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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총각의 운명
도봉산 '총각길' 뚫은 대학 동문 설악산 죽음의 계곡서 함께 숨져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목숨을 잃은 오준보.임경식.이희성씨의 묘.
대학 산악부에 들어가 세상천지 넓은 줄 모르고 산만 쏘아다니며 즐겨 부른 이 노래는 우리 산악회의 회가(會歌) 노릇을 했다.
우리는 이 노래를 함께 부르던 산친구들을 산에서 잃게 되면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이 노래로 달래곤 했다. 그 때마다 스무살 무렵에 이 노래를 합창하며 오르내리던 산정과 암벽에서의 뜨거운 우정과 맹목적인 열정이 고스란히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노래를 즐겨 부르던 산사나이들 중 상당수가 총각으로 산에 묻히게 됐을까.
이 노래를 지은 만수형만 해도 그렇다. 1969년 총각이었던 그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또다른 아홉 명의 산친구와 함께 눈사태를 당해 저승의 하얀 산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때 설악에서 만수형과 함께 묻힌 김종철형과 오준보형도 대학 산악부의 선배들인데 그들도 만수형처럼 미혼이었다. 죽음의 계곡 눈사태 현장에서 발견된 그 세 선배의 주검은 매우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수형과 준보형, 그리고 종철형 모두 목숨처럼 아끼던 '비브람'이라는 겨울 등산화를 가슴에 고이 품은 자세로 숨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가죽 비브람은 방수가 잘 안돼 신발 주인이 밤새 껴안고 자며 체온으로 말려야만 다음날 보송보송해져 이른 새벽의 겨울 산행에 신고 갈 수 있었다.
산악회 선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가슴에 품은 비브람' 얘기를 들으며 산을 배운 우리는 만수형의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본 적도 없는 종철형과 준보형, 그리고 그들과 함께 눈사태로 묻힌 십동지의 나머지 일곱명의 산선배들의 산행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등산화를 가슴에 품고 산의 품에 영영 안겨버린 산선배들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바로 '아름다운 저 산이 우리를 부를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순진무구한 총각의 자세를 뚜렷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의 이 노래는 모든 종교의식에서 불려지는 성가(聖歌)같은 힘을 발휘해 함께 노래하는 산친구들까지 종교적 희열에 빠지게 했다.
내가 대학 산악부에 들어가기 서너해 전 쯤인 1960년대 후반 만수형과 종철형, 그리고 준보형은 연세대 산악부의 이름과 함께 불리는 암벽코스 하나를 서울 도봉산 선인봉에 개척했었다.
요델산악회의 송준호씨가 개척해 '준호버트레스'라고도 불리는 요델버트레스 곁으로 선인봉 정상까지 시원스레 뻗어있는 그 코스에 개척의 주역이었던 세 선배는 왜 '총각길'이라는 뜻의 '바첼로(bachelor)코스'라는 영어 이름을 붙였을까.
자신들 모두 총각의 몸으로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 묻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한 총각으로 남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었을까!
설악의 눈보라 속…
박영배씨가 즐겨 부른 산노래에 끌려
겨울 토왕폭·아이거 북벽 동행 결심
우리는 설악 산행의 통과의례로 산행 전에 꼭 노루목을 찾는다.
그리고 십동지묘의 만수형과 종철형.준보형의 영전에 절을 올릴 때마다 우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저 산이 우리들을 부를 때… 얼음보다 차가운 우리 정열 태우러…'하던 만수형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말 속의 '아름다운 산'과 '얼음'이 바로 십동지묘에 절하고 되돌아보게 되는 설악산과 토왕폭이어서 우리는 그 산과 빙폭의 부름을 받고 또다시 설악으로 달려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다시 설악을 찾아간 우리의 절을 받은 것은 노루목 산기슭에 돋아난 잔디의 돌기가 아니라, 십동지묘 속에 간직된 '영원한 동정'이었다. 왜냐하면 묘에 재배하고 뒤돌아보게 되는 토왕폭은 동정의 순수함과 열정을 가진 총각에게만 제 몸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동정을 간직한 총각들은 토왕폭뿐만 아니라 범봉.천화대.석주길.공룡능선.용아장성.곰길.적벽 등 설악에 있는 여러 처녀지들과 사랑을 나누는 산행을 통해 서로 한몸으로 영원히 결합됐다.
