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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 상 雜錄 上
잡록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온 나라에 전해지는 철행哲行과 의범懿範 가운데
그 기록이사라졌거나 드물게 전해지는 것을 잡다하게 모아놓은 것이다.
좀 더 넓게 채집하지 못한것은 내 견문이 넓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옛 사람이 “한 마디의 좋은 말씀이라도 들을 수있다면 죽을 때까지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고 했으니, 만일 이 잡록을 읽는 사람이 책을펼쳐보는 사이에 이러한 내 뜻을 알아준다면,
백성들의 윤리를 바로잡고 세교世敎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효행 孝行
1.1. 향덕 向德
신라新羅 향덕向德은 공주公州 사람으로, 효성스러워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마저 돌고 있을 때,
부모도 굶주림과 병으로 거의 죽게되었다.
향덕이 옷을 벗고 잠을 잘 겨를도 없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으나,
굶주림을 해결할 도리가 없어 결국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또어머니가 종기가 나자, 향덕은 그 종기를 자신의 입으로 빨아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
이러한 향덕의 일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임금은 벼 3백 곡斛과 집 한 채 및 구분전口分田약간을 하사했다.
또한 관리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 향덕의 행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 일컬었다.
1.2. 손순 孫順
손순孫順은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어린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언제나 어머니의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데,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기어렵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으로 가서 땅을 파고 아이를 묻으려 했는데,
아주 기이하게도땅을 파다가 돌로 된 종을 얻었다.
부부는 놀랍고 괴이하게 여겼는데, 그 아내가 “돌로 된종을 얻었으니,
이것은 아마도 아이의 복福 같습니다.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손순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와 돌로 된 종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돌로 된 종을 대들보 사이에 매달아 두고 종을 쳤는데,
이 종소리가 궁궐에까지 울려 퍼졌다. 왕은 사람을 시켜 종소리가 나는 곳을 알아보게 하였다.
왕이 보낸 사람이 종소리가 난 곳을 살펴보고서, 이 일에 대해 왕에게 모두 알렸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4)가 아들을 파묻을 때 하늘이 쇠로 된 솥을 내렸는데,
지금 손순이 아이를묻으매 땅에서 돌로 된 종이 나타났으니,
앞선 곽거의 효성과 지금 손순의 효성은 세상에똑같은 모범이 된다.”
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와 쌀50석碩을 하사했다.
효 (孝)
1.3. 최루백 崔婁伯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수원水原 사람 최루백崔婁伯은 호장戶長 상저尙의 아들이다.
최루백이 15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
이에 최루백은 그호랑이를 잡고자 하였으나, 어머니가 이를 말렸다.
이에 최루백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도끼를 메고 호랑이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호랑이는 최루백의 아버지를잡아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었는데,
최루백은 호랑이 앞으로 다가가 호랑이를 꾸짖으며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나도 마땅히 너를 잡아먹겠다”.
이에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며 땅에 바짝 엎드렸다.
그러자 최루백은 도끼를 들고 호랑이의 배를 갈라,
호랑이 배 속에 있던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어 장사지냈다.
또한 호랑이의 고깃덩어리를 항아리에 담고, 시냇물 가운데 묻었다.
아버지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뒤에,
묻어 두었던 호랑이의고기를 모두 꺼내어 먹었다고 한다.
뒷날 최루백은 한림翰林의 관직에 올랐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최루백의 효행孝行을 세상에 드러냈다고 한다.
【최루백과 관련된 행적은 모두 삼강록三綱錄에 보인다.】
1.4. 김천 金遷
김천金遷은 명주溟州의 향리鄕吏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고종高宗 때 몽고군이침입하여,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 김덕린金德麟이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김천의나이는 15세였다. 김천은 밤낮 울부짖다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 길에서 죽은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서 상복을 입고 3년 상을 마쳤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원元나라에서 온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사람이,
저잣거리에서 명주溟州 사람을 사흘 동안이나찾았다.
