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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야산(也山) 이 달(李達․1889~ 1958)은 근세 한국주역사(韓國周易史)에서 특출한 존재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주역을 공부하면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고 간 분이다. 아울러 주역이란 과연 공부할 만한 학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간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위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서구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 분야는 지하 단칸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화려한 고층 빌딩에는 결코 나와본 적이 없다. 비록 지하 단칸방에 파묻혀 있었지만 필자는 야산(也山) 만한 인물은 그리 흔하게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也山, 정밀한 생활주역의 세계
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야산이다. 양자의 경향성을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거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야산은 일상사에서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미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고 보인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미시주역(微視周易)과 거시주역(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쳐다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고, 이야산을 바라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일부는 망원경 주역이고, 야산은 현미경 주역이다. 물론 음양중(陰中陽)이고 양중음(陽中陰)이듯, 망원경 속에 현미경이 포함되어 있고, 현미경 속에 망원경도 있는 법이다.
야산도 민족의 진로와 같은 거시적 전망에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사에 주역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반대중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인물은 일부보다 야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야산이라는 인물에 대한 최초의 정보를 입수한 시기는 5년 전쯤이다. 중국의 선종(禪宗) 사찰들을 답사하면서 건국대 이 준 교수와 동행한 적이 있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이 준 교수와 중국 장시(江西)성의 시골 허름한 여관방에 같이 묵으면서 뜻밖에도 불교의 고승들과 도교의 도사들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가 야산이 남긴 일화였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 무렵부터 야산은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녔다. 영낙 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닌 야산은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치장에서도 횡설수설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흥얼거리니 일본 경찰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판정하고 방면하였다. 유치장 문을 나가면서도 야산은 경찰관을 향해 대한독립만세여!하고 중얼거리며 나갔다고 한다.
8월13일 경남 청도의 화계리(花溪里) 오씨(吳氏) 집에 머무르던 야산은 따르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경사스러운 일을 들으러 가자!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1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문경면(聞慶面) 문경리(聞慶里)로 십수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간 제자들에게 야산은 잔치를 벌이라고 하였다. 문경리의 촌로들을 모아놓고 닭고기와 술을 대접하는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야산은 오늘같이 기쁜날 내가 닭춤을 한번 추겠다하면서 잔치마당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것 아닌가. 속을 모르는 제자들은 우리 선생이 요즘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 같더니 정말 돌았는지 모르겠다면서 걱정스럽게 야산의 닭춤을 구경하였다.
8월14일 저녁 가져간 돈으로 문경리의 촌로들에게 술과 닭고기를 대접하면서 흥겹게 논 다음날, 15일이 되었다. 제자들은 그날 36년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제자들은 광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산은 민족의 해방이라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기 위하여 장소도 비상한 곳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장소에서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일을 한다고 했던가. 비상한 장소, 그게 바로 문경(聞慶)이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는 뜻 아닌가.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는 그 경사스러움이 트리플로 겹치는 곳이다. 해방 하루 전인 14일 잔치판을 벌여 놓고 닭고기를 먹으면서 닭춤을 추었으니 절묘한 무대연출 아닌가. 닭은 바로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메신저(messenger) 아니던가. 1980년대 암울한 시절 누가 그랬던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한 퍼포먼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也山과 안면도 피난 이야기
이 준 교수로부터 들은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서해안의 안면도와 관련된 이야기다. 6․25가 나던 해인 1950년 3월 무렵 야산은 제자들에게 다짜고짜 통고하였다.
자네들 집에 있는 재산 가운데 10만원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전부 나에게 가져와.
말하자면 비상금 정도 남겨 놓고 나에게 재산을 다 바치라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평소 스승의 남다른 선견지명을 여러번 경험한 바 있는 제자들은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한다. 제자들은 당시 금액으로 집에 10만원만 남겨놓고 가산을 정리하여 현금으로 가져왔다. 그때 야산을 충실히 따르던 핵심 제자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산은 이 가운데 2명의 제자가 가져온 돈을 마당에 내던졌다고 한다.
너희 둘은 제자가 아니다.
