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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려면 아직 멀은 새벽 5시,
밤새 잠을 뒤척이신 임광준 선생님과 기철이 대화에 깼습니다.
"기철아, 생각해볼수록 우리 참 대단한 인연이야. 그치?"
"네."
"우리 기철이, 볼수록 참 기특해.
고생을 안 하려고 그저 피하는 시대에 사서 하겠다고 한 것도 참 대견해.
기철이 이 경험이 아주 귀하거든. 기철이는 잘 될거야."
"네."
"기철이는 긍정적이지?"
"네."
"그래, 그래보여. 기철아, 고전이 뭔지 들어봤지? (네)
지금 기철이가 잘 하는 컴퓨터나 최근 지식, 정보이 중요해.
앞으로 그런 IT가 아주 중요한 시대니까.
그런 반면에 고전이란 그냥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옛것 중 잃어버려선 안 될 것들 있지?
형제, 부모, 친구, 이웃... 이런 소중한 걸 놓치지는 말자는 거야.
내가 독일갔을 때 개인이 독립적으로 사는 건 정말 대단해.
자식이 18살만 되면 결혼할 여자를 집에 데려와 살아도 부모가 그걸 인정하거든.
그런데 부모, 자식 사이에 정이 없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인거지."
임광준 선생님 말씀에 옛것이건 지금 것이건 다만 마땅한 바,
사람 사이 이웃과 인정이 메마르면 되겠는가를 묻는 핵심질문처럼 들립니다.
기철이에게 어떻게 들렸는지 모르겠으나 제 스스로 울림이 큽니다.
길위의학교, 기철이에게도 유익하나
임광준 선생님 말씀, 엄춘자 어르신 글귀... 저한테도 유익한 바가 분명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네요." 말씀드리니
"그렇지? 래성쉼터 어른도 선비 집안에 고전, 서예 배우시고.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참 귀한 분들이야..." 하십니다.
기철이와 이불을 개고 비질을 했습니다.
임광준 선생님이 당신도 가만있을 수 없다며 대걸레질을 하셨습니다.
기철이가 어제 밤 조금 태운 밥에 물을 부어 누룽지를 끓여
가져온 반찬들과 아침식사를 합니다.
저는 괜찮지만 임광준 선생님께 탄 밥 드리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괜찮아. 먹을 만 한데? 기철이 요놈, 삼층밥 안 했으니 봐주지 뭐."
선생님이 웃어넘기시자 기철이도 저도 허허 웃고 밥을 먹습니다.
"제가 설거지 할게요."
아침밥 다 먹고 기철이가 일어서며 말합니다.
"그래, 고맙다." 했습니다.
아침먹고 짐을 꾸리고 있으니 노인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방 따뜻했어?"
"네, 잘 잤습니다."
"회장님, 호텔 같은 방에서 잘 잤습니다."
임광준 선생님 인사에 회장님이 웃으십니다.
노인회장님께서 창고에 들어가 음료수를 꺼내 하나씩 쥐어주십니다.
고맙습니다.
"엄여사(엄춘자 어르신)한테 이제 간다고 전화해야지."
엄춘자 어르신께 전화를 하십니다.
노인회장님께 인사드리고 길을 나서니
회관 맞은편 길에 엄춘자 어르신이 나와 계십니다.
"아침에 떡만두국 끓여줄게요. 먹고 가."
아침밥은 먹었다 하니 떡국떡, 만두, 김을 손에 쥐어주시며
"점심 때 해먹어. 알았지? 개밥 해주느라고 조금 늦었더만 아침을 못 해줬네..." 하십니다.
"고맙습니다." 기철이와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길을 나섭니다.
# 남교리 노인회관 ~ 솔방울 작은도서관
코끝이 싸늘하게 차가운 바람과 아무도 없는 눈쌓인 길,
고요 속에 동터오는 저 산 너머의 섬광이 서서히 빛을 발합니다.
봉우리 사이로 구름이 한쪽만 불그스레하게 물든 채 저희를 반깁니다.
