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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꺾인 사나이들
1978년 여름 설악산 백운동계곡을 오른 김성택(左).윤태규씨.
토왕폭 우측 벽을 오르던 송원기 대원에게 위기가 닥쳤다. 발디딜 곳도 없어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송대원의 눈에 소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소나무는 송대원이 있는 곳에서 2시 방향으로 13m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 소나무는 '구원의 나무'처럼 보였다. 그 소나무에 확보점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 뒤쪽의 벽은 경사가 완만한 데다 토왕폭 상단 정상까지는 20여m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소나무까지만 나아간다면 등반은 사실상 끝나는 셈이었다.
어느 순간 벽이 환해졌다. 산안개가 완전히 걷히며 토왕골 위로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달빛을 받은 토왕골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밑에 있던 김성택 대원이 연발하는 감탄사가 송대원에게까지 들려왔다. 토왕골이 보여주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송대원은 바위 틈에 엉성하나마 두 개의 하켄을 박아두고 구원의 소나무까지 힘껏 건너뛰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소나무는 작고 볼품이 없었다. 밑에서 본 소나무가 아니라 다른 소나무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자신과 김대원의 목숨을 걸기에 반 뼘쯤 되는 소나무의 밑둥이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러나 소나무 밑둥에 자일을 건 송대원은 토왕폭 우측 벽 완등이라는 대과제를 자기 손으로 마무리한다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송대원은 밑의 김대원에게 올라와도 좋다는 뜻의 신호인 '하이 빌라'를 외쳤다. 고정자일에 유마르를 걸고 김대원이 올라오는 사이에 손이 빈 송대원은 볼트 설치에 들어갔다. 아무리 뜯어봐도 소나무가 너무 가는 데다 바위 틈에 엉성하게 박힌 두 개의 하켄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볼트 구멍을 거의 다 팠을 때 7m쯤 밑에서 김대원의 해드랜턴 불빛이 흔들거리며 번쩍였다.
'아! 성택형은 역시 빠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볼트를 구멍에 끼우려는 순간, 벨트를 맨 허리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몸과 소나무가 벽에서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걸 보았다. 송대원과 김대원은 그렇게 검은 토왕의 벽에서 하얀 달빛 속으로 날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그게 뭔 헛소리인가? 토왕폭에서 추락하고 있는 김대원과 송대원에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떨어져서는 안될 높이가 있을 뿐이었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높이가 있다.
토왕폭에서 추락하는 것은 토왕폭만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토왕폭을 오르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쌓아올린 높이만 품고서 김대원과 송대원은 그렇게 높은 곳에서-1973년 1월의 송준호가 그랬듯이-토왕성 폭포 위를 가르는 하나의 물줄기로 떨어져 내렸다.
생사 갈림길
북한산 인수봉을 찾은 김성택(右)씨가 김종현(中)씨 등과 함께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토왕폭 정상에서 이해관 대원과 길고 긴 밤을 하얗게 지샌 장경덕 대장은 속초 시내의 불빛이 흐릿해질 무렵 전날 밤 후배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던 토왕의 정수리께로 다시 갔다.
여전히 후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단 설사면을 내려다보니 몇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더니 그들의 응답이 들려왔다.
"경덕이형, 나 백승기요. 후배들이 추락했어요. 추락."
악우회의 백승기 대원은 이어 "한 대원은 중단 위쪽에, 다른 한 대원은 중단 아래쪽에 떨어졌다"고 알려줬다. 동료들이 추락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주저앉은 이해관 대원을 부축해 장대장은 급히 우측 능선을 타고 백대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백대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장대장은 중단 설사면 위쪽에 떨어진 대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김성택 대원이었다. 김대원의 눈자위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헬멧은 반쯤 벗겨진 채 깨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긴 상태였다. 장대장은 김대원의 눈을 감겨준 뒤 김대원보다 더 아래쪽으로 떨어졌다는 송원기 대원을 찾았다. 그러나 송대원은 그곳에 없었다. 후배의 주검을 찾는 그에게 백대원이 소리쳤다.
"경덕이형, 나도 정신이 나가 깜빡했네. 원기는 살았어요. 다치지도 않았어요. 형 팀의 후배들이 조금 전 베이스캠프로 옮겼어요."
베이스캠프로 급히 내려가 송대원과 눈물로 재회한 장대장은 의사로서 송대원을 진찰해봤지만 50층 건물 높이인 1백50여m 위에서 추락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다친 데가 없었다.
"볼트를 치려는 순간 몸이 붕 떠면서 곧바로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중단 설사면이지 뭐예요."