2명의 제자는 재산 가운데 일부만 정리하여 가져왔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 여긴 이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 제대로 재산을 정리하여 나머지 돈을 모두 가지고 왔다. 제자들은 왜 우리 선생이 재산을 가져오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감히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다.
10명의 제자들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갈취한(?) 야산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남길 뿐이었다.
음력 6월 초에 서산 포구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한 그 날짜에 서산 포구에 제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도착해 보니 배가 2척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이 배에 타거라.
배를 타고 어디로 가는데요?
안면도(安眠島)로 간다.
지금은 안면도에 다리를 놓아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었다.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야산은 제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는 안면도의 면(眠)자에서 눈을 떼어야 할 것이다.
눈이라 하면 눈 목(目)자를 의미한다. 眠에서 目을 떼어내면 민(民)자만 남는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안면도는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즉 안면도에 가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안면도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이미 야산이 집을 빌려 놓은 상태였다. 쌀로는 부족해 보리를 특히 많이 장만해 놓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 상황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스승이 왜 터무니 없이 돈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야산이 미리 안배해 놓은 덕택에 제자들과 그 가족들은 안면도에서 무사히 6․25를 넘길 수 있었다.
비상계엄령 선포 직감
나는 이 준 교수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야산이란 인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더듬어보고 싶었다. 이 준 교수에게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물어보았다. 1977년 무렵 야산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산(亞山) 김병호(金炳浩․1920~82)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김병호는 경남 고령 사람이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14대 후손으로 주역을 비롯한 도학을 평생 연구하다 야인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뼈대 있는 선비 집안의 후손이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주역을 공부해서 언제 광명이 올 것인가 예측하는 일뿐이었다. 아산 김병호는 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주역에 심취했던 선비가 해방후 할 수 있는 일은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뜻있는 사람들을 만나 주역을 강의해 주는 마지널맨(marginal man)의 삶이었다. 1977년 경에는 서울에 자주 들러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주역을 강의하였는데, 그가 남산의 여관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자주 찾아간 이교수에게 해준 이야기가 바로 문경과 안면도 이야기였다. 한번은 아산이 이교수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다음주에는 서울에 못 올라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러면 언제나 오십니까?
다음주에 못오면 아마 2주나 있다 오게 될 걸세.하고는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령 하에서는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다. 당연히 주역 강의나 모임도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산이 수도하던 장소 중 하나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峯) 밑의 구룡정사(龜龍精舍)라는 곳이라고 했다. 답사해 보니 터가 암벽으로 짜여 있어 영기가 있는 곳이었다. 일부 선생이 거처하던 토굴에서 10분 더 내려와 위치해 있다.
계룡산 국사봉은 특별한 곳이다. 이름 그대로 국운을 염려하던 국사(國師)급 인물들이 자주 찾던 봉우리다.
장래 희망이 국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도 계룡산 국사봉을 반드시 찾았다. 국사봉 앞으로는 교과서에 나오는 토체(土體) 안산(案山)이 가로놓여 있어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려준다.
필자가 그동안 구경해본 토체 안산 가운데 국사봉 앞의 안산이 단연 최고다. 김병호는 구룡정사에서 주역을 공부하려는 제자들에게 면벽(面壁)을 시키곤 하였다. 면벽은 정신집중 훈련이다. 면벽의 과정 없이 주역의 64괘만 달달 외운다고 대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산이 제자들을 데리고 안면도에 들어간 시기는 6․25 전쟁 발생 며칠 후였다. 정확하게는 인민군이 예산․홍성에 진입하기 하루 전이었다고 한다. 이때 야산을 따라 안면도로 건너간 인원은 제자 몇명만이 아니라 약 300가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300가구의 인원이라면 한 가구에 3명만 치더라도 약 1,000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다.
안면도 300가구 피난의 비밀
야산을 따르던 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면도 일대로 피난했다. 안면도 일대라 하면 충남 광천․서산․홍성 일대까지 포함하는 지역이다. 야산은 이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서 광천․서산 등지의 주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얼떨결에 공짜로 쌀과 보리를 받은 광천 사람들은 야산과 그 추종자들에게 고맙게 생각했음은 불문가지다.
