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佳室) 본당은 경북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대구대교구 소속이며 설립일은 1894년 9월경이다. 초창기의 이름은 가실 본당으로 후에 행정구역명을 따라 낙산(洛山) 본당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가실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주보는 성녀 안나이다.
본당 설립과 정착 박해가 끝난 뒤 경상도 지방의 전담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에 거주하다가 1887년 대구 인근의 새방골[新坊谷]로 이주한 뒤, 신나무골에는 그의 보좌인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한때 거처하다가 각각 전주와 부산으로 부임하였다.
그 뒤를 이어 1894년에 입국한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가밀로 신부는 그 해 6월 신나무골에 와서 머물며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전교하였으며, 9월경 가실(佳室, 왜관읍 낙산동 蘆湖)로 이주, 김회두(金會斗, 베드로) 소유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성당으로 삼고 전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파이야스 신부가 담당한 전교 지역은 칠곡을 비롯하여 성주, 선산, 문경, 상주, 함창, 군위, 안동, 예천, 의성, 김천, 거창, 안의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 등지였으며, 공소는 17개소. 신자수는 777명이었다. 파이야스 신부는 이후 1898년 6월까지 이곳에서 전교하다가 황해도 장연의 두섭[道習] 본당으로 전임되고, 제2대 본당 주임으로 김성학(金聖學) 알릭스 신부가 부임, 3년 간 전교 활동을 하다가 1901년 김천 본당을 분리 설립하면서 그곳으로 이임하였다.
김 신부의 뒤를 이어 가실에 부임한 신부는 3대 즈와요(Joyau, 玉裕雅) 알퐁소 신부였는데, 그는 1903년에 성당을 증축하는 한편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며,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부임 당시 800여 명이던 신자수를 1,400명 정도로 증가시켰다. 그러던 중 나병에 걸려 1907년 1월 12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교구장을 맡고 있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이해 초에 입국한 소세(Saucet, 蘇世德) 히폴리토 신부를 제4대 본당 신부로 임명하였고, 그는 5월에 가실로 부임하였다. 이후 가실 본당은 1911년 4월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 설정됨에 따라 새 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소세 신부는 이 해 7월 3일 대구 계산동 본당의 로베르 신부가 치료차 프랑스로 출국하자마자 계산동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가실을 떠나 대구로 이임하였다. 그렇지만 계산동 본당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가실 본당의 신자들도 계속 방문하였으며, 그러다가 1912년 5월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하던 투르뇌(Tourneux, 呂東宣) 빅토리노 신부가 제5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분할과 변모 투르뇌 신부는 1912년 5월 29일 가실 본당에 부임한 뒤 1924년 몇 개월 동안 임시로 교구 당가를 겸임함으로써 델랑드(Deslandes, 南大榮) 루이 신부에게 잠시 가실 본당을 맡긴 외에는 1944년 3월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일제 시대 대부분을 이곳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으며,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1922년에는 문경의 점촌(店村) 본당과 상주의 퇴강(退江) 본당 분할로 김천 본당과 함께 관할 구역이 축소되었고, 게다가 신자들이 대구로 이전하면서 신자수가 줄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자들과 함께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28일에는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Giardini)의 집전으로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함께 투르뇌 신부는 왜관(倭館) 지역의 전교에 힘써 1928년 2월부터 공소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축을 시작, 11월에 이를 준공하고 다음해 5월에는 왜관 본당을 분리하였다. 세 번째의 자본당인 왜관 본당의 설립은 가실 본당의 위축을 가져오게 되었다. 왜관은 새 중심지로 발전하는 추세에 있었지만 가실은 시골 본당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이에 드망즈 주교는 1933년 가실 본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 본당으로 설정하였다. 또 투르뇌 신부가 1935년부터 베르트랑(J. Bertrand, 韓聖年) 줄리앙 신부를 대신하여 자주 교구 당가 일을 보면서 본당 일이 종종 소홀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943년 2월 지병으로 은퇴하여 주교관에서 휴양하던 중 사망하였다.
