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에 있는 정토진종 본부에 있는 법당입니다]
*교토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민중 위해 정토 열어젖힌 아미타 화신의 본찰
일본에 도착한지 며칠이 지났건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통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 오는 밤 따뜻한 정종을 마시며 교토의 밤을 즐긴 것까진 좋았는데,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야외로 돌아다니는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 결국 가이드의 임기응변으로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교토역 주변에 위치한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였다.
그런데 덤으로 간 이 사찰에서 뜻밖의 횡재를 만났다. 가마쿠라 신불교를 대표하는 신란(親鸞, 1173~1262)이라는 스님이 이 절 어영당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이 사찰이 본래 신란 스님 집안의 가묘(家廟)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후 신란 스님을 종조로 하는 정토진종의 본산 역할을 하면서 사세는 전국 최고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 시절 교토 귀족들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사찰이 동서 반쪽으로 분할되었다. 당시 일본의 사찰, 그 중에서도 관사(官寺)들은 지방 다이묘들의 세력기반으로 활용됐고, 관승들은 사찰의 성직자 역할뿐만 아니라 지방 귀족들의 하급 관료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1864년 대화재를 당해 거의 폐허가 되었으나 메이지 시대 전국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날의 히가시혼간지로 재탄생하게 됐다.
혼간지는 13세기 중세 가마쿠라 신불교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이다.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불교사에 있어 혁명적인 시기이자, 현대 일본불교의 골격이 형성된 시대다.
지금부터 1000년을 거슬러 신란 스님이 활동하던 가마쿠라 시대로 떠나보자.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불교는 황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불교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모든 승려들은 국가에서 임명했고, 이들은 사실상 국가의 제사장 역할을 담당하는 관료 신분에 가까웠다. 게다가 당시 사찰에는 천황가와 귀족 자제들이 상당수 출가해 세속의 인간관계나 신분관계가 그대로 승가에 적용되었다. 천황이나 귀족 자제는 초특급으로 출세한데 반해 가문이 대단치 않은 가난한 집안 출신은 평생 하급승의 위치에 머물러야만 했다.
또한 관승들은 일반인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역할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관승에게는 공무원의 복무규정에 해당하는 제약이 있어 사청(私請)이라는 예외적인 초청이 아니면 일반인에 대한 개인적인 교화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민중 구제를 원하는 뜻있는 승려들은 승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3세기 초반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생 교화를 위해 관승에서 이탈하는 스님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그 중 선구적인 인물이 호넨(法然), 신란, 사이교(西行) 등이다. 이들은 둔세승이라 불렸으며, 하얀 옷을 입는 관승들과 달리 먹물을 들인 검은 가사를 입어 ‘검은 옷의 스님’이라고도 불렸다.
호넨이나 신란 같은 법 높은 스승들이 속세로 나가다 보니 자연 후학들도 이들을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승려로서의 보장된 지위를 포기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 이들은 나무아미타불이나 나무묘법연화경을 부름으로써 불국토에 갈 수 있음을 설파했다.
특히 신란 스님은 스승 호넨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전수염불(專修念佛)’ 즉 오로지 염불만을 외움으로써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신앙을 유포시켰다. 이는 교학이나 계율을 중심으로 하는 관승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윤리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이들 둔세승들은 기득권 불교세력으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1207년 조정에서 전수염불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둔세승의 선구로 꼽히는 호넨 스님, 그리고 신란 스님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줄줄이 유배를 갔다. 그 중 일부는 환속했고, 일부는 신란 스님처럼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면서 민중 교화 활동을 이어나갔다.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승려도 속인도 아닌 삶을 택했던 이들의 파급력은 그러나 엄청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고, 사무라이들의 참모 역할을 하던 ‘식자층 불교’가 아니라, 짧은 염불 하나로 나를 불국토로 이끌어주는 스승이 나타났으니 일반 민중들의 환호성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이 가마쿠라 신불교를 배경으로 일본에서 염불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두 종파 즉 정토종과 정토진종이 탄생했다. 이들은 귀족불교를 대표하는 천태종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아미타불의 자비로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민중들에게 일심(一心)으로 염불할 것을 권유했다. 호넨 스님의 제자들은 정토종이라는 이름으로 종파를 이어나갔으며, 신란 스님의 제자들은 정토종으로 부터 독립하여 ‘정토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이다.
현재 정토종 총본산인 지은원 어영당에는 호넨 스님이, 정토진종 총본산인 히가시혼간지의 어영당에는 신란 스님이 종조로 모셔져 있다.
어쨌든 이 두 정토 계열 종파의 탄생은 종래의 귀족불교가 민중 속으로 투입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쿠라 시대(1185~1333) 전체로 확대되었고, 이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완전히 일본 민중 속으로 뿌리를 내렸다.
신란 스님은 가마쿠라 시대 둔세승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신란 스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메이지 시대 ‘정토 신앙’과 ‘비승비속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신란 스님의 역할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던 이유도 사실 배제할 수는 없다.
신란 스님은 교토의 중급 귀족인 후지와라씨 일족으로, 1173년에 태어났다. 9세때 출가해 히에이잔 엔랴쿠지의 관승이 되어 천태종 수행에 힘썼다. 29세 되던 해 히에이잔에서 내려와 교토의 한 사원에서 칩거하면서 기도를 하던 중 어느날 꿈에서 쇼토쿠 태자를 만나게 되었다. 쇼토쿠 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깊은 감화를 얻는 신란 스님은 호넨 스님의 문하로 들어갈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쇼토쿠 태자를 만난 스님은 귀족 승려로서의 명예보다는 참다운 출가자로서의 삶, 보다 가치로운 수행자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아닐까.
호넨 스님 밑에서 수행을 쌓고 있던 1207년 2월 조정에서 전수염불(專修念佛) 금지령이 내려져 신란 스님 또한 에치고로 유배를 간다. 1211년 석방된 후 히타치노로 이주해 20여년간 도코쿠[東國] 지방 교화에 힘쓰면서 살아갔다.
1232년 교토로 돌아와 1262년 91세로 입적할 때까지 신란 스님은 『교행신증』 등의 저술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란 스님은 에신(惠信)과 결혼을 하여 네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삶을 살았다. 스님의 삶에 대해 일부에서는 계율을 무시한 혹은 계율에 무지했던 삶이라 평가내리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오로지 ‘지극한 신심’으로 불교를 믿고 ‘지극한 신심’으로 전파한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부분은 일본 불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대부분의 종파가 신란 스님의 비승비속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스님이 결혼을 하는 풍습은 현재 일본불교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신란 스님의 딸 각신 비구니(1224~1283)는 신란의 묘당과 토지를 문도들에게 넘기고 대신 묘당관리인 유수직을 자손이 대대로 이어갈 것을 인정받았다. 그 묘소가 점점 사원의 모습을 갖춘 것이 히가시혼간지이다.
[탁효정기자의 일본불교순례기]
첫댓글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찰이자 성덕종의 총본산인 법륭사의 창건주 쇼토쿠 태자(성덕태자)는 경을 배울 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꿈에 불보살님이 나타나 풀이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덕태자를 모신 곳을 몽전(夢展)이라고 한답니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 성왕의 후신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불사를 많이 도왔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