이 적선으로 말미암아 안면도 일대로 피난했던 야산 일행은 6․25때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6․25라는 것도 깊이 들어가 보면 좌.우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개인감정의 청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명분인 경우가 많다. 원래 난리가 나면 평소 원한 있는 사람부터 손보게 마련이다.
6․25때 안면도에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야산이 안면도의 잠잘 면자에서 눈 목자를 떼라고 했는가.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연이 있었다.
첫째, 피난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하라.
둘째, 원래 이름이 안민도(安民島)인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눈 목자를 일부러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제 해방되었으니 눈 목자를 떼어야 한다.
셋째는 안면도의 또 다른 이름을 개락금(開洛金)이라고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락(洛)은 하도(河圖)․낙서(洛書)의 낙서를 의미한다. 하도는 선천이요, 낙서는 후천세계를 상징한다. 금(金)은 오행 가운데 후천세계로 변하더라도 살아남는 강한 기운이다. 그러므로 안면도는 후천세계를 여는 중요한 시금석이라는 뜻이 된다. 최근 들어 안면도는 육지로 연결되면서 장엄한 서해 일몰과 함께 아름다운 꽃축제로 유명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두고 볼 일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왜 피난할 때 하필 300가구였는가 하는 대목이다. 주역의 괘를 들여다보아야 해명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괘는 천수송(天水訟) 이다. 위가 건괘이고, 아래는 감괘로 형성된 괘가 천수송 괘다. 이 괘의 뜻은 송(訟)이다. 분쟁한다는 뜻이다. 서로가 자신을 믿으므로 송사가 쉽게 끝나지 않고 잘잘못도 판별되지 않는 상태이니, 꼭 송사에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두려운 괘라고 설명되어 있다.
야산은 6․25가 발발하기 전에 이 괘를 뽑아보고 사태를 미리 예견했던 것 같다. 6․25라는 전쟁은 천하의 큰 송사(訟事)가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니 잘잘못도 판별되지 않은 셈이다. 천수송 괘에서 음미할 부분은 구이(九二)는 불극송(不克訟)이니 귀이포(歸而逋)하야 기읍인(其邑人)이 3백호(三百戶)면 무(無) 하리라는 구절이다. 구이는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읍 사람이 300호면 재앙이 없으리라로 해석한다.(大山周易講解上,143쪽) 읍 사람이 300호라는 대목에서 300가구가 연유하였다. 천수송 괘를 뽑았을 때 그 송사를 피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300가구를 데리고 어디론가 피하는 것이었고, 야산이 볼 때 그 피난하는 장소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뜻을 지닌 안면도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상황을 재검토해 보면 이렇다. 야산이 6․25 전에 천수송 괘를 뽑은 것은 순전히 영감이었고, 직관의 영역이었다.
네 글자 안에 포함된 주역과 오행의 신비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도 하였다. 64괘 중 다른 괘를 선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필 천수송 괘를 선택하였는냐 하는 문제는 야산 본인의 직관적인 판단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 의문은 300가구다. 100가구, 아니면 400가구, 또는 다른 규모의 인원이 아니고 왜 유독 300가구로 정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주역이라는 경전에 나와 있는 구절을 참고한 것이다. 경전에 나와 있으니 이를 보고 참고한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직감과 학문이 종합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직감만 있고 천수송 괘의 구절을 몰랐다면 100가구를 데리고 갔을 수도 있다. 반대로 주역의 구절만 알고 직감이 없었으면 현실에서 무력할 뿐이다. 거울 같이 비추는 직감과 박식한 학문을 아울러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래야만 쌍권총을 차는 셈이다. OK목장에서 결투할 때는 쌍권총을 차야만 승산이 있는 것 아닌가. 학문만 있고 직관의 세계를 모르면 초월을 모르니 속되고, 직관만 중시하고 학문을 모르면 부황해질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8․15와 6․25에 대한 야산의 예언을 추적하다 보면 이 보다 더 기막힌 이야기가 나온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던 194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도쿄(東京)제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던 김병윤(金炳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이 뒤숭숭해지자 김병윤은 주역의 대가라고 소문났던 야산을 찾아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겠읍니까?하고 물었다. 야산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거두절미하고 위성황련(胃醒黃連)이라는 네 글자를 묵묵히 써 주었다. 이는 한약의 처방전이다. 위성(胃醒)이란 위장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소화불량․식욕감퇴․구토와 같은 증상을 말하기도 한다. 이때 사용하는 약재가 황련(黃連)이다.