임광준 선생님은 "신선 사는데 같구만.",
기철이는 "딴 세상 같아요.",
저는 "구름이 저희를 따라오네요." 구름 하나를 놓고 감탄합니다.
50분 가량 걸었을 무렵,
만해 한용운 선생님을 기린 '만해마을(http://www.manhae.net/)'이 나타납니다.
임광준 선생님 잘 아시는 분이 만해마을 박물관 대표시랍니다.
개관시간은 아니나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습니다.
걸어가시면서 지인들께 생각날 적마다 전화하시는 선생님 보며
'주변 사람들 저렇게 사귀어야지' 배웁니다.
기철이와 선생님이 쉬실 동안
만해마을 기념관 안에 있는 서가를 둘러봅니다.
'솟대문학'이란 잡지에 실린 글 '옛날 옛적 장애인은'이 눈에 들어옵니다.
퇴계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퇴계의 소개로
시각장애가 있는 이씨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주위 사람들의 염려에
"우리 부인은 길쌈이며 집안일도 잘하고 우리 부모님도 어찌나 공경하는지 모르오.
그리고 밤마다 부인은 나와 학문을 논하는 벗이오." 대답합니다.
장애를 보지않고 사람으로 보는 대목에 감탄합니다.
남편이 일찍 병이 들어 죽어,
이씨 부인이 남은 생애를 얼마나 슬기롭게 살아
주변 사람들 또한 감화, 감동받는지가 주된 내용입니다.
다시 길을 나섭니다.
한파경보가 닥칠 만큼 추운 날에 잠을 거의 못 잔 탓인지
임광준 선생님과 기철이 발걸음이 어제보다 느립니다.
해가 산 능선을 타고 넘어 비추기 시작하니 머리 위로 온기가 느껴집니다.
해뜨는 게 고맙습니다.
솔방울 도서관에서 잠시 몸을 녹입니다.
임광준 선생님 글씨가 도서관 현판으로 걸려 있습니다.
1층 정보화마을 사무실에 용대2이 정연배 이장님이 계십니다.
인사드리고 들어가니 임광준 선생님을 보고 놀라시며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십니다.
추운 날씨와 잠을 못잔 체력상태를 고려해
오늘 코스를 변경하고 내일 코스를 새로 설정하는 안을 의논합니다.
"오늘 진부령 정상까지 갔다가 걸어서 되돌아와
용대자연휴양림 내 김광석 선생님까지 가는 코스 대신
오늘은 진부령 정상을 가지않고
곧장 김광석 선생님 댁까지 가서 일찍 쉬는 건 어떨까요?
대신 도보여행 답게 내일 간성까지 가는 건 어떠세요?
어차피 원통까지 돌아가는 거리와 큰 차이는 없고
또 갔던 길 다시 되돌아가는 거라 안 가본 길 가는 것도 좋을 듯 한데..."
임광준 선생님과 기철이에게 묻고 의논했습니다.
기철이가 정보화마을 사무실 컴퓨터를 잠시 빌려 코스를 검색하고 확인했습니다.
"가보지, 뭐. 오늘 푹 쉬면 괜찮겠지." 임광준 선생님이 대답하십니다.
오늘 코스는 어제와 비슷한 거리로 단축되는 대신
내일 코스가 29.81km로 늘어납니다.
"원장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너도 마지막까지 잘 다녀오고. 조심해라."
이장님이 떠나는 임광준 선생님과 기철이에게 말씀하십니다.
관심, 걱정, 염려... 고맙습니다.
# 설산펜션 ~ 용대 자연휴양림 김광석 선생님 댁
설산펜션까지 거리상 대략 한 시간 가량 남았습니다.
풍대리 용대리는 여전히 바람이 차고 거셉니다.
"기철아, 설산펜션에 가려면 한 시간쯤 남았으니 미리 연락드리자."
기철이가 설산펜션 주인 아저씨께 전화했습니다.
"도보여행 간다고 했던 성기철인데요.
저희 지금 백담마을 입구쯤인데, 한 시간쯤 뒤에 들리려고요.
