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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1. 바울과 고린도 교회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고 있으면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다(고전16:8). 고린도교회와 고린도 지역은 바울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다. 사도바울은 흔히 일컫는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하면서 빌립보 지역과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 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그 지역들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수십 년 전 팔레스틴에서 출생했다가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당해야만 했다. 극렬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를 죽이려는 자들마저 생겨났다. 결국 마게도니아 지역에 있는 성도들은 그를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해 여러 철학자들을 만나 교회를 위한 변론을 하기도 했다(행17: 18,19).
그 후 그는 고린도에 도착해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AD40년대 후반에 있었던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추방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피해 고린도로 왔던 것이다(행18: 2). 바울과 브리스길라 부부는 장막을 만드는 직업(tent-maker)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같이 머물면서 생활한다. 바울은 고린도지역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비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심한 고난을 당했다. 유대인들은 그를 로마인의 법정에 끌고 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인물이라며 고소하기까지 했다. 당시 그 지역 총독이었던 갈리오(Gallio)는 그것이 유대인들의 관습에 관한 문제라며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유대인들의 중요한 종교 지도자로 있으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던 소스데네(Sosthenes)가 심한 고통을 당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당시 회당장(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이었던 소스데네에게 심한 폭행을 가했던 것이다(행18: 17). 그런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 지역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된다(행18: 11). 그 후 바울은 그곳을 떠나게 되지만 고린도교회는 항상 바울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린도교회의 복잡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고린도전서를 썼다. 그리고는 그 편지를 디모데 편으로 고린도교회에 보내게 된다(고전4: 17; 16:10). 그는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디모데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그가 아무런 위협이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쓰라고 말했다. 이는 디모데를 위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사도적 권위를 가진 형제를 신실하게 대함으로써 고린도교회가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 성경과 교회 (1-3)
바울은 서신 가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apostle)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그런데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종교적인 열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즉 바울은 사도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의지’를 말한다. ‘뜻’과 ‘의지’는 거의 동일한 의미이지만 내적인 의미와 그 강도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즉 ‘뜻’이 소극적 의미를 지닌다면 ‘의지’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의지’(the will of God)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것은 계획하고 계시는바 하나님 자신의 중요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 허락되는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도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직분자들이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와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형제 소스데네(Sosthenes)와 더불어 편지를 쓰고 있음을 밝혔다. 이는 그 편지가 단순히 개인적인 권면이나 명령 아니라 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소스데네는 그 전에 고린도에 있던 유대인 회당(synagogue)의 최고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 때문에 고린도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폭행과 고통을 당했지만 지금은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가 바울의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라 교회에 보내는 공적인 서신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개인적인 의도에 따라 마음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교회 가운데 신실하게 전달할 따름이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진정한 의미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에 온전히 적용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그 교회는 일반적인 종교적인 회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는 교회의 소속 즉 교회에 대한 소유권을 말해준다. 따라서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며 다른 어느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기피로 값 주고 사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행20: 28). 그러므로 바울은 또한 성도들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Jesus) 존재할 뿐이며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그 바깥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나아가 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보편교회에 관련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 편지를 받는 대상에는 각처(in every place)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말했다. 이는 의미상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그에 포함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살피는 것은 이 말씀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지교회에 속해 있지만 원천적으로는 보편교회에 속해 있다.
바울은 인사 형식의 문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인가? 이는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을 통해 열심히 호칭한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서에는 입술로 주님의 이름을 부지런히 호칭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즉 아무리 주님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고 오랜 시간을 들여 되풀이해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오해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 21)
중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주님의 이름을 호칭하며 부름으로써 천국이 허락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입술로서 열심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도리어 본인과 주변의 이웃들에게 자기의 신앙을 오해케 하는 걸림돌이 될 따름이다. 즉 온전한 신앙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그것이 마치 훌륭한 신앙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1: 2)이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 편지하면서도 그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물론 구약시대부터 계시되어온 말씀으로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사도 베드로가 인용하며 선포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 13; 행2: 21; 욜2: 32)
이 말씀은 주님의 이름을 열심히 호칭해 부르라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음과 예수 그리스도께만 진정한 생명이 있는 줄 알고 오직 그에게 의지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 자들이 생명의 근원인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게 된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바는 이 말이 단순한 염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때로 남들이 듣기 좋은 말로 은혜와 평강을 빈다고 말하지만 바울의 이 말은 그렇지 않다.
참된 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은혜와 평강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당연히 존재하는 현실적인 형편이다. 즉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과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은혜와 평강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거나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는 평안은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 27)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안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이 되지 못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가운데 상당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이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성공하고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다. 신실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의 말씀을 하시면서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도리어 세상에서 근심되고 두려움에 빠질만한 일들이 닥치게 됨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언약 가운데 기원하는 은혜와 평강은 바로 그런 것이다.
