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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구택(南湖舊宅)은, 1876년(고종 13)에 농산 김난영(聾山 金蘭永)이 지은 것을, 아들인 남호 김뢰식(南湖 金賚植)이 물려받아 살던 집이다. 봉화 일대의 명망 높은 부자였던 김뢰식은, 이 지방의 명망 높은 부호였던 김뢰식은 자신의 전재산을 저당(抵當)하고 대부(貸付)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2차 유림단 사건)으로 내놓은 공(功)으로 1977년 건국훈장(建國勳章)을 받은 인물이다.
남호 김뢰식 선생의 큰따님은 봉화 만산고택 강필(독립유공자)선생의 셋쩨아들에게 출가하였다.그 딸은 경주 최부잣집으로 출가하여 최준선생의 손부이시다..
남호 김뢰식 선생의 따님중 한분은 존재 이휘일(석계 이시명의 子,유명한 경당 장흥효 선생의 따님인 '장씨부인'의 아들이다)家 종부로 출가하여 그분이 낳은 따님이 나의 집안 형수(예천 맛질 '미산고택')님으로 오셨다.
남호선생의 따님중 다른 한분은 안동 퇴계 이황선생의 종부로 출가하셨고(현재 퇴계종손의 어머니) 그분이 낳은 따님중 한분은 현재 학봉종택의 종부로 계신다.그래서 나의 집안 형수님과 학봉종부,경주 최부잣집 종부는 이종사촌간이다.
봉화 해저리 바래미마을은 조선시대 팔오헌 김성구가 입향조인데,나중에 개암종택이 들어온 것이다.개암(개암 김우굉)선생은 동강 김우옹선생과 형제이신데 성주에서 상주쪽에 와서 사시다가 나중에 해저리로 들어왓다고한다.팔오헌 종택이 들어온 이후 소과(진사)를 64장,대과를 14장 이룩한 문중이다.소과 64장이란 뜻은 진사아닌 사람이 없었을 정도란 뜻이다.
해저리의 남호 김뇌식(김뢰식金磊植)선생은 제2차유림단 의거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셨다.집등 전재산을 저당잡혀 3천원의 거금을 상해임정 군자금으로 심산 김창숙 선생에게 제공한 것이다.
제1차 유림단의거는 3.1운동 직후 성주에 살던 김창숙과 면우 곽종석등이 활동했던 '파리장서운동'이었고(이때 파리장서 기본초안을 만회고택에서 작성한 자료가 있다) 순흥에서 김교림을 만난 후 해저마을에 들어온 김창숙은 창근.창순.족숙인 한식.뇌식.족질 홍기 등을 만나 경상도 지방의 연락을 논의하고 쾌락을 받았다.그런데 집안 동생인 창도의 집에서 회식을 하던중 일제 경찰이 찾아와서 봉화를 떠나라했고,다음날 유곡의 권상원이 김창숙의 안동.예안행을 막았다.그 물결과 영향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의 유림인사중 봉화인물이 9분이나 된다.유곡의 안동권씨 문중에서 6분,해저마을 의성김씨 문중에서 3분이다.김창숙이 먼저 방문한 해저마을부터 보면 ,김건영金建永,김순영金順永.김창우金昌禹 3인이고,닭실마을의 안동권씨 문중에서 6분이 서명하셨다.
2차 유림단의거는 1925년부터 다음해까지 김창숙을 중심으로 독립군기지건설(내몽고쪽)과 이에 따른 국내 자금모집 활동과 나석주의 의열투쟁까지를 일컫는 말이다.
파리장서를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규식선생께 전한 심산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상해임정의 초기단계에 활동하고 있었다.유림대표라는 위상을 갖고 중국 혁명인사들과 외교활동을 펼쳤다.운남의 '이문치'를 광동에서 만났고,상해에서 '손문'을 만나는등의 활동이었다.
당시 상해임정의 외교활동이 한계에 부딪혔고,만주지역의 독립전쟁은 봉오동.청산리전투를 고비로 크게 약화되었다.그래서 독립전쟁준비방략의 추진사업으로 군사력을 준비하고 전쟁비용을 준비해야 했는데, 김구가 주역을 맡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안창호의 '이상촌'과 이회영의 '자치촌'건설 목적은 1만명의 노병과 100만원의 전쟁비용을 준비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의열투쟁도 한계에 부딪혔고 김원봉을 비롯한 핵심간부들이 스스로 광동으로 이동하여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자금확보 대상으로 안창호는 미주동포사회에 염두를 둔데 비해 심산은 국내의 유림을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 동북지방 열하熱河나 내몽고 미개간지 지역등을 염두에 두고 만주의 군벌등과 협의를 하여 한대漢代의 둔전제(屯田制를 생각하였다.서울에 면우 곽종석郭鐘錫의 문집간행소가 설치되어 유림들의 왕래가 있고 자금이 모여지고 있는 것을 기회로 삼고자 국내 침투할 요원들과 회합을 가졌다.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출신의 송영호宋永祜,달성군 하빈면 하산동 출신의 이봉로李鳳魯,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출신의 김화식金華植(서울에서 사립중학교를 중퇴하고 1924년 4월 북경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수학중) 등이었다.
김창숙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직접 맡고 나섰다. 자금을 모을 대상은 바로 영남 지역 유림이었다. 즉 자금 모집의 범위를 파리 장서 서명자 130명, 목표 금액 20만 원으로 정하였다.박은식,우당 이회영 선생등에게만 연락을 하고선 국내로 잠입하였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모금운동에 활용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1925년 6월 말 송영호를 먼저 국내로 침투시키고, 자신도 8월 중순에 서울로 잠입하였다. 서울에 거점을 확보한 그는 관훈동에 마련된 면우 집간소(俛宇集刊所)를 중심으로 정수기(鄭守基), 손후익(孫厚翼) 등 영남 유림들을 만나서 자금 모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10월 중순까지 그 성과를 별로 올리지 못했다.