네, 네. 고맙습니다."
첫번째 방에 짐풀고 쉬면 된다 하셨답니다.
"잘했다, 기철아."
백담마을 지나 설산펜션 가는 옥수골 뒷길은 황태덕장이 진풍경입니다.
올해가 가장 많이 널어놓은 해라 그런지
가도가도 끝이 없을만큼 황태덕장이 가득합니다.
옥수골 뒷길이 끝날 무렵, 설산펜션을 만났습니다.
가장 안쪽 주인집에 노크를 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십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점심 좀 해먹고 잠시 쉬었다 가도 될까요?"
"네, 방에 불 넣어놨는데 따뜻하려나 모르겠네. 우선 좀 쉬고 있어요."
찬바람 맞다 온기가 감도는 방에 들어오니 나른합니다.
엄춘자 어르신이 주신 만두를 넣어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숨 잡니다.
"1시30분쯤이면 되겠죠?"
"그래, 가는 거리 얼마 안 남았으니 그래도 좋겠다."
알람 시간을 기철이와 의논해서 정했습니다.
단잠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편안합니다.
이불을 개서 정리하고 펜션을 나서니
주인아주머니가 마침 외출 준비 중이십니다.
"날 추운데 조심하셔요."
"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드리고 떠났습니다.
진부령 올라가는 길은 2차선 차가 다니는 도로라, 차를 마주보고 걸었습니다.
아침에 찬 무릎보호대와 발목보호대가 안 맞으신지 당기신다며
임광준 선생님 걸음이 느려집니다.
"선생님, 좀 기다렸다 갈까요?"
기철이가 뒤를 돌아보며 묻기에
"선생님께 여쭤보자. 우리가 너무 기다리면 그것도 미안해 하실거야."
선생님께 전화드려 여쭈니 신경쓰지말고 먼저 가고 있으라 하십니다.
기철이에게 "어른을 도울 땐 그냥 돕는 게 아니라 여쭤보고 돕는거야." 했습니다.
용대자연휴양림 입구에서 기철이가 김광석 선생님께 전화드렸습니다.
"도보여행 간다던 성기철인데요.
지금 자연휴양림 입구까지 왔어요. 네~"
"미리 전화 잘 드렸다, 기철아." 했습니다.
가는 길에 기철이가 빈 새집을 발견했습니다.
기철이가 안에 뭐가 들었나 궁금해
새집이 달린 나무를 툭툭 쳐봐도 끄덕없습니다.
"엄청 튼튼하네요."
자연휴양림 들어가는 길은 깊숙히 민박하는 집 몇 채 사는 것 말고
사람이 살지않아 산새소리가 자주 들릴만큼 조용합니다.
기철이와 가는 길에 딱따구리도 발견했습니다.
"딱따구리 맞지?"
"네."
우리를 몇 번 쳐다보고 딱따구리가 금새 날아갑니다.
"휘이~휘잉" 기철이가 휘파람을 붑니다.
"선생님, 무슨 소리 같지 않아요?"
"새소리 같은데 글쎄... 무슨 새지?"
"참새요, 참새.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
높은 음이 됐다 낮은 음이 됐다 그래요."
기철이 말을 듣고 다시 들어보니 참새소리와 정말 흡사합니다.
굵은 고드름을 따다 눈 위에 '길 위의 학교', '성기철' 이라고 쓰자
"선생님 왜 해요" 묻습니다.
"그냥, 재밌으니까" 하며 웃자 고드름을 건네받곤
"저도 해볼래요." 하며 왼손으로 '길 위의 학교'를 눈에다 씁니다.
# 김광석 선생님 댁
김광석 선생님 댁 앞에 도착해 임광준 선생님을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나타나신 선생님을 반기며 가까이 가니
마침 김광석 선생님도 댁에서 나오십니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애썼어, 너도."
새로 지은 근사한 황토방 펜션 한 채를 내주십니다.
원래 사시던 집 보일러가 얼어 요즘 쓰고 있는 집인데, 큰 쪽을 다 내주셨습니다.
