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와 바늘귀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선행의 결과인줄 알았던
한 부자 관원에게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에게 어떤 결단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시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5) 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0:25, 누가복음 18:25에
나타나는 말씀도 거의 동일한 말씀입니다.
1.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주장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아니라 본래 '밧줄'이라야
더 걸맞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 주장에 대한의 근거는 아람어에서 낙타
즉 '가믈라' (그리스어의 '카밀로스')라는 낱말은
밧줄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장의 어감 상 바늘귀에는
낙타보다 밧줄이 더 어울린다는 주장입니다.
공관복음에 세 곳에 기록된 내용
(마 19:25, 막 10:25, 눅 18:25)에
등장하는 낙타(camel)는
그리스어 원문에
'카멜로스'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 그리스 사본 몇 가지에는
카멜론(대격/목적형) 대신 '카밀론'
(밧줄/거룻줄)으로 돼 있습니다.
또 공교롭게도 아람어 성경 역본인
신약 '페쉬타'는 아람어 '가믈라'
(굵은 밧줄)로 돼 있어
이 역시 은근히 '밧줄' 쪽
손을 들어 줍니다.
그래서 아람어에서 번역한 성경인
'람사' 역을 비롯한 일부 소수의 번역들이
'밧줄'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낙타보다는 밧줄이
덜 우스꽝스럽고 더 조화되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낙타의 털실로 짠
밧줄이라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밧줄' 쪽을 지지하는 가장 초기 사본들은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그루지야 사본(둘 다 번역판)들입니다.
대문자 사본(949년)도 있고,
비잔틴 전승의 소문자 사본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서기 1000년으로 꺾인 뒤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밧줄'로 번역된 번역판은 매우 희귀합니다.
무수한 원어학자들/성경학자들이 연구해 옮긴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낙타'로 돼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원문 사본들 중 극소수 사본만이
이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사본들조차
무척 후기의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약사본들이 희귀하던 중세 교회사 초기에
몇몇 '교부'들의 빈약한 추정들이 그런 설을
북돋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오리게네스의 '카테나' 단편(마태 19:24),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마 19:24 주석
'파트릴로기아 그레카'(=그리스 교부 문서) 72.429D),
테오퓔랔투스(마 19장. '파트릴로기아 그레카' 123.356D)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더 쉽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낱말
'유코포테로스'의 원형 '유코포스'는
"가벼운 수고로도"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어떤 살아 있는 존재에
쓰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즉 밧줄 같은 무생물엔
영 걸맞지 않는 뉘앙스의
낱말이라는 뜻입니다.
2. 바늘귀는 '침공문'(針孔門)이라는 주장.
그 근거로 본래 예루살렘에는
침공문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이 있었다든지
광야에 낙타 한 마리도 어렵사리 통과하는
골짜기의 협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고대 예루살렘에
'바늘귀'(=바늘구멍)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있었다는 주장인데
그 문으로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광야의 협곡에 낙타 한 마리가 통행하기에도
비좁은 지점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 됐습니다.
이 학설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합니다.
또 외경의 하나인 '페트로 복음서'에 따르면
페트로가 하나님께서 그런 권능이 있으심을 보여 주려고
어떤 '대문'을 초자연적으로 확장시켰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이나 그 정도의 협곡이 있었는지,
또 예수님이 특별히 그 곳을 집어 말씀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유대의 라삐 문서에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과장법은
우리가 이 문장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합니다.
바빌론 포로기 때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대 외전의 하나인 바빌론 탈무드
'바바 메찌아'(중간대문이란 뜻)에서
라삐 ‘쉐슅’이 라삐 ‘ 아므람’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님은 '폼베디타' 파의 한 분이신가 봅니다.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그밖에도 같은 문서의 38b에도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문서 '베라코트' 55b에도
"그들은 한 사람에게도 황금 종려나무,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란
구절도 있습니다.
비슷한 과장법이 폭 넓게
유포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리스 속담)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속담)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 23:2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종종 이런 은유를 통하여
신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예수님의 뛰어난 유머감각과
과장법이 빚어낸 다양한 표현중 하나로
해석하는 것이 덜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우선, 부자의 자기노력으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함을 이 과장법으로써
극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사람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마 19:26A).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짐을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서는
불가능도 가능해짐을 곁들여
강조하려 하신 것입니다.
(마 19:26b, 창 18:14 참조).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의 삭개오(눅 19:1-10),
아리마데의 요셉(마 27:57)과 같은 거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시대에도
그런 부자들이 있었습니다(행 4: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