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운각 임영수
지붕에 눈모자를 쓴 희운각산장 앞에는 1969년 눈사태로 산악인 열명(10동지)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계곡이 펼쳐진다.
[김근원씨 제공]
외설악 천불동 계곡 끄트머리, 무너미 고개에 올라서면 층계참처럼 평평한 더기에 자그마한 산장이 하나 나타난다. 1970년대 후반부터 10여년간 그 산장을 지키던 임영수씨가 들려준 '설악의 노래'다.
"설악이 산트림하는 날 설악에서 태어났어요. 장수대가 고향이랍니다. 장수대가 좋아요. 내 태어난 설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날 길러준 곳이니까요. 약초 캐는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설악엘 다녔어요. 설악은 우리 식구를 먹여살렸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석이버섯을 시작했지요. 석이버섯을 아시나요? 바위에서 태어나 바위에서 죽는 게 우리들 설악의 산사람 팔자와 똑같은 버섯이지요.
차츰 산 재주도 늘어 여름에는 송이버섯을 기르고 겨울에는 오소리를 잡았지요. 옛날에는 좋았어요. 가을에는 설악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오소리굴을 봐두지요. 겨울이 되면 학교도 빼먹고 오소리를 잡으러 갔어요. 광목자루와 낫과 괭이를 가지고 오소리를 잡으러 가지요.
학교 가는 것보다 열배는 신났어요. 오소리굴 앞에서 불을 지펴 연기 피워가며 강원도 비탈 칡감자를 구워먹고 선생님 욕하면서 실컷 놀다보면 굴 속으로 쳐들어온 연기를 참다 못한 오소리가 울면서 튀어나오지요. 그러면 오소리가 든 광목자루를 메고 집으로 돌아오지요.
원통에 있는 중학교까지 걸어다녔습니다. 40리 거리였답니다. 어느 여름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 머루를 따먹고 배를 채우게 됐죠. 하도 배가 고파 머루를 마구 따먹었지요.
머루 먹고 취해 본 적 있나요? 저는 취했답니다. 춥고 배고파 눈을 떴더니 벌써 먼동이 트고 있잖아요. 그대로 학교로 되돌아갔죠. 산이 집이고 또 엄마 품이었던 거죠. 그렇게 자랐어요. 설악은 그렇게 나를 키웠지요.
다 커서 설악을 버리고 도회로 나가봤어요. 그렇지만 술이 너무 빨리 취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서울에서는 못 살겠더군요. 40여일을 하루 세끼 라면만 먹고 산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요. 그렇게 살다가 결국 설악으로 되돌아왔지요. 78년 12월부터 희운각에서 살게 됐습니다.
옛날 산과는 많이 달라졌지요. 오소리를 잡던 설악은 이제 이곳에 없어요. 산짐승들과 어울리다가 사람 체온보다 더 따뜻함을 느끼게 하던 설악을 이제 여기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요.
하지만 설악이 여전히 좋아요. 설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저는 희운각을 바보집이라 불러요. 제가 바보거든요. 산에 살면 누구나 바보가 돼요. 여기서는 따지고 계산할 게 없어요. 계산할 줄 모르면 바보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엄마와 누이는 여전히 장수대에 살고 있어요. 우리 식구 모두가 설악에서 태어나 설악에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설악은 어떻게 될까요?"
임씨의 마지막 물음에 대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읊조렸다.
"아, 사람을 가둬놓고 놔주지 않는 산, 설악이여!"
귀면암 유민석
용아장성의 바위연봉.
필자는 1976년 여름 이곳을 등반한 후 유만석씨를 양폭산장에서 처음 만났다.
[김근원씨 제공]
며칠을 굶다시피 하며 용아장성과 천화대를 혼자 등반하고 양폭산장에 닿아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지어 막 첫숟가락을 뜨려는 순간, 남루한 차림새의 어떤 사내가 말을 걸어 왔다.
"형씨, 숟가락 좀 빌려줄 수 있겠어요?"
숟가락의 용도는 우선 밥 먹는 것이지만 소주병을 따는 데도 요긴하게 쓰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에 쥐고 있는 보따리 속에 소주가 있나보다' 생각하고 숟가락을 빌려줬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내의 입에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이 세 번이나 튀어나왔을 때 뭔가 감을 잡았어야만 했다. 내 숟가락을 낚아채 듯 받아쥐자마자 사내는 뚜껑 딸 소주를 꺼내지는 않고 내 발 밑에서 밥냄새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코펠을 냅다 가로채더니 그야말로 눈깜박할 새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게 아닌가. 망연자실!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보통 "어!"소리를 한번만 내지르는 버릇이 있는 나는 이땐 "어! 어! 어!"라고 잇따라 내뱉었다. 첫번째 "어!"에서 세번째 "어!" 소리를 낼 때까지 5초 정도 걸린 것 같았는데 그 사이 사내는 코펠을 깨끗하게 비운 뒤 숟가락을 내던지고 귀면암 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하산? 천만에 그건 도망이었다.
