 뽕마리다리.센스궁. 일셍루이섬을
돌아 올라온다. 유람선을 운영하는 바또무슈(Bateaux Mouches) 회사는 1949년에
장브뤼셀에 의해 탄생되었다.
기발하고 창조적이었던 장브르셀은 2차 대전의 종말은 여행, 여가선용 또는 국제적교류에 새로운 문화의 장이 열릴 것을 예상하고, 그는 1900년 만국박람회에 전시되었던 최후의 증기선중의 한척을 구입해, 바또무슈 설립자라는 명칭하에 장세바스티엥무슈라는 가상인물을 주인공으로 홍보작업을 벌임으로써 오늘날 세느강에서 가장 유명한 크루즈회사인 바또무슈회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14척의 크루즈 배가 있다.
우리 일행은 밤 10시가 지나서 숙소로 돌아와 모두 단잠에 빠졌다.
파리 개선문
파리 꽁꼬드광장에서 2.2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즉 상젤리제거리 끝에 우뚝 선 개선문은 높이 50m의 건축물이다.
1805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물리친 오스테리츠 전투를 기념하여 나폴레옹의 명으로 1806년에 공사가 시작, 1809년에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고,
1815년 나폴레옹시대가 끝나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30년이 흐른 1836년 루이필립 시대에 완성했다.
공사를 명한 나폴레옹은 1821년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생전에 개선문의 완성을 보지못한셈이다.
개선문 벽면에는 프랑스 혁명시기부터 나폴레옹 1세때까지 128번의 전쟁에 참전 했던
총 558명의 장군이름이며 전사한 장군 이름 아래는 검은 줄을 거으 놓았으며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이 중앙 아치 밑에 묻혀있고, 개선문에는 나폴레옹 1세의 공적을 기념하는 총 10개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의병들의 모습과 출정하는 의병들의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개선문이 있는 광장은 문을 중심으로 별모양의 12개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있고 12개의 도로에는 대부분 참던했던 장군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한다. 일명 “엘투알광장”“샤롤 드골 광장”으로 부르기도 한다네. 우리나라의 어느 공원이름처럼....
꽁꼬르드광장과 샹제리제거리
꽁꼬르드 광장엔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다.
광장은 1757년~1779년(22년간) 쟉크 앙주 가브리엘의 설계로 건축되어 루이 15세에게 바쳐졌는데, 프랑스 혁명(1789년) 당시 이곳에 단두대가 설치되어 1,3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장소이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어면서 민심이 피폐해져 혁명이 일으났고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루이 16세는 이곳으로 끌려나와 왕비와 함께 목이 잘렸다.
광장 우측에는 앵벌리드 전쟁기념관이 있고 가로등과 기념물등에 곳곳에 금박을 장식해 한층 고급스럽다. 광장 가운데 오벨리스크(obelisk)는 이짚트 테베 강변의 람세스2세 신전에서 가져 온것이고(아마 약탈해왔을 것이다.) 무려 3,200년이 지났으며 높이가 23m나 되는 분홍색 화강암이다.
그 옆으로 “대양의 분수”가 물을 뿜고 있고 샹제리제거리는 2.2km의 대로이고 양쪽에는 유명한 건물이 즐비하며, 서점.식당. 카페.기념픔가게.오락실등이 있고, 그리스 신화에서 낙원이라는 의미의 엘리제를 따서 샹젤리제( 엘리지의 들판)라는 뜻이고 꽁꼬르드는 화합이란 뜻이다.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게 되면 필수코스중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이다.
일반적으로 세계 3대 박물관을 들라면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러시아의 “에르 미 따쉬 박물관”을 꼽는데. 예술품의 규모는 루브르가 40만점으로 단연 세계최대이다. 본래는 1190년 필리프 오귀스트왕이 바이킹으로부터 파리를 지키기위해 요새로 건설했는데 샤롤5세가 궁전으로 개조하고, 역대 프랑스국왕들, 특히 프랑수아 1세.루이 13세. 루이 14세 등이 수집해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 이중 일부는 부채대신 받은 작품이고 나머지 태반은 나폴레옹이 원정국에서 약탈한 예술품이다.)이 소장되어 있는데, 프랑스 혁명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하므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의 대 미술관이 이루어졌다.
루브르박물관의 4대 소장픔은 1.노예상(미켈란젤로작) 2.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 3. 승리의 여신 (목짤린 여인상 : 일명 니케상 )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케섬에서 1863년에 출토된,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리며 배위에 내려않는 당당한 여신의 모습 .
