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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룩한 공회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두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함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셔서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1-22).
어제저녁에 저희 교회와 주위에 있는 두 교회가 힘을 합해 이화대학 강단에서 선교 음악회를 공연했습니다. 저희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였고, 또 모두가 성의있게 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은근히 제 마음 속에 서운했던 것은 본래 선교음악회의 개최 목적이었던 ‘교회연합’에 대해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오히려 세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경쟁만 하고 마치지 않았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상 이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요 모든 인간에 있어서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에서조차 서로가 경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거룩한 공회”라는 말은 영어로 Holy Catholic Church라는 뜻으로 이것은 “거룩한 카톨릭 교회(즉 천주교)를 믿사오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많으 개신교회에서 ‘홀리 카톨릭처치’라는 말 대신에 ‘홀리 유니버설 처치(Holy Universal Church)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카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보편적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천주교와 혼돈하지 않도록 ‘우주적인’ 이라는 뜻을 지닌 ‘유니버설(Universal)’이라는 말로 대치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바 ‘카톨릭’이나 ‘유니버설’ 등의 단어 시비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는 ‘범(凡)세계적으로 하나’여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오면서 이와 같은 ‘교회의 통일’에 대해 지나친 무시와 오해가 있는 듯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주교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를 적대시했습니다. 심지어 존 칼빈(John Calvin) 같은 사람은 천주교 교황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까지 극언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신경을 말할 때 ‘Holy Catholic Church' 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만큼 ’교회의 하나 됨‘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 ’교회의 하나 됨‘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천주교의 입장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천주교에서는 교회의 하나 됨의 표준을 ‘교황을 수반으로 한 교회제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바티칸의 공의회를 거쳐서 공적으로 해야지 개(個)교회(local church)가 제 마음대로 제도나 교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외형적 교회 제도에 표준을 두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보통 교회의 특성을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화’로 분리시킴으로 보이는 교회는 각자의 교리에 따라 사분오열 되어 있을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교회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에 표준을 둡니다.
사실상 천주교에서 ‘카톨릭’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부터 외형적 천주교회가 하나였던 것은 아닙니다. 대개 오늘날 카톨릭 교회라고 하면 로마 카톨릭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카톨릭 교회에도 제도상 다른 여러 교회가 있습니다. 주후 8세기경부터는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하는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하는 서방교회가 몇 가지 교리 차이로 말미암아 완전히 분리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만 해도 희랍정교, 리시아 정교, 시리아 정교 등으로 분열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서방교회도 처음에는 카톨릭 교회 하나뿐이었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왔고, 그 후에 개신교는 루터교, 개혁교, 침례교 등으로 나뉘었다가 오늘날에는 수를 해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분파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물론 최초의 교회가 동.서방 교회로 갈라질 때부터 순수한 동기의 교리 분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정치적 이권이 개입되었음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수많은 분파들은 역시 순수한 ‘신학적 논쟁’때문이라기보다 정치적, 지역적 감정에 크게 기인함을 우리는 슬픔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는 하나요, 보이는 유형교회는 여럿일 수 있다는 교리가 결코 인간의 이권 다툼에 의해 찟겨진 하나님의 교회를 변명한 구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엡2: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있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이방인도 외국인도 아니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시민이고, 따라서 유대인과 동일한 권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든 기독교인은 원칙적으로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입니다. 바울은 엡2:20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여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로,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인 이유는 그 기초가 같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선지자와 신약성경을 의미하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로서, 동일한 하나님 말씀의 기초위에 교회는 하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왜 도일한 기초위에 세워진 교회가 사분오열되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 1,400여년 동안 천주교에서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직 신부들만이 성경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왜 금지가 되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부패한 교회 지도자들이 정책에 순순히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우민정책(愚民政策)’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평신도들이 다 성경을 읽고 각기 상이한 해석을 함으로 파생될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우려가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처음으로 라틴 성경이 대중 독일어로 번역된 사건입니다. 이때에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아주 재미있는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제 마음대로 해석할 터이니, 교회는 사분오열로 갈라질 것이다”라고, 이와 같은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어서 마침내 교회는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어야 되고 또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교회가 순수한 성경해석상의 차이점에 의해서 분열된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분열의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수히 따르는 순수한 성경해석상의 차이점 때문이 아니라, 성경 외적 요소인 개개인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이 교회 분열의 요인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교육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 상이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가장 진정한 하나님의 뜻일까?”를 위해 자신을 포기한 마음들이 모인 곳에 교회 분열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성경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들입니다.