이에 김창숙은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친일 부호에게 강제로 돈을 받아내는 방법을 생각하고, 이를 담당할 무장 조직 신건 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여기에 김창숙, 김화식, 송영호, 곽윤(郭奫), 김황(金榥), 손후익(사돈,며느리 손응교 여사 부친), 하장환(河章煥), 이자근(李字根), 이기병(李基炳) 등이 참석했다. 이 가운데 김화식, 송영호, 정수기 등은 권총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돈을 모았다.
바로 이때 봉화 해저리의 남호 김뢰식(김뇌식)선생이 전재산과 집을 저당잡혀서 2,000원의 거금을 심산에게 제공하여 상해임정 군자금으로 제공하였고,아래의 동아일보기사(1925.10.30)에 나오는 예천 큰맛질 미산고택의 박면진(석주 이상룡의 처외사촌)할배는 200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아마도 전재산을 저당잡혀 대출받은 돈이 3천원이라면, 200원은 부호들이 그래도 논 몇십마지기는 팔은 돈이었을 것이다.그런데 봉화의 권상경 집에가서 2만원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그전에 권상경은 1천원을 기부했다,권상경의 손자는 전 과기처 차관을 지낸 권원기씨다.)
군자금 모집은 강제성을 띠었지만 모금액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더욱이 대구에서 울산으로 사돈을 만나러 이동하던 김창숙은 1926년 1월에 언양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가 구르는 바람에 허리에 절상(絶傷)을 당하고 말았다. 모금액도 적고 중상까지 입게 되자, 1926년 3월 김창숙은 마침내 계획을 중단했다.이때 남호 김뢰식의 아들 김창희金昌禧(현주인의 조부)는 부친이 내놓은 자금 2천원과 사장어르신인 만산고택의 강필선생이 내놓은 자금을 대구의 정수기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나중에 경주에서 사고를 당한 김창숙을 찾아가 봉화인들의 활동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무능한 국가보훈처는 김창희의 서훈을 아직 안했다)
부산 범어사에서 손후익,정수기,이재락,등이 모여 모집한 자금으로 의열단원을 다시 국내로 파견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비협조적인 친일부호들을 응징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목적은 잠자는 민족정신을 일께우기 위해서였다
1926년 3월 22일 그는 삼랑진을 출발하여 3월 26일 봉천[지금의 심양]에 도착하였다. 김창숙이 떠난 일주일 뒤 4월 2일 김화식이 체포됨으로써 관련자들이 줄줄이 붙잡히기 시작하여 5월 중순까지 대부분 체포되었다. 돈을 많이 거두지는 못했지만, 김창숙이 귀국하여 몰래 활동하던 6개월 동안 그 누구도 밀고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림의 의리 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독립군 양성기지를 건설하는데 한참 부족한 그 자금을갖고 김구,김두봉,이동녕,유자명,정원등과 상의하였고, 의열단원 나석주를 소개받아서 국내에 잠입시켜 의열투쟁(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투척)을 벌인것이다.
서울에서 심산역사탐방 투어를 오신 손님들께 안주인께서 아침인사를 하고 계신다.
남호구택 안주인분과 한컷.예천 맛질에서 왔다니까 반가워 하신다.안동 오천 군자마을 후조당이 친정이시다
해저리(바래미마을) 고택체험은 요기로
남호구택 요기로 054-673-2257,
팔오헌종택 054-673-5519(010-3959-5519)
만회고택 010-7602-1333 / 054-673-7939
그 외 봉화 가볼만한곳
근처에는 춘향전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선생의 종택인 '계서당'도있고,'쌍벽당'도 있다.법전면의 만산고택도 있고.다실마을(유곡리)의 '청암정'도 죽기전에 봐야할 한국의 100곳 중 한곳이다.
봉화 계서당 자료는 요기참고 http://blog.naver.com/gaetuel/20207615578
성이성 선생은 나중에 암행어사를 5번정도 역임하신 분인데,부친인 성안의공이 남원부사로 임지에 있을 때 따라가서 함께 생활했다.그때 성춘향을 만난 것이다.엄격히 말해서 이춘향이고 성도령이다(성춘향과 이도령이 아니고).성안의공은 권율장군의 천거로 화왕산성의 망우당 곽재우 의진의 종사관을 하셨다(화왕산동고록火旺山同苦錄).그래서 성안의 선생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아침은 어제 저녁을 먹은 봉화기차역 앞에 있는 '봉화송이식당'송이국밥으로...봉화 가시거들랑 유명한 송이국밥도 드시고...송이불고기도 드셔보시라...은어회도 좋고...봉성숯불단지의 숯불고기도 좋고...
아침식후 고택에 다시 가서 짐을 꾸려서 역사탐방단 일행은 파리장서기념비를 참관하였고,심산 김창숙 선생이 영주출신 정산 김동진선생과 회합한 장소인 부석사를 들러서 서울로 갔다.나는 부석사에서 일행과 작별한 후 시내버스를 타고 영주터미널로 갔고.다시 안동으로,다시 청송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송소고택으로 갔다.내일 (6.1 )청송 의병기념공원에서 행해지는 제 5회 '의병의날'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참고자료-동아일보기사-예천 '미산고택'을 방문한 '심산 김창숙'
참고자료 = 김창숙 (권기훈,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편)
참고자료 = 나석주의사(네이버케스트)
참고자료 = 봉화의 독립운동사(김희곤,권대웅 외)
참고자료 = 창녕의 임란사(昌寧의 壬亂史)
참고자료 =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안동 농암종손 이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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