마침 김천의 친구인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습성은 김천의 어머니가 김천에게 보낸 편지를 주었다.
김천의 어머니가 쓴 편지의 내용은다음과 같다.
“나는 살아서 어떤 고을 어떤 사람의 집에 흘러 들어가 그 집의 종이 되었”다.
김천이 이 편지를 보고서 통곡하면서,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찾아 돈을 주고서라도
어머니를 모셔 오고자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백금白金을 빌려,
고려 통역관通譯官인 공명孔明과 함께 북주北州의 천노채天老寨로 가서,
군졸軍卒인 요좌要佐의 집에 찾아가게 되었다.
요좌의 집에 도착하니,다 떨어진 옷에 쑥대머리를 하고,
얼굴에는 때가 낀 한 늙은할멈이 있었다.
김천은 그 할멈을 보았지만, 자신의 어머니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할멈이 자신의 고향과 집안 내력을 모두 말하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덕린이 나를 따라 이곳에 온 지 19년이 되었는데,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천노天老 집의종으로 있다.”
김천이 이 말을 듣고 엎드려 절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니,
어머니가 김천의 손을 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로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벌써 죽은 줄 알았다” .
요좌가 공교롭게도 집에 없어서, 김천은 어머니를 바로 구하지 못하고,
동경東京으로 돌아왔다. 별장別將인 수룡守龍의 집에서 한 달간 머물다가,
수룡과 함께 다시 요좌의 집으로 찾아가 어머니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요좌는 듣지 않았다. 김천은 애원하여 백금白金 50냥을 주고 어머니를 구해 돌아왔다.
이에 동생 김덕린이 김천과 어머니를 전송하러 동경東京에 와서 울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비록 함께 돌아가지 못하지만,
만일 하늘이 도와준다면 반드시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돌아가는 길에,
동경에 들러 김천 모자母子를 불러서 만나 칭찬했다.
그러고는 돌아가는 길에 총관부摠管府에 명하여 음식과숙박을 제공하게 하였다.
명주에 도착하고, 김천의 아버지인 김종연金宗衍 또한 별탈없이 지내고 있었기에,
서로만나 기뻐하며, 마침내 예전처럼 부부로 함께 살게 되었다.
김천의 외조부外祖父인 김자릉金子陵은 당시 79세였는데,
딸을 보고서 기절할 정도로 기뻐했다.
6년 후 천로天老의 아들이 동생 김덕린을 데리고 오자,
김천은 백금白金 86냥으로 김덕린을 구해냈다.
이후 동생 김덕린과 함께 평생 효도하며 살았다 .
1.5. 지은 知恩
효녀 지은知恩은 한기부韓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는데,
나이 서른둘이 되도록 여전히 시집가지않고,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고 구걸도 했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부잣집의 종이 되어, 낮에는 그 집에 가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면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렇게 한 지 여러 날이 지나자,
어머니는 지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네가 나에게 준 밥은 비록 거칠어도 맛이 달았는데,
지금은 밥은 좋은데 마치 칼로 속을 찌르는 듯하니 이게 무슨 일이냐”?
이에 딸이 사실대로 말하니,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네가 남의 집 종이 되었으니, 내가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크게 울부짖자, 딸 또한 울었다.
이 소문을 들은 낭도郞徒 효종의孝宗義가 그녀 집에 곡식 100석石을 주었고,
또 그녀를산 주인집에 몸값을 치러주어, 그녀를 종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왕도 곡식 500석과 집한 채를 하사하고서, 그 마을을 효양방孝養坊이라 부르며 널리 칭찬하였다.
1.6. 위초 尉貂
위초尉貂는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리자 위초는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의 병을 치료했다.
이에 임금이 재상들에게 포상을 의논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문극겸文克謙 등이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당나라 안풍현安豊縣 사람 이흥李興은 아버지가 난치병에 걸리자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였는데, 그 마을에 홍살문을 세워 표창했습니다.
