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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차 답사 (2009.2.14) 익산의 성[城] 1) 용산성(龍山城) 오전 9시, 오늘은 많은 회원님들이 참석하셔 익산 산성에대해서 공부하였다. 용산성, 함라산성, 어래산성, 낭산산성, 도토성외에도 입점리 고분전시관과 미륵사지 사리장엄 발굴 사진전까지 마쳤다. 300m ~ 150m의 낮은 산들이지만 여러 산을 오르내리다보니 조금은 힘들었으나 백제의 문화유적역사를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생각과 지식이 풍부하신 선생님들의 응원 속에서 즐겁게 답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번 답사 해설은 배홍선선생님, 이택희선생님, 최옥환선생님등, 여러 선생님께서 해주셨다.
옛 함열 용산은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지금은 익산시 함라면 용산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함열(함라)에서 남쪽으로 4km쯤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구릉지다. 성이 있는 곳은 넓은 용안평야의 중심부에 해발 50m쯤 되는 당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그 유지가 완연하게 남아 있다. 용산성은 곧 함열 현의 읍성으로 축조한 것이며,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읍성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을 축조하였으나 조선 후기까지도 고성으로 존재하여,<여지도서>에서도 龍山古城이라 하여 동쪽 5리에 있고, 둘레 3.603척 높이10척의 규모로 남아 있으나 오래되어 퇴락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읍성으로 축조된 성에 읍의 치소를 옭기 못한 것은 관아를 비롯한 여러 시설물을 풍년이 들어 건축한 다음에 가능한 일이 엇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지고, 또한 왜구의 침입이 없어져 평화가 지속된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시기의 조사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1923년에 석재를 빼어 황등제수축에 이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지금은 돌을 빼어 사용한 까닭에 토성처럼 되어버렸다. 성내에 향교터와 동헌터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 우물터와 못 터만 남아 있고, 민가가 성내의 골짜기마다 들어서서 큰 부락을 이루면서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성내의 논 가운데에는 높이 2m 정도의 입석이 부락의 수호신과 같이 서 있다 (성의 흔적은 대동 마을 거주 박준화(62세, 전 교육자) 씨의 초등학교 시절 까지 찾아 볼수 있었으며 성내 중앙으로 학당터라는 흔적이 있어 향교와 동헌터가 있으며 주변에는 기와와 토기의 흔적을 찾을수 있었다. 정월 대보름에는 성을 경계로 성내 마을과 대동 마을이 불 싸움을 하였고 논 가운데 입석은 그 후 없어졌으며 성곽의 돌 들은 황등제 축조로 무너지고 작은 돌은 도로 부역과 주택의 돌담을 쌓았다고 증언 하고 있다)
이곳에서 옛 아름다운 모습의 아기 업은 할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얼굴도 인자하시게 보이며 우리에게도 성터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주셨다. 정말 보기 좋았다. 2) 소방봉 봉수대 오전 10시, 웅포면 웅포리 해발 220m의 일명 봉화산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한 함라산성이다 소방산 정상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열현 봉수조에 보면 ‘소방봉 봉수는 서쪽으로 임피면 오성산 봉수와 응하고, 동쪽으로는 용안현 광두원산 봉수와 응한다.’ 라고 되어, 이 봉수가 호남 해안 쪽으로 오는 봉화를 용안의 광두원산 봉수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린 봉수대에 올라 시원한 금강과 웅포골프장을 내려다 보면서 회장님께서 준비해온 과일을 맛있게 갈증을 해소하고 다시 어래산으로 이동하였다.
익산시에서 녹차밭을 조성하고 있는 곳이다. 산을 다랭이 계단식으로 작은 묘목들을 심어 놓았다. 녹차밭의 보호 벽이다. 오랜 자생 녹차나무가 많이 산재되 있다. 3) 어래산성(御來山城) 전북문화재자료 제173호 오전 11시 40분, 익산시 웅포면과 군산시 나포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170m의 어래산 주봉 정상부와 작은 능선 사이의 계곡 윗면을 에워싼 토,석혼축성이다. 성의 둘레는 410m-485m 로 흙과 돌로 부분마다 재료를 달리한 토,석혼축성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쌓은 보루라는 전설과 농성이란 전설이 있다.
건물터나 기타 시설물이 있었다고 여겨지고 성의 중심부가 되는 작은 골짜기 아래로 우물터로 여겨지는 곳이 하나 확인되나, 성내에는 유물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백제 이후 후기 신라기와 고려시기에 간혈적으로 사용된 성터일 가능성이 있다. 성벽경사는 다른 성곽에 비해 완만한 편이다. 주위의 도청산성, 관원산성과 연결되는 곳에 위치하여 금강연안의 요새로서 삼국시대 이래 금강 하구방어에 전초기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답사를 마치고 of내려오니 건 오후 1시가 되었다. 가까운 곳에서 청국장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웅포 입접리 고분전시관으로 이동을 하였다.
