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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진목사, 삶과 종교생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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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초대석 초종교 평화세계의 꿈을 심는다. 청파동 본부교회, 문형진 목사의 삶과 종교활동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이른바 통일가에 잔잔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교단 창립기 이후 활약했던 1세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2세들이 선교와 기업 경영 현장에서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물론 그동안 통일그룹 내에 상당한 세대교체가 이워졌으나, 최근 2세들의 전면 배치가 단행되면서 초창기 못지 않게 활기가 넘치고 있다. “생활 속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며, 승리, 깨달음, 평화의 정신 전하는 목회활동 펼칠 것”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의 막내아들인 문형진 목사가 지난 12월1일 서울 청파동 소재 본부교회 목사로 취임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한국 가정연합의 상징인 본부교회는 그 동안 총재가 직접 목회했던 유서 깊은 곳이며, 역대 협회장이 담임 교회장으로 겸임해온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형진 목사가 취임하면서 선교 일선에 새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물론 세대교체는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문 목사는 미국 뉴욕 웨체스트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신학대학원에 세계종교학을 전공하는 등 정통엘리트코스를 밟으면서 종교지도자로서 신망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성공적인 목회 실험 문형진 목사는 지난 7월부터 서울 마포교회에서 ‘천일국 식구 예배’라는 이름 아래 첫 목회 경험을 쌓았다. 전통적인 예배와는 사뭇 다른 이 예배는 크게 환영의 장, 찬양과 감사의 장, 설교와 다짐의 장 등으로 나눠 진행된다. 특히, 대부분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는 기존의 예배형식과는 달리 목회자와 신도들이 호흡하는 역동적 형식을 지향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천일국 식구 예배’는 우선 부부사역이 특징이다. 그는 예배 시작 30분전부터 아내인 이연아 목사와 함께 예배에 참석한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한 미소와 사랑의 마음으로 환영하며, 예배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로 일상에서의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축원하고 환송한다. 또한 그는 예배 프로그램 중 제1장인 환영의 장을 사모와 함께 진행한다. 이 예배가 돌풍을 일으킨 것은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신도들은 VIP다 △매일 매일의 삶에 조금이라도 더 승리하고,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더 평화롭게 살아가자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자는 등의 핵심가치 때문이다. 또 이 예배는 교회 신도와 가족 그리고 영계에 있는 조상을 위한 정성을 들이기 위해 성애초를 밝히고, 찬양 사역을 강화했다. 명상도 예배의 특징, 두 차례명상 가운데 첫 번째 명상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며, 마지막 명상은 설교 후에 그 날의 메시지를 하나님을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다. 한편 한 주일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한 신도를 우해 일대일로 축원해주는 시간을 갖고, 이어 영계와 지상의 가족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전통 예배에서는 볼 수 없는 의식이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먼저 눈을 감고 영계에서 항상 협조하고 있는 조상과 가족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이어 지상에서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소중한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때 가족이 함께 예배에 참석했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준다. 물론 예배의 핵심은 설교이다. 그는 결코 설교 시간에 복잡하고 이론적인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진리의 말씀을 바탕에 두되 실생활에서 그가 직접 경험하고 실천하면서 깨닫게 된 것을 전달한다. 마포교회는 ‘천일국 식구 예배’를 통해 많은 신도가 감동받고 변화됐다. 주일예배는 1부에서 4부로 확대되는 등 단기간에 급성장했다. 문 목사는 이 예배를 통해 추진하고자 한 것은 교회 갱신이다. 그는 교회 목회 영역 전반에 걸쳐 새로운 문화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문 목사가 마포교회에서의 4개월간의 사역을 마치고 12월1일 그가 본부교회로 옮긴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가 가정연합 2세대 지도자도서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 줄 것으로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순수 열정, 겸손의 감동 통일가에서는 문형진 목사에 대한 신뢰가 남다르다. 그것은 순수한 열정과 그가 신도들을 대하는 자세 때문이다. 늘 낮은 자세로 신도들을 대하고, 그동안 교회 발전을 위해 고생한 선배들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신도들에게 늘 겸손함 모습으로 다가간다. 그가 신도들에게 각인된 대표적 겸양의 사례는 세족식이다. 2006년 2월 5,000여 명의 신도가 모인 강연회에서 ‘말씀을 많이 하는 것 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면서 단상 아래로 내려와 초창기 원로 신도 한 분과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신도에게 직접 발을 씻겨준 뒤 오랫동안 포옹하면서 그 동안 수고해온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단상으로 다시 올라와 울먹이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매일 열심히 생활하시는 모든 분들, 참부모님 심정 안에 하나 됩시다”라고 힘주어 강연했다.