그 사랑을 노래하는 순간을 위해, 그 아름다운 산이 우리들을 부를 때 산에 가서 다함께 어깨 겯고 노래 불러 총각이 되자는 뜻에서 만수형은 그런 노래를 만들었고 또 새로 낸 암벽코스에 '총각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만수형의 '아름다운 저 산'에 필적하는 산노래가 있다.
"산이 생명이라고 웃던 그 친구/ 어이해 눈보라 속 사라졌나 그 친구/ 눈덮인 설악산아 대답해 주려마/ 어이해 눈보라 속 사라졌나 그 친구…."
1977년 토왕폭을 초등한 박영배씨의 18번 산노래다.
물론 나는 박씨를 알기 전에 이 노래를 알고 있었으며 가끔 흥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가 가슴 저린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박씨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듣고나서다. 모든 노래에는 주인이 있게 마련인데, 이 노래야말로 박씨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 노래를 박씨에게서 처음 들은 날, 나는 어느 총각 산후배를 산에서 잃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박씨가 소속한 크로니산악회의 박석정씨가 서울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등반 도중 추락해 숨진 것이다.
그를 떠나보낸 아픔을 달래기 위한 술자리에서 나의 '아름다운 저 산'이라는 노래에 화답한 박씨의 노래가 바로 '어이해 눈보라 속 사라졌나 그 친구'였다.
종교를 갖지 않은 나도 그 노래를 듣는 순간에는 종교적 희열에 몸을 떨었다. 동시에 그 노래의 가사대로 눈보라 속에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박씨가 함께 가자는 겨울의 토왕폭과 아이거 북벽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나의 토왕폭 등반은 박씨의 노래가 이끈 것이다.
겨울 산간학교
1970년 토왕폭에 문 연 최고 등산학교
고상돈씨 등 유명 산사나이들 배출 요람
1969년 1월 토왕폭 하단 등반에 앞서 기념촬영을 한 에코등반대.
왼쪽부터 정영규.이상학.이일영.유창서.김종철씨.[김근원씨 제공]
'노루목 산모퉁이를 돌면 고개 드는 토왕폭/ 너는 언제나 낯익은 웃음을 보내지만/ 네 목소리를 기억할 수 없구나/ 무엇이라 얘기했던가/ 그 여름 우리의 가슴 깊숙이 무작정 내리 꽂던 그 물줄기 그 폭포 소리를 잊고야 말았구나/ 아, 무엇이라 얘기했던가. 이 겨울 오히려 네 가슴에 얼어박힌 그 한마디의 슬픈 순수가 하얗게 얼어 섰구나…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찬 어깨 여위어가다 그 하얀 몸 형체도 없이 사라져/ 다시 하나의 소리로 돌아갈/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는 설악을 떠난다'
우리의 설악산행은 언제나 토왕폭을 바라보며 시작됐다가 토왕폭을 뒤돌아보며 마무리짓는다. 설악에 들어갈 때는 승용차나 버스의 왼쪽 창가에 앉아 토왕폭을 바라보고, 산행을 마치고 나올 때는 그 반대편 창가에서 높이 솟은 함지덕 봉우리가 시야를 가릴 때까지 토왕폭에 눈길을 주며 설악과 이별하게 된다.
내가 토왕폭을 처음 만난 때는 1970년 한여름이다. 첫 설악산행에 나서 노루목 십동지묘의 이만수.김종철.오준보 선배의 무덤에 절하고 뒤돌아 보았을 때 토왕폭은 곧은 소리를 내며 토왕골의 깊숙한 골짜기로 물줄기를 끊임없이 쏟고 있었다.
