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인과응보[토정 이지함]’의 유래
조선시대 토정 이지함 선생이 초가을 낮에 오수를 즐기고 깨어나 방문을 탁 - 쳐 열고 마당에 가래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마당에 있던 배나무 밑에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었는데, 문 여는 소리에 놀란 까치 한마리가 배나무 가지에서 푸드득 날아오르고, 그 바람에 배 하나가 한 계집아이 등에 업혀 잠든 아기 머리위에 떨어져 그만 그 애기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토정 선생은 아무리 의도하지 않고 우연하게 벌어진 일이었어도, 자신이 문을 탁 친 것이 ‘인(因)’이었고, 아이의 죽음이란 ‘과(果)’가 맺혔으니, 반드시 그 ‘응보(應報)’가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토정 선생은 법적으로는 아무 책임이 없어, 그로인한 벌을 받지는 않겠으나 자신의 후손 중 누군가에게 그 앙화(殃禍)가 미칠 것임을 직감하고, 그 후손에게 서신을 써서 밀봉하고, 겉에,
“이 글은 큰 재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개봉하라.”
고 써서 후손에게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토정의 후손 중 누군가가 너무 궁핍하여 관곡을 차용해 끼니를 해결했는데, 기일 내에 갚지 못하고 몇 해를 반복하다보니, 수백 석으로 누적되자 관가에 잡혀가 태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형틀에 묶여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대로 전해오는 조상님 유서가 떠올랐습니다.
높이 앉아있는 군수에게 토정 할아버지의 유서 얘기를 하며 태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걸 보고 싶다고 하자, 군수 역시 유명한 토정의 유서라 하니 호기심이 일어 그리하라 허락했습니다.
급히 가져다가 봉투를 뜯으니, 속에 또 밀봉을 하고 이중 봉투 겉에,
“군수 ㅇㅇㅇ가 개봉 하시오.”
라고 현재의 군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옆에서 보던 이방이 그 봉투를 사또에게 전했고, 군수가 뜯어보니,
“어서 급히 마당으로 피하시오.”
라 쓰여 있어서 영문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서는 순간 천정에서 서까래 하나가 부러지며 떨어져 방금까지 사또가 앉아있던 의자가 박살이 났습니다.
군수가 정신을 차리고 마저 읽어보니,
“내가 그대를 살렸으니 내 손자를 살려주시오,”
라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토정 이지함이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은 어떤 모양으로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게 되면 자신이나 후손이 그 화를 받게 된다고 하시며, 남을 억울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