김성택 대원의 추락에 따른 충격으로 확보줄을 건 소나무와 두 개의 하켄이 모두 부러지고 빠져나가면서 송대원도 뒤따라 떨어진 것이다. 김대원이 그렇게 낚아채듯 끌어당긴 게 결과적으로는 송대원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수직으로 떨어진 김대원은 절벽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에 잇따라 부딪친 데다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경사가 완만한 바위벽에 추락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송대원은 김대원의 추락으로 인한 충격이 원심력으로 작용해 둥근 원주를 그리며 떨어졌다. 때문에 송대원은 추락 중에 바위와 전혀 부딪치지 않은 데다 바위벽이 아닌 가파른 설사면으로 내려앉듯 떨어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권금산장의 유창서씨, 거리회의 장봉완씨, 요델클럽의 백인상씨, 악우회의 윤대장과 유한규.백승기 대원의 도움을 받아 장대장은 김대원의 유해를 설악동으로 옮겼다.
청봉과 어센트
한 시즌에 토왕폭 좌.우 암벽과 빙벽을 동시에 등정한 부산 청봉산악회원들.
1980년 겨울 토왕폭은 어느 해보다 꽁꽁 얼었다. 79년 겨울에 어느 팀도 완등하지 못하자 외로움을 느낀 토왕폭이 '토왕폭의 사나이들'을 부른 것일까. 81년 1월 두 팀이 며칠 사이로 토왕폭 정상에 올라 제4등과 제5등을 이뤄냈다.
제4등은 부산 청봉산악회가, 제5등은 서울 어센트산악회가 각각 81년 1월 6일과 9일에 달성했다.
77년 1월 토왕폭 제2등을 기록한 부산합동대의 핵심 맴버들과 토왕폭 좌측 암벽 초등자 등 쟁쟁한 산쟁이들로 짜여진 청봉산악회는 80년 겨울에 토왕성 좌.우측 암벽과 토왕성 빙벽을 모두 등반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설악산으로 들어왔다.
김흥수 대장이 이끄는 청봉의 등반대는 정태희.홍복광.이정호.이재섭.권찬근.양진현 대원으로 구성됐다.
80년 12월 27일부터 등반에 들어간 그들은 먼저 3백m 높이의 좌벽 공략에 나서 정태희.홍복광 대원을 정상에 세웠다. 부산의 산사나이들은 81년 새해 첫날부터 토왕폭 빙벽 하단에 불었다.
등반조는 이정호.홍복광 대원이었다. 동굴을 거쳐 동대테라스까지 나아간 그들은 갑자기 쏟아진 폭설로 일단 후퇴했다. 하지만 정태희.이정호 대원이 다음날 아침 일찍 등반을 시작해 4시간 만에 하단 정상에 올랐다.
1월 5일 중단 캠프를 떠난 두 공격대원은 다음날 오후 6시10분 토왕성 빙벽 상단의 정상에 섰다. 토왕성 빙벽 제4등을 깨끗이 마무리한 청봉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상당수의 대원이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모든 대원이 1월 8일 높이 4백여m의 우측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등반 닷새째인 12일 우측 벽의 정상에 섰다. 마침내 청봉은 '토왕폭 좌우 암벽 및 빙벽 한 시즌 등반'이라는 과제를 풀었다.
어센트산악회는 토왕폭의 빙벽과 그 좌.우벽을 일직선 상에 놓고 연장등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81년 1월 2일 토왕골로 들어갔다.
그들의 목표는 청봉산악회의 경우처럼 단지 빙벽과 두 암벽을 잇따라 등반하는 게 아니었다. 세 개의 벽을 하나의 벽으로 생각하고 등반하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공격조의 식량과 장비 등을 나르는 지원조는 등반이 쉬운 우측 능선으로 돌아 올라가거나 지원물품을 미리 부려 놓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격조가 뚫은 루트만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온다는 원칙을 세웠다.
토왕폭의 해빙기
1981년 토왕폭 등반에 나선 어센트산악회들이 중단에 설치한 베이스 캠프에 장비를 펼쳐 놓고 포즈를 취했다.
좌로부터 전두성.김명춘.이정환.신동우.이규남씨.[전두성씨 제공]
1981년 1월 2일 전두성 대장을 비롯한 6명의 어센트팀 대원들은 토왕폭 하단 아래쪽에 베이스 캠프를 쳤다. 사흘 뒤 하단 등반을 시작했을 때, 토왕폭은 이미 다른 산꾼들 차지였다. 허영호씨가 이끈 제천산악회의 토왕폭 등반대였다.
제천팀이 동대테라스로 들어가며 떨어뜨린 낙빙에 어센트의 김명춘 대원이 얼굴을 다치기도 했지만 파트너 이정열 대원과 곧 하단 등반을 끝냈다. 그들보다 몇 시간 먼저 하단 등반을 마친 제천팀은 하단 완등에 만족하고 곧 하산했다.
1월 9일 김명춘 대원은 신동우 대원과 토왕폭 빙벽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어두워질 무렵 간신히 상단 정상에 올라선 김대원은 나무에 자일을 고정시키고 신대원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자일을 고정시킨 나무가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부러지면서 자일이 풀려나갔다. 김대원은 무의식적으로 자일을 붙잡았으나 무정한 자일은 사정없이 손바닥을 빠져나갔다.