투르뇌 신부가 은퇴하면서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마산에 있던 베르몽(Bermond, 睦世永) 줄리앙 신부였는데, 이때부터 ‘가실 본당’은 ‘낙산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일제 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대구 남산 본당에 감금했으므로 4월 13일자로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가 왜관 본당에 부임, 낙산 본당의 제7대 주임 신부를 겸하였다. 이때부터 해방, 6 · 25 동란을 전후하여 본당의 주임 신부는 자주 교체되었으며, 한때는 왜관 본당 주임이 낙산 본당 주임을 겸하기도 하였다.
즉 베르트랑 신부가 다시 제8대 주임으로 부임(1945. 8)하였다가 부산 청학동 본당으로 이임(1946. 1)하면서 진주 장재리(長在里) 본당에 있던 안국목(安國牧) 마가리노 신부가 제9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안 신부가 경주 본당으로 전임(1947. 6)되면서 계산동 본당 보좌였던 신상조(申相祚) 스테파노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신 신부가 1년 만에 다시 계산동 본당 보좌로 전임(1948. 6)되고, 함양 본당에 있던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가 왜관 본당에 부임하여 낙산 본당의 주임을 겸하다가 낙산 본당 주임으로 임명(1949. 10)되었다. 이어 김 신부가 밀양 본당으로 전임(1951. 4)되고, 밀양에 있던 류선이(柳善伊) 요셉 신부가 제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낙산 본당은 이후 1952년 6월, 왜관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동시에 류 신부가 구마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베네딕도회의 최영호(崔榮浩) 비안네 신부가 제1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53년 11월, 점촌 본당으로 이임하였다. 이때 본당의 제14대 주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휴전 후 재입국한 베네딕도회의 뮐러(A. Muller, 모안세) 안스가리오 신부였으며, 동시에 새로 서품된 김성동(金聖道, 모이세) 신부가 초대 보좌로 임명되었다.
뮐러 신부 재임시에 본당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는데, 그 예로는 1954년 12월 8일에 개최한 본당 설정 60주년 행사, 이듬해 6월 12일 본당 최초로 실시한 성체 거동 행사를 들 수 있다. 또 이때부터 본당은 주임 신부의 이동이 적은 탓에 안정을 가져오게 되었고, 1970년대 초까지 약 1,300여 명의 신자수를 기록하였다. 그 결과 제18대 주임 이동식(李東植) 베네딕도 신부 재임기인 1968년 9월 성체회 분원을 설립했다가 1970년 8월에 이를 철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 현상이 심해지면서 젊은 층 신자들이 크게 줄어드는 동시에 신자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600-700명의 교세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본당 신자들의 활동이 위축되어 왔고, 활동 단체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1986년 1월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는 등 신심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하였고, 소공동체 활동과 친교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후 본당은 1986년 2월 28일, 왜관 감목 대리구의 폐지로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으로 변경되었으며, 1990년 10월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성당 정면 마당에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봉헌한 ‘순교자 성순교가문의 신앙유적비’(成舜敎家門 信仰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가실 성당 자리가 본래 경신박해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난 갔다가 체포되어 1861년 상주에서 순교한 성순교의 기와집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성순교는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성섭의 증손자로 추사 김정희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는 젊은 시절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홀로 남아 세계 일주를 했는데, 이스라엘까지 다녀왔다는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상주로 가기 전 성순교는 가실 집을 외가에 맡겼는데, 주인이 순교하자 집은 주인을 잃어 버렸다. 1894년 신나무골에서 가실로 옮겨 온 파이야스 신부가 이를 매입해 첫 번째 가실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투르뇌 신부는 1922-1924년 사이에 현재의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성당을 건립했다. 설계는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을 지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담당했다. 프와넬 신부는 중국 기술자들에게 벽돌을 한 장씩 굽도록 하여 잘 구워진 것은 성당을 짓는데,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데, 품질이 나쁜 것을 버렸다고 한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옛 사제관 내 유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유물관에는 공의회 이전까지 성당 제대 위에서 사용하던 십자가와 감실, 중앙 제대 왼쪽과 오른쪽에 설치돼 있던 성모성심 제대와 예수성심 제대의 감실, 촛대 등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본당 설립 초창기 신자들의 교적은 물론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친필 공문 제1호 등 교회사의 중요한 사료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본당이 한창 번성하던 1960년대 신자들 교육용으로 사용하던 환등기(전기가 없던 시절 등불을 이용해 그림을 볼 수 있는 독일식 환등기), 밍크본이란 화가가 1930년대에 그린 43장의 성서 그림, 미사주를 채즙하던 포도 착즙기, 성체를 만들던 숯 제빵기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실 성당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략을 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 병원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훼손되지 않아 옛 유물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당 앞쪽에 위치한 ‘성녀 안나상’은 본당의 주보성인이기도 하지만 192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수입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안나상이다.