4. 밀로의 비너스. 이고 유리 피라밋은 루브르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Ground Floor 에 입장하면 죽어가는 노예상. 프시케와 큐피드. 부부의 석관. 밀로의 비너스.람세스2세 좌상. 함무라비 법전.1층Floor에는 메두사의 뗏목.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모나리자. 그랑 오달리스크. 나폴레옹황제의 대관식.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날개.서기좌상들. 2층 Floor 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 가브리엘자매. 뒤러의 자화상.피에로. 터키욕탕.
로마제국시대의 “웅크린 아프로디테의 조각상”.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름답고 쇠약한 남성과 여성으로 결합된 “잠든 양성구유”조각상. 13세기의 목판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수난상.등 13세기부터 19세기 까지 그림과 조각상들이 세기별로 진열되어있다.
전시실은 크게 리슐리와관. 쉴리관. 드농관으로 나뉘어있고 4개층으로 이루져있으며 4개층은 다시 220개의 작은 전시실로 나눈다.
리슐리와.쉴리.드농은 과연 누구인가? 책자의 내용을 빌리면:
리슐리와는 루이13세때, 쉴리는 앙리4세때 재상이었고, 루브르의 증축을 선두 지휘했던 사람이며 또 리슐리와는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기도합니다. 드농은 루브르의 초대 관장으로 나폴레옹시대의 사람이며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다닐 때 그를 따라다니며 이집트의 문화재를 파리로 옮겨오는 일을했는데, 이로써 루브르는 세계최고의 이집트 컬렉션을 자랑하는 박물관이 될수 있었답니다.
루브르박물관의 수많은 조각.회화.판화.고대미술 등 총7개 부문의 전시품을 다 보려면 대략 60km를 걸어야 할정도로 오랜시간이 걸린다니, 우린 가이드의 주요한 작품들만 설명듣고 1시간 가량 관람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 언덕은 예술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갈망했던 화가.시인등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곳으로 해발 130m의 나지막한 언덕이다. 지금도 고흐나 파카소.위트릴로 같은 예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화가들이 관광객을 잡고 즉석 인물을 그려주고 주변 건물들을 스케치해주면서 돈을받고있는 정경들이 파리 예술의 낭만과 감성을 느끼게 해준다. 다른 한쪽은 카바레 물랭루즈와 수많은 술집. 클럽들이 늘어져있어 환락가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흰색 외관이 이국적인 사크레쾨르 사원은 파리의 다른 성당들과는 달리 로마 비쟌틴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다.
1870년 보불 전쟁의 패배로 암울했던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기위한 시책으로 가톨릭교도를 위해 세워졌으며, 40년이란 오랜세월에 걸쳐 지어졌다.
사원 앞에 서면 높은곳에 있기 때문에 탁 트인 파리 시내의 전망을 감상할수 있고 내부에는 비잔틴 양식의 그리스도 천장 모자이크 가 눈길을 끄다.
사원으로 올라오는 계단에는 흑인들이나 상인들이 물건을 팔려고 귀찮을 정도로 따라 붙고 색색깔 실로 손목에 장식을 하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면서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또 계단 옆 받침대 위에는 사람이 하얀소복을 입고 얼굴도 하얗게 칠을해서 꼭 마네킹처럼 서서 걸인 행세를 하는이도 있다.
걸인에게 내가 1유로를 주니 받침대위에서 고맙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재미나는 흉내를 약 5분간 무성(無聲)으로 해주고 고맙다는 인사가 깎듯했다.
우리 일행들은 걸인의 웃음을 뒤로하고 파리의 유명한 프랭탕 백화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프랭탕 백화점은 여성의류와 화장품 코너가 대단했고 파리의 다양한 패셩흐름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나도 손주놈 옷한벌을 사려고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맞는게 없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옷보다 좋을게 없는데 비싸긴 더럽게 비싸네...
그래서 일행중 몇이서는 저럼한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을 보러 백화점 밖으로 나왔으나 우리의 발길을 잡는곳은 없었다.
프랑스를 여행하게되면 의례 맛맛으로 달팽이 요리를 접하게 된다. 그걸 프랑스어로
에스까르고( Escargot) 라 부른다.
푸르스름한 소스는 소금.후추.다진마늘.에샬로트.파슬리등을 향신버터와 섞어서 만든 것으로
달팽이 속을 빼먹은 후엔 접시에 푸릇한 소스가 약간 남게되는데 바케트 빵을 찍어 먹는다. 우리나라 백고등과 비슷한데 프랑스 달팽이는 포도덩굴 위를 즐겨 다니면서 포도덩굴잎을 갉아 먹고 산다. 주로 포도주.삼페인 안주로 먹는다.