두 번째로, 모든 교회가 하나인 이유는 20절 하반 절에 말씀하심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건축에는 모퉁이 돌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중동 지역에서는 모퉁이 돌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건물을 세우는데 처음 모퉁이 돌을 놓고 그 돌에 따라서 건물의 위치와 방향 등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라는 건물이 서기 위한 기초 돌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예수님께서 한 분 이심과 같이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전3:11절에 보면 “닦아 둔 것 외에는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기초 외에는 다른 기초가 있을 수 없으니 기초이신 예수님이 한 분이면 교회도 하나여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엡4:4절에서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아래서 부르심을 입었느닐.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니라”고 함으로 교회가 하나임을 강조했습니다.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본문은 매우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엡2:16절을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하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라고 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둘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본문이 말하는 바 ‘둘’은 하나님과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본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지은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분 안에, 즉 그분이 담당하신 대속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원수된 것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중보자가 되셨는데, 그것은 14절에서 말한 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라고 한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중간의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으로 예수님을 통해 유대인의 ‘선민적 교만’과 이방인의 ‘허무한 것에 굴복하는 미신적 담’이 무너지고 둘이 다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없고, 자유자나 노예의 차이도 없고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초대 교부시대의 어거스틴(Augustinus)을 비롯한 많은 기독학자들이 감히 그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노예해방’을 주장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위해서 바울이 권한 말이 나옵니다. 그는 당시 짐승과 같이 여겼던 노예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명(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허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담입니다. 동시에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 이스라엘의 개념이 영적 이스라엘의 개념으로 바뀐 사실입니다. 참 이스라엘이란 유대의 피를 따라 할례를 받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언약에 동참한 오늘날의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어야 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로 오실 것입니다.
본래 교회란 말은 희랍어로 ‘에클레시아’라는 것인데, ‘뽑아내어 불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를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마치 몸이 서로 가라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팔이 다리와 갈라질 수 있으며 눈이 뒤로부터 갈라질 수가 있습니까? 모든 교회는 한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너무도 많이 너무도 심각하게 갈라져 있고, 이것에 대해 우리는 지나치게 둔감해져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교회가 왜 이렇게 갈라졌습니까?” 생각하고, 다른 교회 교인을 만났을 때 우리의 형제나 자매라 하는 의식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실상 개 교회 중심의 교회 운영은 다른 교회의 성공에 대해 은근히 질투하는 풍조를 만들어 왔고, 어느 새 서로 경쟁하는 교회로 서로를 경계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의 약함을 도와주고 감싸주는 하나된 교회를 우리는 그리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소위 ‘교단’이라는 것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합니다. “당신은 무슨 교를 믿습니까? 예장이요? 기장이요? 아니면 예장 중에서 무슨파요?” 할 뿐ㅁ만아니라, 교단지도자들은 우리들에게 교단에 충성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단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단의 의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잘못되어 갈 때 그것을 다스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칠 때 그것을 제재(制裁)하기 위함일 것이요 잘못된 지도자를 치리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상부기관에서 중재(仲裁)하고 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외에는 사실상 별 다른 의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단에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드려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 교인이니까 우리 교회가 하는 일에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가 교회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고 이와 같은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당한 일인가 아닌가를 판단하여 합당하면 마땅히 협조해야하고 만일 여러분의 성경적 양심에 합당치 않다고 여겨지면 협조할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의 충성과 복종의 대상은 하나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개 교회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교단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물론 보이는 교회는 항상 불완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아도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순결하더라도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섬기던 교회가 조금 틀리니까 “나는 이제부터 틀린 교회에 충성하지 않겠소” 한다면 교회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애써야 할 것이요, 교인은 할 수 있는 한 협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적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가면서까지 보이는 교회에 절대 순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교단의식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교단 지도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마는 평신도 사이에는 