오랜 역사와 어우러진 성물들은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새롭게 제작되었다. 동양화가 손석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와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작가 에기노 바이너트(Egino Weinert)가 제작한 유리화가 성당을 감싸며 고유의 색을 뿜어내고 있다. 10개의 창문에 설치된 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이다. 삼왕의 경배부터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까지 총 40가지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한국에서 11번째, 대구대교구에서 계산 성당에 이은 두 번째이자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인 가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옛 사제관과 함께 2003년 4월 1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 대구대교구는 2005년 2월 2일자 공문을 통해 낙산 본당의 이름을 옛 이름인 가실 본당으로 다시 변경하였다. 가실 본당은 설립 당시 ‘아름다운 집’(佳室)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 ‘가실 본당’으로 정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산(洛山) 본당’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어 왔었다. [출처 : 관련 신문 기사 참조(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위치한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3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들의 애환은 오늘날 후손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하물며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을 기억한다면 순례자들은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이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구덩이 속에 묻혀 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됐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월배동 감천리의 천주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 19일 비로소 대구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김해에서 태어난 허 야고보는 본래 중류 계급으로 생활이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846년 입교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재물에 어두운 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났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彦陽) 산골에 잠시 머물다 울산에 있는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으로 피난해 여기에서 이 베드로, 김 루카를 만나 순교의 길을 예비했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 루카는 어려서 입교해 신앙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울산의 죽령 교우촌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 죽령 대재 마을의 회장이었던 이 베드로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멀리 경상도로 내려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울산 대재 공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꿀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며 전교에 힘쓰던 그는 다른 두 사람을 만난 후 또다시 박해를 피해 먼 길을 떠났다. 여러 날 끝에 경주 산내면 단석산에 있는 한 석굴(범굴)을 발견하고 이를 천혜의 피난처로 삼아 세 가족은 모두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나라로부터 더욱 혹독한 체포령이 내려져 마침내 1868년 이들은 포졸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이들은 즉시 영장(營將)의 심문을 받았다. 이들 3인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의 80리 길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큰 칼을 목에 차고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한 울산 장대에서 그들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목을 떨구었다.
신앙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향을 떠나 어린 자식과 힘없는 부녀자들을 이끌고 수십 수백 리 길을 쫓겨 다닌 이들은 오히려 순교함으로써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 터덜거리던 현세의 고달픈 삶은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은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을 받게 되었다.
복자 성당은 대구대교구가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교구민의 성금으로 1970년 설립한 성당으로 1973년 감천리 교회 묘지에서 순교자 3위의 유해를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례지로서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7년 관할 구역명을 따라 신천 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9년 본당 설립 당시의 정신을 살려 복자 성당으로 다시 변경하였다.
복자 성당은 2002년 순교자 묘역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그 해 9월 1일 축복식을 가졌다. 순교자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묘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묘소 앞에는 넓은 잔디마당을 마련했다. 또한 성당 내부 제대와 감실에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2010년 3월 14일에는 노후화된 성당 내외부 전체를 리모델링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3위의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후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