지금 위초는 거란契丹 족속으로 글도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살을 베어 아비에게 먹였습니다.
또 아비가 죽은 뒤에 3년 상喪을 효성스럽게 다했으니, 마땅히 예전 방식대로,
그 마을에 홍살문을 세워 표창해야 합니다”.
이에 명종明宗이 그 말대로 하였다.
1.7 손순흥 孫順興
손순흥孫順興은 구례현求禮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
데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 섬기면서,
3일에 한 번씩 어머니의 무덤에 가서 생전과 다름없이 봉양하였다.
1.8. 차달 삼형제 車達三兄弟
운제현雲梯縣 지불역祗弗驛의 백성인 차달車達 삼형제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차달은그 아내가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지 않는다 하여 내쫓아 버렸다.
두 동생도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봉양하느라 모두 장가들지 않고 마음을 같이하여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1.9. 임광렴 林光廉
서도西都 사람 임광렴林光廉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뒤,
어머니의 모습처럼 생긴 마른나무를 가져다가 어머니를 섬기듯 봉양하면서
어머니 모시는 예를 다하였다.
1.10. 석주 釋珠
경도京都 사람 석주釋珠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나무를 부모의 형상으로 깎아 색칠을 하고서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처럼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봉양했다.
1.11. 장주 상성 걸아 長州相城丐兒
장주長州 상성相城에 음식을 구걸하며 살아가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언제나 심맹연沈孟淵의 집에 가서 음식을 구걸하곤 했다.
그런데 구걸하여 얻은 음식을 모두 먹지 않자,
심맹연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아이가 가는 곳을 뒤쫓게 했다.
들판 언덕에이르자, 보잘것없는 작은 배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배 안에는 말끔하게 단장한 노파가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구걸해 온 음식을 어머니 앞에 늘어놓고서는 술잔에 술을 따라 엎드려
어머니에게 올렸다. 어머니가 술잔을 드는 것을 보면,
곧바로 일어나 춤을 추고 산가山歌를 불러 흥겹게 노닐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언제나 이렇게 어머니를 섬기었는데,
어머니가 죽자 다시는 구걸하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황명皇明 시절에 살았던 사람의 일인데, 너무도 기이하여 함께 기록해 둔다】
1.12. 정양옥 鄭良玉
국조國朝 영남嶺南 사람 정양옥鄭良玉은 부모님을 효성스럽게 섬겼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 상喪을 마쳤는데도,
오히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에게 밥상 올리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살아계실 적에 어머니는 대추를 좋아했는데, 시장에 가서 대추나무를 사다가길러,
그 대추를 따서 차를 만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대추차를 어머니의 사당에 올렸다.
어쩌다 한 번 대추차를 올리지 못한 날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사당에 엎드려 밤이 될 때까지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바라보니, 대추나무가 홀연 7그루가 되어 있었다.
그대추나무는 한 겨울에도 사당 앞에서 우뚝 자라났는데,
높이가 수 자에 이르고 열매도 아주 많았으며, 대추 색깔은 모두 흰빛이었다.
정양옥은 이 대추를 따서 어머니의 사당에 바쳤다.
6년 뒤에 정양옥이 죽자 대추나무도 말라 죽었다.
그 고을의 현령縣令이 친히 이 일을 보고서는 감사監司에게 표창해 줄 것을 건의했으며,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그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그 고을은 삼가현三嘉縣인데, 고을 사람들이 백조당白棗堂을 세워,
7그루 대추나무에 제사를 드린다.】
1.13. 길재 吉再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자는 재보再父이다.
아버지는 길원진吉元進으로, 토산兔山 김희적金希迪의 딸과 결혼했으며,
길재를 선산善山의 봉계鳳溪에서 낳았다.
아버지 길원진은송도松都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고,
길재는 어머니를 따라 옛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길재가 겨우 8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길원진은 전라도 보성寶城의 판관判官이 되었다.
