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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순의 하얀산
부산합동대원들이 짐을 나르던 중 토왕폭 초입에서 잠시 쉬고 있다. [권경업씨 제공]
"정말 이상한 소리였어요. 우리 부산합동대는 당시 초등에 성공한 크로니팀의 박영배씨와 송병민씨가 서로 고립되는 위기 상황이 벌어진 줄 몰랐거든요. 때문에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박씨나 송씨일 거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어요. 오히려 토왕폭이 크로니의 산꾼들에게 처녀를 내주던 광경을 지켜보다 말고 돌아선 에코팀의 투박한 총각들이 내지른 고함인가 했지요."
배종순씨는 토왕골 들목에 있는 비룡폭포 위쪽 베이스캠프에서 하산하는 유기수씨의 에코팀을 만났었다.
"그때 기수형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아무 대꾸도 없더군요. 어디 그 말이 제대로 들리기나 했겠어요. 하지만 다른 후배들은 몹시 흥분해 있더라고요. 그들 가운데 누가 홧김에 지른 고함이 아니었을까요?"
하긴 서로 연결한 자일을 놓쳐버린 박영배씨와 송병민씨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고함을 내질렀겠지만,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비룡폭포까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배종순씨가 추측하는 그 '에코설'도 곧이 들리지는 않았다. 유기수씨는 바위에서 떨어질 때 '앙카'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자신의 추락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이 깨져도 소리치지 않는 바위 같은 유기수씨는 속으로만 노래하는 '침묵의 산꾼'을 대표했다.
"아니! 그럼 누가 그런 소리를 질러댔단 말이오?"
유기수씨의 에코팀에서 낸 소리가 아닐 거라는 내 주장에 배종순씨는 짜증스레 반응했다. 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더 짓궂게 내질렀다.
"그럼, 정말 그런 소리를 듣긴 들은 거요?"
"거참! 박형도 답답하네. 우리가 왜 없는 얘기를 꾸며내겠소. 나뿐만 아니라 그때 비룡폭포 위에 있던 부산합동대의 대원들이 다 들었다니까."
그제야 나도 고백했다.
"사실 권경업씨에게서도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니까. 그럼 그게 사람 목소리가 아니라 혹시 토왕폭이 낸, 토왕의 소리가 아닐까요? 왜 얼음이 얼거나 깨질 때 비명소리를 지르잖아요. 아무튼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해요. 아무래도 다시 들어보러 토왕폭으로 가봐야겠어요."
그렇게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그 토왕폭의 사나이는 그해 겨울 아이거 북벽으로 떠났는데 다시는 토왕골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는 토왕폭에서 줄을 함께 묶었던 자일 파트너 김원겸씨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죽음의 빙벽'으로 불리는 아이거 북벽을 겨울에 완등했으나, 하산길에 악천후를 만나 두 사람 모두 정상 부근 설원에서 탈진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부산합동대의 토왕폭 제2등의 하객인지 그들이 등반을 마친 1977년 1월 25일, 두 명의 산꾼이 토왕골로 찾아 들었다.
그들은 토왕폭을 뚜렷이 볼 수 있는 폭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가 3백m 길이로 드리워진 얼음기둥을 서너 시간 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내려갔다.
마운틴빌라의 도전
부산합동대원들이 짐을 나르던 중 토왕폭 초입에서 잠시 쉬고 있다. [권경업씨 제공]
하산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권경업씨는 그런 상념에 잠겼었다. 권씨의 상념은 그때로부터 정확히 1년 앞을 내다본 통찰이었다.
장경덕 대장이 이끄는 서울고 산악부 OB회인 마운틴빌라의 토왕폭 등반대 9명은 크로니팀이 토왕폭을 초등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월 11일 토왕골로 들어갔다. 한 해 전 권경업씨가 만난 두 산사나이들은 마운틴빌라팀의 정찰대원이었던 것이다.
12일 토왕폭 하단 아래쪽에 베이스를 치고 장경덕.최영규 대원이 오후 4시쯤 등반을 시작해 동대 테라스까지 진출한 후 자일을 고정시켜 놓고 캠프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오전 9시30분 등반을 재개한 두 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 등반을 끝냈다. 놀라운 속도였다.
1월 15일, 전날 상단 80m까지 설치해둔 자일을 타고 최영규.김기환 대원은 오전 8시30분쯤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움직여 오후 4시쯤 1백10m 지점에 세번째 테라스를 깎았다. 이제 위쪽으로 남은 토왕빙벽의 길이는 20여m에 불과했다.
하산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권경업씨는 그런 상념에 잠겼었다. 권씨의 상념은 그때로부터 정확히 1년 앞을 내다본 통찰이었다.
장경덕 대장이 이끄는 서울고 산악부 OB회인 마운틴빌라의 토왕폭 등반대 9명은 크로니팀이 토왕폭을 초등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월 11일 토왕골로 들어갔다. 한 해 전 권경업씨가 만난 두 산사나이들은 마운틴빌라팀의 정찰대원이었던 것이다.
