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 나라의 시호 제도
법전(法典)이 밝히는 우리 나라 시법(諡法)은 조선 초까지는 왕과 왕비, 종친(宗親), 실직(實職)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시호’가 주어졌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완화 확대되었는데 비록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親功臣)에게는 시호(諡號)를 주었고, 대제학(大提學)은 종2품이더라도 내렸으며, 유현(儒賢)이나 사절(死節)한 자(者)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더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역사 기록으로 ‘시호’는 514년(신라 법흥왕 원년)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했다는 기록이 그 효시이다. 그러나 삼국과 고려의 시호 제도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절차나 범위 등 시법을 상고할 수가 없다. 이 시호 제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에 와서 정비되었다.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고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도청(都廳)·낭청(郎廳)’ 등을 임명하여 시책(諡冊;국왕과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올릴 때 쓰는 책)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어 문무관(文武官), 유현(儒賢), 사절(死節) 등 일반인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하여 증시(贈諡)를 하였는데 그 대체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1.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이나 인척 등이 행장(行狀)을 작성하여 예조(禮曹)에 제출함.
2. 예조에서 행장을 검토하는 등 조회(照會)를 필한 후에 봉상시(奉常寺)로 보냄.
3. 봉상시에서는 행장에 근거하여 합당한 시호를 평론하여 세 가지 시호를 정하여 홍문관(弘文館)으로 보냄. 이를 시장(諡狀)이라 함.
4. 홍문관에서는 응교(應敎-東壁) 이하 3인이 삼망(三望)을 의논한 뒤 응교 또는 부응교가 봉상시정(奉常寺正) 이하 제원(諸員)과 다시 의정(議定)하여 결정하여 의정부(議政府)로 넘김.
5. 의정부에서는 사인(舍人)과 검상(檢詳) 중 1인이 서경(署經)하여 시장과 함께 이조(吏曹)에 넘김.
6.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하여 국왕에게 입계(入啓)하여 수점(受點)을 받음
7. 국왕의 수점 후에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쳐 확정됨.
8. 국왕의 특별한 교지(敎旨)로 시호를 주는 경우에는 예조(禮曹)에서 행장(行狀)을 접수(接受)함이 없이 홍문관에서 직접 정일(定日)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합석(合席) 부대시장(不待諡狀) 합의를 이루어 곧바로 시호를 내
리는 예(例)도 있었는데,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간(李柬)에게 문정(文正)으로 시호가 하비(下批)된 경우가 그러하였다.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경우 봉상시에서 의논한 세 가지 시호는 충무(忠武), 충장(忠壯), 무목(武穆)이었는데, 이 때 각 글자의 뜻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쳐들어오는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 하고,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함을 장(壯)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로움을 굳게 지킴을 목(穆)이라 풀이하였다고 한다.
또 우리 나라의 경우 시호로서 가장 권위가 높은 것으로 치는 ‘문(文)’자의 뜻은 다음 여러 가지라 한다. (1) 도덕박문(道德博聞)/(2) 도덕박문(道德博文)/(3) 박학호문(博學好文)/(4) 박학다문(博學多聞)/(5) 근학호문(勤學好聞)/(6) 근학호문(勤學好文)/(7) 박학다식(博學多識)/(8) 박문다견(博聞多見)/(9) 민이호혹(敏而好學)/(10) 경직자혜(敬直慈惠)/(11) 자혜애민(慈惠愛民)/(12) 충신접례(忠信接禮)/(13) 충신애인(忠信愛人)/(14) 강유상제(剛柔相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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