다음날 허기에 지친 발걸음을 끌고 양폭산장을 떠나 귀면암의 고갯마루로 올라섰다. 그곳에서 웬 사내가 등산객을 상대로 음료수를 파는 난전을 펴놓고 있었다. 전에는 못 보던 풍경이었다. 난전을 스쳐지나는데 그 사내의 시조풍 사설이 들려왔다.
"저기 저 젊은이 뒤돌아 나를 보소. 자기가 먹을 밥을 남한테 거저 주고 제 굶고 남 먹이니 너무 귀한 사람일손. 내 그대의 허기를 설악의 정기로 채워주리니…."
나를 부른 그 난전의 사내가 바로 전날의 '숟가락'이었는데 뒷날 '귀면암 도사'로 불린 유만석씨였다.
귀면암의 동쪽 기슭에 토굴을 하나 파서 그 속에서 살았던 유씨에게 신통력이 들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룻밤새 머리카락을 까만색에서 흰색으로 바꾼다지. 둔갑술을 한다네."
"지리산 허우천 도사를 만날 때는 축지법으로 하루 밤 만에 설악에서 지리까지 내달린다네."
1982년의 어느 겨울날 귀면암 토굴로 찾아가 그 신통력에 대해 묻자 유씨는 소년처럼 깔깔댔다.
"둔갑술? 사실이지. 염색약 바르면 되니까."
"축지법? 그건 아냐. 이 땅이 왜 이렇게 좁아졌는지 알아. 옛날 도사들이 서로 빨리 가려고 축지법을 써 땅을 좁혀 놓았기 때문이지. 원상회복시키는 확지법을 몰랐던 게야. 그래서 요즘 내가 확지법을 연구하고 있어. 그게 뭐냐고? 음, 그건 말야. 천천히 그러니까 빨리 가려는 욕심을 버리는 법이야. 천천히 움직이면 땅도 마음도 넓어져."
우리의 확지법 도사는 86년 여름 설악에 폭우가 쏟아진 날, 귀면암 아래 계곡을 건너려다 조난당한 여러 여대생을 구해냈으나 정작 자신은 급류에 휩쓸려 아주 떠내려가고 말았다.
알프스와 설악
샤모니산장에서 포즈를 취한 연세대 2차 알프스 원정대의 대원들.
사진 왼쪽부터 류중희.박종수.정호진.산장 주인 띠띠.정원양.안중국.박환선.박인식씨.
[류중희씨 제공]
'젊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 사랑도 명예도 젊은 목숨 걸기에는 너무 낮다/ 설악을 오르며 찾아냈다/ 목숨 걸 만한 단 하나의 이상을/ 그 이상 속으로 끝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세상으로 연결된 모든 길들이 사라진다/ 곧 나는 산이 된다'.
군복무를 마친 1976년 여름, 설악의 천화대를 단독등반할 때 쓴 유서다. 추락할 것 같은 불안감에 쫓겨 쓴 글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산에서의 죽음을 동경한 게 아닌가 싶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83년 여름, 알프스의 어느 벽 아래에 있는 산장에서 다른 대원들이 잠든 사이 나는 설악의 천화대에서 쓴 유서를 떠올렸다. 다시 유서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연세대의 제2차 알프스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드류 서벽과 마터호른.투르롱드 북벽 등을 등반하고 최종 목표인 그랑드 조라스 북벽에 목숨을 건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레쇼 산장을 떠나기에 앞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우리는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끓이고 밥을 푸짐하게 지었다.
대원 중 막내인 김시영(현 가평요 대표)씨가 박내혁 대원의 밥그릇에 밥을 퍼담는 순간 파이브글라스로 만든 밥그릇이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혀엉, 나 못 가겠어요."
죽더라도 그랑드 조라스에서 함께 죽자던 김대원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김대원에 이어 류중희(현 캐드랜드 상무)대원과 박대원도 등반에 나설 엄두를 못 냈다. 나는 대장으로서 철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샤모니에 있는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자 등반을 적극 지원했던 샤모니의 터줏대감 띠띠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원들을 맞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는데 새벽에 그랑드 조라스에서 네명의 등반대원이 낙석사고로 숨졌다는 거야. 나는 그 희생자들이 자네들인 줄 알았지."