교단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교회와 올바르지 못한 교회를 구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이 올바르게 가르쳐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교회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은 갖춰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이 올바르게 가르쳐지는가 하는 것이요, 둘째는 치리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치리라는 것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사기, 간음 등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교회 권세로서 의 압력을 말하는데, 현대에 들어오면서 교단과 개 교회 의식이 약해짐과 동시에 이 치리에 대한 문제도 아주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성경말씀 한 구절 읽어놓고 그 다음엔 온갖 소리를 다해도 그만이고, 한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해서 치리를 당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다른 교회에서 전입하는 교인에게는 반드시 이명 증서를 가져오도록 해야 할 텐대 그 사람이 과거에 사기를 했건 간음을 했건 관계치 않고 교인 수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가 아닙니까? 단순히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 순결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순결한 교회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순결하지 못한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귀의 힘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개교회의 성장이나 사업의 확충을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개교회들을 만든 목적이 모두 힘을 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하고서 실제로는 교회가 하나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세계의 교회가 하나 되게 행동해야 된다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 고백을 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 생각하고 다른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이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교회에 손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실상 강조한 것은 에베소의 보이는 교회 교인들이 먼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선 보이는 작은 교회부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원칙을 지키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려고 애를 쓰면 저절로 하나가 됩니다. 그 원칙은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요, 서로가 용서하는 것이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요, 타인에게 실례나 방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예의란 다른 사람에게 기분 나쁘게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일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앞좌석부터 않는 것도 그중의 하나요, 성경 찬송을 지참하기가 귀찮다고 교회 비치용 성경 찬송을 항상 독차지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그중의 하나요, 식사 후에 남은 밀감 껍질이나 빵 봉지를 흩어버리지 않는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 된 지체로서 형제의 수고를 더는 것이 의식화되면 나의 고집보다 하나 된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통일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공평하고 원칙적인 자세로 생활한다면 교회는 마침내 하나가 될 것입니다.
13,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하나님이 이제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2-20).
최근에 들어와서 한국 경제는 심한 불황에 허덕인다고 합니다만, 예외적으로 한국 교회만은 불황에 있지 않습니다. 교인수도 늘어나고 연보액수도 늘어나고 교회당도 자꾸 늘어갑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교회의 양적 증가와 더불어 교회의 분열도 가속화 되어 가고 있슴을 솔직히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분열이 전도를 위한 동기 유발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만 사실상 교회가 분열되면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교단이 분리되면 교회가 분리되고 교회가 분리되면 이제까지 한 식구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나누어져야 되니 이것은 마치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원칙적으로 하나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는 한 몸이니 어떤 사람은 발이요, 어떤 사람은 손이요, 어떤 사람은 필이요, 누이라고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가르치고 있고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마치 머리와 몸이 갈라질 수 없는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는 갈라질 수 없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교회 그 자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갈라지면 그 가족들의 마음이 맞지 않으면 똑같은 결과가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단순히 ‘교회연합’을 위해서 잘잘못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하나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전11:19에 보면 아주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편당(偏黨)이 있어야 옳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교회의 연합을 그렇게 강조하는 사도 바울이 왜 이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교회 가운데 편당이 있어야 옳은 자들이 나타난다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하나 되기 위해서 모든 잘못도 다 덮어두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한 믿음 안에서, 올바른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가장 손쉬운 통일국가의 방법은 독재정치입니다. 어느 독재자가 강한 권력으로 모든 국민의 반대의사를 억누르면 우선 겉보기에 평화로운 것 겉고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굉장히 약한 통일입니다.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고 올마른 기초위에 있는 통일이라야 참 통일이지 단순히 통일을 위한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 아닌 것처럼, 교회 안애서도 진정 하나가 되기 위한 편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진정한 민주국가에 의견이 다른 정당이 존재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도 진리를 위한 편당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그 편당이라는 것이 지식인끼리, 지역 사람끼리, 또는 정치적으로 이권이 일치하는 사람끼리 맺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을 중심하는 편당이 아니고 내용을 중심하는 편당이 되어야 합니다.