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하는 그에게 신도들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고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문선명 총재는 공적인 일에 매달리면서 자녀들을 돌 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에게는 늘 부모 옆에는 신도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부모를 빼앗겼다는 원망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 목사는 차츰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뜻을 읽게 되고, 신도들의 노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 문 총재의 가르침을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보다는 신도와 같이 제자 된 자리에서 보게 되면서 상당한 변화가 오게 된 것이다. 문 목사는 매달 1주일씩 일본의 교회를 방문해왔다. 고생하는 일본교회 신도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서다. 일본교회 가운데 상당수는 숙박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40여 교회를 방문하는 가운데 어떤 교회는 샤워시설이 없어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어떤 교회에서는 사무실 바닥에서 침낭생활을 하며 현지 신도들과 함께 격의 없는 만남을 가졌다. 물론 아침이나 혹은 점심은 햄버거로 해결하는 때도 많았다. 문 목사는 자신은 형제들 가운데에서 제일 공부를 못했다며 아무 스스럼없이 말한다. 종종 우스갯소리로 “형님, 누나들이 수수밭(성적표에 제일 높은 점수 ‘수’)을 키울 때 자신은 옥수수밭을 키웠다”라며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어린 시절 공부에 관심이 없어 좋은 성적표를 가져오는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주변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칭찬받는 아이였다. 동년배나 어린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그들을 늘 보호하고,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통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자주 어울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A학점 받고 일류대학을 다니는 형들을 본받아 다시금 공부에 전념하면서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특히 그는 2006년 5월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졸업할 당시는 통일교를 대표해 졸업생 연설과 축도를 할 정도로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했다. 동양사상 심취, 세계종교지도자와의 교류 문형진 목사는 대학시절부터 동양사상에 심취했다. 현재 그는 외형적으로 20대의 여느 청년과 다름없는 외모를 하고 있지만 2000년부터 7년 동안 삭발을 하고 승려들이 입는 개량 한복을 입고 다녔다. 이 기간 새벽 2시 30분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와 명상을 하며 깊은 내면의 세계를 탐구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세련된 양복과 멋있는 헤어스타일 대신 깨끗이 면도된 머리에 아시아 전통 법복을 입고 있는 나의 변화된 모습을 많은 사람은 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저 ‘세상에, 그에게 무슨일이 있는 거지? 갑자기 스님이 되었네’라든가, ‘방해하지 말자, 무술을 너무 좋아할 뿐이야. 그저 또 다른 변화이겠지’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문형진 저 ‘대머리와 딸기’에서 인용) 그가 삭발하고 긴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참선과 명상에 정진하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 부친과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문 총재를 따르는 일부 교회 지도자는 그의 종교적 수행법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물론 문 목사조차도 자신의 이러한 수행에 대해 부친인 문 총재의 가혹한 질책까지도 각오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 총재는 깊은 사랑과 이해로 품어 주었다. 그리고 문 총재는 “계속 공부해라. 세계의 모든 종교를 공부해라, 네가 모든 종교를 이해하고 품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말하자면, 99.999%의 신도들이, 심지어 아버지와 지극히 ‘가까운’신도들이 아버지가 나의 이러한 공부에 열중하고 승려 같은 모습을 보고 심하게 질책했을 거라고 믿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에 기뻐하셨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종교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게 됐고 아버지에 대한 신회도 높아갔다. “나는 아버지가 주신 자유로움, 원대한 자유를 발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이 근본주의자적인 이념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참된 길을 발견했음을 인정해주고 대화도 중 깊은 우주적 사랑을 보내 주신 한분, 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어떤 한 종교를 공부함에 있어 종교 지도자의 이념적 발달 과정을 보는 것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아버님께서 원리나 초창기 시절의 말씀을 넘어 살고 계시며 계속 발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고 계심을 잊고 있다.” 문 목사는 이러한 부친의 깊은 배려와 사랑에 크게 감명을 받게 됐고, 이때부터 문 총재를 육신의 아버지만이 아닌 진정한 영적 스승으로 고백하게 된다. 이후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이어 동 신학대학원에서 세계종교학을 전공했다. 