어머니 김 씨도 아버지를 따라 보성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봉록이 넉넉하지 못하여 먹고 사는것이 쉽지 않았기에,
길재를 외가에 맡기고 보성으로 떠났다.
길재는 어머니와 헤어지자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하루는 혼자 남쪽 시냇가로놀러 갔다가 우연히 자라를 잡고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鱉乎鱉乎 자라야 자라야
汝亦失母乎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
吾亦失母矣 나도 어머니를 잃었단다.
吾知其烹汝食之 너를 삶아 먹을 수 있지만
汝之失母猶我也 어머니 잃은 처지가 나와 같기에
是以放汝 너를 놓아주노라.
그러고는 자라를 물속에 던져 주고 울부짖는데 너무도 구슬펐다.
이웃 여인들이 이를 보고서 울며, 김희적과 그 아내에게 말을 하니, 서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웃에 사는남녀들도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와서 부둥켜안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에 마을의 늙은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겨 “우리 마을에 이 같이 훌륭한 아이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뒷날 아버지 길원진이 다시 송도松都에서 벼슬을 하다가,
다시 노영盧英의 딸에게 장가를 들면서, 결국 길재의 어머니 김 씨와 소식이 점차 뜸해지게 되어,
길재의 어머니가 길재의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었다. 길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비록 남편과 부모가 불의不義한 일을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그르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人倫의 변고變故는 성인도어쩔 수 없는 일이니,
다만 정당하게 처신하여 이로써 천명天命을 기다려야 합니다” .
어머니 김 씨가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죽을 때까지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길재가 하루는 어머니를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 오랫동안 문안드리지 못하면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고는 송도松都에 이르러 아버지를 섬김에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
간혹 노 씨가 자애롭지 않는 말을 하여도, 길재는 공경과 효도를 극진히 하니,
노 씨가 감동하여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재를 대했다.
뒷날 어머니가 연로할 때까지 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며 이부자리를 펴고 개는 것을 자신이 직접 하였다.
자신의 아내나 종이 이 일을 대신하고자 하자, 길재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어머니께서 지금 늙으셨으니, 훗날 어머니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려 해도 할 수없다.”
1.14. 오백주 吳伯周
관동關東에 한 선비[오백주吳伯周]가 있었는데【그 선비의 성명姓名은 잊어 버렸다.】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 아버지가 괴이한 병에 걸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병세는 더욱 깊어만갔다.
온갖 약을 처방해 치료해 보았지만, 효과가 전혀 없어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했다.
몇 십 리 떨어진 곳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성격이 꼿꼿하고 박학다식했으며,
의술醫術이 또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병의 증상에 대해서는 얘기하면서도 처방해 주는경우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병이 들어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았다.
오백주는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노인의 집을 찾아가 무릎 꿇고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말했다.
이에 노인은 한 마디 말로 흔쾌히 허락하면서 “내가 가서 살펴보겠소.”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오백주의 집에 와서 그 아버지의 병세를 살펴보고서는 오백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 아버지의 병은 치료하기가 어려운데, 한 가지 방법은 있소.
그러나 그대 집이 너무가난해서 그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을 듯하여,
말해줘도 도움이 안 될 듯하”오.
이에 오백주는 “힘쓰는 것은 자식이 얼마나 효성스럽냐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그치료법만 알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생삼生蔘 3근과 꿀[石淸] 2말을 구해서 함께 끓여,
고약膏藥을 만들어 복용하면 효과를볼 수 있을 것이오.