한국본초도감(韓國本草圖鑑)을 찾아 보니 황련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깽깽이풀의 뿌리라고 되어 있다. 열을 내리고 독을 다스리며, 위를 튼튼히 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 주로 위장에 이상이 생겼을 때 사용하는 약재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난데없이 위성황련이라는 처방을 써주었으니 받는 사람 측에서는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보면 자네 위에 열이 차서 답답한 상태이니 황련을 쓰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었다.
야산은 자기를 찾아온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고 위에 이상이 있음을 한눈에 간파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야산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방약합편(方藥合編)과 같은 의서(醫書)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사 묻기 전에 먼저 네 몸부터 돌보라는 뜻도 내재해 있다. 한약재와 처방에 관한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김병윤이 무슨 뜻인지 좀더 풀어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다시 써준 문구가 계명월성전 전중공거지(鷄鳴月星田 田中共車之)였다. 이는 위성황련이라는 글자를 파자(破字), 즉 인수분해한 문구였다. 위성을 인수분해하면 계명월성전(鷄鳴月星田)이 된다. 한문이 지닌 은유와 상징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단백 압축 사례이기도 하다.
먼저 성(醒)자를 뜯어보면 왼쪽에 유(酉)자가 나온다. 유는 닭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 위성이라는 두 글자를 합해 놓고 거기에서 유를 빼면 월성전만 남는다. 위는 월과 전이고, 나머지는 성이다. 가운데에 성을 배합해 넣으면 월성전이 된다. 무슨 뜻인가? 월성전은 달과 별의 밭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은하수를 지칭한다. 계명월성전은 닭이 하늘의 은하수에서 운다는 뜻이 된다. 이 시기는 음력으로 7월7일을 가리킨다. 칠월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서 은하수가 장관을 이룬다.
음과 양이 합하고, 산택(山澤)이 통기(通氣)되는 날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이는 1945년 음력 7월7일을 가리킨다. 1945년은 을유(乙酉)년이다. 닭의 해다. 닭이 운다는 것은 1945년에 해당하고, 월성전은 7월7일이다. 음력 7월7일은 양력으로 8월14일이다. 그러니까 월성 두 글자에는 1945년 양력 8월14일에 해방된다(닭이 운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일본의 항복 선언은 15일이었지만, 실제적으로 항복선언문은 14일 완성되었다고 본다.
황련을 인수분해 하면 전중공차지(田中共車之)가 된다. 황(黃)자의 중간에는 전(田)자가 있다. 전중은 황자 중간에 전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황에서 가운데의 전을 빼면 공(共)이 된다. 그 다음에 련(連)을 분해하면 차(車)와 지(之)이다. 책받침( )은 갈 지로 보았다. 그래서 공차지가 나온다. 다시 전중을 보자. 전중은 밭의 가운데다. 고대에 정전법(井田法)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토지를 우물 정자로 9등분하여, 가운데 중심은 공전(公田)이고, 나머지 8군데는 사전(私田)이었다. 즉 사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자기 것이지만, 가운데 밭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국가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었다. 가운데는 국가와 공중(公衆)의 것이었다. 전중은 정전법의 가운데 부분을 상징한다. 사유가 아닌 공유, 나아가 오행으로 중앙 위치의 토(土)를 가리킨다. 토가 가리키는 숫자는 5(五)와 10(十)이다. 그러므로 전중은 5월10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음력이다.