다음해 겨울, 그러니까 71년 12월 하순께 외설악 일대에서 제2기 겨울산간학교가 문을 열었다. 연세대 산악부의 정원양(현 강원대 교수).김성혁(현 숙명여대 교수)씨와 함께 그 산간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하얗게 언 겨울의 토왕폭과 재회했다.
우리가 매달리기에는 너무 높고, 우리가 소리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겨울의 토왕폭을 바라보며 나는 앞에서 읊은 졸시 '토왕폭'을 썼다.
겨울산간학교는 토왕폭 사나이들의 영원한 모교로 부를 만했다. 학교를 다닐 땐 몰랐지만 졸업생 대부분이 토왕폭 사나이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이다.
토왕폭 제2등을 이룬 부산합동대의 권경업.이종양씨, 제3등의 손칠규씨, 광주 바자울산악회의 조덕형씨 등이 산간학교 동기였다.
70년 졸업한 1기생으로는 77년 한국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오른 고상돈씨(79년 알래스카 매킨리봉 등정 후 하산하다 추락사)와 최근까지 한국산악회 전무를 지낸 박봉래씨 등이 있다. 이처럼 산간학교는 개교와 동시에 최고의 등산학교로 자리잡았다.
당시 한국산악회장이었던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와 산악의학 분야 권위자인 이기섭 박사가 직접 설악의 교육현장까지 달려와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을 정도로 교육자나 피교육자 모두 등산교육에 열성이었다.
권금성산장 유창서씨
1989년 여름 전국의 산장지기들이 도봉산에 모였다.
서 있는 사람은 왼쪽부터 유창서(권금성).유용서(도봉산)씨, 앉은 사람은 왼쪽부터 사진작가 김근원씨, 함태식(피아골).윤두선(백담산장)씨.
[김근원씨 제공]
지금의 한국등산학교(교장 이인정)의 전신인 이 겨울 산간학교가 단시간에 등산교육의 명문으로 부상된 것은 막강했던 강사진 덕이었지만, 그 강사진과 학생들을 하나로 묶은 동력은 어디까지나 당시 난공불락의 아성을 키우고 있던 토왕폭의 빙벽에서 비롯되었다.
서울산악회의 안광옥씨가 학감을 맡고 한국산악회의 등반기술연구위원회에 소속된 이강오.한이석.민상기.이영수.김경배.박봉래.유창서씨 등이 강사진으로 포진된 이 산간학교는 당시 히말라야 마나슬루 제2차 원정대를 꾸리고 있던 김정섭씨가 최석모씨 등의 원정대원을 파견하여 위탁교육을 받게 했을 만큼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했다.
이들 여러 강사 중에서 수강생들로부터 가장 뜨거운 존경심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그 즈음부터 설악산 권금성산장을 관리해오고 있던 유창서씨다.
모든 정열은 전염되는 법이다. '토왕폭의 사나이'라는 정열을 간직했던 유씨는 자신에게서 빙벽등반 교육을 받던 모든 수강생들의 가슴에 토왕폭 초등자가 되리라는 열정의 불을 질러 놓았던 것이다.
유씨는 1969년 1월에 에코클럽의 동료 이일영씨와 토왕폭에 도전했었다. 나의 연세대 산악부 선배인 김종철.정연규(현 연세대 교수)씨가 지원했던 이 에코의 토왕폭등반대는 하단을 20여m 오르는 데 그쳤지만, 그 등반을 리더했던 유씨는 산간학교의 수강생들에게 토왕폭 등반을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과는 산쟁이의 인생 자체의 색깔마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토왕폭 등반에는 종교적 체험이라 불러도 좋을 감동이 있고 인간 존재 깊숙이 육박해오는 희열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그 희열은 때로 죽음에 이를 만큼 치열하면서 치명적이기도 했다.
산장지기에게 '수염'이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산장지기들 중에는 털보가 많다. 유씨는 그 털보파 산장지기의 수장쯤 된다.