이 방법 이외에 날마다 수 만 가지 방법으로 치료하고자 해도
아무런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이에 오백주가 노인에게 대접할 저녁상을 챙기려 하자,
노인은 “잠시 이웃 사람에게 갔다오겠소.” 하고서는
대문을 나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백주는 이웃집에 가서 그 노인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노인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백주는 아내와 함께 몸을 깨끗이 씻고, 밤새도록 정성껏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새벽이되자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이 흐릿해져 땅에 엎드려 있는데,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정중히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 모某 방향 모某 산의 몇 번째 봉우리의 동굴에서
꿀이 생산된다. 또 그 아래로 얼마쯤 가다보면 산등성이가 있는데,
그 주변에 생삼 몇 뿌리가 있으니, 너는 가서 그것을 가지고 와라”.
오백주는 깨어나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서는 마침내 행장을 꾸려 지름길로 그 노인의
집으로 가서, 먼저 어제 자신의 집에 와서 아버지의 병에 대해
처방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에 노인은 “어찌 거짓말을 하느냐. 어제 자네를 만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자네 집에 가서 아버지의 병세를 살필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오백주는 어리둥절한 채 일어나 절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저희 집에 오셔서 아버지의 병세를 살피실 때,
제가 경황이 없어서 어르신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어르신이 가신 후에야 이렇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
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이러한 꾸지람을 들으니,
더욱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르신께 용서를 받을 수 있을는지요”?
이에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찌 그런 엉뚱한 말을 하는가? 어제 나는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 모모 등과 함께저녁까지 모여 놀았다네. 만약 자네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어제 내가 함께 논 친구들에게 찾아가 물어보시게.”
오백주는 곧바로 절을 하고 물러나, 한동네의 이웃에게 찾아가서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과연 그 노인의 말과 같았다. 오백주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꿈속에서
신인神人이 가르쳐 준 산으로 곧장 갔다. 몇 봉우리를 지나 신인이 말한 봉우리 아래 이르렀는데,
신인이 말했던 것처럼 과연 그 아래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틈에 굴이 있었다.
그 굴 가운데에서 꿀[石淸] 몇 말을 얻어 항아리 안에 담았다.
또 바위 아래를 두루 살펴보니, 또한 생삼뿌리가 많이 있어 생산 몇 근을 캤다.
오백주는 꿀을 담은 항아리와 생삼 뿌리를 단단히
묶어 등에 지고 산을 내려왔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오백주를 향해 오고 있었다.
오백주는 호랑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랑아, 호랑아, 너는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산속의 군주[山君]라 불리니,
어찌 내가홀로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온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지금 하늘이 도와 아버지의 약을다행히 구했으니, 나를 잡아먹고자 한다면,
나를 따라 우리 집에 가서 내가 이 약을 아버지께 전해 준 다음에
나를 잡아먹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이렇게 거듭거듭 호랑이에게 애걸하니, 마침내 호랑이는 오백주를 잡아먹지 않았다.
갑자기 호랑이는 오백주를 잡아 자신의 등 위에 태우고서 달렸는데,
오백주는 어떻게 해 볼수가 없어서, 호랑이 등에 바짝 붙은 채 눈을 감고
호랑이가 달려가는 데로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호랑이가 오백주를 땅 위에 내려 주자,
오백주는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니, 바로 자신의 집 울타리였다.
이에 오백주는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약을자신의 아내에게 전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약을 구했으니, 빨리 이것을 끓여 아버지에게 드리시오.
나는 호랑이와약속한 것이 있어, 그 약속을 어길 수가 없네”.
그러고는 대문 밖으로 나왔는데, 호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백주는 호랑이를 찾아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약을 끓여 고약膏藥을 만들어 아버지에 드렸는데, 아버지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오백주의 효성이 하늘의 신령神靈을 감동시킨 것이다.
아버지의 병에 대해 처방을 내려준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이었고,
그날 밤 오백주를 등에 태워 집에 데려다 준 것도 호랑이가 아니라 신神이었던 것이다.
오백주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동하여 생삼과꿀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멀리하겠는가?”라는 것이니,
진실로 천고千古의 기이한 일일 따름이다.
.... 우하영의 천일록 - 잡록 상 중에서 ...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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