특히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가톨릭계 페이필드 대학을 다닌 것을 계기로 신부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하버드대 대학원에 다닐 때는 한국에서 유학 온 일미 스님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유학 온 다양한 종교계 인사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하버드신학대학원에서 세계종교학을 공부한 것을 계기로 세계 각국 성지를 순례했는가 하면, 2005년 12월 말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직접 친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행보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추구하는 초종교, 초교파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문 총재는 그에게 두 가지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하버드 대학원을 마치고 경기도 가평의 청심신학대학원에 강의를 하러 가게 되었을 때, 문 총재는 “교회 신도들 앞에 설 때는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스스로가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이 말씀이 바로 첫 번째 가르침이다. 두 번째로 그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한 번민을 부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질문에 대해 문 총재는 “정성을 계속 쌓아라”라고 당부했다. 이는 영적인 수행의 길,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교만한 마음, 높은 지위에 대한 욕심보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신 ‘본연의 자아’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는 부친의 귀한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며 새벽 정성을 쌓고 있다. 갈등과 수행, 부모님에 대한 감사 세계적 종교지도자인 문선명 총재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킬까. 문 총재의 자녀는 어떻게 성장할까. 문 총재가 유명한 것과 비례해서 세간의 관심은 자녀들에게도 쏠린다. 문 총재는 공식적인 집회를 주관하는 것 외에도 늘 새벽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신도들을 지도한다. 그래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극히 적다. 그래서 자녀들의 눈에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문형진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비록 내 아버지였지만 보통 사람들이 각자의 아버지에 대해서 느끼는 그런 정다움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1년을 통틀어 1주 내지 2주 동안만 부모님을 볼 수 있었으며 그것도 아침 시간에 잠깐 인사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결국 불만이 높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는 부모님을 어릴 때는 항상 진지하게 존경하지는 못했다. 사실 사춘기 시절 ‘신성한 아이’ 신드롬으로 고생하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1979년 9월 26일 뉴욕의 웨스트 체스터에서 문 총재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열한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그 때부터 신도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러다보니 마음대로 뛰어 놀 수도 없었고, 늘 부자유스러운 생활 속에 갇혀있었다. “우리들은 계속하여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물 한잔을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갈라치면 복도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구 나를 찍고 있다! 나는 이 ‘침입자들’을 공격하고 싶었으나,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들을 만족시켜 주어야만 했다. ‘당신들은 누구야? 난 누구도 이곳에 초대한 적이 없는데, 누구에게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다가와 자기들의 눈의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일이 없단 말이야.’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곤 했다.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달란 말이야’”(‘대머리와 딸기’ 중에서) 문형진 목사에게 인생의 전환기를 가져다준 사건은 1999년 늘 함께 지내며 서로 외로움을 달래던 형(문영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영진씨는 “대부분 같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으며, 함께 도리토 칩을 먹으며 같은 비디오 게임을 하곤 했었다”는 형이다. 또한 “영진 형의 죽음은 내 인생에 있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형의 죽음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으며 오늘까지도 그가 했던 말들이 내 안에 공명되어 울리고 있는데, 그것이 나를 참회와 고행 그리고 수행의 길로 내몰았다”고 말한다. “영진 형은 언제나 착했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항상 순종했으며 학교 공부는 물론 모든 일에 성공적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게으른 놈이었다. 학교에서 낙제하여 퇴학당한 놈이었다. ‘패배자’로 불리기도 했으며 ‘문지기’라고 놀림을 당하던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가 아닌 그를 데려가셨는가?!, 내가 갔어야 했는데! 바로 나였어야 했는데, 나였어야... 나는 중얼거리며 어느새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대머리와 딸기’중에서) 그리고 두 형제는 자주 종교나 아버지에 대한 시각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 때마다 영진 형은 아우를 이끌어 나갔다. “위선자가 가장 나쁜 거야! 위선의 탈을 벗어, 부모님을 보다 잘 섬겨야 해, 효자가 되어야지. 더 잘하란 말이야. 아버지에게 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어 아버지는 벌써 80세가 넘으셨다고! 