달팽이를 먹을 때는 스텐레스로 제작된 요리 도구로 꺼내 먹는다.
내 생전 처음 먹어본 에스까르고는 맛있고 기름지고 담백했다.처음 먹어본 음식으로는 맛이 참으로 좋았다.
우리 일행은 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파리 북쪽에 위치한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가서 영국행 비행기를 타고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는 여행용 가방의 크기를 엄밀하게 따지고 보안 유지가 대단했다.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11시경 도착, 런던으로 달리는 차창밖은 온통 푸른초원 뿐이고
안개로 시야가 흐릿하다.
가이드가 영국은 1년중 200일 이상이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씨로 비를 피하려 달리거나 우산을 쓰는 사람이 없단다.
신사의나라 영국.섬의나라 영국. 한때는 해가 지지않은 대영제국. 산업혁명을 가장먼저 겪은 선진국. 크기는 서울의 2배 반, 인구는 750만명으로 인구 밀도는 서울의 1/3 수준도 안된다. 과거부터 마차가 성행했던 나라라서 도로는 좁고 통행방식은 우리와 반대로 차는 좌측 사람은 우측 통행한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의 직위는 지금도 장자에게만 상속된단다.
시내는 5층 건물이 주류이고 1인당 평균소득이 37,000불이나 되나 아직도 흑백 TV를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검소한 국민이란다.
런던시내로 들어오는길에 거대한 함선 모양의 건물을 지어 분양했으나 변화를 싫어하는 영국인들이라 분양이 안돼 런던의 흉물로로 불리고 있단다.
런던의 관광은 국회의사당. 빅벤. 버킹검궁전. 웨스트민스터사원등을 차에서 설명하고
외관만 보고 잠시 차에서 내려 사진 몇장 찍고는 떠나는 관광이다.
영국의 상징 국회의사당은 빅벤과 주얼타워.빅토리아타워로 이루어져있고 1834년 대화재로 궁전이 타버린뒤 1852년에 다시 완성된 것으로 총면적이 3만3,000입방메타이고 방이1,100개로 북쪽은 하원의사당, 남쪽은 상원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859년에 세워진 95m 높이의 시계탑 빅벤은 13.5t의 거대한 종이 15분 간격으로 국제표준시를 알려주고, 분침의 길이가 4.2m 에 이러는 거대한 시계가 탑의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서쪽에 있는 대 사원이랑 의미이며 대 성당과 같은 뜻이다.
이 사원은 13세기 이후에 영국왕의 무덤( 역대왕 17명이 묻혀있다)이고 대관식장이며
왕가의 결혼식장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외관만 보고 버킹엄 궁전으로 갔다.
버킹엄궁전도 철창밖에서 외관만 보고 광장에 있는 동상 앞에서 사진만 몇장 찍고, 근위병 교대식도 못보고 겨우 근무자 3~4명 정도만 보면서 기념사진 찍기에 바빴다.
가이드 설명으로는 여왕이 궁전에 있을때는 로열 스탠더드 깃발이 내 걸린단다.
궁전 안에는 17만 4000 입방메타에 달하는 넓은 정원과 660개의 방이 있고 내부도 무척 화려하단다.
런던을 상징하는 랜드 마크중하나인 타워 브리지도 멀리 영국의 법원 뒷마당에서만 봐야 했다. 1894년 완성된 이 다리의 총길이는 270m. 대형선박이 지나갈때면 가운데가 83도로 올려지는 개폐교이다. 다리 양쪽에 있는 두 개의 고딕양식 탑은 높이가 60m로 탑안에는 타워 브리지에 관한 사진과 기록들을 전시하고 영상물도 보여 준단다.
템즈강에는 괭장히 큰 군함들도 함포를 장착하고 대기 중이고 수많은 배들이 다니는 곳이다. 템즈 강가에 “런던아이“ 라는 놀이기구 형태의 초대형 관람차가 있었다. 템즈강에서 135m 높이 까지 올라가며 32개의 갭슐이 강위에서 1분에 26m의 속도로 회전하고 30분의 운행 시간동안 런던 곳곳의 명소를 내려다 보는곳이다.
대영 박믈관으로 오는 도중 시내 한가운데 차이나타운이 크게 자리잡고있어 중국의 세계진출이 눈에 띄도록 활발했고 한국의 음식점은 왜 없을까? 생각을 하면서 가이드가 말한 영국에 한국 음식점이 32개 있다는 말을 상기 하면서 위안으로 삼았다.
