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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설교
손봉호 박사( 한국 성서 유니온 발행. 발행인 윤종하)
서울대학 문리과 대학 영문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
화란 자유대학교 철학부, 철학박사
경력
화란 자유대학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장로회 신학교, 총신대학교, 교수역임
동덕여대 총장 역임, 그 외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 기타 생략.
머리말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책을 하나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 당장 말해 줄 수 있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지나치게 전도지적인 성격을 가진 것들이 아니면, 신학적으로 일방적인 책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요를 이 책은 다소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모든 종파에 공통되는 가장 보편적인 신앙고백이요,, 기독교인을 비기독교인으로부터, 참 기독교를 유사 기독교로부터 구별하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 설교 형태로 풀이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더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이론적인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의 고백이기 때문에 딱딱하고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설명 방법인 설교가 제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설교이긴 하지만 역사적인 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어떤 고백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그것들을 가능한한 언급하려 노력했다.
이 책의 내용은 1981년 8월 말부터 1982년 1월 초 까지 16회에 걸쳐 서울 영동교회에서 한 설교들이다. 이장원 집사님께서 녹음된 설교를 종이에 옮겼고, 박은조, 김영일, 변종길, 이광희, 박상원 등 전도사님들이 다시 다듬어 원고로 정리하였으며, 교정에는 강원초, 김유찬, 군 등이 수고하였다. 내용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지나, 책은 이분들의 수고로 이루어졌다. 깊히 감사해 마지 않는다.
부록 <창조의 철학적 의미는>는 지난 가을 한국창조 과학회 에서 행한 특강 내용이다.
끝으로, 이 책 출판을 뒤에서 후원해 준 서울 영동교회 출판위원회와 출판을 맡아주신 성서 유니온의 윤종하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초판이 나온 지 두 달이 못되어 재판이 나오게 된데 대하여 애독자 여러분께 또한 감사드린다.
1982년 8. 16. 손 봉 호.
1, 신앙고백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최근 우리 한국 기독교의 여러 가지 특색 중의 하나는 교리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가 과거에는 교리를 아주 중요시했습니다. 교리 분제로 교단이 분립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교단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교리 문제도 그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즈음에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구원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모두를 성령을 강조하고 모두를 교인수를 강조하고 연보를 강조하다 보니까 교리의 조그마한 차이는 강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리의 작은 것까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 이 교회와 저 교회는 이렇게 다르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건전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리를 너무 강조하지 않아서 이제는 기독교인지 무당 종교인지 그 구별마저 분명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도신경의 12가지 신앙고백 내용을 차례 차럐로 설교함으로써 우리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인가,
긷독교란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대체로 주일 아침 예배를 시작할 때면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러이러한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므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간단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입니다. ‘보편적’ 이란 말은 적어도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모든 종파는 사도신경만은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모든 교회가 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하나의 방편(方便)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도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개신교에서도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천주교로부터 개신교가 새로 생겨나게 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이 사도신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우리나 혹은 초대 교부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마치 꿀벌들이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부터 꿀울 모아내듯이 위대한 선지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의 가르침을 오묘하게 요약한 것이 사도신경이며, 어린이들과 순수한 기독교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성경의 이 신비한 66권을 아름다운 꽃에 비한다면, 이 사도신경은 그 꽃들로부터 꿀벌들이 꽃가루를 모아다가 꿀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매우 강조함으로써 우리 개혁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로 그런 교회라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상에서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앙고백’과 ‘아타나시우스 신앙고백’입니다. 그 중에 아타나시우스 신앙고백이라는 것은 상당히 깁니다. 그리고 니케아 신앙고백은 비교적 간단한데, 이것은 주후 382년에 콘스탄티노풀에서 150명의 신학자와 교부들이 모여서 체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은 어떤 종교회의에서 의논을 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도신경의 12가지 신앙 조목은 12 사도들이 한 사도가 한 조목씩, 그래서 12사도가 12 신앙고백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12개의 신앙고백이 사도신경 속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합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사도의 고백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사도들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이라 하는 것이지, 사도들이 만들어 낸 신앙고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사도신경의 형태는 주후 710-724년에 ‘공인된 문서’, 즉 ‘택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ceptus)라는 것이 정식으로 널리 보급되었는데, 거기에 실린 고백이 지금 우리의 고백과 같습니다. 다만 그때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것보다 고백이 하나 더 들어 있습니다. 즉,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말 앞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말이 더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하는 이 구절은 초대의 여러 신앙고백에 나타납니다. 물론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신앙고백에 그것이 나타나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이 주후 700년 경에 정식으로 지금 우리가 외고 있는 것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와 비슷한 신앙고백은 그 이전에 벌써 교회 사이에 유행되고 있었습니다. 가령, 주후 215년에 히폴리투스(Hippoytus)의 질문 형식의 신앙고백이 있었음이 오늘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을 질문 식으로 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셋째,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주후 340년에 마르셀루스(Marcellus)라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유행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내가 믿으며,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믿습니다. 그는 성령과 마리아로 말미암아 태어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며, 장사지낸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실 것입니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주후 340년의 마르셀루스의 이 신앙고백은 지금의 사도신경과 내용이 것의 일치합니다. 다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라는 구절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주후 404년의 루피누스(Rufinus)의 신앙고백이 지금의 사도신경과 비슷하고, 또 주후 400년에 지금의 애굽 북쪽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있던 아프리카 교회의 신앙고백도 지금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과 비슷합니다. 사도신경 외에도 교회사적으로 살펴 볼 때 신앙고백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국의 장로교회가 체택하고 있는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체택하고 있으며, 또한 침례교와 감리교의 신앙고백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물론 감리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을 따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도신경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펴 보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히폴리투스나 마르셀투스나 혹은 루피누스 등의 여러 교부들에 의해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오늘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께서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역사했다고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명한 교회사학자인 베르코프는 그의 교회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미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것은 참 놀랄 만한 일이다.”