그 다음 공차지를 보자. 공이란 공산당(共産黨) 또는 공산군(共産軍)을 의미한다. 지는 간다는 뜻이다. 조합해 보면 5월10일에 공산군의 수레가 지나간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음력 5월10일은 양력으로 6월25일이다. 6․25에 대한 예언을 이런 식으로 하였다. 위성황련 네 글자에는 1945년 8월15일 해방과 그 다음의 6․25가 예언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절묘한가! 한약재 처방전에서 시작하여 주역과 오행을 거쳐 8․15와 6․25까지 꿰뚫었다. 단 네 글자로 말이다. 이 예언 내용을 미리 예측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예측을 이렇게 고준하면서도 압축된 표현으로 정제해낼 수 있는 야산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밖에 없다.
1950년대 중반의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당시 신소천(申素天) 거사라는 분이 있었다. 평생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서 한 경지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던 도인이었다. 금강경은 선불교(禪佛敎)에서 애호하는 경전이다. 상(相․집착과 분별심)을 없애는 데 특효가 있다는 경전이기도 하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만약 모든 사물의 형상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면 그 즉시 부처가 된다)라는 구절은 한국의 선승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금강경 내용이다.
대전시 동구 비룡산 정상 바위에 새겨진 也山의 초서체 글씨. 號神發이란 신이 부르면 발(반응)한다'는 뜻이다.
신소천 거사와 야산의 일화
신소천은 바로 이러한 비상(非相)의 경지를 맛본 도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조계사에서 시작한 금강경 강의는 도학에 관심이 많은 식자층들의 화제에 오르곤 하였다. 그 신소천 거사가 한번은 야산과 만나게 되었다. 신소천 거사 쪽에서 먼저 야산에게 한번 만나자고 초대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거이탈삼취무공이차기여우국성(去二脫三吹無孔 以此寄與憂國聖).
신소천이 써 보낸 편지 겉봉의 글씨는 난해하였다. 편지를 전하던 야산의 제자가 무슨 뜻인지 해독을 못하고 스승에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야산은 이 글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고 전한다. 과연 신소천 답다. 거이탈삼(去二脫三)은 둘을 보내고 셋을 벗긴다는 뜻이다. 이는 신(申)자에 대한 인수분해다. 신자의 양쪽 변의 세로로 된 작대기 두 개를 떼어내고, 다시 가로로 된 작대기 세 개를 벗기면 무엇이 남는가. 기둥(申) 하나만 남는다. 이 기둥은 구멍 없는 피리(吹無孔)를 상징한다. 이것을 나라 걱정하는 성인에게 보낸다(以此寄與憂國聖)는 내용이다.
신소천은 신씨다. 그러니까 신소천의 마음 속에 간직한 진심을 나라 걱정하는 도인인 야산에게 보낸다. 그러니 한번 만나자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금강경과 주역대가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의 장문인이 만났으니 당연히 스파크가 튀었을 것이다. 먼저 신소천 거사가 야산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역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점술(占術)에 있습니다.
점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라는 신 거사의 재차 질문에 야산은,
건괘(乾卦) 구오(九五)에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매우 짤막한 두 사람의 문답이었지만 그야말로 핵심은 다 들어 있는 대화였다. 주역 64괘 중에서 제일 비중 있는 괘는 역시 첫번째 괘인 중천건(重天乾) 괘다. 위 아래가 모두 건괘로 이루어졌다. 그 건괘의 하이라이트는 구오다. 구오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굴리며 신묘한 변화를 나타낸다는 내용이 구오에 담겨 있다. 야산은 바로 이 구오를 주역의 핵심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야산이 신소천 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금강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습니다.
야산이 재차 물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신소천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그 자리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파상(破相:상을 깨트린다)입니다.
과연 고수다운 문답이었다. 고수들일수록 문답이 짧으면서도 영양가는 높다. 하수들일수록 이야기가 늘어지면서 영양가는 없다. 고수들 문답은 들을수록 압축된 인생의 향기가 느껴진다.
첫댓글 조용헌교수글은 약간 과장이 있고 좀 깁니다만 하여튼 읽어보시라고 퍼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고수와 하수라,,,
나무 관세음 보살 !!!!!!!!!! 나무마하반야 바라밀 !!!!!!!!!!!!!!도사님 또요 더요... 부탁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