영국의 택시는 검은 색이고 택시표시가 없고 뿔처럼 표시가 달려 있다네. 지붕은 볼록하게 되어 있어 모자를 쓰고 다니는 영국 신사들을 위한 배려이고 옛날 마차의 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나.?
대영박물관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러시아의 에르 미 따쉬 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 박믈관중의 하나다.
영국을 여행하게 되면 당연히 들리는 코스인데 세계 그 어느 박물관보다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고르게 소장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박물관이 태동하게된 배경은 의사였던 영국의 한스 슬로인 경( 1660~ 1753년)이 서인도제도 근무를 마친후 자메이카의 자연사에 대한 책을 내는등 과학적인 연구에도 전념했는데, 1753년 사망당시 긱물표본과 장서. 79,575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국왕 조지 2세에게 기증, 이를 기초로 동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건립 복권을 판매, 소유권을 의회로 넘겨 1759. 1. 15 현위치에서 최초공개 했다.
여타 박물관과 다른 것은 일반공개한 이래 한번도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는 런던외곽이었으나 지금은 런던 시내가 된 현 위치에 건평 2만평. 진품 700만점을 자랑한다.
이 박물관에는 이슬람세계. 아프리카. 이집트. 중국. 인도. 태평양및호주. 아메리카.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중세유럽. 르네상스 및 현재 유럽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며 좁은 공간이지만 한국 전시실도 있다. 총 94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대부분이 남의 나라것이지만 기증품의 비율이 가장 높다.
이집트 전시실에 보면 이집트 제18왕조 아메노피스 3세의 거대한 석상이 전시되어있고 머리 부분이지만 재질이 적색 화강암이라 특이하고 군데군데 파손된 자국이 보이나 젊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왕관을 쓴 두상이 높이는 거의 3m나 된다. 기원전 1390년경 작품이라니 지금부터 3,400여년 전에 만들어 졌음에도 몇해전에 만든양 생생하다.
또 이집트 제 19왕조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있다.
머리부분이 파손 됐지만 머리엔 뭔가 올리고 수염을 달아 근엄함을 나타냈고 젊고 청순하며 지혜가 빛날듯한 미남형이다. 이집트 19왕조의 3번째 왕으로서 67년간을 통치한 파라오. 통치기간은 전무후무한 번영과 평회를 누렸단다.
한국관에는 청자. 유학자의 초상화. 아미타경의채색사본. 말 모양의 청동띠고리(기원전 1~2세기 철기시대를 대변). 삼국시대의 금 귀걸이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옥의 형태도 있다.
대영박물관의 유물들은 지하부터 2층까지 총 3층에 걸쳐 전시되어있어 3주를 관람해야 다 볼수있으나 우리 일행은 시간관계상 이집트관과 한국관만 관람하고 나왔다.
대영박물관을 끝으로 우리의 유럽여행관광은 끝났다.
우리는 서둘러 히드로 공항으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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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행을 갔다오면 보고 듣고온 기억들이 오래를 가지 못하고 금방 잊어버리기가 일수다.
그래서 훗날 기억을 되 살리고자 여행시에 보고 배운 여러 가지 사실들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서 뒷날의 추억으로 갖고자 함이다.
내가 본 유럽의 여러 가지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내용은 가이드의 설명과 안내 책자등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하여 기록으로 남긴다.
여행기간: 2008년 10월 3일부터 10월 14일까지 12일간
여행지: 독일( 뮌헨. 퓌센).오스트리아(인스부르크). 이탈리아( 베네치아.피렌체.로마.폼페이.나폴리. 쏘렌토.카트리섬.피사.밀라노).스위스(인트라켄. 융프라우요흐). 프랑스(파리). 영국(런던)
첫댓글 훌륭한 여행기 로구만.전에 한번 가 봤던 것들이 떠 올라 다시 한번 가 본 느낌이 들 정도 니까. 그런데 폼페이 유적지에서 천연색 벽화로 된 리얼한 섹스 장면 못 보았는가? 나는 그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데!
카페앨범에 한캇트 올려났음메. 보시고 실습은 마소. ㅡ기억남는것은 길 한가운데 돌위에 갑자기님 크기의 거시기를 조각 해났납니다. 함보시고 비교해보시오?
옆에서 같이 여행했는데도 모르는 사실이 많군요. 처음부터 다시 보는듯한 아주 실감나는 기행문 잘 보았습니다. 쓰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좋은곳 기행문 잘읽엇소 그런데 이런성의가 놀랍구려 그리고 카페앨범에 올린 사진도 잘밨오 감사 또감사
생각나는데로 적다보니 여행담아라기는 좀 어색하네요. 잘 읽어줘서 고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