라고 지금 천주교에서는 미사라는 것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천주교에서는 매우 중요시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시대에 형성된 사도신경이라면 미사에 대한 언급이 들어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미사를 믿사오며” 이런 구절이 하나쯤 들어갔을 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그것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이 될 사도신경을 교회역사를 통하여 형성시켜 주셨다고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사도신경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아주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역사하셔서 형성한 것이라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왜 이런 신앙고백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고백이란 것은 성경 그 자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유명한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게 가르쳐 준 것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라고, 또한, 누가복음 12: 8-9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인한다’는 말은 ‘고백 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 자체에서도 우리 믿는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직접, 간접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왜 성경에 있는 것 외의 신앙고백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이유는 대개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세례를 줄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목사님께서 와서 제가 세례를 받겠습니다 하면 목사님이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적어도 기본적인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교회에서 만들어 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마지막 장 까지 전부 읽어가면서 “이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또 그저 “신. 구약 성경에 있는 것을 내가 다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됩니다. 신. 구약 성경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래서 아주 간결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써 필수불가결한 신앙 간증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려면 적어도 사도신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고백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인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표준으로서 이 신앙고백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들에게 교육시킬 때에도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주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물려 주어야 하겠습니까? 신. 구약 성경을 그냔 물려줌으로써 되겠습니까? 되지 않습니다. 이 신. 구약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가령, 안드레가 베드로의 동생이라든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든지 하는 것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가르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셋째,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이단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단이란 것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 말을 집어 넣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표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단들이 나타나서 저마다 떠들게 됩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앞에서 말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니케아 신앙고백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하거나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자를 우리 공회가 저주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니케아 종교회의 때에 벌써 많은 이단들이 교회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를 순수한 기독교로 유지하려면 신앙고백은 불가피하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9-10. 곧 본 내용의 주제 말씀에 보면 분명히 신앙고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렇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과 입,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 이 네 가지를 서로 연결해 놓고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분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별히 현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하니까 입으로 하는 말은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은 겉 다르고 속 다릅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은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구별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믿는 것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데 특별히 부활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있습니다. 왜 구태여 부활을 강조했을까요? 적어도 사도 바울의 생각으로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핵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부활 하셨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 즉 현대인의 사고나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가 죽으셨다는 것을 전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할 정도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보통의 죽음이 아니고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것이고, 대속의 죽음을 주자면 예수님에게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동정녀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셨다는 것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마음올 믿는다”는 말에 대해 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마음’ 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는 ‘heart' 라고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head and heart'라 구분합니다. 즉, ‘머리’와 ‘마음’ 을 구분한다는 말입니다. 이로 볼 때 ‘아는 것’ 과 ‘믿는 것’ 을 구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마음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해서 지식을 아주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분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무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이 마음이라 했을 때는 지식을 제외한 마음이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커(Heidegger)라는 사람이 ‘결단’ 이라는 것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자 어떤 철학도가 강의실을 나오면서 친구에게 “나는 결단했다” 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무엇을 결단 했는가?”하고 묻자, “모르겠다 하여튼 결단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무엇을 믿는가” 하고 물으면, “아, 그것은 몰라도 돼, 예수만 믿으면 돼”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그 다음에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꼭 시인해야 하느냐,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예를 들어 생각해 봅니다.
어떤 총각이 어떤 처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마음속으로 아주 깊이 사랑합니다. 이 사실을 안 처녀는 기분이 좋겠지요,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원하는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날 때나 내 아내로 삼아서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총각이 결혼을 해서 살다가 더 예쁜 처녀가 나타나서 마음의 갈등이 있을지라도 곧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처녀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면, “옛날에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내 마음이 바뀌었으니까”하고 돌아서 버릴 수 있습니다. 나중에 처녀가 와서 “당신이 옛날에는 나를 사랑하더니 지금은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냐” 고 물으면 “내가 언제 당신을 사랑했느냐?”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신앙과도 통합니다. 마음속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선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례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교회의 정식 교인이라는 명부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에서 한 번 고백을 해놓으면 그 마음의 신앙이 굳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좀 약한 신앙이라도 공중 앞에 나가서 고백한 뒤부터는 그 고백에 충실하도록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직분을 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이 약한 사람이라도 집사로 봉사하게 하면 그 다음부터 신앙이 강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사 때 엉뚱한 짓 하던 사람이 장로가 되고 나서 갑자기 아주 신앙이 좋아지고 점잖아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마음과 입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심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군목으로 계시면서 한 번은 버스를 타고 동두천 어느 곳을 지나가는데 창녀들이 많이 타더래요. 창녀들을 보니까 마음 속에 역겨움도 생기고 고함도 치고 싶더래요, 그러나다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니까, 나는 얼마나 거짓되나, 나는 얼마나 더러우냐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이 사실상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창녀하고 똑같지 않으냐, 나도 간음하자.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그 창녀보다 더 깨끗하지 못할지라도 창녀와 같이 간음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 속에 있는 것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나의 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 고백에 맞게 믿음을 강하게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은 반드시 내용이 있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신앙고백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특별히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이 고백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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