유씨는 아버지에게서 두가지를 물려 받았다. 그 한가지가 억센 '힘'이며 나머지 하나가 바로 '털'이다. 노다지 광산을 가졌던 선친은 거부열전에 기록될 만큼 돈도 많았지만, 얼굴에 수염도 많았다. 그 수염을 9남매 중 셋째인 유씨에게만 고스란히 물려준 것이었다.
유씨는 외설악 구조대를 이끌고 여러 사람을 구한 공으로 82년에 자연보호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 서훈식 때 그의 유난스러운 수염이 문제가 되었다. 표창할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수염을 깎고 오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듣고는 화장실에 잠깐 갔다 오마 하고는 설악으로 줄행랑쳐 버렸다.
"쇠붙이 하나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맞바꿀 곰 같은 놈이 어디 있겠나."
그 일만 회상하면 이 곰 같은 산사나이는 권금성 산장에서 만큼은 자신이 가장 크게 웃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듯, 컬컬한 웃음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설악산 반달곰
1965년 도봉산 만장봉에서 추락한 한국은행 여직원을 유창서씨가 업고 하산하고 있다.
[김근원씨 제공]
'설악산 반달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창서씨의 무성한 구렛나루 수염은 권금성 산장을 지키며 설악에 살아온 지난 30여년 동안 설악산 명물의 하나로 자라났다.
하지만 유씨가 요즘처럼 마음 놓고 수염을 기르기까지 남모르는 고충이 많았다. 우선 어머니가 수염 기른 유씨는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설악에서 서울로 나들이 갈 때마다 면도를 해야만 했다. 어머니로부터 수염을 길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불혹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하관이 그 짙은 수염으로 까맣게 뒤덮이기 시작한 10대 후반부터 40세가 될 때까지 그는 '털보'와 '비털보'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아왔다. 그러자 유씨는 털보와 비털보 중 어떤 쪽이 자신의 참모습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70년대 후반에 주변 산악인들과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시모노세키(下關)항의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유씨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왜 남의 여권을 갖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여권에는 말끔히 면도한 '비털보' 유창서씨의 사진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은 지 두 달이 지나서야 발급받은 여권이었고, 그 두 달은 유씨가 다시 완전한 털보로 탈바꿈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일본인 직원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듣고서야 입국시키면서 그 직원은 이렇게 물었다.
"사진 속의 비털보와 지금의 털보 중 어느 게 진짜 당신이요?"
그런 궁금증은 자신의 수염처럼 밀어붙일수록 더욱 짙어져 수염 난 유씨의 얼굴에 늘 붙어 다녔다.
'제2의 고산자'라고 불리던 지도장이 고(故) 이우형씨와 서울 북한산의 우이산장에 갔을 때다. 물론 모친 때문에 말끔히 수염을 깎은 비털보의 모습이었다. 산장에서 쉬고 있던 여러 후배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우형씨의 배낭은 받아들면서도 다들 유씨를 본척만척했다. 그래서 두 뺨을 손으로 가려 보이자 '아이쿠 창서 형님, 설악에서 언제 나오셨습니까' 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배재고 재학시절에 산을 익혀 학교에 산악부를 만들었고, 에코클럽의 창립 멤버이자 동국대학 산악부 OB며 한국산악회의 열성 회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69년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설악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권금성 산장은 71년부터 관리해왔다.
자신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수염은 이제 설악에서 뺄 수 없는 명물이 되었고, 지리산 피아골의 함태식씨와 더불어 '털보파' 산장지기의 대부로 그를 키워 놓았다고 얘기한다면 수염을 제외한 유씨의 다른 신체 부위들이 발끈하며 화를 낼 지도 모를 일이다.
산장생활을 시작할 때는 케이블카도 없는 시절이었다. 내부 장식에 필요한 박달나무며 석유.식수.연탄 등을 설악동에서부터 권금성 산마루까지 져올리느라 그의 어깨며 허리, 그리고 장딴지 등은 성할 날이 없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