소위 민주주의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당이 있고 양당이 있기 위해서는 각 당마다의 독특한 정치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는데, 대다수의 나라에서 여당은 집권당이고 야당은 차기 집권당이 되기 위한 무조건적 반대론자라는 인상을 주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이라는 것은 집권을 하든 못하든 자기들의 프로그램을 끝까지 견지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정권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정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잘못을 지적하는 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신사도’가 필요하다고 민주주의적인 훈련과 교회생활이 필요합니다. 설령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원수가 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의견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히려 더욱 더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의 태도라 생각됩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성숙한 교회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편당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갈라진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도 가장 시시한 것 때문에 한 교회 내에 여러 분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식사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처럼 예배당 건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마도 큰 집을 가진 성도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저녁에는 매일같이 모였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 마다 소위 아가페 식사(애찬)를 했는데, 그 음식은 교인들 각자가 장만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교회는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두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소위 한 무리는 자유자요 또 한 무리는 노예들입니다. 특별히 초대교회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애찬을 나눌 때 귀족이나 자유자는 꽤 많은 음식을 장만해 왔고 그렇지 못한 노예들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때문에 이것은 간접적인 구제도 되었습니다. 사실상 이 정신은 옳았고 처음에는 잘 운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타락하니까 부자와 노예계급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상류계급인 자기들의 노예의 신분인 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기분나쁘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들이 많이 장만해 와서 노예들에게 나눠주니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식사시간 이전에 자기들끼리만 먼저 먹을 뿐 아니라 심히 많이 먹음으로 어떤자들은 잔뜩 취하고 어떤 자들은 시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도 바울은 그것을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어 심히 책망을 합니다. 22절에서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라고 꾸짖습니다. 이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나의 권리만을 주장함으로 가난한 자의 권리가 무시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을 할 경우에는 참으로 조심해야 됩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자기의 지식이나 재물, 명예 등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이 세상것으로 더럽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신성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라 행해야지 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27절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흔히 이 구절의 해석을 23-26절에 나오는 성찬 이야기와 연결 지어서 성찬예식 전에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문맥을 살피면 “부자는 와서 제 것 먼저 마시고 제 것 먼저 먹고 가난한 사람은 시장하니...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 함으로 사랑의 애찬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좀더 역사적인 배경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상 초대교회에서는 성찬과 사랑의 애찬 사이에 구별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신 것처럼 식사를 통해서 성찬과 애찬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것이 너무 복잡하니까 약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년에 두 차례 성찬 예식을 갖습니다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주 행하되 넓은 홀에 큰 상을 가져다 놓고 모든 교인들이 배부르도록 같이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렇게 행하지는 못해도 그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성찬예식에 참여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할 뿐 아니라, 동시에 같은 떡, 같은 잔에 동참한 자로서 우리 성도가 한 몸임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서로 미워했으니 그것은 주의 잔을 잘못 먹고 마신 것이 되었고, 바우의 경과와 같이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는 책망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하신 것을 보아도 바울의 경고가 사랑의 애찬에 대한 경고임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먹어서 취하지 말고 기다렸다가 같이 나누어 먹으라는 뜻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교회 교인은 그저 모여서 얼굴이나 보고 흩으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되 서로 기다리며 양보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지나치게 신사적이어서 괜히 예배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들어오고 끝나자마자 곧 나감으로서 괜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되겠다 생각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상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보다 자기 일에만 충실한 것을 우리들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지나치게 신사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우리가 전부 하나라는 의식과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마친 후 그대로 가시지 말고 옆에 있는 분들과 더불어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다음에라도 어느곳에서 만나면 저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아무개구나 하고 기억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사회의 신분을 교회에 그대로 가져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회의 신분 때문에 교회에서 영광이나 존경을 받으려 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사회에서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교회의 문턱을 넘는 순간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한 시민이요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모든 것을 유무상통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지혜로운 투자는 “도울 수 있을 때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을 때 바르게 쓸줄 알아야지 기회를 놓치면 투자하고자 해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심할 것은 행여 나의 도움이 도움받는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줄 때도 어떻게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겠는가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아니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도록 감쪽같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당장 집에 가시면 일년내내 쓰지 않는 물건이 혹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런 물건들이 있다면 잘 챙겨서 교회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 중에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작년에도 저의 집에 달력이 여러장 버려져 있었고 금년에도 여러장이 남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중에 행여 달력이 없는 분이 있을 지 모르고 또 필요한 곳에 보내드릴 수 있도록 집에 달력이 남는 분은 교회로 가져 오시기 바랍니다. 혹시 어린 아이들을 다 키우신 분들 중에 집에 어린 아이용 옷가지가 있는 분은 교회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은 귀하니까 새옷입혀서 키워야 된다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헌옷을 입었다 해서 결코 헌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ㅇ;와 같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재물도 좀 아끼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유무상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됨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을 통해서 나보다는 남을 먼저 의식하는 한 한 가족의 생활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이루져야 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가나다의 목사님과 한 방에서 지냈는데, 그분은 책상, 침대 등 자기의 짐을 제일 나쁜 곳에 먼저 놓으셔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서로가 나쁜 곳을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사이가 가까워지고 그 우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에 덕이 된다면 우리는 감사히 그것을 감수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 생각을 통해 말씀드리는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요구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대로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4,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롬3:9-24).