3. 보편교회에 대한 바울의 교훈 (1:4-9)
(1) 성도의 영적인 교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에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즉 그들 곧 교회가 그의 감사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성도의 교제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관심 있게 이해해야 할 바는 그 교제의 끈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교회에 허락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교회들이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에서 지상교회 가운데 마땅히 나누어져야 할 성도의 교제를 기억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지 교회 안에서의 교제뿐 아니라 흩어진 교회들과의 영적인 교제를 포함한다. 물론 교회 안에서 함께 삶을 나누는 성도들과의 교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 기억해야 할 바는 서로 알고 지내는 지 교회 내의 성도들뿐 아니라 지상에 흩어져 존재하는 여러 교회와 성도들 역시 교제의 끈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도 우리의 교제의 대상이다. 이는 물론 ‘교회’라는 허울만 가지고 있는 다양한 종교집단들을 두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언급하는 교제의 대상이 되는 교회와 성도들이란 보편교회에 속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고 여러 여건상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교제의 대상이 되며 사실상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 가운데 있으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의 개인적인 인간관계뿐 아니라 에베소교회와 고린도교회 사이에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린도 지역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과 에베소 지역의 성도들 중에는 상호간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자들이 많았겠지만 사도바울을 통해 영적인 교제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전 세계에 흩어진 여러 건전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일면식조차 없다 할지라도 서로 간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과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여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전혀 알지 못하지만 지상에 흩어진 여러 교회들과 성도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우리의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처한 환경이 다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며 하나님께 감사 드릴 제목이 되는 것이다.
(2) 모든 구변(口辯)과 지식(知識)에 풍족한 교회
사도바울은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구체적인 몇 가지 내용들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의 재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그에 관한 것들을 마땅히 갖추어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미리 언급되고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부하다는 점이다(고전1: 5). 바울은 그것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내용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변(speech)과 지식(knowledge)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이 말주변이나 일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바울은 도리어 그것들을 철저히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2: 1;8: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가운데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구변과 지식의 풍부함을 감사의 조건으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진리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1장 5절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풍성한 지식’이다. 이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은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본문에서 언급하는 ‘구변’이란 ‘변증’을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진리를 허물고자 하는 자들의 훼방을 말씀을 통해 변증함으로써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게 된다. 올바른 변증을 할 수 있는 배경은 세련된 말솜씨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 소유한 참된 지식과 구변을 통한 변증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에 대한 올바르고 풍성한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정확한 변증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 지켜가기 위한 소중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가운데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정착되어 있음에 대해 감사했다(고전1: 6). 이는 예수가 곧 구약에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아닌 엉뚱한 데서 그리스도를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1세기 당시의 많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그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다. 현대의 유대교인들 역시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나아가 우리 시대의 기독교 안으로 몰래 들어온 배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양한 여러 종교들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 자들은 ‘종교다원주의자’(christ-pluralism)가 되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이 구약시대부터 줄곧 예언되어 오던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소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믿음이 교회 가운데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 이는 성도들의 신앙이 개인적인 결단을 넘어 참된 교회에 예속되어 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의 날
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필요한 은사들을 받게 된다(고전1:7). 그 은사들은 지상에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증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풍족히 주어지게 되므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은 흔들림 없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된다. 그것이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이 되며 그것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지만 악한 세상을 능히 이겨나갈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기다린다. 그것은 최종적인 완벽한 구원과 더불어 궁극적인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자녀들이 심판의 날에 아무런 책망할 것이 없도록 끝까지 지켜주신다. 그날 의인들은 영원한 구원을 허락 받게 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된다. 이는 세상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인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살아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하셨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 29)
이는 세상의 마지막에 있게 될 최종심판에 연관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책망할 것이 없도록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시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부르셨음을 말하고 있다(고전1: 9). 이는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나오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은혜가 베풀어졌다. 언약에 따라 그 일을 진행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믿어야만 할 분이다.
4.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참된 교회
오늘날 우리시대의 참된 교회들은 다른 여러 교회들과 더불어 고린도교회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보낸 편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편지이다. 즉 고린도교회에 주어진 성경을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교회를 향해 쓴 바울의 공적인 서신을 ‘우리 교회’가 읽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산재한 여러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교만한 자들의 파당문제, 세상의 지혜에 오염된 문제, 간음문제. 세상법정 소송문제, 우상제물문제, 여성의 지위문제, 성찬에 관한 문제, 은사에 관한 문제, 부활에 관한 잘못된 해석 문제 등이 그것들이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안일한 신앙에 대해 강하게 책망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비록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당시 모든 교회들에 어느 정도 일어나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은사에 관한 내용들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에만 특징적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당시 세계에 흩어져 있던 모든 교회들은 은사에 대해 고린도교회와 동일한 깨달음과 더불어 그것을 적용해야만 했다.
이는 물론 ‘사도교회 시대’의 특성과 더불어 생각해야만 할 사안들이다. 사도교회 시대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까지의 시대를 일컫는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지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시대가 끝나고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특별 계시가 종료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특별한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따르는 보편교회가 되면 제도적으로 완성된 모습을 갖춘 교회 가운데 달리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즉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여러 은사들 중에 많은 부분은 사도교회를 통해 보편교회의 기초를 놓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한다.
이광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