12일 토왕폭 하단 아래쪽에 베이스를 치고 장경덕.최영규 대원이 오후 4시쯤 등반을 시작해 동대 테라스까지 진출한 후 자일을 고정시켜 놓고 캠프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오전 9시30분 등반을 재개한 두 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 등반을 끝냈다. 놀라운 속도였다.
1월 15일, 전날 상단 80m까지 설치해둔 자일을 타고 최영규.김기환 대원은 오전 8시30분쯤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움직여 오후 4시쯤 1백10m 지점에 세번째 테라스를 깎았다. 이제 위쪽으로 남은 토왕빙벽의 길이는 20여m에 불과했다.
최영규 대원 구출기
토왕폭 빙벽 하단부 동대 테라스를 향해 오르고 있는 권경업씨의 뒤에서 김원겸씨가 밧줄을 잡아주고 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장경덕 대장은 때마침 토왕폭 하단을 등반하고 야영 중이던 서울 봔트클럽의 최영국 대원과 마운틴빌라의 이건성.이만영 대원을 데리고 오른쪽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층 가까워진 왼쪽 빙벽에서 새어나오는 김대원의 신음이 구조대원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다.
"경덕이형! 손이 썩어들어가요. 빨리 구해줘요."
다른 대원들은 중단에 파놓은 설동(雪洞) 위쪽까지 나아가 조난당해 토왕의 빙벽에 매달린 김기환.최영규 대원에게 소리쳤다.
"기환이형, 영규형! 나 의근이야. 자지마. 자면 안돼. 손발을 계속 움직여!"
최대원은 혼수상태에 빠져 반응이 없었고, 김대원은 침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한 다음 요구사항을 말했다.
오전 4시30분쯤 장대장은 조난 대원들의 졸음을 쫓아 주려고 서울고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고 조용한 음률의 목소리가 토왕골로 퍼져 나갔다.
"인왕의 억센 바위…."
아래쪽 설동에서도, 빙벽의 최대원도 따라 불렀다. 어둠 속 토왕폭은 그들의 노래 소리로 가득 찼다.
장대장의 눈에서는 별빛을 받은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 별빛으로 반짝이는 눈물을 보는 순간 불가사의한 힘에 휩싸인 장대장은 허리까지 빠지는 눈더미를 헤치며 정신없이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전 7시쯤 정상에 닿은 장대장은 40m짜리 자일 4동을 연결해 먼저 김기환 대원을 끌어올렸다. 4시간 30분 동안의 격렬한 몸놀림 끝에 네 명의 구조대원은 김대원의 얼굴이 토왕폭 상단 설사면 위로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생명의 불꽂이 사그라져가던 그 얼굴을 얼싸안은 토왕폭 사나이들의 눈은 격정으로 이글거렸다.
점심 때쯤 최영규 대원도 구조돼 정상으로 옮겨졌다. 최대원의 왼손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고, 양쪽 발목은 부러져 40도 정도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신발을 벗겨 볼 수도 없었다.
오후의 햇살이 걷히자 기온은 더욱 떨어졌고, 잠잠하던 토왕골은 다시 거센 바람에 휩싸였다.
그날 저녁무렵에야 최대원이 중단 설동까지 무사히 옮겨진 것을 확인한 장대장은 김대원을 부축해 골짜기로 들어섰다.
토왕은 이미 비정한 산으로 변했고, 바람결은 냉혹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 추위도 토왕폭 사나이들을 얼릴 수는 없었다. 오후 10시30분쯤 중단 설동에서 김대원은 먼저 내려온 최대원과 재회했다.
이튿날 에코클럽의 박일환씨, 광주서 올라온 바자울산악회의 토왕폭 정찰대, 동굴사진가 석동일씨 등의 도움으로 하단 아래로 옮겨진 최대원은 곧장 서울 백병원으로 후송됐다. 마운틴빌라 회원인 권철수 정형외과장의 집도로 최대원은 동상 걸린 오른쪽 발가락 모두와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잘라냈다. 마운틴빌라팀의 속도 등반은 그렇게 미완성으로 끝났다.
돈키호테 손칠규
윤대표씨가 1999년 여름 북한산 선인봉 하늘길을 오르고 있다. [사진작가 손재식씨 제공]
손칠규씨는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샀다. 이는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샀다는 것보다도 상식 밖의 일이다.
손씨의 행위는 가계 형편상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살 여유도 없는 사람이나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구입하는 사람, 양쪽 모두를 약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일까. 이웃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가 남기고 간 외제 피아노였기에 그걸 팔아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 등산화와 프랑스제 샤를레 모제 피켈.아이젠 등의 빙벽 등반장비 일체를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외제로만 사서 산으로 간 날 그는 선배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가 외제 빙벽 등반장비로 중무장하고 찾아간 곳은 대구 팔공산이었는데, 선배들은 도대체 얼음도 없는 팔공산에서 그런 장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손칠규씨를 마구 나무랐던 것이다.