어제 저녁에 우연히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정신과 의사의 발표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분은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를 고치는 과정을 불교나 유교에서 소위 수도하는 것과 비교를 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범인이 속세를 떠나서 부처나 보살이 되는 과정과 노이로제로부터 치유를 받는 과정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최근에 들어와서 정신분석학의 이론이 널리 전개됨에 따라 어릴 때에 부모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가 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의 장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오늘날 그토록 많은 정신과 의사가 있어야만 되는가?”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문명한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는 목사의 수 보다 정신과 의사의 수가 더 많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얼마 전의 통계를 보니까, 미국에 있는 전(全) 정신병원의 모든 침대수보다도 사실상은 정신병자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오늘날의 모든 종교는 정신분석학이다”라고 극언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많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서라기보다는 정신분석학의 방법을 통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카운셀링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덮어주고 문제점을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는 목사 가운데 로버트 슐러라는 분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하기도 하는 교수인데, 그는 로스엔젤레스에 엄청나게 큰 호화 예배당을 지어놓고 겉보기에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기독의 신앙에 기초한 목회가 아니고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종교인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학자들 가운데 소위 종교라는 것은 정신현상의 일부요, 그것은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 노이로제의 일종이라고 보는 사람의 수효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릭슨 같은 사람은 마틴 루터가 노이로제 현상에 의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독교와 정신분석학 사이에 여러 가지로 아주 비슷한 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정신분석학과 기독교를 비교함으로써 무엇이 참 기독교의 본질인가를 죄사함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기독교와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비정상이라는 관점에서 같이 출발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비정상이라는 것은 주로 어릴 때 보모와의 관계가 정상이 아닌것이 정신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인간을 전제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아무튼 정신분석학의 견해를 따르면, 가령 아버지를 몹시 미워하는 환자는 어렸을 때 사랑하는 어머니를 독차지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이 잠재적으로 쌓여있는데 소위 이 감정을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이 감정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이기 때문에 의식내에서 반동적으로 “나는 아버지를 몹시 사랑한다”라는 생각을 억지로 가지며,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우리 아버지는 매우 훌륭하며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주장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노이로제라고 합니다. 따라서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분석을 통해서 환자의 무의식 세계에서는 자기 아버지를 몹시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해줌으로 병의 원인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들은 “180도로 바뀌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의 처음 작업은 무의식 세계내에 있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무의식의 사실을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치료가 못되니까 이제는 무의식으로 마워하는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의 치료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격이 성숙해지고 실제로 자기가 아버지를 참 훌륭하신 분이다“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완전치유’라 하며, 360도 변해서 노이로제가 고쳐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것이 정신과 의사의 작업으로 동양의 모든 종교가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속죄와 유사한 구졸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가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살 때 비교적 도덕적으로 무난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대상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마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0의 위치, 즉 정상은 정상인데 실상은 비정상인 정상(의식적으로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나 실상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미워하는 식) 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3:10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점잖은 사람이 그 구절을 읽으면 기분 나쁠 정도로 심하게 인간의 본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 중에 상당수도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뭐 이 세상에서 그리 크게 해 끼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심하게 써 놓았을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세리이고 한 사람은 바리세인이었다. 그런데 세리는 당시 침략국이던 로마 정부에 아부해서 동족을 착취하는 앞잡이였고, 바리세인은 아주 점잖고 선행에 힘쓰는 모범적 시민이었다. 그런데 바리세인은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옆에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했고,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다. 사실상 바리세인은 모범적 시민이었고 세리는 죄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정은 누구에게로 갔겠느냐? 