그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해, 네가 변화하는 것이 더 가능한 거라고.” 물론 형의 이러한 말에 반발도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그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으며, “내가 위선의 모습을 보일 때 나 자신을 보다 정직한 자리로 되돌려 놓곤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몰고 오는 깊은 상실감과 절망감,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상처를 통해 새롭게 내적인 언약을 하게 되고 더욱 종교와 신앙에 몰두 하게 된다. 그리고 인생을 뒤흔드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통일교인’ 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고, 문 총재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성취해내신 존경하는 아버지”에 불과한 분이 아니라 “영적인 스승이요, 안내자”로 다가왔다. 특히 선불교의 스승이 전해준 우와 ‘딸기 이야기’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원수(쥐)에게도 딸기를 나눠주어야 한다는 부친의 참사랑의 가르침에 대한 부친의 통찰을 확인하면서 문 총재의 위대성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고백한다. 통일그룹의 미래를 본다 문형진 목사의 취임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2세들의 전진 배치가 갖는 의미도 크지만 앞으로 그들에게서 새로운 역동적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문 목사는 젊지만 선후배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열정과 실력, 실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겸손한 자세 때문이다. 그는 원로신도들만 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새벽기도를 오랫동안 쌓아왔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등 외국어 실력도 갖추고 있다. 그는 앞으로 총 12개 국어에 능통 할 수 있도록 외국어 공부를 해서 직접 세계신도들과 대화를 하고자 하며, 또한 세계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하며 교류를 통해 초종교 활동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문 목사는 지난 수년간 닦아온 정성의 노하우를 미국 뉴욕의 UTS(통일신학대학원)에서 ‘천화당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국에서는 청심신학대학원에서 ‘천일국 백성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터득한 명상수행을 신앙생활에 접목시켜 ‘참사랑’으로 거듭나게 하는 수련이다. 그는 2006년 5월 대학원 졸업을 마치고 부친인 문 총재의 부름을 받아 한국으로 이주한 후 12월1일 청파교회목사로 정식 취임을 하기 전까지 비공식적으로 지금껏 자신이 닦아오고 쌓아온 모든 내용을 직접 현장을 돌며 실천하고 있다. 지난 7월29일 마포교회에서 70여명의 신도를 놓고 첫 예배를 시작했지만 17주가 지나며서 1부 예배는 4부 예배로 확대됐고, 전체 참석 예배 인원은 평균 6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급성장한 배경은 문 목사가 신도들의 가정방문과 개별접촉을 통해 그 동안 응어리졌던 마음을 풀어주고 진실된 마음으로 신앙지도를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장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필리핀 부인들을 비롯한 외국인 신도들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 교육시키고 토요일 오후에는 영어예배를 집전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나고 자란 탓에 한국말이 서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가 어렵게 찾아낸 쉬운 한국말로 진행하는 설교는 순수하고 진정성이 담겨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목회자로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 “전통적인 목회는 죄를 회개하자는 내용이 많다. 저는 그보다는 죄인 의식에서 벗어나 생활 속에서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VIP)이라는 생각으로 승리(victory),깨달음(Iumination)평화(Peace)의 정신을 전하는 목회활동을 펼치겠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개신교적 전통이 강하지만, 그는 앞으로 동양적 명상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종교는 대부분 배타적이다. 그러나 문 목사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를 부모로 모시고 있지만, 불교, 유교, 도교 등 동양종교와 철학을 공부하는 등 타종교까지 시야를 넓혔고, 이들 종교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통일교인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문 총재가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벌여왔던 종교연합 운동을 이어받아 초종교 초교파적인 종교 지도자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 역시 “앞으로 초종교적인 활동을 통해 종교의 갈등과 싸움을 그치고, 세계평화를 모색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동안 1954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설이후 문 총재가 추구해온 종교연합과 신앙 혁신운동 등 각종 현안 해결이 문 목사를 통해 더욱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2세들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각계에서 긍정적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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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퍼갑니다.감사합니다.
감사히 담아 갑니다♡
저도 퍼가요~감사!!!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글 담아갑니다. Tha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