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창세기 18:22-33
유명 탤런트 나한일 씨를 아십니까? 그 분이 밤늦게 촬영을 마친 어느 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야간 촬영차 지방으로 출발했는데 그때가 밤 12시 경이었습니다. 차를 타자 곧 잠이 들었는데 얼마 후 ‘꽝’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떠보니 빗길에 차가 낭떠러지로 여러 번 굴렀습니다. 차는 완전히 폐차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운전사만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 나한일 씨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밤 12시 25분경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집에 있던 나한일 씨의 아내 유혜영 씨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피곤해하는 남편을 야간 촬영장으로 떠나보낸 아내 유혜영 씨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편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녀가 기도를 시작했던 시각이 밤 12시 15분경이었습니다. 그녀가 기도하는 가운데 남편이 타고 있던 차가 사고가 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안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답답한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 배우자, 가족, 사업 등 한편으로는 나의 힘이 미치지만, 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으면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중보기도 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돔의 죄악으로 인하여 소돔을 심판하시겠다고 뜻하셨습니다. 이것을 안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 소돔을 위하여 중보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이 죄악이 가득하지만, 그 가운데 의인이 있을 텐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과 함께 의인을 심판하려 하시는지 항의하면서, 소돔에 의인이 50명이 있으면 소돔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소돔에 의인 50이 있으면 소돔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요청한 내용을 수정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50명보다 5명이 부족해도 소돔성을 멸하실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의인 45인이 있으면 소돔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자신의 말을 수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40명이 있으면, 의인 30명이 있으면, 의인 20명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의인 10명이 소돔성에 있으면 소돔성을 어떻게 하실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이 있어도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소돔성을 위해 중보기도 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그리는 오늘 본문은 중보기도와 연관하여 자주 다루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중보기도와 연관하여 두 가지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중보의 대상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지경이 넓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하여 하나님께 끈질기게 중보를 했습니다. 소돔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롯과 그의 가족의 구원만을 위해 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롯이 살고 있는 도시 전체의 구원을 위해서 중보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를 묵상하면서, 저의 중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의 중보는 단지 롯 뿐이었습니다. 저의 중보의 대상이 참 좁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저의 가족이나 저와 가깝게 연결된 공동체 외에는 거의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목회를 할 때에는 성도들도 나의 중보의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중보의 지경이 참 제한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단지 롯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알지 못하던 소돔 성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끈질기게 했습니다. 이런 중보의 자세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지경을 넓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중보기도의 목적은 응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면을 강조하거나, 듣기를 좋아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나한일 씨의 사건도 그의 아내 유혜영 씨가 중보기도를 하였고 그것이 응답받아 사고 가운데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중보기도와 연관하여 이렇게 응답받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보기도를 하여 응답받았던 예를 통하여 우리도 중보기도를 하면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소돔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비록 그 기도에는 ‘의인 00명이 있으면’이라는 조건이 달렸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의 기도는 소돔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돔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서 그녀가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말씀하면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면 아비멜렉이 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아비멜렉은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20:17-18).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였는데,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고,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중보 했을 때는 그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즉 어떤 중보기도는 응답되어지고, 어떤 중보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중보기도라 할지라도 응답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의 더 큰 관심사는 아브라함의 기도보다는 소돔의 죄악상, 즉 소돔은 의인이 10명도 없을 정도로 죄가 가득한 도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도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불어서 본문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중보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보기도도 다른 기도처럼, 비록 우리가 그 기도가 응답받기를 기대하고 바랄 수는 있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응답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를 했을까요? 왜 이러한 응답받지 못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남을 위한 중보를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응답받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중보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아닙니다. 응답이 기도 또는 중보기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응답은 기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기도의 내용을 들어주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기도 응답의 공식이나 비밀을 계산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의 뜻을 알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할 수 있을 뿐이다.···우리는 이적을 함부로 보장하거나 또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경이로운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일어나기를 기다릴 뿐이다.”(이경숙, “한나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신학” 중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기다리고 기대할 수는 있지만, 기도의 목적은 응답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중보기도를 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남을 위하여 중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뜻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란 이웃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에스겔서 33장 2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파수꾼과 연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이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경고하였는데 백성들이 그것을 듣지 않아 심판이 임하면 듣지 않은 백성들의 잘못이지만, 심판에 대하여 경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백성들이 심판을 받으면 백성들의 죄로 인해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것이긴 하지만, 그 죄를 경고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경고의 말씀을 듣든지 듣지 않든지 관계없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모습은 위에서 말한 대언자의 모습도 있지만, 중보자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대언자로서의 모습은 중보기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 중보 하는 것이 응답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는 중보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자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믿는 자가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중보는 이웃을 사랑하는 한 모습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얻는 유익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더욱 깊이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모든 지각에 가장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지혜롭고, 우리보다 우리의 상황을 훨씬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는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의 혼돈스럽고 불안한 마음과 생각에 평안함을 얻게 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과 일, 그리고 마음과 생각 가운데 하나님의 지키심을 경험하는 지체들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