깨끗하게 살고 토색도 하지 아니하고 불의도 저지르지 아니하고 십일조도 잘 내던 바리세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동정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세리에게로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바리세인의 삶이 가치있어 보였지만 실상은 자신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으로는 의롭고 훌륭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모습을 좀더 진실되게 알았다는 데서 하나님의 동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리세인보다 세리를 더 의롭다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 자기 관조적(觀照的) 요소가 기독교에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가 환자의 무의식세계를 잘 표출해 냄으로써 무의식 속에 감취었던 본능을 보게 만드는 것처럼 기독교에서도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율법의 용도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법대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감음한 자다” 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자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만하면 율법을 다 지켰다 생각하던 바리세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고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도 참으로 이상한 습성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면 나도 죄인이어도 괜찮다는 타락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발버둥 칩니다. 게다가 동일한 말씀을 여러 번 들으면 귀가 무디어져서 “원래 설교자는 저런 이야기를 하게 마련이고 우리는 원래 못 지키도록 되어있는데 뭘” 하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노이로제요 기독교의 죄인입니다.
이와같이 정신분석과 기독교는 상당히 유사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치유의 방법과 과정에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치유의 과정은 상당한 시일과 꾸준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즉 자기가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으나 그 아버지를 용서하고 존경하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노력과 시일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치유, 즉 죄용서 함은 오랜 시일도 노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사실을 발견하고 회개 하면 즉시로 치유(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흰 눈처럼 희게 하겠다”(사1:18)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세익스피어의 ‘맥베드’를 읽어보신 분이 계실 줄 압니다. 그것을 보면 맥베드 부인이 자기 남편을 속이고 자꾸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았을 리도 없고 손에 피가 묻은 것도 아닌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식이 자꾸만 그녀의 손을 씻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마음에 묻은 피가 비누로 씻는다 해서 없어 질 리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방법으로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면 즉시 흰 눈 처럼 깨끗이 씻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치유방법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용서를 행여 우리가 값싸게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한국 사람들처럼 죄도 쉽게 짓고, 또 남의 죄도 쉽게 용서해 주는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운전을 하시는 분들, 사업하시는 분들, 공무원들, 아니 우리 모두가 쉽게 위법하고 또 위법한 자들을 쉽게 용서해 주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도 그저 적당히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입니다. 따라서 죄를 한국 사람들처럼 그렇게 쉽게 용서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아픔을 통해서 죄인들을 용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은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가 정죄하리요”?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 의롭다 선언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비록 우리의 모든 것이 죄악 투성 일지라도 그분의 말씀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마3:8) 의롭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한 후에 다시 범죄하고 또 회개하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계십니다. 사1:13-17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사1:18). 회개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적당히 해도 되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회개와 더불어 끊임없는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사죄 받은 자의 바른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회개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정신분석학과 기독교의 차이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놓고 우리의 본모습을 살피며 나의 잘못된 부분을 자비하신 사랑으로 용서함 받고 건전한 새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늘날 서울 시내 정신병원 환자의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라 합니다. 이것은 왜 그렇습니까? 문제는 교회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씀 하는 바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가르치지 않고, 헛된 것을 가르침으로 오히려 기독교가 정신질환을 유발 시키는 자극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께 보입시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과 같이 분명한 자기 자신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 드러내 보입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자인가를 알 것이요, 오히려 나 같은 죄인을 값없이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바른 신앙을 소유한다면 왜 기독교인이 노이로제 환자가 되겠습니까? 죄 사함이 없으면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펼 때 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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