토왕폭 위로 실뱀처럼 흘러내리던 물길은 어센트산악회의 김명춘 대원이 올라가며 걸어둔 자일을 금방 꽁꽁 얼렸다. 이 때문에 발디딜 곳을 찾지 못한 신동우 대원은 50여m나 추락했다.
상단의 출발지점까지 떨어진 신대원은 한 해 전 토왕성 우벽에서 추락한 마운틴빌라팀의 송원기 대원처럼 다친 데도 없이 말짱하게 일어났다.
대신 정상에 홀로 남은. 김명춘 대원은 언몸으로 혹독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에야 기진맥진한 몸으로 중단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 사고로 발가락 다섯개를 잘라야 했다.
정예 대원이 추락사고를 당하자 전력에 큰 차질을 빚은 어센트팀은 연장 등반을 포기했다. 토왕폭 제5등만을 이루고 토왕골을 뒤돌아본 토왕폭의 사나이들은 상단에다 토왕폭 연장 등반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의 상징으로 자일을 걸어두고 토왕골을 떠났다.
철수 전날, 전두성 대장은 메모지를 넣은 봉지를 비닐로 싸서 상단 출발지점에 매달아 두었다. 메모지에 전대장은 이렇게 썼다. "이 자일은 어센트산악회가 토왕폭 등반에 사용하고 회수하지 못한 것임. 해빙기에 회수할 예정이니 그냥 두기 바람."
내가 이 메모의 토씨까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대장이 그 메모를 쓴 지 정확히 닷새후인 81년 1월 27일 나는 토왕폭 등반에 나섰다.
토왕폭 하단을 끝내고 상단으로 나아갔을 때, 상단 가장 아랫 부분에 자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철사줄같이 얼어붙은 자일은 폭포를 역류하는 뱀장어처럼 스스로 토왕폭을 올라가겠다는 듯 강렬한 등반 의지를 내뿜고 있었다. 그 자일의 아래쪽 끝은 출발지점의 볼트에 연결돼 있었고, 그 볼트에는 비닐봉지가 하나 달려 있었다.
이만수의 설악가
여름의 토왕폭은 겨울과 달리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이 '천상의 폭포'처럼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김근원씨 제공]
그렇게 나는 어센트산악회의 토왕폭 등반대가 방수 포장해 둔 그 메모와 마주쳤다. 그 메모를 보면서 나는 토왕폭이 '토왕폭 사나이'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전두성이라는 토왕폭 사나이가 또다른 토왕폭 사나이에게 당부하는 전갈이라기보다 토왕폭이 자신의 내밀한 사연을 고백한 토왕폭의 언어였다. 토왕폭이 내게 알려준 사연은 '해빙기'라는 그 한마디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너무도 애틋했다.
메모 속의 해빙기라는 말은 여위어갈 토왕폭의 3월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해빙기가 오면 이 거대한 얼음기둥이 헤라클레스가 밀어붙이는 그리스신전의 기둥같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릴까, 아니면 개구쟁이 꼬마가 조금씩 빨아먹고 있는 얼음과자처럼 야금야금 녹아내릴까?
돌이켜보면 설악에 갈 때마다 토왕폭을 눈여겨봤지만 언제 그토록 장엄한 빙폭을 드리우는지, 또 언제 녹아 없어지는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봄.여름.가을에 절벽 아래로 곧은 물줄기를 쏟던 것이 겨울이 왔다 싶으면 어느 새 하늘의 뿌리처럼 높고 큰 하얀 얼음기둥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오면 꿈처럼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토왕폭은 하나의 소리로 되돌아갔다.
토왕폭은 강신(降神)처럼 등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그처럼 신화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토왕폭도 언젠가는 사라지고마는 인간처럼 생로병사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애틋함을 '해빙기'라는 단어가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노래가 어떤 삶의 주제가가 될 수 있듯이 하나의 산노래는 어떤 산사람의 산행 주제가로 불릴 수 있다.
"아름다운 저 산이 /우리를 부를 때/ 우리 모두 모여서/ 저기 저산 오르세/ 바위보다 단단한/ 우리 마음 달래고/ 얼음보다 차가운/ 우리 정열 태우러/ 모여서 가는 곳/ 저 높은 산…."
단순하기 그지없는 멜로디에 실린 이 산노래는 멜로디와 노랫말 만큼이나 순박하고 단순한 산사람들의 애창곡이 됐다. 단순한 멜로디와 순진무구한 노랫말의 투박한 어울림은 언제나 내게 동정의 단순함과 순진성을 떠오르게 한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만은 동정을 간직하고 있던 스무살 무렵의 귓바퀴 파랗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환상에 빠진다.
그뿐 아니다.
산을 바라보며 동요 부르듯 맑은 목소리로 이 노래를 뽑아내는 사람을 보면, 그가 비록 노인일지라도 총각 시절의 순진함으로 인해 더욱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산노래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 대학 시절 가입했던 산악부 선배인 이만수형이기 때문이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