4) 익산 입점리 고분 [益山笠店里古墳] 사적 제 347호 오후 2시, 익산시 웅포면(熊浦面) 입점리 산174번지에 있는 5세기 중엽 백제시대의 고분군이며, 웅포면 입점리에 위치하는 백제의 무덤떼 이다. 지정면적은 1만 8,520㎡ 이다. 1991년 2월 21일 지정되었다. 입점리 칠목재에서 동남으로 뻗은 해발고도 100m 구릉의 중턱에 분포하고 있으며, 입점리고분(笠店里古墳)은 1986년 2월 한 고등학교 학생이 토끼를 잡으려 올랐다 최초로 발견하였다. 1호분에서 8호분까지 확인 되었다. 조사결과 입점리고분에서는 금동관모, 금제신, 금제장식구, 중국청자 등이 수습되어 5세기 중엽 경의 백제토착세력과 중앙 귀족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임이 확인 되었다. 그해에 문화재연구소에서 8기의 무덤을 조사했다. 무덤들은 익산시 입점리·웅포면, 군산시 나포리에 걸쳐 있는 야산 위에 분포되어 있으나 편의상 입점리 고분군이라고 부른다. 무덤들이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파괴가 심한 편이나 1호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구조를 상세히 알 수 있다. 1호분의 구조는 원형의 봉토 내에 위치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서 남북방향을 장축으로 삼고 있다. 크기는 약 16m, 높이는 약 2m 안팎이다. 널방[玄室]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며 널길[羨道]은 남벽의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마련되어 있다.
출토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금동관의 관테[臺輪]와 솟은장식[立飾], 관모(冠帽), 신발[履] 등과 함께 봉황무늬[鳳凰紋]와 연꽃무늬[蓮花紋]를 점열무늬로 시문한 관장식[冠飾]편들, 금동제드리개[金銅製垂下飾], 귀걸이[耳飾],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를 들 수 있으며 그외에도 철지은장(鐵地銀裝)의 재갈[轡]과 말띠드리개[扁圓魚尾形杏葉], 발걸이[鐵製輪鐙], 금동제안장꾸미개[金銅製鞍金具] 등의 마구류, 화살통[箭筒]장식, 중국 남조(南朝)의 청자네귀단지[靑磁四耳壺]를 들 수 있다.
자연괴석을 이용하여 널방을 축조했는데 벽면은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위에서 안으로 들여 쌓은 궁륭상(穹窿狀)이며 천장은 4장의 장대석(長大石)으로 덮었다. 바닥은 자연암반층 위에 찰흙과 모래를 섞어 덮고 그 위에 자연석을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배수로도 확인되었다. 또한 납작바닥단지[平底壺]·목단지[長頸壺]·굽다리단지[臺附直口壺]·작은 단지[小壺] 등의 토기류와 철제꺾쇠 및 쇠못[鐵釘]·철지은장못[鐵地銀裝釘]·은제고리장식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다른 무덤들은 파괴가 심하여 내부구조를 알기가 곤란하나 대체로 굴식돌방무덤이나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부에서는 입큰단지[廣口壺]·목단지·직구호(直口壺)·작은단지·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蓋杯]·세발토기[三足土器]·독[甕] 등의 토기류와 쇠낫[鐵鎌]·쇠도끼[鐵斧]·쇠손 칼[鐵製刀子]·철제꺾쇠·쇠못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시기는 대체로 5~6세기로 판단되며, 일본 규슈[九州]의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의 출토유물과 동일한 것으로 당시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헤아리게 한다.
1998년에는 사적 제 374호로 지정된 지역에 대한 정비를 위해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13기의 고분이 조사되어 총 21기의 고분이 확인 되었다. 이중 3기는 새터마을 뒷산과 능선 넘어 군산시 나포면에 위치하여 사적으로 지정. 입점리 고분의 고분유형은 구덩식돌곽무덤(수혈식석곽묘)11기, 앞 트기식돌곽무덤(횡구식석곽묘) 2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7기, 독무덤(옹관묘)1기로 여러 유형의 고분이 한 지역에서 혼재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웅포리 고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고분간의 관계는 백제 지방묘제인 구덩식돌곽무덤이 중앙묘제인 굴식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아 앞트기식 돌무덤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아울러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익산지역이 백제의 중앙 세력권내로 흡수 편제되었기 때문에 입점리 고분은 백제사뿐만 아니라 익산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이제는 낭산으로 넘어가보자 → 다음 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