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의 학교'에서 수련을 받고 부르는 희망 글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오늘은 그동안 내가 산책길에서 따서 모은 꽃잎들로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약간은 빛이 바랜 벗꽃잎, 아직도 빛깔이 선명한 분꽃잎과 장미 꽃잎,
그리고 책갈피마다 들어 있을 만큼 보아도 많이도 모아둔
네잎 클로버들을 보니 어찌나 반가운지!
잠시 고요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말린 꽃잎들 위로 내가 투병 중에 견디어온 시간들이 웃으면 지나갔습니다.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친지들의 얼굴들도 웃으며 지나갔습니다.
몸에 좋다는 식품, 영혼을 치유해준다는 음악, 운동할 때 신으면 좋다는 신발,
위로천사 역할을 해줄 거라는 인형들,
잠자리를 편하게 해줄 거라는 이불과 베개와 잠옷,
좋은 그림과 책들과 편지와 엽서 등등 온갖 종류의 선물을 보내주고,
보이지 않는 기도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많은 분들에게
나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호자 수녀까지 곁에 두어 병원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준
수도공동체에도 나는 사랑의 큰 빚을 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덮친 암이라는 파도를 타고 다녀온
'고통의 학교'에서 나는 새롭게 수련을 받고 나온 학생입니다.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는 여유,
힘든 중에도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
유머를 즐기는 여유, 천천히 생각할 줄 아는 여유,
책을 단어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는 여유를 이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아직도 수련 중이긴 하지만 이 학교에서 다시 보는 세상은
얼마나 더 감탄할 게 많고 가슴 뛸 일이 많은지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지요.
치유를 원하는 환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는 왠지 민망하여,
나는 오히려 다른 환자분들을 위한 기도를 더 많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감사만 하기에도 부족을 느끼는 나에게 친지들이 문병을 오면
하나같이 말보다는 더 깊은 눈빛으로 말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힘들어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재촉하는 사랑의 언어였으며,
함께 아파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연민의 기도였습니다.
몸은 많이 아프고 마음으로는 문득문득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순간에도 나는 이상하게
눈물은 한 번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나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듣거나
해 아래 빛나는 나무들을 보거나 해 질 무렵 기도하는
수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 흘린 일은 있어도,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 울지 않은 것만도
참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종종 칭찬해 주었습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됨을 삶으로 보여주며
죽는 날까지 희망에 대해 말했던
장영희 교수의 애장품인 고운 시계가 있는 방,
암에 걸린 것을 무슨 벼슬인 양 자랑하며 웃었던
화가 김점선의 그림들이 있는 방,
"나도 수녀님처럼 생각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테....."
하시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이 있는 방,
이 방에서 글을 쓰려니 새삼 다정했던 그분들의 생전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나의 그날은 언제일 것인가?
미리 헤아려보게 됩니다.
유난히 이별이 많았던 2009년이 지나고 201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옷을 입는 것은 희망을 입는 것이고,
살아서 신발을 신는 것은 희망을 신는 것임을 다시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전에는 그리 친숙하게 여겨지지 않던 희망이란 단어가
퍽 새롭게 다가오는 날들입니다.
희망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러야만 오는 것임을,
내가 조금씩 키워가는 것임을,
바로 곁에 있어도 살짝 깨워야만 신나게 일어나
달려오는 것임을 다시 배워가는 날들입니다.
치료를 받으며 힘겨웠던 시간에,
쉬는 시간에 노래처럼 흘러나왔던 시들을
희망은 깨어 있네에 담아서 내놓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동안 걱정을 많이 하며
나의 쾌유를 빌어주던 고마운 분들에게 드리는
하나의 답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부에서 5부까지는 시를, 6부에서는 그동안 기록했던 일기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단상들을 정리하여 넣었습니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나
우선은 최선을 다해 투병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심정으로 작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는 희망,
죽어도 부활하는 희망을 꿈꾸며 나의 또 다른 이름이
작은 희망일 수 있기를 겸손되이 기원해봅니다.
부족한 그대로나마 현재의 나의 모습을 글로써
여러분께 보여드리는 기쁨에 새롭게 감사드립니다.
정성 다해 책을 꾸며주신 <마음산책> 여러분께서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곧 80주년을 맞는 우리 수도공동체에 바치는고 싶습니다.
2010년 1월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희망은 깨어 있네」책머리에서 수녀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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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은 희망 수녀님! 하고 나직이 불러보니 수녀님의 환한 웃음이 화답해 주시는듯 하네요. 고통의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시고 작은 희망들이 모인 희망의 학교에 입학하신 수녀님의 출석부에는 '작은 희망 민들레 수녀님'이라고 써 있을까요? 수녀님 사랑합니다.
너무도 귀한 글귀에 감사드리구요,, 늘 행복하십시요,,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