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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월정사.상원사.선교장.오죽헌.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힘차게 내다려 우리 국토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중심에 날카롭지 않고 둥글면서도 그윽한 향기를 가진 채 넉넉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후덕한 산, 오대산. 한반도 중동부,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오대산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도암면, 용평면과 강릉시 연곡면과 홍천군 내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월정사가 소유한 땅은 총면적 1천7백7십만평에 이른다. 이렇듯 오대산은, 설악산이 날카로운 기암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장쾌하면서도 노년老年의 듬직한 육산肉山이며 모산母山이기도하다.
오대산은 오대산 지구와 소금강 지구로 나뉘는데 그 성격이 서로 다르다. 비로봉 정상에서 볼 때 동대 너머의 청학산 쪽 소금강 지구는 바위산으로서 금강산에 견줄 만한 절경이며, 비로봉에서 평창 쪽으로 내려가는 오대산 지구는 부드러운 흙산으로서 산수가 아름답고 불교문화유적이 많다.
호명골, 중대골, 서대골, 신성골, 동피골, 조계골, 등의 계곡물이 만나 시작되는 오대천은 동대천과 합류하면서 정선을 지나 남한강으로 굽이굽이 흘러든다. 무려 32개의 산봉우리와 31개의 계곡, 12개의 폭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뛰어난 자연림을 자랑하며, 신선초와 같은 희귀식물을 비롯하여 수백 종의 식물과 동물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오대산은 봄에는 온통 꽃동산으로, 여름에는 시원하면서도 울창한 계곡과 숲으로, 가을에는 오색의 단풍으로, 겨울에는 설화를 피워내는 설경으로 철철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풍부한 천연자원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진 오대산은 신라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사는 산으로 믿은 뒤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교성지로서 큰 몫을 담당하여 왔다. 또 김시습이나 함무외, 허목과 같은 빼어난 문인과 도가적인 취향을 가진 이들도 오대산을 거쳐 갔다. 조선후기의 율곡과 이중환은 오대산을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으로 우리나라 12대명산의 하나로 손꼽았다. 한편, 오대산에 있는 우통수于筒水는 일찍이『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서 밝혔듯이 한강의 발원지이다.
오대산이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게 된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 가사, 발우 등을 얻으면서부터이다. 이로써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뒤에 7, 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즉, 동대 만월산滿月山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麒麟山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 미타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象王山 나한당에는 오백 나한이, 중대 지로산地爐山 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오만보살신앙은 경덕왕대에 살았던 신효거사信孝居士에 의해 다시 확인되면서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는 상원사에서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한 일화를 통하여 다시 한번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성지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이에 따른 유물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한암,, 탄허, 만화 같은 큰스님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오대산은 이렇듯 불교성지로서 정신과 신앙의 귀의처였던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뛰어난 유물들이 많다. 오늘도 오대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서 부처님법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는 월정사를 비롯하여 눈푸른 납자納者들이 정진하는 상원사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등이 우리나라 최대의 불교성지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대산월정사
월정사전나무길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그 뒤로 유동보살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 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월정사일주문
월정사 일주문은 다포계의 공포로 상부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시각 효과를 이루었고 단청이 화려하다. 기둥 양편으로 판전을 붙여 안정감을 높였고 판전에는 네 분의 재미있는 신장상을 양각하였다. 네 분의 신장상은 사대천왕(四大天王)·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기둥 양옆으로 샛기둥을 세워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둥글게 다듬어 모양을 내었다. 기초는 화강석으로 복련을 조각하였다.
월정사 일주문은 전체적으로 웅장한 오대산과 잘 어울린다. 월정대가람月情大伽藍의 현판글씨는 탄허 스님의 친필이다.
1976년 만화스님이 중건했다.
일주문을 지나 월정사를 향해 걷다 보면 좌우에 아름드리 큰 전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팔백미터쯤 늘어선 전나무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해준다. 장쾌하게 쭉쭉뻗은 전나무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지만 볕이 잘들어 음습하지 않다. 오대산은 기온이 낮아 모기가 없고 지질학적으로 바위대신 흙이 많다.