김광석 선생님 원래 사시는 댁은 임꺽정이 살 것 같은 멋진 산채같고
내주신 집은 숲속의 공주가 살 것만 같은 근사한 집입니다.
인테리어부터 소품까지 공들인 티가 역력합니다.
"일류 호텔이네." 임광준 선생님이 감탄하십니다.
기철이는 2층 다락방에 올라가 구경하며 즐거워 합니다.
"선생님, 우선 편히 쉬시고요. 저녁에 이따 오겠습니다.
보일러에 나무 넣어놓았으니 따뜻한 물 잘 나올 겁니다."
"고맙습니다."
임광준 선생님, 저, 기철이 이렇게 씻고난 후
저는 임광준 선생님 무릎과 기철이 어깨에 맨소래담을 바르고
기철이는 제 어깨에 맨소래담을 발라주었습니다.
가족처럼 정답습니다.
임광준 선생님께서 단잠을 주무실 동안 기철이가 저녁준비를 합니다.
"할머니한테 김치 볶는 거 물어봐야겠어요." 하더니
없는 재료 말고 있는 재료인 김치와 김치국물에다 라면, 떡을 넣어 끓여냅니다.
기철이가 수저를 놓고 물을 세 잔 따라 자리에 놓습니다.
단잠에서 깨신 선생님과 기철이, 저 이렇게 둘러앉아 오붓한 식사를 합니다.
"기철아, 맛있네."
"라면같지 않다."
선생님과 제가 칭찬하니 "라면스프가 하나라서 김치국물을 넣었어요." 기철이가 말합니다.
"기철아, 잘 먹었다." 인사하고 일어서니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기철이가 말합니다.
"그래, 고맙다. 식탁정리는 내가 할게." 했습니다.
저녁 차리고 설거지까지 하는 기철이가 대견합니다.
"선생님, 기철이가 참 대견하네요."
"그러게, 애가 참 기특해.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그런지 참 착실해."
임광준 선생님이 흐뭇하게 바라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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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먹고 기상청에 전화해 내일 날씨를 알아보고,
기철이는 간성터미널에 전화해 간성에서 출발하는 원통행 버스 시간을 알아봤습니다.
김광석 선생님이 가져다주신 따뜻한 벌나무 차를 마시며
쇼파에 앉아 임광준 선생님 젊으실 적 이야기를 청해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해방직후 소련군과 미군이 주둔하던
거친 시대 상황에 살아오셨던 이야기 들으니 역사 속 인물을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소련군 행패가 심하던 시절,
집집마다 꽹꽈리처럼 두들기면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비치해두고
소련군이 집에 찾아오면 크게 두들겨서 옆집에 알려 막으셨답니다.
밤중이면 그 소리로 평양시내가 떠들썩 했던 이야기에
기철이 시선이 선생님을 향합니다.
맏손녀를 팔에 안거나 유모차에 태워
원통 시내를 왔다갔다 하며 가게 간판을 읽어주고
뭐하는 가게인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셨다는 온유한 모습을 생각하면
젊은시절 선생님께서 옳지 않다 싶은 일이면
드라마 야인시대 구마적처럼 단박에 박치기를 하셨던 일화가 믿기지 않습니다.
"70대가 10대, 20대하고 대화 잘 안 하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이렇게 벗처럼 다니면서 대화하고 지낸다는 게 참 귀한 일이야.
하긴 옛날 고전들을 보면 4, 50살 차이나는 사람들도
벗하면서 학문을 논했다고는 하니 이것도 되긴 하지."
저와 기철이를 소중한 인연이자 한 사람으로 여기고
거리낌 없이 대화상대로 존대하는 임광준 선생님,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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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선생님께서 임광준 선생님 드시라고
어리굴젓, 토봉꿀에 절인 인삼을 약주와 함께 내오셨습니다.
기철이더러 "옆집에 가서 먹고싶은 과자 있음 가져와서 먹어도 돼." 하십니다.
새볔녘에 혹 추울까 나무도 다시 넣어주신 김광석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참 따뜻하고 편안하게 잘 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