그랬던 것이다. 숨진 네명의 대원은 레쇼 산장에서 우리와 함께 대기했던 프랑스팀이었음이 분명했다. 우리 팀보다 하루 늦게 산장에 들어왔기 때문에 먼저 출발해도 좋다며 양보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등반을 포기하자 우리 팀의 예정 등반시각에 북벽을 오르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프랑스팀에는 미안하지만 이게 모두 설악의 산신령이 우리를 지켜준 것 아니겠습니까." 류대원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알프스의 산 속에서 노루목 기슭에 잠들어 있는 선후배들과 설악의 정상을 그리워하며 유서를 쓰는 대신 노래를 지었다.
'홀로 살아남은 슬픔 딛고 가기에/ 아직은 남은 삶이 무거워/ 발길 내디딜 때마다 영혼까지 따라 흔들거리더라도/ 산으로 가자 … 흔들리던 그리움이 따라 엎어져/ 홀로 살아남은 서러움이 먼저 일어나더라도/ 진정 외로운 영혼 챙겨, 산으로 가자/ 저 삼각 받침으로 제 목숨 세운 산, 설악산으로 가자'.
구원의 산
한 자리에 모인 농심마니 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박인식.송현.강찬모.최유진.이영기.김여옥씨, 뒷줄 왼쪽부터 전유성.김준근씨.
[월간중앙 제공]
'대청봉에 먼저 내려앉은 첫눈처럼/ 쌓이고 쌓이던 그리움/ 마장동 금강운수 버스에 인제 원통으로 바람처럼 달려가면/ 봄소식 더불어 오르던 화채봉 능선길/ 꿈이었다 잊을까… 꿈에도 못잊는 그리움/ 그리움의 얼굴 설악아!'
나의 이 '설악'이라는 어줍짢은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설악은 지금의 설악이 아니다. 서울에서 국도를 달려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넘어 서너시간 만에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이런 설악은 없다.
지금까지 내가 그려본 설악은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 그리고 속초시에 속하는 행정구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청춘과 맞물리는 1970년대의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그 원형을 냉장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설악의 모습은 개인의 탐욕과 집단의 이기심에 희생된 만신창이 신세다. 설악이 설악다운 모습을 보여주던 70년대의 설악은 정말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솟아있는 구원의 산이었다. 이 땅에서 멀어봐야 얼마나 멀겠냐고 하겠지만, 당시 설악은 38선 너머 분단의 최전방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즈음 설악 갈 때는 요즘 히말라야나 알프스로 등반하러 떠나는 것처럼 '원정간다'고 했다. 설악산 원정대는 떠나기 전날 저녁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여관에 모여 합숙까지 했다.
양평을 지나 홍천에서 점심을 먹고 철정검문소에 이르면 괜히 공비나 간첩으로 보일까봐 잔뜩 쫄아들어 주민등록증이나 학생증을 내보였다.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설악산 입산허가를 받은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때려잡자, 김일성!"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인제나 원통을 지나는 길 주변 담벼락 여기저기 적혀 있는 그런 반공.방첩 구호나 가끔 스쳐 지나가는 군용트럭에서 풍기는 분단의 긴장감 또한 설악을 더욱 멀게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1박2일 만에 설악동에 닿으면 우리는 한층 높아진 하늘을 우러러 "공기부터 다르제"하며 설악의 정기를 가슴 깊숙이 들어마셨다. 그들이 마신 설악의 신선한 정기야말로 '젊은 자유' 그 자체였다.
그 설악의 자유를 설악의 아름다움과 조화시켰던 70~80년대 젊은 산꾼들의 숨은 얘기를 제대로 풀어내기에 내 능력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연재내내 성원을 보내준 김진배(농수산물유통공사 사장).이인정(한국등산학교 교장).홍석하(사람과 산 발행인).류중희(캐드랜드 상무).손재식.류시건씨 등 여러 산악동지와 이땅의 오지에 산삼을 심고 있는 전유성.이영기.노인숙.최유진.이광표.박은미.이상철.이두엽.권경업.변규백.강찬모.신명덕씨 등 '농심마니' 회원들은 이렇게 다시 이름 불러보는 순간에도 설악만큼이나 그립다.
<끝>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필자 약력
▶1951년 경북 청도 출생
▶연세대 졸업
▶조선일보 '월간 산' 기자
▶월간 '사람과 산'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전 연세산악회 회장
▶전 대학산악연맹 부회장
▶장편소설 '만년설' '백두대간' '종이비행기', 기행에세이집 '반딧불이 되도록 그리운'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사람의 산' 등 출간