또 여느 산에 많이 있는 소나무가 거의 없고 그 대신 전나무가 유난히 많다. 특히 큰 전나무 아홉그루는 '아홉수'라 하여 많은 전나무의 기원이 된다
석조보살좌상
월정사석조보살좌상 월정사윤장대
부처님의 진신사
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그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입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 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빰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위에 높다란 원통현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손을 가슴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 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童子像이다.
팔각구층석탑
월정사팔각구층탑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팔각구층석탑이 서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 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것에 견주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른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 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랫층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수광전아미타불
무량수전 은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극락전 이라고도 불리운다.
아阿란(아미타(바)Amitabha 무량광無量光·무량수無量壽) 한량없다無의 뜻이며 미타는 수명을 뜻하니 목숨이 없는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월정사 무량수전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뒤쪽으로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모시고 있다.
중단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장시왕地藏十王 목각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님을 금선묘金線描의 탱화로 봉안하고 있다. 지금 무량수전은 1989년 도명스님 때 시작해 1992년 현해스님이 완공廻向했다.
팔각구층석탑 뒤에 만월산 자락의 한 기운이 엉긴 곳에 자리한 적광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은 매우 화려하다.
1930년대의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 7불을 보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
적광전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主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적광전 뒷면 벽화는 10개의 소를 찾아 다니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주련의 넉 줄은 자장율사의 불탑게이다.
오대산 상원사
상원사대웅보전(청기와가 위풍당당)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월정사와는 이웃하고 있다. 원래의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고 통도사(通度寺) 등을 창건한 자장(慈藏)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종각(鐘閣)만 남고 건물은 8·15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다.
상원사동종(가장오래된동종) 상원사고양이
오대적멸보궁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이 미혹(迷惑)의 세계를 벗어나 항상 적멸의 낙을 누리는 곳이다.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예불을 올릴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해 둔다. 부처의 존상이나 후불탱화도 없고 다만 법당 바깥에 사리를 모신 탑이나 계단(戒壇)을 설치한다.
한국의 오대적멸보궁은 ①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중대(中臺) 상원사(上院寺)의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의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의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을 말한다.
이들 적멸보궁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590∼658)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정골(頂骨)이 모셔져 있다. 다만 정암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는 임진왜란 때 유정(惟政:사명대사)이 왜적의 노략질을 우려하여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모신 것이다.
상원사적멸보궁
통도사에는 자장이 반야(般若)의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 근본인 계를 금강석처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석가모니의 가사와 진신사리를 모셨다. 상원사에는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거주지로 보고 사리를 모신 뒤 적멸보궁을 쌓았는데, 뒤에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 중대지로산(中臺地爐山)에 절을 지었다. 지금은 불사리를 안치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뒤쪽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 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오죽헌
오죽헌사랑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양식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4면을 굵은 댓돌로 한 층 높이고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하여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향하여 왼쪽 2칸은 대청이며 오른쪽 1칸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대청 앞면에는 각각 띠살문의 분합(分閤)을, 옆면과 뒷면에는 2짝 씩의 판문(板門)을 달고, 그 아래 벽면에 머름을 댔다. 온돌방은 뒤쪽 반 칸을 줄여 툇마루를 만들고, 앞벽과 뒷벽에 두짝열개의 띠살문을 단 것 이외는 모두 외짝문이다. 천장은 온돌방이 종이천장이고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에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있는 대량(大樑)은 그 아래 중앙에 세운 기둥으로 받쳤다.
대량에서 좌우 측면의 가운데 기둥에 걸쳐서는 충량(衝樑)을 배치하였으며, 그 상부에는 지붕 합각(合閣) 밑을 가리기 위하여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대량 위로 종량(宗樑)과의 사이에는 대공을 받쳤는데 그 형식은 오래된 수법을 따르고 있으며, 조선 초기의 주심포(柱心包)집에서 볼 수 있는 대공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
기둥머리에 배치된 공포(包)는 주택건축에서 보기 드문 이익공형식(二翼工形式)이며 그 세부 수법으로 보아 가장 오래된 익공집 건축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쇠서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고, 첨차(遮)의 형태는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지녀 주심포집에서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조이다.
오죽헌 사랑채, 기둥의 주련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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