손씨는 선배들로부터 맞아 생긴 몸의 상처보다 마음 속에 키우고 있던 토왕폭 등반에 대한 열정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아주 서러웠다. 대구 왕골산악회의 회원으로 발군의 클라이밍 실력을 가졌던 그는 당시 쟁쟁한 산꾼들의 꿈인 토왕폭 초등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꿔치기한 외제 빙벽 등반장비들이 팔공산과는 궁합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손씨는 남들이 들으면 농담이라며 웃고 말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그의 집에는 커다란 과일 저장창고가 있었다. 손씨는 그 창고의 벽을 얼리고, 또 얼음을 쌓아 다양한 형태를 갖춘 빙벽 훈련장을 만들었다.
토왕폭 초등자를 꿈꾸며 그는 매일 창고 속에서 피켈을 휘두르며 얼음을 깨뜨려 놓았다. 그러나 겨울산간학교(한국등산학교의 전신)에서 배운 '피올레 캉'이니 '피올레 라마세'니 하는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연습하기에 빙벽이 너무 가팔랐다. 그래서 이 엉뚱한 사나이는 더욱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젠을 신고 집 마루에서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흉내냈다. 그 바람에 마룻바닥이 온통 울퉁불퉁해졌다. 마루에 엎어져 피켈을 휘두르며 프런트 포인팅까지 연습한 탓에 마루는 곧 부서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토왕폭이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이는 모두 의치(義齒)다. 오토바이 타기와 암벽 등반, 그리고 스킨 스쿠버 다이빙 등 이가 부러질 짓만 골라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고교 때부터 즐긴 오토바이 질주로 이가 모두 부서졌는데, 그 뒤 다이빙을 하다가 물 속 바위에 얼굴을 들이받는 바람에 새로 끼운 앞니가 다시 몽땅 내려앉고 말았다.
손씨의 취미에서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남들은 가질 엄두조차 못 냈던 핫셀 블라드를 '소품으로 쓴다'고 큰 소리쳐 다른 사진쟁이들의 간을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다.
손칠규의 열정
토왕폭 등반을 마친 손칠규씨(左)와 윤대표씨가 기념촬영을 했다.[허욱씨 제공]
손칠규씨는 제대한 뒤 대학시절 전공(작곡)을 살려 포항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땐 사진 찍는 재미로 지낼 만했다고 한다.
시험 시간에 커닝하는 아이들의 표정, 매질하는 어느 여선생의 모습. 봄날 교무실에서 입 벌리고 침 흘리며 잠든 노처녀 수학선생의 표정 등을 카메라에 몰래 잡아 대문짝 만하게 인화해 음악실에 걸어 뒀었다.
그러다가 토요일만 되면 요란한 파열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몰고 대구 근교의 산으로 사라져버리는 이 괴짜 음악선생은 침 흘리며 잠든 여선생의 사진이 화근이 돼 인연없는 교육계를 떠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은 토왕폭이 된, 얼음 창고와 마루에서 토왕폭을 오르기 위한 등반훈련을 거듭했다.
손씨는 1977년 12월 말 설악의 토왕폭으로 정찰등반을 떠났다. 같은 해 1월에 크로니산악회와 부산합동대에 초등과 제2등의 영예를 잇따라 내준 토왕폭이었지만. 손씨는 7년 가까이 키워온 토왕폭 등정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토왕골에 들어가 토왕폭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중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산하게 됐다.
대구의 집으로 가보니 어이없게도 자신의 혼수함이 알지도 못하는 어느 처녀의 집에 가 있었다. 그는 설악에서 바로 내려온 산행 차림으로 배낭을 진 채 그 처녀의 집으로 가서 신랑으로서 인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손씨의 부모는 종손인 그를 대학 재학 시절부터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들이 산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아들이 설악의 토왕골에 들어가 있는 틈을 노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 기습적으로 합의, 이 문제아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은 한라산으로 갔다. 한라산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뒤 신부를 대구 근교의 처가에 맡겨두고 78년 1월 말 곧장 설악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토왕골에는 토왕폭을 함께 오르기로 약속한 악우회의 윤대표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손씨는 집안뿐 아니라 대구 산악계에서도 단단히 찍힌 문제아이자 이단자였다. 짐 잘 지고 밥 많이 먹고 술 또한 잘 마시면 선배들에게서 좋은 후배 나타났다고 귀염받는 분위기 속에서 손씨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데다 남들은 걷기 산행에 열을 올릴 때도 바윗길만 고집했다.
또 그는 이중섭이 그린 바닷게 등짝처럼 생긴 키슬링이라는 대형 배낭 대신 날렵한 외제 배낭을 메고서 외제 신발을 신고 바위만을 쳐다보고 다녔으니 산선배들의 눈 밖에 나는 건 당연했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팔공산 바윗골까지 달려가 암벽 등반을 하는 바람에 산선배들에게서 미움을 톡톡히 샀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첫댓글 이제 좀 귀에 익은 분들이 나오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